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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성탄절 조회 수 5591 추천 수 0 2019.12.29 17:38:36
설교보기 : https://youtu.be/PrVEyjVbnSg 
성경본문 : 이사야 63:7-9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63:7-9, 성탄 후 첫째 주일, 20191229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걱정거리 없고 즐겁게 사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조건이 갖춰진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은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이나 가족이 갑자기 큰 병에 걸리거나 경제적인 난관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거나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이상에 맞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합시다. 시간이 흐르면 그런 것들은 새롭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를 극복하려고 색다른 취미생활도 합니다. 그런 생활도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움이 사라집니다. 사람은 그 어떤 삶의 조건에서도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부에 생명의 근원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바른길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생명을 창조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사람들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세상살이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돈과 권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듯이 보입니다. 유대인들이 살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군사와 경제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제국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유대인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제국은 바벨론이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초토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고, 고급 집기는 강탈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전쟁 노예로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행복한 시절이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돌봐주지 않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은총의 하나님

그들 앞에 이사야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 신앙이 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전혀 다른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7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총을 말하겠다는 이사야의 외침은 유대 민중들에게 감동적으로 들리기보다는 뻔한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매우 피곤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쳤습니다. 언제 이런 궁핍한 생활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끝나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총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사야는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겠다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를 이사야가 본 게 아닙니다. 그는 손에 잡히는 어떤 증거를 본 게 아니라 하나님을 느끼고 본 겁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경험에 관한 가장 적절한 비유는 8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현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부르고 택하신 백성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을 지키신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자기 백성을 지키지 않는 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지만, 그 모든 과정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키시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은총을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서 확실하게 경험했습니다. 삶의 조건으로만 본다면 광야는 생존이 불확실한 장소였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광야로 이끌고 나온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고난의 행군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셨으니 다른 상황에서야 더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에 찬 사람은 세상이 제시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삽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고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에 상응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온전하게 붙들지 못했습니다. 주변의 바알숭배 민족들을 보면 자신들도 바알을 따라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바알숭배 이데올로기인 부와 권력에 기울어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외쳤지만, 민중들의 귀에는 공허하게 들렸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중에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수의 남은 자들입니다. 그들로 인해서 말씀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역사가 오늘 본문에서도 이어집니다.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에게는 들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사야 메시지가 오늘 여러분에게는 들리는지요. 이사야는 7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총을 말했고, 8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점을 제시했고, 이제 9절에서는 더 깊은 차원을 말합니다. 이게 들린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소수의 남은 자들에 속할 겁니다. 9절의 말하는 더 깊은 차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환난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총이 이 한 문장에 다 담겼습니다. 이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환란 앞에서

우리의 인생살이가 힘들어지는 이유는 재난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표현으로 바꾸면 환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해서 하나님을 떠난 이유도 이런 재난과 환난 때문입니다. 그 재난과 환난 가운데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그 재난과 환난마저 버텨낼 수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제가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임종시설에 들어간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가장 불행한 운명에 처한 사람입니다. 이미 삶을 포기했으니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찾을 수 있기도 하고, 또는 살고 싶다는 욕망에 몸부림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심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는 게 좋습니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런 운명에 떨어진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떨어진 사람은 모든 미련에서 해방됩니다. 크고 작은 자식 걱정에서 벗어납니다. 대한민국의 이 복잡하고 골치 아픈 정치 상황에서 멀어집니다. 공연한 다툼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하나는 영성이 살아있는 기독교인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게 핵심입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다는 느낌이 그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영적으로 뛰어났던 사람들은 그 마지막 순간에 거룩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순교 당하는 그 순간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7:55).

지금 제가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마지막 순간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모든 환난에 동참하신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설교를 실감하라고 극단적인 예를 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환난에 동참한다는 게 분명하다면 죽음의 순간에도 함께하신다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를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제 좀더 일반적인 상황을 놓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가장 일반적인 환난은 가난입니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가난한 삶에도 동참하신다는 말이 가능합니다. 어떤 이들은 부자로 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싶어 할 겁니다. 그게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많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능한 한 여유롭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부자이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가난한 자로서 하나님을 찾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버림받은 자들인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게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가난하면 일단 삶이 피곤해집니다. 하나님을 찾을 여유가 오히려 생기지 않습니다. 겨울철에는 춥게 지내야 하고, 큰 병에 걸려도 제때 치료받지 못합니다. 자식들 교육도 충분하게 뒷받침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합니다. 최저 임금을 받으면서 일해야 합니다. 불안하고 외롭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없도록 우리는 저항하고 연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절망적이라고 말하는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에게서 오는 구원의 빛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통증으로 밤을 새우다가 새벽녘 잠시 통증이 사라진 순간이 큰 기쁨인지 느껴본 사람만 알 겁니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말씀드리면, 우리나라 노인 연금은 월 30만원입니다. 지원 대상자가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30만 원이 어떤 사람에게는 푼돈이나 어떤 이에게는 정말 큰돈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절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절실함이 하나님 경험의 토대입니다.

저는 나이가 들면서 성경 기자들의 가르침이 가장 궁극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더 절감합니다.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라도 하더라도 역시 진리이기에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에 하나님이 동참한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옳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 증거를 찾기 시작하니까 눈에 더 들어옵니다. 찾는 자가 찾아낼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옳습니다(7:7).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돈이 많아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삶과 돈이 없어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삶을 구분해서 보십시오. 돈이 많지 않아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삶이 진짜 삶입니다. 지구에서 돈이 부족하거나 없어도 누릴 수 있는 삶은 무한하게 많습니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를 보는 것, 밥 냄새, 어린아이 웃음소리, 도서관에서 책 읽기, 유튜브로 설교 듣기 등등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찾지 않는 이유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었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교회 성장 이데올로기가 한국교회를 일방적으로 지배하기에 교회의 본질을 찾지 않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현대인들은 물질적인 욕망에 빠져서 살다가 멸망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의 심판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제공함으로써 심판하는 분이시니까요.

 

예수의 십자가

하나님이 모든 환난에 동참하신다는 이사야의 메시지는 예수에게서 실체(reality)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땅에 오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보내는 편지에서 당시 초기 기독교에 잘 알려진 그리스도론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2:6,7절만 보실까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에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인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단순히 영원무궁 자존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처럼 나약한 모습으로 살았고 죽는 존재입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죽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고함을 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겁니다. 절망과 허무의 끝자락입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목사인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세상과 삶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인생살이 역시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인 위상이 달라지고, 가족 관계가 달라지고, 재산의 변동이 생기지만 그런 것으로 우리 삶이 확인되는 게 아닙니다. 늙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영혼이 예민하면 젊어도 이런 느낌은 비슷합니다. 지금 각자가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 잘 모릅니다. 각자 인생의 꿈을 이루느라 정신없이 달리다가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놀랍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데 왜 이렇게 삶과 세상이 불확실한 것일까요? 하나님을 어디서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안 계실지 모른다는 이런 질문은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질문이 오히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과정입니다. 성경 기자들도 이런 질문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런 질문이 없으면 언젠가 더 큰 절망에 떨어질 겁니다.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세상과 인생살이에서 선지자들은 종종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전합니다. 마음이 갑갑하다가도 이 빛을 느끼면 존재가 환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이사야는 하나님을 모든 환난에 동참하는 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선포에서 어떤 빛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에서 벌어질 환난을 미리 당겨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걱정하는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해도 하나님을 얻는다면 별로 손해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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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셀

December 30, 2019
*.38.22.14

아멘! 누가 이 지혜의 보고 생명의 비밀을 풀어주는 고귀한 말씀을 번역하여 온 세계에 올려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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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0, 2019
*.182.156.135

ㅎㅎ 아셀 님에게 제 설교가 잘 전달되었나 보군요.

설교자로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제 2019년이 끝나가네요.

2020년에도 제가 설교 사역을 잘 감당해보겠습니다.

기대해주시고, 기도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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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240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193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15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381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978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40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6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98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43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38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42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21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57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80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61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58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70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98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98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75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49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14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99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20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12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4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50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97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15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07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73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95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63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22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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