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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대림절 조회 수 9437 추천 수 0 2019.12.22 20:26:46
설교보기 : https://youtu.be/6U4YL8niLxU 
성경본문 : 마태복음 1:18-25 

예수와 임마누엘

1:18-25, 대림절 넷째 주일, 20191222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예수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 안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예수 생애를 똑같이 다루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이에 관해서 아무런 말이 없고, 다른 서신에도 일절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 출생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은 남자와의 잠자리가 없었던 처녀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고대 지중해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철학자 플라톤과 알렉산더 대왕도 남자 없이 태어난 인물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처녀 탄생 이야기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예수는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에 초점이 있습니다. 우선 오늘 설교 본문인 마 1:18-25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따라가 봅시다.

 

예수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청천벽력 같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혼인은 했으나 아직 동거하기 전인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문입니다. 그는 파혼으로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지를 설명합니다.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이뤄진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리아를 정식 아내로 맞으라고 충고합니다. 마리아가 낳게 될 아들의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고 했습니다. 21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는 평범한 유대인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예수아라 하고 그 이름을 조금 길게 발음하면 여호수아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낳은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는 그 아들이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말은 현대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어딘가 구질구질하게 들립니다. 죄는 파렴치하거나 반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만 해당하기에 건전하게 살아가는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여깁니다. 좋게 보더라도 교회에 가서 형식적으로 사죄 기도를 드리는, 일종의 종교적인 통과의례로만 받아들이지 실제 삶과는 관계없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도덕주의적인 죄 개념에 떨어진 기독교의 책임이 큽니다. 그 죄 개념은 부흥회와 청교도 신앙에서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이런 경향의 신앙에 기울어진 이들은 효도하지 못한 죄, 어릴 때 남의 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쳐먹은 죄, 음욕 품은 죄, 심지어 술 마시고 담배 피운 죄 등등을 강조합니다. 이런 잘못을 일일이 따지기 시작하면 사람은 누구도 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짓지 않는 상태에 이르지 못합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이 심리적인 죄의식, 또는 죄책감에 치우쳐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접근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겠지만 성숙한 사람에게는 별 영향력이 없습니다. 니체 같은 철학자는 기독교의 도덕주의 죄 개념을 통렬하게, 그러나 설득력 있게 비판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도 이런 도덕주의적인 죄를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죄인 집단에 속했던 이들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예수님이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말은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에서 우리를 건져내신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생명을, 즉 우리의 일상이라 할 을 파괴할까요? 그게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문제로 인해서 삶이 위축되는지를 확인해보십시오. 각자 처한 형편에 따라서 다를 겁니다.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실직했거나 앞으로 해고를 앞둔 분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평생 쌓은 사업이 부도가 날 수도 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할 최소한의 생존 조건이 위태로울 때 삶이 위축되는 걸 절감합니다. 큰 병에 걸린 사람이나 실연당한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사고를 치면 부모의 일상이 무너집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14일 새벽 성주 영천고속도로에서 발생한 블랙 아이스 사고만 해도 그렇습니다. 누가 그런 일이 일어날 거를 예상했겠습니까. 일상을 파괴하는 어쩔 수 없는 사고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주변에서 늘 일어납니다. 그런 사고가 줄어들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말은 실직당하지 않거나 교통사고 당하지 않거나 여러 가지 재난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욥의 재난을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재난과 불행의 가능성은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에게만 그런 재난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인지상정이라 이해는 가나 신앙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죄는 훨씬 근원적인 악한 세력인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가리킵니다. 욕망은 자기를 높임으로써 만족을 얻으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대부분의 불행은 다 여기에 기인합니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유욕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부동산 투기는 광풍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가 부족할 정도도 인간의 탐욕을 그대로 보이는 현상입니다. 자신에게 천문학적인 불로소득이 떨어지면 다른 어떤 누구에게는 불이익이 돌아갑니다. 저는 이런 문제에 관해서 문외한이지만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부동산 투기는 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과열 현상을 보이는 지역의 양도소득세와 보유세를 높이는 방법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동산 매매를 막을 수는 없으니 세금으로 환수하면 자리를 잡지 않을까요? 정부가 이런 간단한 방법을 모르는지, 알면서도 자신들의 이익 관계로 인해서 머뭇거리는 건지, 제가 알지 못하는 거시 경제의 어떤 비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 탐욕에 근거한 경제 정책은 인간 삶을 위축하고 파손하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거기서 이익을 얻는 사람이나 손해를 입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소득 수준이 높아진다 한들 어떻게 행복하겠습니까.

세상이 다 그렇게 돌아가는 데 기독교인만 혼자 고고한 척 재물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그런 말씀은 물론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갖고 사는 게 탐욕에서 벗어나는 삶인지에 관해서도 제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우회적으로 이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1230일 저녁 6시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기도와 인권상 시상식> 모임에서 설교합니다. 며칠 전에 설교 부탁을 받았을 때 오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부자들에게 똑같은 의미로 들려야 할 설교여야겠지요. 그 핵심은 지금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아무 차이 없이 결국에는 모두 가난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뚫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무로 돌아갑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부자라고 해서 잘난척 하지 못하고, 가난하다고 해서 주눅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게 아닐는지요. 그때는 그때이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지금 자신은 머리를 잘 굴려서라도 잘 먹고 잘사는데 몰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제가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그 마지막 순간에 제 말이 생각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앞에서 설명한 부동산 투기와 같은 물질적인 욕망으로만이 아니라 선하게 보이는 방식으로도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자부심이 큽니다.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입니다. 오늘의 지도급 인사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나름으로 전문가 집단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문 지식을 행사하면서 삶을 확인합니다. 전문 지식인들끼리 서로 다투고,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을 상대화하면서 자신들의 우월감을 나타냅니다. 여러분이 다 알고 있겠지만 신학, , 의학, 물리학, 생물학, 문학과 예술 등등의 전문 지식도 사실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세상의 신비와 비밀의 작은 흔적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전문가 집단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전문 지식으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는 못할 겁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일류대학교에 합격하면 축하할 일이기는 하지만 자랑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액 연봉을 받는 직장에 들어갔으면 축하할 일이기는 하지만 다른 교우들에게 자랑삼아 드러낼 일은 아닙니다. 그런 사회적 위치로 구원받은 사람을, 행복한 사람을 저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인간에게서는 구원이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파렴치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나 고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나 구원에서 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일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때도 불가능합니다. 제 아내를 향해서 물건에 대한 호기심이 왜 저렇게 많은지 이해할 수 없네. 과유불급이야.”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제 기준으로 아내의 생각과 행동을 재단하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저의 생각이 상당히 정리되긴 했으나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죄의 무게로만 본다면 물건에 대한 과한 호기심보다는 남을 판단하는 저의 태도가 더 무겁습니다. 성경이 죄의 본질이라 말하는 교만이 남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태도 아니겠습니까. 제 아내도 저에게 짜증을 종종 부리니까 피장파장이긴 합니다.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고 했으니 저도 죽기 전까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과연 해결될까요? 이어지는 설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는 이사야 714절을 인용하여 예수에게 붙일 둘째 이름을 제시합니다. 이를 23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의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에게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공허하게 들릴 겁니다. 예수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 외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 위대한 선지자들과 예수는 어떻게 구별될까요? 이를 더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는 무슨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유일한 그리스도이고, 우리의 생명을 완성할 자인가요?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게 깨닫고 경험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가장 친근한 표현인 나의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하나님을 선포한 많은 선지자가 있었지만, 그리고 예수와 같은 시대에 조금 앞서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세례 요한이 있었지만, 예수 같은 이는 없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저 하늘 우주 공간 어딘가에서 이 세상을 호령만 하는 군주가 아니라 아주 자상하고 친밀한 아빠처럼, 다정한 친구처럼 지금 여기에 함께하는 존재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식과 경험에 근거하여 예수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셨고, 온갖 비유를 통해서 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당시에도 예수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구원자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대라는 겁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12:38). 아주 겸손한 듯한 표현이지만 예수가 구원자라는 표적이 없다는 비난입니다. 예수는 표적 구하는 일이 악하고 음란하다고 규정하면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예수의 선포가 바로 표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이 손에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어디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살아있다.’라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가 그것입니다. 여기 5천만 원 연봉을 받던 사람이 갑자기 25백만 원을 받게 되었다고 합시다. 기분은 나쁘겠지만 이 사람이 씀씀이를 줄이면 살아가는 데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살아있다는 경험이 중요하지 연봉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이미 절감하듯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는 돈이 거의 들지 않습니다. 겨울 햇살을 만끽하는 데 돈을 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친구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을 때도 돈이 들지 않습니다. 돈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생존 조건이 열악해도 볼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지천으로 널려있습니다.

지난 주일의 대구 샘터교회 주간일지를 대구 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서 본 어떤 회원이 예배 출석 89명에 헌금이 33만 원이라는 댓글을, 물론 좋은 뜻으로 달았습니다. 제가 답글로 33만 원 헌금은 유대인들이 광야를 지날 때 먹었던 만나라서 우리 교회가 생존하는 데 충분한 금액이라고 썼습니다. 저는 실제로 그렇게 믿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구하라 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고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게 삶의 실질적인 능력입니다. 일용할 양식만으로 영적인 충만을, 즉 살아있다는 기쁨과 자유를 충만하게 경험하지 못하면 임마누엘 신앙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가기가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를 삽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과 전혀 상관없이 세상이 돌아가니까요. 이런 혼란을 한두 마디로 제가 해결해드릴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여기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 임신 소식을 듣고 혼란에 떨어졌던 요셉을 찾은 천사의 메시지를 다시 전할 뿐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예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임마누엘, 즉 구원의 시간이 곧 옵니다. 기다리십시오. 아니 이미 왔습니다. 그러니 찾아보십시오. 찾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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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2, 2019
*.182.156.135

오늘 설교 내용 중에 가족 이야기 나올 때 약간 시간이 지체되었는지

빨리진행한다고 생각했는데도, 

동영상 전체 길이가 31분30초 정도가 나왔습니다. 

아프리카 티브이 자체 메커니즘으로는 30분까지만 부분 저장이 가능하여

어쩔 수 없이 설교 영상 앞부분에서 그정도를 잘라냈습니다. 

별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니 그냥 넘어가도 그만입니다.

동영상 편집기를 다운받아 작업하는 능력을 아직 습득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밤도 별빛이 총총하군요. 꿈인지, 생시인지...

모두 복되고 즐거운 성탄을 기다리는 평온한 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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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December 22, 2019
*.86.237.246

생명에 대한 인식과 경험에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120세의 나이에도 눈이 침침하지 않고, 몸 또한 쇠하지 않았던 모세와 같은

축복이 목사님께 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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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3, 2019
*.182.156.135

80세까지만이라도 정신줄 놓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치매에 걸릴지 ... 그분이 알아야 하시겠지요.

다만 지금 이 순간이 꿈속 소풍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세상 하직하는 순간, 평생 붙들었던 예수만 생각할 수 있도록

지금 용맹정진하고 싶은 뿐입니다. 

바울이 그랬을지, 요한이 그랬을지, 어거스틴이 그랬을지,

아마 아퀴나스나 루터와 칼빈과 바르트가 그랬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위대한 신학자들과 영성가들의 발자취를 조금이라고 흉내내고 싶네요.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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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December 21, 2020
*.153.19.160

목사님 늘 감사합니다.

죄의 본질을 가리는 죄 같은 것들로부터 헷갈리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함께 살고 죄를 짓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심을 또 알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때로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내가 경계해야 할 죄와 내가 경배해야 할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삶이 드라마틱합니다.

꿈과 같기도 하고 현실 같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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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1, 2020
*.137.91.228

진인택 님, 오랜만입니다. 반가워요.

딱 일년 전 설교를 다시 보셨군요.

저도 역시 꿈과 현실을 자주 오갑니다.

그런 우여곡절을 지내면서도 그 모든 것의 실재(reality)가 

조금씩이라도 선명해지니, 그나마 다행이고, 은혜라고 하겠지요.

복된 성탄절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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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89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42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464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766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90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860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355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772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209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398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919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65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62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85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82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220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712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605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56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456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505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83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45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269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216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211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426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032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46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91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614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62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50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56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34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69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85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73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72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81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408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913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9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62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2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611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36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23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58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64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710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25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13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90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011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87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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