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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xmRlZJ9v5I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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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이사야 43:16~21 |
하나님의 새로운 일
사 43:16~21,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22년 4월3일
오늘 설교 본문인 사 43:16~21절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16절)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19절에서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발언하신 문장처럼 들립니다만, 실제로는 이사야라 이름하는 고대 이스라엘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입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이사야의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모든 선지자의 설교가 옳은 건 아니었습니다. 렘 28장에는 예레미야와 하나냐 선지자가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 선지자의 설교 중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서 검증받은 뒤에 하나님 말씀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 성경으로 채택되었는데, 이사야가 그중의 하나입니다.
이사야는 유대교인만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신약성경 저자들이 예수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이사야에서 종종 찾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 53장의 ‘고난받는 종’ 개념은 신약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 눅 22:37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기 운명을 사 53:12절에 근거하여 설명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인 빌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립은 성지 순례차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가던 에디오피아 고위 관료를 만납니다. 그 관료는 사 53:7절 이하의 말씀을 읽고 있었고, 빌립이 그 말씀을 복음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사 43:16~21절도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명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구절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표적 신앙의 위험성
여러분이 사용하는 성경에는 사 43:14절부터 21절 대목에 “바벨론으로부터 빠져나오다”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을 겁니다. 그 소제목이 이미 암시하듯이 오늘 본문을 기록한 (제2)이사야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바벨론 제국의 공격에 수년간 저항하다가 기원전 587년에 패전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바벨론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수십 년간 살았을 겁니다. 영적인 감수성이 예민했던 이사야는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실 것이라 확신하고, 자기의 생각을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배웠던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우선 여호와께서 이전에 그들 선조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43:16b)라는 말은 홍해가 기적적으로 갈라진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려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43:17)
이사야가 간단히 두 구절로 묘사한 홍해 사건에 얽힌 이야기는 출애굽기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야곱의 후손인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소수 민족으로, 실향민으로, 디아스포라로 430년(출 12:40)을 지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게 내리신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은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결정을 후회한 바로는 당시 최정예부대인 기마병 출동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길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위태로운 상황에 떨어진 겁니다. 뒤에서는 기마병이 추격하고, 앞은 홍해가 막았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자 홍해가 갈라져서 육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홍해를 무사히 건넜고 뒤따라오던 바로의 기마병은 수장되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대대로 이 이야기를 후손에게 전했습니다. 모세의 누이 마리암이 다른 여자들과 함께 소고(小鼓)를 치고 춤추면서 부른 노래가 민요처럼 전해졌습니다. 출 15:21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이사야가 언급한 내용입니다. 아무리 반복해서 듣거나 노래로 불러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홍해 사건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신앙은 바로 이 사실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18절에서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합니다. 들어보세요.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잊지 말고 기억하며, 마음에 새기고 늘 생각하라는 말이 나올만한 순간에 정반대의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고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증해주는 사건이 바로 홍해에서 벌어진 기적 아닙니까. 이런 놀라운 일을 기억하면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는 게 신앙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사야는 왜 기억하지 말라고 말한 것일까요? 소극적인(negative) 관점과 적극적인(positive) 관점으로 나눠서 보는 게 좋겠습니다.
소극적인 관점으로 홍해 사건이 아무리 놀라운 표적이라도 하나님 신앙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1) 어떤 사람은 다시 모세 같은 인물이 와야만 오늘 바벨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모세 같은 인물이 없는 상황에서 모세를 기다린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2) 다른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우리 선조들이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운이 좋았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 옛날에 일어났던 일은 아름답게 회상되지만, 현재의 일은 암담하게 느껴집니다. 3) 또 어떤 이들은 바벨론과 예루살렘 사이에는 출애굽 당시에 여호와께서 기적적으로 길을 내신 홍해가 없으니 오늘 자신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사야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팽배한 과거지향적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경고하려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발언, 즉 홍해의 기적을 기억하지 말라고, 옛날에 벌어졌던 그 사건에 머물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과거에 벌어졌던 특별한 사건에 관한 경험은 우리가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어려운 시절을 많이 겪었던 유대인들이 표적을 찾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늘에 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일을 기대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그런 표적에 관한 이야기가 수없이 나옵니다. 그런 표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에게도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표적에 매달리면 하나님은 잊힙니다. 하이데거가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존재하는 것의 본질을 찾다가 ‘존재 망각’이 일어났다고 말했듯이 ‘하나님 망각’이 일어납니다. 표적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에 중요한 매개인데, 역설적으로 그런 표적이 하나님 신앙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표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니라 표적을, 요즘 식으로 성공 신화를 믿는 겁니다. 한국교회에 간증 이야기가 범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인식은 가볍기 짝이 없으면서 자기에게 어떤 표적이 일어났는지에 관한 열정은 뜨겁습니다.
표적 신앙의 위험성은 우리의 가벼운 일상에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부부 사이라도 좋고, 부모와 자식 사이라도 좋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사랑하고 존경하며 귀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 표적으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서로의 생일을 기억해서 선물을 준비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화기애애한 이벤트를 만들어 ‘서프라이즈’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에서도 그런 이벤트가 없으면 심심할 정도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서로 친밀감이 깊어진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이벤트만 좇으면 그 사람 자체에 관한 생각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적극적인 관점으로 이사야가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외친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더 정확하게 선포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눈에 비슷해 보여도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일이 새롭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며칠 전 어느 행사에 참석해서 퇴임한 후에는 잊힌 사람으로 살겠다고 말했다 합니다. 자신을 정치 현장으로 끌어들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나, 대통령으로서 자기가 행한 이전 일은 잊겠다는 태도 아니겠습니까. 신앙적으로 바꾸면 하나님에게만 새로운 일이 가능하니 자신은 이제 현장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행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새롭다.’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기에 그런 말을 들어도 대충 ‘그런가?’ 하고 지나칩니다. 정권을 바꾸는 일인가? 촛불혁명을 완성하는 것인가? 구약의 전도서에 나와 있듯이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습니다.”(전 1:9). 비슷해 보이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보통 ‘대박’이라고 소리치는 일도 새로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 세상의 그 어떤 일로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대단한 듯이 보여도 새로운 일이 아니니까요. 하나님에게만 새로운 일이 가능합니다. 거기에 우리가 눈을 떠야 합니다. 이사야가 19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
그는 20절에서 다시 반복합니다.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길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제 홍해가 갈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으나 대신 광야와 사막에 길이 생기고 강이 흐를 것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사야는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경험하십니까? 그렇게 열린 눈으로 자기와 세상을 보고 계십니까?
21세기 과학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기계적 인과율이나 결정론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이런 인과율과 결정론을 개인이 피하기 어렵습니다. 사업에 성공해야 하고, 정치에도 성공해야 하고, 목회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성공해야만 행복합니다.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가난에 치를 떱니다. 국가 차원에서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필수입니다. 대한민국도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합니다. 이럴 때만 우리를 지킬 수 있고, 국민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인과율이자 결정론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양자 역학에서는 인과율이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양자처럼 미시의 세계에서는 원인이 있어야만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 원인 없이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에너지의 흐름이 불연속적입니다. 이런 현상을 양자 도약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원인 없는 결과는 인공지능 아니라 인공지능 할아버지가 나타나도 계산해낼 수 없습니다. 전체는 부분의 집합이 아니라는 명제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한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를 모아놓는다고 해서 그 인간이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눈이 내린다고 합시다. 대기에 대한 정보를 아무리 완벽하게 입력한다고 해도 2킬로 상공에서 만들어진 눈이 어디에 떨어질지는 컴퓨터로도 계산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드리는 이 순간이 50년 전에는 계획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50년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계산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계산될 수 없는 전체를 창조하고 주관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그분만 새로운 일을 행하실 수 있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라는 게 멀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로도 우리는 짜증을 냅니다. 자기가 지지한 대통령이 당선되지 못하거나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으려면 심리 치료나 약물치료를 받고, 취미생활을 하거나 좋은 친구와 만나서 즐겁게 지내십시오. 거기서 사는 재미를 느낄 겁니다. 그런 재미는 예수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재미는 우리 삶에서 임시 조치입니다. 임시 조치로 우리 삶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새로운 일에 눈을 뜨는 겁니다. 오늘 이사야는 하나님이 광야와 사막에 길과 강들을 내서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일은 처음 홍해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혀 새로운 일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정말 새롭다고 여길만한 일을 언제 경험하십니까?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2020년대에 들어와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을 새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다 시시한 일이 되고 맙니다. 나이가 든 분들은 시간이 빠르다고 느끼는데, 그게 바로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일이 새롭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인생이라는 게 원래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충 살란다, 하면 저도 옆에서 어쩔 수 없습니다. 요르크 칭크의 책 『기도를 어떻게 드릴까요?』 1권 107쪽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삶을 마칠 때까지 자기 삶이 얼마나 메마르고 황폐해 있는지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대충 그렇게 사는 건 그의 내면세계가 정체되어 있다는 뜻이라서 이미 죽은 건지 모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신앙의 선배인 바울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바울은 하나님의 새로운 일에 대한 이사야의 선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본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단순히 애굽이나 바벨론에서 해방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는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의(義)로부터 믿음 의로 존재가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삶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삶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에릭 프롬의 표현으로 바꾸면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소꿉장난으로 다투는 어린아이의 삶에서 벗어나서 어른의 삶으로 바뀌는 겁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ure) 되었다고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만이 새로운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곧 닥칠 죽음도 우리의 삶을 망치지 못합니다. 그런 믿음이 분명하다면 겉으로 지루하게 보이는 여러분의 일상이 보석처럼 빛날 겁니다. 늘 새롭게 경험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 여러분의 남은 인생에서 어떻게 펼쳐질지를 기대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의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말씀을 요즘 계속 되내이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아득하기만 합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네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읽으면 읽을 수록, 한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목사구원'에서 말씀하신 '솔라피데'가 주는 어떤 자유로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텍스트 너머에 있는 텍스트가 가리키는 실체로 더 나아가고 싶네요! 귀한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