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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주현절 조회 수 9827 추천 수 0 2018.01.15 19:27:39
설교듣기 : https://youtu.be/BmFpVaxSxH0 
성경본문 : 요한복음 1:43-51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1:43-51, 주현절 후 둘째 주일, 2018114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나다나엘

1:43-51절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뒤에 갈릴리로 자리를 옮기려고 했습니다. 갈릴리는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길을 떠나려고 하는 순간에 빌립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앞 단락에서는 안드레와 베드로 형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립은 그의 친구로 추정되는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다.’(45).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아주 특별한 존재로 경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한 빌립의 말 중에서 한 가지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나사렛은 무식한 촌놈들이 사는 시골입니다. 나사렛에서 괜찮은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노골적으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 문장은 하나의 속담처럼 전해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와서 보라.’고 말합니다. 선입관을 버리고 직접 예수님을 만나보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빌립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나다나엘은 빌립의 권면에 따라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47절부터 51절까지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나다나엘을 가리켜서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이며, 그 내면에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듣자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는 나를 어떻게 아시느냐?’고 예수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데리고 오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얼마 전에 무화과나무 옆을 지나치다가 그 밑에 앉아있던 나다나엘을 유심히 보았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나다나엘도 이미 예수님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설명이 본문에는 없습니다. 성서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말은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볼 수 있는 초능력이 예수님에게 있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이런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특별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당신은 메시아입니다.’라고 반응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다나엘은 이미 빌립에게서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예수님에게 와서도 여러 대화를 나누었을 겁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나다나엘의 이런 고백은 그 순간에 벌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훨씬 후대에 형성된 제자들의 신앙이 나다나엘의 이야기에 포함된 것으로 봐야합니다. 만약 처음 만나서 한두 마디를 나눈 즉시 메시아라고 고백했다면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마술사나 독심술사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많은 이야기가 생략되고 비약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린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는 말을 듣고 나를 메시아로 믿는 모양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건을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오.’(50). 사람의 중심을 뚫어보는 초자연적인 능력보다 더 중요한 사건을 믿음의 토대로 삼아야한다는 뜻입니다. 그 중요한 사건이 51절에 나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28:10절 이하에 위 본문이 묘사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 명분을 가로챈 야곱은 죽여버리겠다는 형의 위협을 피해서 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도망가는 도중에 벧엘 들판에서 노숙하다가 꿈을 꿉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사닥다리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사닥다리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야곱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잠에서 깹니다. 28장에서는 천사들이 사닥다리 위로 움직인 반면에 요 1장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 위로 움직였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묘사는 마 3:16절에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천사들이 나타났다거나 하늘이 열렸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성경에 자주 묘사된 이런 것들을 오해하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갈등을 겪거나 신앙 성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수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요한계시록 18장을 공부했습니다. 18:1절이 위에서 인용한 구절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이 구절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마술이 아니라 일상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영적인 깊이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현상 중에서 두 가지만 짚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자, 또는 천사로 일컬어지는 존재는 모든 이들이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천사는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만 볼 수 있는 대상입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대구샘터교회는 15년 전에 경산시 하양에서 2,3, 그리고 진량에서 2,3년 있다가 대구로 거처를 옮긴지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처음에는 대구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우연한 일들이 계기가 되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인도해준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2) 천사의 영광으로 땅이 환해졌다는 표현은 그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어둔 길을 가는데 하늘에서 전조등 같은 빛이 그들의 앞길을 비춰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걸 마술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술적인 것이며, 시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여러분이 마음 깊은 곳에서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빛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손자가 다니는 초등학교를 방문했다고 합시다. 여러 학생들이 한 교실에 앉아 있습니다. 그중에 손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빛이 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연인들 사이에는 그게 더 강력합니다.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동성로 어디에서 만나자고 해서 거기로 나가 기다립니다. 약속 시간이 지났습니다.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림자처럼 지나칠 뿐입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대상이 나타났습니다. 빛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서 세상이 환해지는 걸 실질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술가들과 시인들은 일상에서 이런 경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의 극치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빛입니다.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걸 볼 눈이 있어야 하고, 들을 귀가 있어야 하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세상을 피상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이런 결정적인 것을, 즉 천사와 빛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놓칩니다. 지금 함께 예배드리는 이 자리와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경험은 다 다릅니다. 제가 여러분 마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구체적으로 짚어낼 수는 없지만 대충은 압니다. 저도 그럴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합니다. 직장 일이나 가정 일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배 빨리 마치고 약속 장소로 나갈 생각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단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다른 신자의 옷차림에 자꾸 신경이 쓰입니다. 교회 걱정도 많이 합니다. 오늘 예배에 빠진 아무개 집사를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 떨어져 있는 한 천사와 하늘이 열리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과 빛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공간에 앉아서 함께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읽고 설교 듣는 것 자체에서 신비로운 기쁨을 느낍니다. 이런 시간과 공간 안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를 황홀하게 느낍니다. 그런 느낌이 가득하게 되면 자기에 대한 생각은 한없이 줄어듭니다. 걱정과 근심과 욕심 등등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예배 사건에 푹 빠져듭니다. 베토벤이 귀가 먹었는데도 음악 소리가 자기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험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이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건조해질 것이며, 우리의 신앙 역시 메말라갈 것입니다.

 

빛 경험

오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하늘과 천사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천사들이 인자 위로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생명을 심판하는 분이며 생명 자체라는 뜻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11:25,26)는 말씀도 이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믿고 경험하는지를 질문해보십시오. 그런 믿음에 근거해서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질문해보십시오. 저는 앞에서 일상의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 빛으로 경험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거기에 대비해서 생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환하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빛의 반대는 어둠이며, 어둠의 반대는 빛입니다. 우리 인생을 어둡게 하는 것은 죄와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죽음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에 빠지는 것이며, 죽음은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아무리 높은 지위를 획득해도, 온갖 세련된 것들을 누린다고 해도 죄와 죽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21세기 현대인의 삶도 죄와 죽음으로 인해서 파괴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라고, 어둠이 아니라 빛이 찬란하다고 말입니다. 그런 느낌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장난감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K 주간지 <정윤수의 서문이라고 읽자’> 코너에 보들레르 산문시 장난꾸러기가 소개되었습니다. 1862년 프랑스 파리에 사는 도시인들의 모습을 비관적으로 묘사한 시입니다. 정윤수가 쓴 글의 제목이 채찍질당하는 나귀 신세가 된 도시인들입니다. 보들레르의 시를 압축한 제목으로 보입니다. 오늘 대한민국 대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채찍질당하는 나귀처럼 삽니다. 정신없이 바쁘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갈 여유를 찾기도 힘듭니다. 장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기업 직원들과 학교 교사들, 그리고 교회 목사마저 혹사당한다는 말이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우리교회 K 집사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직장에 나가 있으면 노예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잔업 수당을 높이 책정함으로써 노동에 더 매달리게 하는 세상입니다. 사회 전체가 총체적으로 죄와 죽음의 두려움에 묶여 있기에 경쟁력이 남보다 앞서봤자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삶의 방향을 전적으로 새롭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삼일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최선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방향전환을 가리킵니다. 1)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완성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거칠게 말해서 출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이런 말을 허튼 소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채찍질을 당하더라도 경쟁에서 무조건 이기려고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그럴듯하지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세상 논리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면, 교회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작지만 신앙의 본질에 천착하면서 평화와 기쁨과 종말론적 희망을 나누는 교회와 더 이상 복음의 능력으로 작동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메가 처치 중에서 어떤 교회가 생명 충만할까요? 어떤 교회에 나가고 싶으신가요? 세상살이도 똑같습니다.


2)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내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시작되고 유지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 삶에 대한 선입견이 너무 강합니다. 우리가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매달리는 삶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생명 완성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생물학적인 관점으로도 이것은 옳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자궁에서 살던 시절이 있습니다. 난자에 정자가 결합되어 배아로 살던 시절이 있습니다. 배아가 성장해서 사람 모양을 갖춘 뒤에 자궁 밖으로 나와서 지금처럼 살아가리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잠시 지구에 살다가 우리의 몸은 다시 원소로 해체됩니다. 생명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완전히 탈바꿈한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곧 생명 완성은 피조물인 우리가 아니라 창조주인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독교 신앙에 집중하면 현실을 도피하게 될지 모른다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걸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주실 터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우리는 오로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는 자세로 살면 된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고유한 능력으로 우리 생명을 완성시키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연민에 떨어지지 않고 인생을 치열하게, 그리고 불의와 우상숭배에 저항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체제 아래서 그렇게 투쟁적으로 살았습니다. 극한 상황에서는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삶의 능력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사람에게서 가능합니다.

설교듣기: https://youtu.be/BmFpVaxSxH0

설교보기는 예배실황 아프리카티브이를 참조하세요.  http://afreecatv.com/nfermata 이 영상은 한 달 뒤에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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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January 17, 2018
*.97.58.49

시대정신에 뼛속까지 길들여져서
세상에서의 경쟁력 확보에 늘 노심초사하며 사느라
하나님조차 자기완성의 우상으로 만드는 우리에게서,

 생명완성에 대한 설레임과 갈급함을 기대하며 사는게 가능할까요?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 하는 모습은
그저 환타지 영화에서나 볼수있을 법한, 또 야곱같은 위대한 족장에게서나 가능한 일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우리에게, 오늘 목사님의 설교 결구는 그 옛날  누구도 귀기울여주지 않던 이사야나 예레미아처럼 허공에 대고 외치는 고독한 절규같아만 보이는군요

나를 향하신 생명완성에 대한 그분의 계획하심과 오늘 나의 무기력한 실존사이의 도저히 매꿔질수 없어보이는 이 엄청난 간극이 매일 매일 하루만큼씩 좁혀져 가고 있기나 한걸까요?

이를 뒷받침해줄만한 특정 성경구절 하나를 끌어다 견강부회 해가며
자기 기만속에 J를 믿고 있는건 아닐까요?

믿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믿고 있지 않는것이다.....

한 주전의 설교문구가 여전히 귓전에 맴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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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7, 2018
*.182.156.9

'하늘이 열린다.'는 말을 이제야 정확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영혼의 깊이에서 느끼고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을

평생 목사로 산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수요성경공부 계 19:11절에도 '하늘이 열린다.'는 말이 나왔고,

참고 구절인 사 64:1절에도 '하늘을 가른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늘'을 아는 것만큼 우리의 신앙과 삶이 깊어지고 풍성해질 겁니다.

지난 주일 서울샘터교회 '설교 한걸음 더 들어가기'에서 보충한 내용을

부스러기 님에게 전달해드리니 시간 되면 들어보세요.

https://youtu.be/uQTAFWkpvb8

저도 부스러기 님의 대글을 통해서 배우는 게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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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mist

January 20, 2018
*.116.48.57

목사님
위의 설교와 서울 샘터교회에서 하신 '설교 한걸음 더 들어가기'도 잘 들었습니다.

일상의 피상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저에게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시적 경험과 예술의 경지를 비교해가며 가능한 신앙의 층위를 뚫고 깊이 중심에 닿도록 가르쳐 주시려는 목사님의 몸부림에 늘~감동입니다.

강의에서 마지막 두분의 질문자들이 던진 질문이 저의 질문이기도 한데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이란 ...과연 하나님의 주도적 은혜로 볼 것인지, 인간의 구도적 노력에 의해서 가능한것인지... 답변이 안 된것 같습니다.(녹취록이끊겼습니다.)

어떤 답변이라해도 시인이 시적 극단을 경험하길원하듯,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자 몸부림치는 노력은 큰 즐거움인것 같습니다.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다비아를 연결해 준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천사가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20, 2018
*.182.156.252

미스트 님이 서울샘터 보충 강의까지 다 들으셨군요.

제 대답은 별 거 없었고, 또 뻔한 대답을 했어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이란 돈오와 비슷한 경험이라서,

그리고 한 순간이기도 하고 과정이기도 한 것이라서

당연히 구도정진이 필요하겠지요.

구도정진이라고 해서 우리의 노력으로 그걸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시편 기자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을 붙들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거 정도로 보면 됩니다.

인공지능과 비트코인이 거의 신처럼 숭배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이 점점 혼란스러워질 것이기에

기독교 신학과 영성이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분발해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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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219
1012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753
1011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1898
1010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440
1009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444
1008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13
1007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733
1006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455
1005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276
1004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680
1003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043
1002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880
1001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222
1000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217
999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325
998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468
997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785
996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183
995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677
994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059
993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293
992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323
991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399
990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1980
989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7
988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396
987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7
986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269
985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838
984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649
983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432
982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573
981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286
980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329
979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172
978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455
977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544
976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178
975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421
974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758
973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630
972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10
971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324
970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328
969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8990
968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4
967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125
966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186
965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125
964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1
963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546
962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188
961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128
960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269
959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8928
958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332
957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047
956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800
955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04
954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521
953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549
952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357
951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2922
950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500
949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0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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