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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창조절 조회 수 10736 추천 수 0 2019.11.03 22:11:08
설교듣기 : https://youtu.be/ommS_i2I2eI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누가복음 19:1-10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19:1-10, 창조절 열째 주일, 2019113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벌어진 일화가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9:1-10절에 나옵니다. 그 풍경은 아주 특이합니다. 한편으로는 만화처럼 재미있는 삽화처럼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 연극의 한 무대처럼 보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영혼이 가을 하늘처럼 투명해지는 느낌이 들 겁니다.

 

삭개오

처음 장면에 삭개오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여리고 지역의 세무관리를 책임진 사람이면서 부자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동북 방향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여리고는 당시 저 멀리 베뢰아 지역에서 유다 지역으로 상품을 운반하는 무역상들이 거쳐야 할 요충지였습니다. 국제 무역이라서 당연히 세금을 징수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부자였다는 말은 별로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로마 정부가 할당해준 세금 액수보다 더 많은 통관세를 거둬서 나머지를 착복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흔히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민족 반역자로 간주했습니다. 세리장인 삭개오는 돈은 많은데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불균형으로 그의 영혼이 아주 불안했겠지요. 돈만 많으면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상관없이 뻔뻔하게 사는 사람도 있으나 삭개오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가 사는 여리고에 들린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유랑 랍비로 활동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만나지 못한다면 옆에서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이미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는 그랬습니다. 그런 태도는 경건한 유대인 지도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비난하면서 저 친구는 세리와 죄인과 친구처럼 어울려서 지내면서 먹고 마신다.”라는 말을 퍼뜨렸습니다. 예수가 지나는 길목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 틈에 끼어 있던 삭개오는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개 마음을 접고 집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삭개오는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예수가 지나갈 길목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정말 뜻밖의 행동입니다. 나무에 올라가는 일은 대개 아이들이 합니다. 그 나무에 몇 명의 아이들도 매달려 있었을 겁니다. 그 장면이 머리에 그려집니다. 다행히 삭개오는 아이들처럼 키가 작아서 주변 사람들이 금방 알아보지 못했겠지요.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에 들어가셨습니다. 여기서 하룻밤 묵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예정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든 걸 보셨습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나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분위기가 싸늘한 마을도 있고, 이렇게 따뜻한 마을도 있습니다. 당연히 기분은 좋으셨겠지요. 아이들은 예수님 바로 뒤를 따랐습니다. 동네 강아지들도 나왔겠지요. 축제 분위기입니다. 저만치 돌무화과나무가 보입니다. 거기에 어떤 사람이 기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키는 작아 보이지만 아이는 아닌 게 분명합니다.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습니다. 나무 바로 아래까지 왔습니다. 나무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어떤 남자가 나무 위에 매달려서 예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5절 말씀이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은 다짜고짜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가 누군지 알고 있었나 봅니다. 삭개오가 그 인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실 때 한번 만나 뵙고 싶다는 말을 삭개오가 지인을 통해서 미리 예수님에게 알렸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삭개오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여보세요. 나무에서 내려오십시오. 오늘 제가 당신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누가복음 기자가 독자들을 위해서 친절하게 삭개오라는 이름을 붙였을지 모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이 이야기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일행은 부자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씻고 먹고 대화를 나누면서 여독을 풀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예루살렘으로 떠나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삭개오의 집까지 따라와서 예수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라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리는 당시에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인도에 아직도 남아있는 불가촉천민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아도 당시 유대교 고위층에게서 일종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는데, 이번 일로 입장이 더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군중들이 그렇게 비판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겠지만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삭개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는지 삭개오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으며, 다른 하나는 남에게 불법적으로 손해를 끼쳤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당시에 회개에 합당한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에게 베푼 호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매우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남에게서 갈취한 것에 대해서 통상의 경우보다 훨씬 엄격하게 지급하겠다고 삭개오는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요즘 부동산 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재산의 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선언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재산의 반인지, 20%인지 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가 그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재물을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두 가지 사실을 재판장이 선고를 내리듯이 말씀하셨습니다.

 

1) ‘오늘의 구원

9절 말씀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런 말씀을 들은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삭개오가 아무리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해도 그가 저지른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가 재산을 환원한다고만 했지 세리장이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의 제자로 살겠다는 결단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구원이 임했다는 말인가, 더구나 세리는 매국노와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상식적이지도 않고 신앙적이지도 않은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오늘 구원을 선포했고, 삭개오를 유대 사람들이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오늘이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구원은 늘 오늘일어납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보다는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삭개오는 오늘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발견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결단했습니다. 소유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었으며, 잘못한 것의 네 배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물질로부터의 자유, 체면과 명예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그 자유와 해방이 구원입니다. 지난날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오늘 그는 새로운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의 신비를 놓치고 삽니다. 지난 일을 후회하거나 그리워하다가 인생을 보냅니다. 왕년에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에 매달려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허망한 미래를 몽상적으로 좇다가 오늘의 삶을 다 소진합니다. 과거와 미래가 아무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와 미래는 오늘로 모입니다. 하이덱거는 이를 순간’(Augenblick)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보세요.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무언가를 봅니다. 그리고 예배당이라는 공간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더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요? 많은 재산과 명예는 이 순간에 필요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생명의 깊이를 느끼고 살아내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오늘 전혀 새로운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걸 아는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죄인 삭개오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도 오늘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생명의 환희와 신비를 느껴야 합니다. 사랑과 희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걱정거리도 많고 숙제도 많고, 나라도 걱정해야 하고, 교회도 걱정해야 하고, 싫은 사람 생각이 자꾸 떠오르고, 분한 생각도 들고, 자식 걱정도 떠나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을 경험할 수 있냐고요? , 우리가 공중에 둥둥 떠서 사는 사람이 아니기에 온갖 염려와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긴 합니다. 인간이기에 부닥치는 일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까지는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일을 후회하는 데에 머물지는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거리는 없습니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그렇습니다. 삭개오에게 일어난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붙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 잃어버린 자

예수님은 10절에서 핵심 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런 주제는 눅 15장에 비유 형식으로 반복해서 나옵니다. 백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심정,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한 개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한 여자의 기쁨, 집을 나갔다가 쫄딱 망해 돌아온 둘째 아들을 뜨겁게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긍휼함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예수님은 거기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세 비유 모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놀랍다고 말을 하고 나름 감동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런 잃어버린 사람의 처지에 떨어지는 걸 크게 두려워합니다. 잃어버린 이는 소수자이고 외톨이입니다.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입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대개의 사람은 가능하면 소위 강남의 1%에 속하는 인생을 원합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는 잃어버린 소수자를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는 그런 잃어버린 자가, 즉 세상의 마이너리티가 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정신적으로 이중적입니다. 머리로는 자기의 정체성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라고 여기지만 몸으로는 늘 주류에 포함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강력한 도전이자 걸림돌입니다.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과 같습니다. 속이 더부룩합니다.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잃어버린 자의 실존에서만 하나님 경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아서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고 생활도 넉넉해지면서 즐거운 인생이 펼쳐진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분이 모두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제가 멈칫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좋은 사람끼리 어울려서 즐겁게 살다 보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딜레마입니다. 인간적인 행복이 우리 삶의 목적인데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사람만이 만날 수 있습니다. 시나 음악 경험과 비슷합니다. 시인들은 언어를 갈급하게 찾습니다. 작곡가는 소리를 갈급하게 찾습니다. 시인이 인간적인 수다에 떨어지면 시를 쓰지 못합니다. 작곡가가 대도시 소음에 파묻혀 지내는 걸 즐거워하면 창조적인 곡을 쓰지 못합니다. 친구가 많고 인생이 즐거우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찾는 듯이 흉내만 낼 뿐입니다. 그가 영혼의 깊이에서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만나려 해도 만날 수 없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재난을 당했다고 합시다. 가난해졌고, 건강도 잃었고, 지인들도 떠났습니다. 노숙자 같은 신세를 벗어날 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대개는 절망하고 인생을 포기합니다. 그런 순간에도 영혼의 눈이 밝은 사람은 어떤 생명의 힘이 자기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지난날에는 보이지 않던 게 그제야 보이기 시작합니다. 천사를 경험합니다. 이런 늦가을 햇살에 눈이 부십니다. 단풍이 눈물 나도록 사랑스럽습니다. 잎 떨어진 나무에 달린 몇 깨 까치밥 감도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천사의 합창으로 들립니다. 이전에도 이런 경험이 가끔 있었지만, 친구를 만나야 하고, 투자한 주식 경기도 챙겨야 하는 등, 바쁘게 지내서 잠시 스칠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오직 그것만이 자신에게 삶의 근본으로 다가왔습니다. 생명의 영인 성령이 자기를 감싸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예수를 실제로 더 가까이 느꼈겠지요. 잃어버린 자에게만 가능한 하나님 경험입니다.

많은 사람과 일과 돈과 인간관계에 파묻혀 사는 세상살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잃어버린 자의 영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각자에게 딱 들어맞는 정답을 저는 모릅니다. 삶의 태도에 대해서만 두 가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잃어버린 자의 운명에 떨어지는 걸 미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순간이 오히려 우리가 구원받는 결정적인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일지 모릅니다. 둘째,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언젠가는 잃어버린 자의 운명에 떨어집니다. 곧 들이닥칠 그 운명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압니다. 다만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본문인 삭개오 이야기에 여러 사람이 나옵니다. 대개는 예수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듣고 배운 기준으로 다른 이를 판단하는 데에 시간을 다 보냅니다. 이들과 달리 잃어버린 자였던 삭개오가 나옵니다. 그는 세상의 판단 기준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빛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경험입니다. 저는 삭개오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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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November 04, 2019
*.136.195.150

설교를 들으면서 ''오늘''이라는 단어가 순식간에 번쩍!! 하고 내 머리와 가슴에 꽂혔습니다.

제목을 ''오늘의 신비''라고 해도 될것같은 설교였어요.
오늘이 중요하고,
오늘에 집중해야 하는건 알지만, 오늘이 신비가 된다는건..좀 특별한 표현 이쟎아요?
주기도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에서..
오늘이라는 날동안,
생명을 경험할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문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니..
설교를 듣는 동안,
그리고 어제 하루종일이 즐겁고 신났던것 같습니다.

날마다 이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꼭 필요하다는걸 새삼 깨닫습니다.
왜냐면..
중요하지 않은데..
중요한것처럼 우리의 귀와 마음을 흔드는 소근거림들 때문이지요.
포기와 절제가 오늘이라는 삶속에 담대하게 생길려면..
먼저는 생명경험이 충만하면 되겠지요?
삭개오처럼.. 이요.

오늘을 신비로 맞이하는 거나..
순간속에서 천사를 만나는 거나..
잃어버린 자가 복이 있다는걸 눈치채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신비한 은총인것 같습니다.
오늘도 멋진설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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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4, 2019
*.182.156.135

은나라 님은 어제를 구원받은 날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ㅎㅎ

오늘, 지금, 순간에 존재하는 것들이 환한 빛을 낸다는 느낌이 온 거지요?

아무도 그런 느낌을 빼앗지 못한답니다. 그게 구원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이런 느낌은 목사나 신학자도 잘 경험하지 못해요. 정말 그렇습니다.

앞으로 살다보면 이런 느낌이 느슨해질 때가 있으나 다시 힘을 내시고

다시 일어나서 이쪽 방향으로 일단 나아가보세요.

언젠가 훨씬 강력한 힘을 느낄 겁니다.

그런 힘이 자신의 영혼에 가득하면, 죽을 준비가 된 거지요.

죽기 전에 그런 경지에 오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나는 아직 멀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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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토마스선생

November 04, 2019
*.79.99.16

순간의 하나님 경험을 전부로 살고자 하지만 

여전히 세상(과거와 미래)의 요구에 휘둘려 살아가는 맹인입니다.


세상의 판단 기준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빛을 만났던 삭개오의 하나님 경험을 간절히 구합니다


매주 목사님 설교를 기다리며 눈팅만 하다가 오늘 용기를 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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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4, 2019
*.182.156.135

토마스 님, 반갑습니다.

토마스 님이 표현힌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빛'을 사람들은

무시하거나 비현실로 간주합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율법적인 부담과 책임감에 사로잡힌 채

생명의 빛에서만 가능한 평화와 안식을 놓치는 경우가 많답니다.

저의 설교를 기다리신다니 힘을 내서 이 일을 잘 감당해보겠습니다.

설교 준비하고 설교 하면서 저 스스로 많은 걸 깨닫고 은혜가 되니,

이것 또한 모두 그분의 특별한 은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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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November 04, 2019
*.139.82.200

마당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설교를 들었는데

일 끝내고 들어와서 다시한번 설교문을 읽었습니다.

'잃어버린 자의 실존에서만 하나님 경험이 가능하다!'

목사님은 어떻게 이런 역설의 신비를 얘기하실 수 있지?

목사님도 뭘 많이 잃어버린 적이 있으신가?..하는 궁금증이 갑자기 생깁니다.ㅎㅎ


삽질을 하다 바라본 앞산의 단풍과

닭장에서수탉이 홰를 치는 소리, 감이 빨갛게 익어가는 풍경,

간간히 눈이 마주치면 꼬리를 흔드는 보라...

정말  생명으로 가득한 세상이었습니다.

남은 세월 잃어버린자의  영성으로 더 깊이 들어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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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4, 2019
*.182.156.135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매 순간 느끼시지요?

하나님의 영광이 온세상에 가득하다는 성서기자들의 진술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웃겨 님이 시골생활에서 매 순간을 '살아있는 것들'과 만나고 계시니 더이상 바랄 게 없겠지요.

곳곳에 천사가 우리 모두를 향해서 손을 흔들면서 웃음 짓고 있네요.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사람이 될까, 하는 걱정일랑 던져 버리고

생명 충만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는 일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짧네요.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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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November 04, 2019
*.151.83.22

설교말씀을 듣고,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죄와 죽음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된 자가 잃어버린자 이네요.

삭개오처럼 거기로 부터 구원 받기를 바라는 사람요.

죄는 윤리도덕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영과 분리되어

인식의 한계상황과 영혼의 만족이 없어 갈급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고,

돈과 물질로 채워보려 하지만 욕망을 따라갈 수 없어 채워지지 않는 것이네요.

소피스트들이 삶을 선택하듯이

죽음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며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죽음을 해결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취하는 부활생명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게됨을 믿게된 사람들이 예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자  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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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4, 2019
*.182.156.135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정말 위로가 됩니다.

생각을 많이 하고 대글을 다셨군요.

가능하면 개념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그렇게 쓰면 아무리 그럴듯해도 죽은 말이 되니까, 

본인 안에서 나오는 느낌을 자신의 (일상)언어로 편안하고 진솔하게 쓰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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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November 08, 2019
*.151.83.22

네, 목사님 .. 방금 난파선에서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조된 사람은

자신의 외모가 어떤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고

오직 살아있는 기쁨으로 가득할것 같습니다.

이 사람에게 그 어떤 걱정이나 욕심은 그 순간에는 없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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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987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1792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1935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1962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242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070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128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212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985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277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216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106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058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092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43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37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195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362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16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486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652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582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699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256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42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19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29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370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20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464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381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697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07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755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282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598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2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49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48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2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6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9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08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6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48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41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8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57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0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3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2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29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29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8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5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14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6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1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6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6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7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4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5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7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9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6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1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1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5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4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4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5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2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1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9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4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4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6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0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3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4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36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6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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