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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창조절 조회 수 6761 추천 수 0 2017.11.26 20:32:21
설교듣기 : https://youtu.be/jDi5BXa2gWA 
성경본문 : 에베소서 1:15-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1:15-23, 창조절 열셋째 주일, 20171126

 

15.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요즘처럼 절실한 때도 흔치 않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금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황의 절대권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을 교회의 수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이 바로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교황으로부터 죄를 용서받는 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거와 똑같으며,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하는 거는 하나님으로부터 파문당하는 거와 똑같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논리에 근거해서 당시 교회는 면죄부(면벌부)를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는 교황이나 사제나 일반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다르지 않고 똑같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만인사제설의 핵심입니다. 이런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당시 로마가톨릭의 교회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절실해진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예장통합에 속한 명성교회가 부자세습을 지난 1112일에 전격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예장통합은 수년 전에 세습 금지법을 제정했습니다. 담임 목사의 자녀와 그 가족이 후임으로 올 수 없다는 법입니다. 그런데 명성교회는 총회 헌법을 무시하고 부자세습을 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회의 행정절차도 불법으로 진행시켰습니다. 명성교회가 작은 교회였다면 부자세습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생각했다고 해도 밀어붙일 수 없었을 겁니다. 교인 10만 명을 헤아리는 슈퍼 처치이기에 교회법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킨 것입니다.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귀결될지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교회가 무엇이기에 이런 일들이 버젓이 벌어진 것일까요?


매주 예배를 드릴 때마다 모든 교회가 함께 읽는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holy, catholic church를 가리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슈퍼마켓처럼 운영할 수 없는 거지요. ‘카톨릭이라는 말은 로마가톨릭교회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교회의 보편성(universality)을 가리킵니다. 개교회주의와 교회의 사유화를 극복하는 개념입니다. 사도신경은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핵심 신조로 삼고 있는데 반해서 니케아 신조는 정교회까지 받아들이는 신조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성찬식이 거행되는 주일에 사도신경 대신 니케아 신조를 함께 읽습니다. 거기에는 교회의 본질이 네 가지로 나옵니다.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이 그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꾸준하게 문제를 제기했고, 신학적으로 성찰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포기하면 교회는 아주 쉽게 세속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와 몸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삼은 구절에도 교회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1:22,23절을 읽겠습니다. 개역개정을 앞에서 성경 봉독자가 읽었으니 저는 공동번역을 읽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이 구절의 요체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몸과 머리로 규정했습니다. 머리도 전체로 보면 몸에 속하니까 그리스도와 교회가 모두 하나의 몸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그럴듯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부활과 승천의 예수를 가리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없습니다. 우주 공간 어디에 계신 것도 아닙니다. 반면에 교회는 보이는 조직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와 보이는 교회가 하나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은유적인 대답입니다. 이 대답에 교회의 본질과 속성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의존되어 있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차를 운전하거나 지하철을 타고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에 가야겠다는 머리의 생각과 명령이 몸에 그대로 전달된 겁니다. 만약 몸이 머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갈 겁니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와서 차를 세워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발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면 큰 사고가 일어납니다. 심한 치매에 걸려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심한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도 머리와 몸이 따로 놉니다. 교회에서도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경우가 있습니다. 몸끼리 작당하는 겁니다. 자기들이 만족스러운 것에 치우치는 겁니다. 교회는 그렇게 왜곡될 개연성이 높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비합리적인 행태가 용납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장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루터 시대의 로마가톨릭교회나 오늘 부자세습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도하는 한국교회가 그런 경우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모르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비유적으로 그리스도는 소프트웨어이고 교회는 하드웨어입니다. 외국어 번역 앱이 있다고 합시다. 그건 소프트웨어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걸 작동시킬 수 있는 컴퓨터 본체나 스마트폰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운명을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조직과 모임이 있지만 교회와 같은 일을 하는 모임은 없습니다. 교회에는 예수를 증언하는 성경이 있고,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와 성찬식이 있고, 그와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고 찬양하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전체 존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를 선취의 방식으로 현실화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아무리 큰 비난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만은 부정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두 가지 시각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에 대한 거룩한 자부심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몸을 대체할 기구는 없습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역할이 교회에게 주어졌습니다. 세상은 돈과 도덕성과 권력을 기준으로 판단하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니 자부심을 느껴도 좋습니다. 이런 관점은 교회 공동체의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 신자의 차원에서도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는 성도도 부름을 받았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자부심을 느껴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우리는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그런 자부심을 느껴도 좋고, 당연히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합당한지, 그런 길을 잘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성찰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성찰이 없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교회의 본질로부터 이탈하고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시각은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성도로서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해야합니다.


평소에 여러분은 이런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기보다는 어느 회사에 속한 사람으로, 어느 가족과 친지에 속한 사람, 어느 동아리에 회원으로 자리매김 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서 그들과 어울려 지낼 때는 그들의 상식에 따르면 됩니다. 바울도 유대인들 앞에서는 자기가 유대인처럼 처신하고 율법 없는 자들 앞에서는 자기가 율법 없는 자처럼 처신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지혜롭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고전 9:20-23). 기독교인들은 세상 안에서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오늘 성경본문은 다른 방식으로 묘사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표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충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플레로마입니다. 플레로마에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영어로 fullness, completeness(주로 신적인 존재나 자연의 완전함으로), fulfilling, fulfillment입니다. 가득함, 완전함, 가득 채움 등의 뜻입니다. 우리말 번역인 충만도 괜찮아 보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충만하게, 완전하게, 온전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에베소서 기자는 먼저 그리스도가 만물을 충만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충만하다는 말을 주로 양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통에 물이 가득하다거나 교실에 학생들이 가득하다거나 저금통에 동전이 가득한 것을 연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 충만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충만하게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채운다는 뜻이 아니라 만물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걸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돈이 생명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돈이 있어야 공부도 하고 병원에도 가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교회도 재정이 확보되어야 교회 살림살이가 가능하고 하나님의 복음 전파에 일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충만은 그런 것과 차원이 전적으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창조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로부터 유()가 나왔다는 것은 세상이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창조 사건 자체가 바로 세상의 충만입니다. 요한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로서 하나님의 창조 때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존재했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시다.’(1:1)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생명으로 높임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가 바로 창조의 로고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함으로써 창조와 창조의 완성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이런 설명이 교회 안에서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제 세상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전혀 다르게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통은 구약 시대에도 그랬고, 신약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고전 1:23절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막론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이자 지혜롭지 못한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 정권에서 출세를 하거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자녀 많이 낳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장수하는 것을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 시대정신에 따르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운명은 당연히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당시 사람들은 거부했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충돌한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 완성자라고 믿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고 확실성이 없는데 공연히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니라 성경과 2천년 기독교 영성에 근거해서, 그리고 지금 옳고 그름에 대한 바른 인식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충만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결핍

그리스도의 플레로마는 세상의 결핍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충만하게 하는 반면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세상을 충만하게 하지 못합니다. 결핍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개인 실존에서 우리는 결핍을 부둥켜안고 삽니다. 돈이 많거나 적거나, 건강하거나 약하거나, 다복하거나 외롭거나를 막론하고 늘 영혼의 한 구석이 비어 있습니다. 대구샘터교회의 지난 수요일 모임에서 부른 찬송가는 406장입니다. 2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를 제가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친구들이 실제로 배신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친구를 통해서, 그리고 친구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참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가 옆에 있어도 궁극적인 결핍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이것은 똑같습니다. 결핍이 없는 나라와 세상을 보셨나요? 부자 나라인 미국은 미국대로, 독일은 독일대로, 스웨덴은 스웨덴대로, 가난한 나라인 부탄은 부탄대로, 에티오피아는 에티오피아대로 다 결핍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적폐청산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이지만, 그것으로 우리나라에 결핍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이 정의로워지고 순전해져도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과 교회를 충만하게 합니다.


실제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충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더 깊고 넓게 기독교 신앙을 아는 사람들은 충만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는 분들은 그게 눈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이것은 퍼즐과 비슷합니다. 퍼줄 조각에만 매달리면 전체 그림을 볼 수 없습니다. 전체 그림을 본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깊이와 넓이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게 잘 알 될 경우에는 일단 퍼즐 한 조각으로서의 자리만이라도 분명하게 지키고 있으면 자기가 알지 못하는 중에 전체 퍼줄 그림에 참여하게 됩니다. 전체 그림, 즉 충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조각의 퍼즐 역할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한 개가 삐딱하게 놓이면 충만이 훼손당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에클레시아(교회)는 에베소서가 기록될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으로 이미승리한 게 아니라 아직전투 중에 있는 교회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그리스도가 비밀한 방식으로 교회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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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김사관

November 27, 2017
*.81.137.191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는 둘다 같은 말인데, 유독 후자가 더 강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형편입니다. 교회가 진정 그리스도의 충만을 누리기까기 결코 절망하기 않겠습니다. 목사님, 그리스도의 충만을 누리는 우리는 결코 남이 아니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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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7, 2017
*.182.156.238

소마와 플레로마,

몸과 충만!

성서기자들의 이런 표현들이

교회 안에서 단순히 성경의 정보로 끝나지 말고

설교자와 회중들 모두에게 현실(reality)로 경험된다면

이 세상의 결핍을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겠지요.

그럴 때만 허튼 것에 영적인 에저지를 과소비하지 않을 겁니다.

낙평이 사관님에게 그리스도의 '충만'이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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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November 28, 2017
*.240.61.32

요즘 교회들이 장로 권사 임직식으로 분주한 철인가보죠?

교회 입구는 흡사 고관대작 자제의 결혼식장을 방불하는 도열된 화환들 하며,

강대상 위에서 듣보잡의 감투을 은근 과시하기라도하듯 근엄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고있는

노회의 내빈 목사들은 마이크를 잡더니만,

  '여러분의 담임 목사에게 충성하는게 하나님께 충성하는거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축사나 설교가 블랙코미디를 보고 있는것 같아 실소가 나오지요.
융숭한 대접과 거마비를 받아가니 밥값은 하고 가야 하겠죠?

"목사를 두고 교회에서 서슴없이 '영적 지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섬뜩한 표현이다..."
영화 '동주'와 '로마서8:37'을 제작한 신연식이라는 영화감독의 표현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이끌고 가며, 영성과 신학적 깊이가 껍데기뿐인채
'사목'으로 치장한 작금의 예수 없는  교회들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충만케 하는
거룩한 능력을 교회에 부여해주셨다...
는 금주 설교는 공허하게 들리기만 합니다

크고 작은 상처에도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적 귀결도 제겐 설득력있게 와닿지가 않았고요.
외람된 표현을 용서하십시요

그렇다고
'교회가 아무리 혼탁해보여도 좌고우면 말고 "너나 잘하세요" 로 가자!'
하는건 이 땅에 교회를 허락하신 그 분의 섭리에 어긋나는것 같고...
잿빛 하늘만큼 답답한 마음에 글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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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8, 2017
*.182.156.236

공허하고 설득력 없는 설교로 전달이 되어서

미안하고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속마음이야 그렇지 않으시겠지만

화가 나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장로 권사 취임식 같은 거는 하지 말든지

하드라도 아주 간소하게 하는 게 좋은데,

이벤트를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의 취향에 맞기 때문인지

어디서나 거창하게 하는 거 같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우상에 기울여지고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을 때도

선지자들은 '남은 자'가 있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런 선포가 가능했지요.

대림절이 다시 시작하니 힘을 내서 기다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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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November 28, 2017
*.136.195.150

기러기님 글을 보니..
좀전에 페북에 쓴댓글이 허공을 맴도는 글이 된거 같으네요.
목사의 가운만 걸치고 자신이 영적 지도자라고 외치는 수많은 강대상의 소경들을 보는 이들에게 저는 과감히 그곳을 나오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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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November 28, 2017
*.151.83.22

교회를 건물과 조직으로 이해하기보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된 개인들의 공동체로 볼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서 일하심이 이해됩니다.

사회적 지위와 많은 자녀와 건강과 장수가
충만한 삶이라는 생각은 추상적이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된
그리스도인이 될때 생명을 얻게됨을
목사님 말씀을 통하여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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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8, 2017
*.182.156.236

만물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그리스도가

교회도 충만하게 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명성교회 부자세습 사건도

이런 사실을 현실(reality)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충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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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거인삭개오

December 01, 2017
*.78.248.145

신약 성경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정확하고 본질을 꿰똟는 설교에 감사합니다. 한편 목사님 설교를 보면서 우리 한국교회가 얼마나 교회의 본질을 알고 그런 교회를 이루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좀 답답하기도하고 탄식이 나오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1. 한국교회의 상당한 목사는 중세의 교황 못지 않은 교회의 머리가 되어있습니다. 섬기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리운 현실입니다.  2.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몸(교회)의 지체로 섬기는 진정한 만인제사장주의를 구현하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지도 묻고 싶습니다. 3.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계급적 구분은 비성경적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형제요 자매입니다. 다만 은사와 직임이 다를 뿐입니다. 마치 형제들이 명절때 만나 검사를 하건, 의사를하건, 호떡장사를 하건 다 형님 동생 하듯이 말입니다. 한국교회 성직자와 평신도의 간격은 중세 카톨릭교회 못지 않은 것이 현실 아닌가요.


제 넉두리를 써 보았네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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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1, 2017
*.182.156.190

거인 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잘 전달되었습니다.

목사와 일반 신자의 관계가 비틀려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거인 님이 말씀하신 상황과는 반대도 있더군요.

목사가 당회에 고용된 바지사장 비슷한 경우도 있다는 거지요. ㅎㅎ

그것도 다 목사의 책임이지만요.

하여튼 갈 길이 멉니다.

대림절의 평화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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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068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126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212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985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277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216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106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058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091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42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37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194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362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15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486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652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582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699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256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42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19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29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370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20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464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380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696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06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754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281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598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1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46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47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2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5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7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06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4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48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39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7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57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0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3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1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29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25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8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4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13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6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18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5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6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7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3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3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7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7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5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0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399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5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3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3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4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4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2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58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8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4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1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6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0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3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4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35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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