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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사순절 조회 수 5773 추천 수 0 2019.03.17 21:20:52
설교듣기 : https://youtu.be/JbhpJRLW5pM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창세기 15:1-12, 17-18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15:1-12, 17-18, 사순절 셋째 주일, 2019317

 

1.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8.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7.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고대 세계 4대 문명 발생지 가운데 하나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에서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입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크게 번성한 도시가 우르입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밀려든 토사에 매몰되어 사람들에게 잊혔던 우르는 1930년대에 영국 고고학 팀에 의해서 발굴되었습니다. 성경에는 갈대아 우르로 표기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이 우르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르의 귀족 가문에 속했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정에 의해서 우르를 떠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보도합니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는 하란에 머물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은 다음에 남서쪽 방향 지중해에 접해 있는 가나안 땅으로 내려와서 정착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이 바로 이스라엘의 시조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바울은 롬 4장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전형으로 제시했습니다. 4:3절에서 그는 오늘 설교 본문에 속하는 창 15:6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15장이 전하는 아브라함이야기는 유대교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

날짜를 특정할 수 없는 어느 날 아브라함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고향 상실의 삶을 그 특징으로 하기에 불안과 두려움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안고 삽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조카 롯이 지역 토호들에게 사로잡혀갔다는 말은 들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서 훈련시킨 사병(私兵) 318명을 데리고 가서 조카 롯을 구출했습니다. 당시에 3백 명이 넘는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그 지역의 맹주로서 큰 세력을 확보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그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환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은 당시에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자식 없는 것이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청지기처럼 여기는 사람의 아들을 상속자로 삼을 계획이었습니다. 15:2절에 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날 자가 상속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뒤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기 몸종인 하갈을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하여 아들을 낳게 합니다. 그가 이스마엘입니다. 일정한 세월이 흐른 뒤에 결국 사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가 이삭입니다. 그건 미래이지 현실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재산을 엘리에셀에게 물려줘서 자신의 가문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 밤하늘을 보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밤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고, 하나님이 이런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겼다고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제사드릴 준비를 합니다. 여기 필요한 제물은 3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입니다. 짐승은 가운데를 잘라서 마주보게 했고, 새는 죽이기만 했지 쪼개지는 않았습니다. 해 질 때에 아브라함은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피곤했겠지요. 그 상황을 창 15:12절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기서 말하는 큰 흑암과 두려움이 무엇인지 손에 딱 잡히지는 않습니다. 다른 번역을 비교해보았습니다. 우리말 성경 공동번역은 심한 두려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루터는 충격과 큰 암흑이라고 번역했으며, 영어 성경 NIV‘a thick and dreadful darkness’라고 번역했으며, KJV‘an horror of great darkness’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의롭다는 인정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이제 긴장이 풀려서 초저녁에 잠들었을지 모릅니다. 마음이 편안하기에 꿈을 꾼다고 해도 좋은 꿈을 꾸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표현만 본다면 그는 악몽을 꾼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들은 악몽을 꾼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들은 종종 도망가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아무리 빨리 뛰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쫓아오는 사람에게 붙잡힙니다. 낭떠러지를 뛰어내리거나 물속으로 빠지거나 하늘을 납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꾸다가 깨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악몽은 젊은 시절에 자주 꿉니다.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설교문 없이 강단에 서는 꿈을 몇 번 꾸었습니다. 너무 자주만 아니라면 악몽을 꾼다고 해서 크게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험들이 우리의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것뿐입니다. 악몽을 꾸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일상 자체를 생명 충만하게 사는 것이 아닐는지요.

아브라함이 잠에서 경험한 큰 흑암과 두려움은 악몽이 아닙니다.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사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임재하신 겁니다. 그것을 흑암과 두려움으로 표현했습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었습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짐승 몸체 사이로 지나갔다고 합니다. 연기와 횃불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시절에 그들의 앞길을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했다고 합니다. 구름기둥은 오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연기로 나타났고, 불기둥은 횃불로 나타났습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을 가리킵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연기와 횃불은 충격적인 흑암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경험에 대한 묘사입니다. 전자는 그걸 가시적인 단어로 묘사했고, 후자는 관념적인 단어로 묘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있을까요? 오늘 우리의 하나님 경험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임재 경험을 무시무시한 암흑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암흑 에너지

블랙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에 관한 우주물리학자들의 설명을 들어도 알듯 말듯 합니다. 현실에서 그걸 경험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경험하기 힘든 물리 현상은 블랙홀만이 아닙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공전 현상도 현실에는 직접 확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눈에 태양과 달은 크기가 비슷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도 못할 정도로 태양이 큽니다. 최소한 4,5백배는 될 겁니다. 검은 구멍이라는 뜻의 블랙홀은 무한의 중력이 작동되는 우주의 한 공간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빨려 들어가면 모든 것들이 형체를 잃습니다. 지구도 사과 한 알 정도의 크기로 줄어듭니다. 빛마저 통과하지 못하는 공간이라서 블랙홀이라고 부릅니다. 우주의 근본은 암흑 에너지입니다. 이전에는 암흑 물질이 대부분이라고 보았지만 현대 물리학은 우주의 더 많은 분량이 암흑 에너지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걸 숫자로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암흑 에너지 73%, 암흑 물질 23%이고, 나머지 4%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물질입니다. 4%의 대부분은 성간의 먼지나 기체입니다. 태양이나 지구, 여러 별들을 다 포함해도 우주 전체에 0.4%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주는 기본적으로 암흑이라는 뜻입니다. 깜깜한 밤하늘을 본 분들은 간접적으로라도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겁니다. 1:2절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흑암이 곧 우주의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일까요? 아브라함은 미리 블랙홀과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를 경험한 것일까요?

우주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자체가 사실은 암흑입니다. 여러분도 일상적으로 그걸 경험합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인식의 불가능성이 우리 인간의 진면목입니다. 겉으로는 많이 보고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북미회담이 위태롭게 진행됩니다. 그것은 남북문제에도 영향을 끼치고, 한반도 전체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좁은 땅 덩어리인 한반도가 분단된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70년 전에 분단이 이렇게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앞으로 이런 상태로 또 70년이 더 흘러갈까요? 누가 그걸 알겠습니까. 개인의 운명도 모르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젊어서 병들어 죽고, 사고 당해 죽습니다. 미세 먼지로 인해서 어느 순간에 지구의 생태 균형이 완전히 허물어지거나 지구의 기온이 급상승하여 지구의 모든 빙하가 녹아 현재 육지의 반이 물에 잠길지 모릅니다. 지구에서 공룡이 멸종하리라는 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 근원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1백년 후는 우리에게 암흑입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우리와 똑같은 차원에서 큰 흑암과 두려움을 경험했는지는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의 뭇별을 셀 수 있는지 보라고 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은 밤하늘을 종종 보았을 겁니다. 여러분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완전히 밤을 새워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 많던 별이 동녘이 밝아오면서 사라집니다. 오늘 우리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지만 아브라함은 몰랐습니다. 그는 암흑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 어떤 존재의 깊은 차원을 느꼈을 겁니다. 그걸 느끼지 못하면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걸 진지하게 생각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영혼의 작용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나이가 충분히 들어서 늙었습니다. 우르를 떠난 시절이 아득합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재산은 많으나 자식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이렇게 저물고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길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죽고 묻히며, 조금 후에 모두 검게 썩는다는 것만 확실하게 압니다. 밤하늘의 별은 무엇이며, 고향 우르에서의 삶은 무엇이고,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삶의 조건들은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손에 잡히는 건 없습니다.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업적을 이루긴 했으나 지나고나니 그게 별 것 아니었다는 걸 절감합니다. 그는 꿈속에서 큰 흑암과 두려움에 휩싸이는 걸 느꼈습니다. 그것은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의 표현으로 누미노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흑암과 두려움이라는 표현이 어떤 분들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겁니다. 뭔가 칙칙해서 우울해진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가능한대로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에는 밝고 즐겁고 매력적인 일이 차고 넘치니까요. 기독교인들도 그런 방향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미국의 조엘 오스틴 목사의 책 긍정의 힘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런 책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배격한 바알숭배 신앙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심리학에 불과합니다. 왜 그런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할까요? 조엘 오스틴 목사는 그 책 첫머리에 자신의 경험을 설명합니다. 목사 부부가 어느 곳을 지나다가 환상적인 풍경의 집을 보고 그 집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겁니다. 얼마 지나자 기도 결과로 그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면 인생이 잘 풀린다는 주장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살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다만 그런 태도는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합니다.

흑암과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여러분에게 칙칙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단어는 실제로는 삶의 심연을 가리킵니다. 심연은 깊이입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심연입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먹는 것도 역시 심연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사소한 사물도 각각 심연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것들입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2백만 년 전 직립을 시작한 유인원을 가리킵니다. 지금 우리의 걷는 행위는 바로 그 유인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선이 너무 깊고 아득해서 현기증이 납니다. 저는 아직도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던 시절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 어린 시절 어느 날 종종 경험했던 일몰과 밤하늘이 삶과 세상을 신비하게 경험한 첫걸음이었겠지요. 신학대학교를 다니던 이십대 초반에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 에릭 프롬의 책들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다니던 교회 생활과 신학생 시절과 평생 구도적으로 이어온 신학공부가 오늘의 저를 만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 심연은 너무 깊어서 다른 말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단어만 여기에 해당됩니다. 삶의 신비! 창조의 어둠과 빛!

저는 여러분들이 일상을 생명 충만하게,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 매몰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일상을 생명 충만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흑암과 두려움의 깊이를 들여다볼 줄 알아야합니다. 흑암 없이 밝음 없고, 두려움 없이 기쁨도 없습니다. 밝은 일상만 좇으면 일상 자체가 과부하에 걸리고, 더 지속되면 빈껍데기만 남게 될 겁니다. 삶의 흑암과 두려움에 대한 경험이 현대인들에게 절실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삶의 흑암과 두려움을 역사적인 한 인물의 운명에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 역사적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수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야말로 흑암 중의 흑암입니다. 두려움 중의 두려움입니다. 블랙홀 경험이며, 암흑 에너지 경험입니다. 여러분이 죽는 순간에 그와 비슷한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그걸 미리 당겨 경험하는 것이 영성의 중심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바로 거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나님이 달리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죽음! 암흑과 같은 그 엄청난 사건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일상이 부활생명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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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March 19, 2019
*.151.83.22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연기와 횃불, 흑암이 하나님 경험에 대한 묘사였다면

오늘 우리의 하나님 경험은 블랙홀, 암흑물질, 암흑에너지의 우주물리현상과

우리 앞날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이 인간의 진면목이라는 사실과

호모 에렉투스 이전 부터 시작된 역사에서 가능하군요.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인간 삶의 전부처럼 보이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생명차원의 행복의 기준으로 이미 여기서 부활생명을 살수 있는 것이네요.

부활생명은 나 스스로 완성하려 하지 않고 참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9, 2019
*.182.156.135

예, 정답을 정확하게 정리 요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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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March 20, 2019
*.151.83.22

성간 먼지에 불과한 태양계에 속한
지구행성에 살고있는 생명체 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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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베뢰아

March 21, 2019
*.130.169.138

불투명한 미래의 불안과 고독한 나그네의 실존을 살아가던 아브라함은
깜깜한 밤하늘을 보는 일상에서 
흑암과 두려움으로 밖에 묘사할 수 없는 심연의 경험을 하던 중
궁극적인 어떤 존재와 세계의 별빛, 즉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들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약속으로 여기고 
그것에 자신의 존재와 미래를 맡기는 확신과 결단으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의로 여기셨다.

십자가라는 실패와 절망, 고독 그리고 흑암과 두려움의 극단에 자신을 내어준 예수님의 운명에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빛을 보게 하셨다
여기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믿는) 자를 의롭다 여기시고
지금의 일상을 눈부시게 바라볼 수 있는 부활생명을 선물로 허락하심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잘 따라가고 있는 건지요
너무나 멀리 있어, 크고 위대한 조상이라고만 생각했던 아브라함이라는 한 어른을 
조금은 가깝게 모셔 바라보게 해 주셨습니다.

흑암 없이 밝음 없고, 두려움 없이 기쁨도 없다는 선언에 
결연한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어두움을 늘 칙칙하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는데 
껴안아 품고 가야 할 삶의 일부이며 
빛으로 인도하는 벗으로 삼아야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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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1, 2019
*.182.156.135

베뢰아 님이 저의 설교를 충분히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야할 영혼의 순례길에 필요한 양식으로(최소한 간식거리로) 받아들이셨네요.

오늘인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춘분이라지요?

우리의 삶에 최소한 반은 암흑이니,

그리고 그것마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속한 것이니

그것을 빛과 하나로 받아들여야겠지요.

밤이 깊어가니 평화도 더 깊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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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146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83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74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221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402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55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520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711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630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765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305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94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74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71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25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74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35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452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753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75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836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337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748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180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389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904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58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49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67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65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205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700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88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40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424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84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63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29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231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180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139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369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954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384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68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97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43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36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40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21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54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79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57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55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64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97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95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71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45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10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94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18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08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4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46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95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13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04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70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95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62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19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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