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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창조절 조회 수 8826 추천 수 0 2017.09.24 20:00:50
설교듣기 : https://youtu.be/YfrFU-8ZDdI 
성경본문 : 빌립보서 1:21-30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1:21-30, 창조절 넷째 주일, 2017924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는 오늘 설교 제목은 빌 1:27절에서 직접 따온 겁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바울의 모든 신앙 경험과 가르침이 이 제목에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제목을 더 줄이면 복음과 삶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삶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를 알려면 우선 바울이 생각하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복음의 깊이, 능력

헬라어 유앙겔리온의 번역인 복음은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던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복된 소식으로 여기는 것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본인이나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여깁니다. 오랜 병마에 시달리다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도 역시 복음입니다. 다 좋은 일들입니다. 그런 좋은 일들이 여러분들에게도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복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즉 영혼 구원이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영혼 구원이야말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무엇일까요? 너무 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대답하려면 어려움을 느낍니다. 현대인들은 영혼에 대한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뇌 과학 전공자들 중에서는 인간의 영혼도 뇌의 작용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뇌의 일정 부분이 손상되었을 때 인간의 생각이 파괴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심지어 인간의 종교심마저 뇌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악마저 뇌 현상이라고 말하게 될 겁니다. 이런 방향으로 나가게 되면 결국 태아의 뇌를 과학적으로 완전무결하게 만들려고 할 겁니다. 미래의 인간은 약 한 알만 먹으면 완전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대인들은 인간을 유물론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영혼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인간의 심리적 작용을 영혼이라고 여깁니다. 이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영혼 구원에 대한 복음은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혼은 생명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가장 고유한 특성입니다. 인간 생명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이기에 영혼이 흔들리면 그 외의 모든 것이 흔들리며, 영혼이 안정되면 비록 다른 것들이 흔들리더라도 견딜 수 있습니다. 영혼은 오뚝이의 중심을 잡아주는 납덩이와 같습니다. 영혼의 평화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복음으로 여기는 삶의 조건이 좋아진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닙니다. 영혼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따랐지만 영혼의 평화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자신이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는 절망감만 더 커졌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혼의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복음 경험은 실존적인 차원에서 죽음과 삶의 문제였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신앙을 교양의 차원에서 대합니다. 절실함이 없습니다. 겉모양만 절실하지 내면은 경직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심층인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갈급함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영혼의 심층에 공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여러분도 다 경험하고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사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옳게 살려고 치열하게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웃과 국가와 인류 전체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반도의 통일을 남의 일로 여기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일로 여깁니다. 우리가 모두 다른 사람과 사회 공동체를 생각하고 국가를 생각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감당할 만큼 감당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문제, 즉 영혼의 구원 문제는 아무도 피해갈 수 없고 피해가서도 안 됩니다. 그런 문제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영혼의 눈이 어두워졌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 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사상은 영육이원론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사약을 받으면서도 여유가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둔 게 아닙니다. 현재의 삶을 사뿐히 벗어나려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이 이미 극복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자기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 경험입니다. 고전 15:54절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현실의 삶을 부정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니라 현실의 삶이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즉 죽음마저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라고, 그리스도는 나의 생명이다.’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신앙이 부럽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백을 들을 때마다 너무 엄청나서 친근감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말에 귀를 아예 닫습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여러분들도 바울의 이런 고백을 말로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영혼으로는 느낄 때는 종종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점점 늘어나는 이들은 세월의 무게와 더불어 신앙이 깊어지고, 그런 순간을 붙들지 못하는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껍데기에 집착하든지 아예 기독교 신앙을 포기합니다. 저의 경험을 말씀드릴 테니 여러분과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보십시오.


저는 어떤 순간에 저와 관계된 모든 것들과 단절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가족과 교우들과 대구성서아카데미 회원들, 그리고 지금까지 집필한 서른 권에 가까운 저서, 많지는 않으나 지금 내 통장에 들어 있는 돈 등등입니다. 여기서 단절된다는 것은 그런 것들이 다 귀찮아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순간은 죽는 순간일 겁니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에 무슨 가족을 생각할 것이며, 돈을 생각할 것이며,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생각하겠습니까. 그 순간에는 모든 것들이 저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죽는 순간의 느낌이 살아있을 때도 종종 찾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런 순간에는 다른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것들이 없어도 됩니다. 아니 없어야만 그런 느낌이 강해집니다. 이런 느낌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생명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바울의 고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순간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영혼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이런 느낌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느낌이 전혀 없었거나 지금도 없다면 영혼의 구원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토대

이런 경험은 삶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삶을 의미 충만하게 합니다. 일상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햇살 한 조각, 하늘과 풀과 곤충 소리와 달그림자가 신비한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건강하게 받아들입니다. 더 이상 이해타산이 아니라 생명의 차원에서 관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과의 영적 사귐 자체를 실제로 행복하게 받아들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기를 내 세우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편지도 이런 마음에서 쓴 겁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1:26)고 말한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했습니다. 자신이 맛본 복음이 삶의 토대라는 뜻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 나가야 할 방향을 그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1) 바울은 27b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협력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어떤 나쁜 일을 위해서 모의하고 작당하는 건 오히려 쉽습니다. 특히 복음을 위해서 협력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협력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중심에 모여야 합니다. 복음의 동지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에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준비가 되어도 협력하는 건 어렵습니다. 사람은 시기심에 영향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협력은 자신이 주인공으로 대접받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한 마음으로 협력하는 것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서나 나타날 수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2) 바울은 28절에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를 대적하는 이들이 누군지에 대해서 본문은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복음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감안해서 본다면 율법주의자들이 바로 대적하는 자들로 추정됩니다. 당시 율법주의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유대 기독교인들이고, 좀더 멀리 보면 유대교인들입니다. 영지주의자들도 대적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 훼손시켰습니다.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이들의 주장이 솔깃해서 복음의 토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을 머리에 뿔 달린 이상한 집단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의 관점으로 바꿔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상대화시키는 가르침입니다. 겉으로는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는 혼합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컨대 기복주의가 그런 것입니다.


3) 복음에 합당한 삶에는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바울은 29절에서 말했습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믿음에 충실하다는 것이며, 믿음에 충실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고난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이 많은 이들에게 불편하게 들렸을 겁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바울이 고난을 미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기에 만날 수밖에 없는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고난은 믿음과 함께 나타납니다. 믿음과 고난은 마차의 두 바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으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신자들은 크고 작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부분적으로 고난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 고난은 추상적인 것에 떨어져 있습니다. 기껏해야 아무리 열심히 목회를 하고 교회를 섬겨도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다거나 정부가 추진하는 종교세 부과 같은 것들을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막연하게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불행에 대한 불안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바울은 30절에서 이런 일련의 문제를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는 싸움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기독교인의 실존은 싸움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런 발언을 종종 했습니다. 딤전 6:12절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싸움이라고 말했다 해서 세상을 무조건 악하다고 보는 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세상과 상관없이 기독교인의 삶 자체가 싸움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는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나태해지니까 자신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을 다른 말로 한다면 자기 성찰이며 구도이며 수행입니다. 바울은 빌 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말했습니다. 달려간다는 말은 곧 싸움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달음질의 영성, 선한 싸움의 영성을 잃었습니다. ‘내게는 생명이 그리스도이니 지금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은 어떤 열광주의자에 헛소리로 들립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대신 일상에 대한 뒤치다꺼리가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목회도 비슷하게 작동됩니다. 일상의 과잉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삶의 재미를 순간순간 얻을지 몰라도 우리의 삶이 의미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초반에서 말씀드렸듯이 영혼의 깊이에서 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깊이에 울림이 없는 상태를 사람은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립니다. 그래도 안 되면 인생은 다 그런 거야 하는 식으로 자포자기에 빠집니다.


설교를 끝내야 할 시점에 되었는데도 여전히 질문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 질문에 제가 제대로 된 대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에 여러분이 답을 찾아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통해서 실제로 우리가 행복하고 의미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건 종교적인 허풍, 관념, 수다, 공허한 미사여구는 아닐까요? 그것이 아무리 진리라고 하더라도 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비현실적인 것일까요? 먹고 사는 문제가 발등의 불이고 복음에 합당한 삶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먹고사는 생존 문제가 급박한 분들은 일단 그걸 해결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예술이나 학문 활동 자체 때문에 시간이 없는 분들도 우선 자기 일에 시간을 쏟으십시오. 언젠가는 생존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예술 활동이나 학문 연구에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될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 순간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거나 세상을 정말 새롭게 하는 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혼의 감수성이 무뎌져서 복음에 대해서,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삶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합(않습)니다. 그런 식의 삶이 반복되다가 결국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에 머물다가 인생을 다 보내게 될 것입니다.


* 설교듣기 https://youtu.be/YfrFU-8ZDdI

*  설교보기 http://afreecatv.com/nfer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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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수호천사

September 25, 2017
*.113.60.88

사도신경 해설 강독을 읽고 있습니다. 


지금 7독 째이고 방금 Chapter 24까지 읽었습니다.

6독이 끝나갈 즈음부터 무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줄 곳 한 가지밖에 말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일관된 메시지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으니 신앙생활의 방향을 전환하라.’였다고 이해했습니다.

사도신경 해설 강독을 읽던 중 Chapter 16에서 역망(逆望, 뒤돌아 봄)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고 씨름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보니 역망은 예수님의 이 말씀과도 관련되는 것 같습니다. 

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 기독교 신학의 종말론이 조금씩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 義自見)이라는 말이 맞기는 맞는가 봅니다.

줄기차게 계속 읽다 보니 내용이 조금씩 이해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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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5, 2017
*.201.102.69

수호천사 님처럼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강독' 녹취본을 탐독하는 분을

제가 처음 봅니다.

영적인 눈이 밝아지신다니 강독한 저도 보람을 느낍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바울의 고백도

역망, 선취, 생명 완성 등등의 개념을 담고 있는 종말론에 근거한 것이겠지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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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mist

September 25, 2017
*.116.48.57

수호천사님의 탐독의 의지가 넘 부럽습니다.

저도 4월말에 샘터교회를 방문하여 정목사님으로부터 사도신경해설강독집을 선물 받았는데... 이제 겨우 1번 보았을 뿐입니다.
솔직히 낯선용어와 짧은 역사지식과 신학적 지식탓에 거의 겉핥기 수준에서 끝냈지만 얼마나 뿌듯하든지요.
이 책이 최종 수정을 거쳐 2015년에 여러도움의 손길을 통해 나왔다는걸 머릿글에서 읽으면서 제손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신비와 감격을 느꼈지요.
물론 내용은 넘 새로와서 지금껏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지만 넘 획일적인 틀에 갇힌 사고로 세계와 신앙을 저울질해왔다는 걸 금방 알수 있었어요.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점으로 역추적하여 성경의 사건들이 재 조명됨을 알게 되면서.. 내 속에 절대화했던 신학적? 사고의 틀을 정말 내려 놓고 열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운 지식대로라면, 하나님나라는 시간이 흘러 죽어서 가는 세계 라는 단선적, 일회적인 차원으로 이해했었는데
사도신경해설강독에서 생명의 심층적 차원과 시간의 현실성의 심층적 이해에 대한 설명을 통해 오늘 이 하루속에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미래? 가 역동적으로 겹겹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 마음이 훈훈해지기도하고 뜨거워졌던 걸 기억합니다.
저도 수호천사님 처럼 10번은 아니더라도 몇번이고 반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목사님께도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책한권 나오기까지 말로 다 할 수없는 수고를 하셨지요?
덕분에 진리를 향한 여정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많은 분들이 같이 읽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5, 2017
*.201.102.69

벌써 완독을 끝내신 미스트 님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다비안들 중에서 1번이라도 완독하신 분들의 숫자는 손에 꼽을 겁니다.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입니다.

책으로 묶이는 데에는 미스트 님이 지적한 것처럼

여러 분들의 수고가 담겨 있습니다.

요즘 대구샘터교회에서 바르트의 <기독교 개요>를 강독하는 중인데

그게 바로 사도신경 해설입니다.

똑같은 사도신경을 놓고 판넨베르크와 바르트가 서로 달리 접근하고 있는 걸

요즘 다시 확인합니다.

실질적으로는 판넨베르크 책의 내용이 더 마음이 닿지만

바르트 책도 그에 못지 않은 깊이가 있어서 좋습니다.

강독하는 사람인 저나 현장에 참여하는 분들이나

녹음 파일도 듣는 분들이 공동 작업을 하는 겁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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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30, 2017
*.182.156.109

와, 오늘 드디어 설교 녹음 파일을 유트브에 업로드 성공했습니다.

1) 오리지널 파일은 알씨 앱을 통해서 동영상 파일로 변환(15분)

2) 유트브에 들어가서 동영상 파일 업로드(10분)

3) 뭔가 잘 안 되어서 다시 교정(5분)

대략 30분 걸렸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네요.

좀더 간편한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가장 초보적인 상태로 편집되었습니다.

앞으로 실력이 늘겠지요.

한번 링크해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ziMAzszRiD8

profile

[레벨:29]캔디

September 30, 2017
*.72.247.134

목사님!

유트브 링크해 보았는데요.

설교가 처음부터 나오지않고 11분 부분부터 나와요.

모바일이 잘못됐나싶어

다시 피씨로 해보니 같은 현상입니다.

다른분들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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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30, 2017
*.182.156.109

내 컴에서도 그렇게 나오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고요.

그래도 그걸 처음으로 돌려서 들으면 될 겁니다.

추가: 방금 이렇게 저렇게 마구 시도해보다가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아직 정확한 원리는 모릅니다. ㅎㅎ

https://www.youtube.com/watch?v=ziMAzszRiD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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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244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078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130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213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986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280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221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108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060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095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44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39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196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362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19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487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653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583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703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257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42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21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30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374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21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467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385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701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15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759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286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609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8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65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50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24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8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01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15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8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50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47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92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61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4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6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2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33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33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93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9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20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71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24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9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85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84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9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70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6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36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62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7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7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7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4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3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50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9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60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7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6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00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60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4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43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6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8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01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7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9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62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44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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