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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주현절 조회 수 9613 추천 수 0 2018.02.04 20:54:11
설교듣기 : https://youtu.be/gZw9vKUgn24 
성경본문 : 마가복음 1:29-39 

예수의 회당 전도

1:29-39, 주현절 후 다섯째 주일, 201824

 

29.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5.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저는 지난 수요일 교회에서 요한계시록 공부를 끝내고 치과에 다녀왔습니다. 어금니 일부가 파손되어 금속으로 메우고 마지막 사랑니를 발치했습니다. 구강 건강이 비교적 좋은 편인데도 세월이 흐르니 망가지는 부분이 생깁니다. 요즘 의학이 첨단으로 발전되어서 웬만한 질병은 가볍게 치료됩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은 의료 도움 없이 민간요법에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민간요법은 한계가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질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이 문제를 주술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치병의 능력이 있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의지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는 유치하지만, 무조건 매도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어린아이들이 몸살이나 소화불량으로 아플 때 어머니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배를 만져주면 치료 효과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몬의 장모 치료

2천 년 전 예수님 이야기에도 이런 치유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보도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막 1:29절 이하에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열병에 걸렸던 시몬(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사건입니다. 당시 이 여자는 사위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지 아니면 열병에 걸려서 임시로 온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예수 일행이 집에 들어왔는데도 그냥 누워있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병세가 심각했습니다. 이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당혹스럽습니다. 보통 때라고 한다면 그녀가 손님 접대를 해야 하지만 지금 그녀는 열병에 걸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열이 심해지면 헛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평균 체온이 36.5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5도만 높아도 생명이 위험합니다. 이런 거를 생각하면 우리가 살아서 숨을 쉬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신비롭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여자의 상태를 예수님에게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를 향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든지 병마야 물러가라.’고 말씀했을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씀 하지 않고 이 여자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셨고, 그러자 열병이 떠났으며, 이어서 이 여자는 손님들을 접대했다고 합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에 들어왔다가 열병에 걸린 시몬의 장모를 고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이런 소문이 들리면 좋을 게 없습니다. 본문 32절에 따르면 저녁이 되자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들이 시몬의 집 앞에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저녁이 되었다는 것은 안식일이 끝났다는 뜻이니 안식일 규정을 걱정하지 않고 치료를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각종 병 든 많은 사람들을 고치고 많은 귀신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 장면이 머리에 그려질 것입니다. 요즘으로 바꾼다면 환자가 몰리는 병원으로 보면 됩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치료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든 것입니다.


저는 열병에 걸렸던 시몬의 장모 이야기를 단순히 몸의 열병만이 아니라 영혼의 열병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병은 우리 몸이 바이러스나 균과의 싸움에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무균실에서 사는 게 아니라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는 한 온갖 종류의 균에 노출되는 것처럼 세상살이의 과정에서 우리 영혼이 수시로 열병을 앓습니다. 잠시 앓고 회복되면 좋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정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 영혼의 열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몸의 열병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이런 영혼의 열병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약과 같은 어떤 것에 취해서 자신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롤러코스트를 탄 것처럼 간혹 삶의 현기증을 느끼기는 하지만 멈추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최근 비트코인 광풍에서 보듯이 현대인의 삶은 서로 쫓고 쫓기는 방식으로, 또는 폭탄 돌리기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런 방식의 삶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주기적으로 멈추어서 자기 인생길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모두 결국은 죽음의 문에서 다시 만날 텐데 왜 저렇게 광속으로 달리기만 할까, 하고 말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가 열병에 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시몬의 장모 손을 붙들어 일으키니 열병이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정신이 말짱한 사람 옆에 있어야 우리의 정신도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신없이 쫓고 쫓기는 열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덕담으로만 생각합니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합니다. 그건 예수 경험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괜찮은 영화, 음악, 그림, 특히 좋은 시를 읽어도 웬만한 열병은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공부시간에 읽은 차창룡 시인의 시 <겨울나무>를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단순해지면 강해지는구나/ 꽃도 버리고 이파리도 버리고 열매도 버리고/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벌거숭이로/ 꽃눈과 잎눈을 꼭 다물면/ 바람이 날씬한 가지 사이를/ 그냥 지나가는구나/ 눈이 이불이어서/ 남은 바람도 막아 주는구나/ 머리는 땅에 처박고/ 다리는 하늘로 치켜들고/ 동상에 걸린 채로/ 햇살을 고드름으로 만드는/ 저 확고부동하고 단순한 명상의 자세 앞에/ 겨울도 마침내 주눅이 들어/ 겨울도 마침내 희망이구나시 한편으로도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지니 예수 경험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문제는 시의 깊이를 몰라보고, 더 근본적으로 예수 경험을 외면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없으니 점점 더 깊이 열병의 저 심연으로 떨어집니다. 그런 것이 인생인 것처럼 착각하는 겁니다. 예수가 시몬 장모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자 열병이 떠났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회당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는 35-39절에 나옵니다. 앞에 나온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른 시간에 기도하러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제자들이 따라와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 가버나움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으니 전도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을 39절에서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은 주로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셨다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회당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활동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전도입니다. 전도는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헬라어 성경과 루터 성경에 따르면 이것은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주로 회당에서 설교하셨습니다. 설교 내용은 유대교 전문 설교자들의 설교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세 군데만 인용하겠습니다. 1) 1:15에서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설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이루어질 뿐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설교하셨습니다. 2) 2:5절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당신 죄는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서기관들이 신성모독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서기관들의 비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중풍 병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지 교주처럼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3) 2:17절에서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하면서 자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죄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으로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즉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서기관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자신들이 절대적인 규범으로 생각했던 율법을 예수님은 상대적인 것으로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3:1-6절에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작당해서 예수 이름을 제거해야 할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렸다고 합니다. 6:1-6절에는 예수님이 고향에서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서 설교했지만 사람들은 예수가 대수롭지 않은 사람으로만 여기고 배척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후로 예수님은 회당과의 관계를 끊고, 더 정확하게 말해서 유대교 주류로부터 배척당하고 회당 출입이 봉쇄당한 후에 저자거리와 광장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회당은 유대교의 예배당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회당에 들어가면 뭔가 거룩한 힘에 사로잡힌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배척당했다는 말은 회당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회당 전통에 고착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고상한 언어로 기도를 드리지만 하나님 향해서는 마음이 닫혀 있었습니다.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그것은 삶의 능력이 없는 종교 언어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들이 재단합니다. 퇴행적인 세계관에 떨어져서 소꿉장난 하는 아이들처럼 자신들만의 종교 언어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은 회당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체제와 조직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정부, 국회, 대학, 연구소, 기업, 병원, 법원, 검찰, 노조, 시민단체 등등, 아무리 선의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체 논리에 빠지면서 퇴락의 길을 걷습니다. 예컨대 검찰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법을 집행하는 조직입니다. 그런 일을 힘 있게 집행하라고 그들에게 기소권이 독점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검찰 조직을 위해서 법을 집행하게 됩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가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조직을 위해서 존재하게 됩니다. 회당의 예수 축출은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귀신을 내쫓으심

예수님이 회당에서 행한 둘째 활동은 축귀입니다. 축귀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오늘 설교 본문의 앞 구절인 막 1:21-28절에 나옵니다. 성경이 말하는 귀신은 생명을 파괴하는 능력입니다. 남을 공격하기도 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파괴하는 세력입니다. 이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의 작용은 비밀스럽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천사의 작용도 비밀스러워서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요일 4: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7:2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향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귀신을 머리에 뿔 달린 존재로 생각하면 귀신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뱀의 속삭임처럼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세련된 힘입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돈이 최고라고 확신하게 하는 이념과 체제가 바로 귀신입니다. 그런 사상과 체제가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력과 선한 세력의 싸움에서 누가 이길까요? 보는 관점에서 따라서 입장이 다르겠지만 회당에서 귀신을 내쫓던 예수가 오히려 회당에서 축출되었고, 나아가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에서 본다면 악한 세력이 이깁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계몽되고 과학과 경제가 발전하면서 점점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뀌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20대 청년들은 민족도 없고 공동체도 없고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익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오늘의 시대정신이 그들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교회 성장주의를 선전하는 세력과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세력 사이의 싸움에서는 어느 쪽이 이길까요? 전자에 속하는 이들입니다. 귀신은 아주 은밀하고 강력하며 매혹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세계 역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역사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생명을 파괴하는 귀신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예감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세상의 논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예감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논리와 다르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지 실질적이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에서 인용한 막 2:17절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이 구절에서 이 세상의 논리와 다른 하나님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의인으로 인정받으려고 무지하게 노력을 하면서 삽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영혼이 너덜너덜해지더라도 거기에 매달립니다. 여기서 죄인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끔찍하게 두려워하고 있는 운명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은총이 임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받아들일 수 있나요? 이를 시인의 말로 바꾸면 고독의 끝에서 우리는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만 기쁘고 행복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더 이상의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승리 방식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회당에서 설교하고 귀신을 내쫓다가 오히려 회당 세력에게 축출되어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 생명으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거칠고 야만스럽고 척박하더라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승리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여러분에게 주어진 조건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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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February 04, 2018
*.105.196.2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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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쿠키

February 04, 2018
*.255.183.176

고독의 끝에서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 와!! 더이상 할 말이 없군요..
시 한편으로도 제 안에 뭔가 가득한 느낌인데 저의 전 존재를 던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있으니..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걱정이 아니라 긴장은 있지만.. 오! 예수 그리스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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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5, 2018
*.182.156.217

현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영성 안으로 들어가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는

기독교의 실체를 아는 것에 비해서 세상의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세상살이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거지요.

기독교인 교수들이나 전업 주부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아는 게 비슷합니다.

그 앎의 차이로 인해서 신앙은 점점 왜소해지고 형해화됩니다.

공연한 말이 많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라는 쿠키 님의 표현이 중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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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mist

February 04, 2018
*.237.42.45

'겨울나무 '시를 냉장고 문짝위에 붙여 놓고 몇번이고 낭독해 봅니다.

시인은 '겨울나무'를 쓰면서 처음부터 나무에게 '죽으라'고 말하는 것 같네요.
그래서 갑자기멈칫해지네요.

버리고, 버리고, 않고, 않고.. 벌거숭이로.

겨울나무와 제 실존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괴리감이 있네요.
저는 뭔가를 버린적도 없고
밥도 굶어본 적이 없으며
벌거숭이가 되어 본적은 더더욱 없으니,
시읽기가 안됩니다.

머리를 땅에 처박은 처절한 경험도 턱없이 부족하니 삶의 층위에 녹여낼 수 있는 깊이도 없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햇살로 고드름을 만들 경지에 닿으려면
동상이 걸려야 가능한데..
동상걸릴까봐 오늘도 양발 두켤레나 덧신었습니다.
죽어야 희망인데
저는 살아서 희망을 보고 싶습니다.
살고자 본능적으로 자신과 세계를 감싸고도는 제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시속의 세계와 깊이는 언제쯤 읽혀지고 경험될른지.... 까마득합니다.
그러나 시를 만난것이 희망인줄 믿고
예수를 만난것도 희망인줄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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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5, 2018
*.182.156.217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시인의 언어로 바꾸면 <겨울나무>의 그것이겠지요.

'죽어야 희망인데'라는 미스트 님의 표현이 세례를 가리키고 있으니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미 죽음과 희망을 삶의 내용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현실에서는 양말 두켤레를 끼어신을 수밖에 없다하더라도 

우리 영혼은 '벌거숭이'가 가리키는 삶을 내다봐야겠지요.

홀로 죽음의 문을 넘어설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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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김사관

February 05, 2018
*.81.137.191

회당에서 시작해 회당으로 끝나는 본문을 놓고  목사님의 '회당 전도'라는 제목설정이 너무도 크게 와 닿습니다. '이 시대에도 진정 전도가 필요한 곳은 교회가 먼저이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희망을 노래하는 '겨울나무' 詩도 너무 좋았구요. 극심 한파가 싫지만은 않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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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5, 2018
*.182.15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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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회당 전도'라는 제목으로 설교문을 작성하기가 만만치는 않았지만

마음을 비우고 본문을 생각하면서 메시지를 정리하다보니

그런대로 괜찮은 설교문이 나온 것 같습니다.

낙평리 사관님이 엑기스를 뽑아서 정리해주시니 설교가 더 선명해졌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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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February 06, 2018
*.151.83.22

예수님이 회당으로 가신 이유는

회당안에도 예수님께 전도 받아야될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것입니다.

회당에 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병고치는 일이나 귀신을 쫓아내어

사람을 살리는일을 안식일에 행하였다고  율법을 어긴일 이라하며

생명보다  율법 그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일것입니다.

예수님이 현시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어떻게 전도하실까?

이세상이 생명을 파괴하는 귀신이 승리하는것 처럼 보이나

사회에서 인정받을 능력이 없는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은총이 임한다고 목사님 말씀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잘났다고 증명하지 않아도 되며,

겨울나무가 한걸음 더 다가오는것을 느낄수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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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6, 2018
*.182.156.227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자,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인 덕담이 아니라 실질적인 겁니다.

정말 그런거지요.

그 이유는 자기가 최대한 축소되어야만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바람을 느낄 수 없지만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은 바람을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거와 같지요.

겨울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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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February 07, 2018
*.240.61.32

"믿음이 구원이다"(11/19)는 설교에서
'나병환자의 실존에 떨어지지 않으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영혼의 절규를 외면하게 되고, 나병환자의 실존에서 멀어질수록 구원에서 멀어지게 된다...'고 하셨죠

치열한 적자생존의 일상속에서, 이웃보다 더한 경쟁력의 확보만이 나와 내 가족이 저 두려운 실존에 떨어지지 않는 유일한 출구로 여겨지는 오늘, 오히려 경쟁력이라고는 도무지 없어보이는 죄인이나 나병환자의 처지에 떨어져야만 구원을 얻을수 있다면 누가 그 구원을 받고자 그 길을 감행할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진 믿음조차 그  비참한 처지로 전락되지 않으려는데에 온통 동원하고 있는 형국인데 말입니다.
우린 어쩌면 평생 경건의 포즈만 취하다가 슬픈 기색으로 돌아가는 부자청년의 신세로 다 끝나버리는게 아닐런지...

구원을 , 믿음을 얼마나 나이브하게 생각하며 이 길을 좇고 있는지 자문하게 되는군요..

'믿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믿지 않는거다...' 하는 목사님의 질타와
'내가 다시 올때 믿음을 보겠느냐?'는  J의 소름돋는 단언 앞에서
행여 나와 내 가족이 죄인이나 나병환자와 방불한 처지에 떨어지진 않을까...  늘 노심초사한채 좇는 자기열심의 길이 얼마나 위선과 가식이 가득한지,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내 안에서 만들어내기란 언감생심임을 새삼 통감합니다,. 

 

아...

구원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도 은혜이듯

오늘 여기서 구원을 경험하고 누리는 믿음 또한 은혜일수 밖에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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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7, 2018
*.182.156.244

부스러기 님의 대글을 읽다보면

설교자인 저보다도 말씀을 훨씬 더 치열하게 대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피드백을 통해서 저도 많이 배웁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가 좌절함으로써

'은혜일 수밖에...'에 도달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루터)가 다시 선물로 주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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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선비다움

February 09, 2018
*.249.231.199

귀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오늘 설교에서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의인으로 인정받으려고 무지하게 노력을 하면서 삽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영혼이 너덜너덜해지더라도 거기에 매달립니다. 여기서 죄인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끔찍하게 두려워하고 있는 운명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은총이 임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받아들일 수 있나요?” 라고 물으시는 부분이 제 영혼에 말을 걸어오는 느낌입니다.

 

사실, 영혼이 너덜해질 정도로 엉망인데도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몰두하는 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신과 사람들을 부추겨서라도 나아가야 하는 현실이 무척 괴롭기도 합니다. 큰 아이가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와세다 대학에 갈 것을 권면했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는 이왕이면 동경대에 가면 좋잖아 하는 혼자만의 생각....

내일 모레 고교입시를 치르는 둘째에게 아무데나 가도 괜찮아, 심지어 떨어져도 괜찮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속으로는 자녀를 통해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체면을 살려주었으면 하는 마음들....

 

얼마 되지 않은 소수의 무리에게 난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세상의 처세술일까, 자기 긍정의 리더십일까? 아니면 예수님에게 붙들리고 그 분으로만 영혼이 불타는 예수 경험일까? 예수의 회당 전도(설교)에서 내 영혼과 공동체의 영혼이 어디에 천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February 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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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님은 일본에 거주하는 교포시군요.

다비아에 회원으로 등록하신지가 벌써 13년이 되셨네요.

제 설교보다 선비 님의 대글이 훨씬 더 리얼하고 은혜롭습니다. 

이런 거를 보면 설교자보다는 회중들이 말씀에 더 민감한 게 분명합니다.

선비 님과 가족,

특히 한창 공부에 매진해야 할 자녀들에게 주님의 평화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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