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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주현절 조회 수 5842 추천 수 0 2018.01.28 20:05:52
설교듣기 : https://youtu.be/6ucCtpJEVg8 
성경본문 : 마가복음 1:21-28 

예수의 축귀 능력

1:21-28, 주현절 후 넷째 주일, 2018128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으로 들어갔을 때 벌어진 이상한 사건 중의 하나가 오늘 설교 본문인 막 1:21-28절에 나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대화가 이어집니다. 급기야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뛰쳐나오는 장면이 실감 있게 묘사되었습니다. 귀신은 그 사람에게 경련 발작을 일으켰고 괴성을 지르게 했다는 겁니다. 오래 전 호러 영화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당시 가버나움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아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기관으로서, 우리식으로 말하면 교회당입니다. 안식일마다 그들은 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와 마찬가지로 찬양과 기도와 성경읽기와 설교입니다. 설교는 주로 회당 책임자가 맡지만 유랑 랍비가 방문하는 경우에는 유랑 랍비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번에 예수님은 유랑 랍비로 대접을 받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설교를 했는지에 관해서는 본문이 별 말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기자의 관심은 설교 내용이 아니라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22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의 가르침에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귀신이 축출된 다음에도 27절에서 이런 표현이 반복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회당에 모여서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이들이 놀라워한 이유는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기관들이야말로 율법의 권위자들입니다. 그들은 오늘날 신학박사 학위를 얻어 평생 신학공부에 매진하는 신학대학교 교수들과 같습니다. 권위로만 말한다면 이들 서기관들이 으뜸입니다. 그렇지만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입담이 좋기 때문이라거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서기관들은 전통에서 들은 것을 말할 뿐이고 예수님은 거기에 묶이지 않고 자신의 영혼에서 나온 것을 말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배운 것을 약장사처럼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있고, 배운 것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영혼에서 나오는 것을 전하는 사람이 있는 거와 같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런 차이를 가리켜서 듣는 것과 보는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8:38절은 이렇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우리말에도 백문이 불여일견이 있습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식상해하던 회중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실감나게 전하려고 마가복음 기자는 귀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축귀 이야기

예수님이 회당 예배의 전통에 따라서 설교한 다음에 새로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회당에 들어온 이유는 신앙적으로 도움을 받으려고 한 것이겠지요. 요즘 의학에서 보면 그 사람은 정신병 환자입니다. 정신 이상이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나기도 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기기도 합니다. 회당의 이 사람은 삶이 파괴된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가버나움에서 미친 사람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서 점점 따돌림을 당하면서 귀신 들린 현상이 더 심해졌을 겁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24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내용이 특이합니다. 이 구절을 제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당신은 나사렛에서 온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그건 내가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회당에 온다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나도 여기 왔습니다. 당신의 설교를 들어보니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데, 그런 조짐이나 흔적을 나는 아무데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가겠으니 방해나 놓지 마십시오.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십시오.’


25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꾸짖으면서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나 장애인을 고칠 때는 손을 대거나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지만 이번에는 그냥 명령만 내리십니다. 제가 젊은 시절 참석한 부흥집회에는 정신 나간 사람이 간혹 참석했습니다. 가족들이 데리고 와서 부흥강사에게 안수기도를 받게 하는 겁니다. 어떤 부흥강사는 25절과 똑같은 말을 합니다. 병자가 뭐라고 대꾸하면 더 큰 소리로 그렇게 고함을 쳤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정신병을 고친다는 건 의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옳지 않습니다. 어쭙잖게 예수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25절을 제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닙니다. 당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악한 기운에 사로잡힌 겁니다. 당신이 아무리 의지적으로 노력해도 그 악한 기운을 통제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당신의 삶을 더 이상 파멸로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만이 당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악한 영을 쫓아내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귀신 들린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26절에 따르면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고함을 지르게 하면서 나왔다고 합니다. 귀신이 나오는 게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경련과 고함 현상을 그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정신 병원에서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걸 억제하기 위해서 정신병원에서는 수면제 처방을 자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정신이상자들은 그렇게 공격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해망상에 떨어져서 움츠려듭니다. 경련과 고함은 오히려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에게서 자주 일어납니다. 속된 표현으로 뚜껑 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경련을 일으키고 더 심해지면 졸도도 합니다. 겉으로는 교양이 넘쳐보여도 영혼은 경련과 고함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이런 걸 놓고 본다면 귀신 들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계선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서로 걸쳐 있습니다. 지성적으로는 건강하지만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큰 장애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술만 마시면 미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에 치우칩니다. 국회의원, 의사, 교수, 법관들 중에서도 귀신 들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련을 일으키고 혐오스러운 헛소리를 내지릅니다.

 

귀신 현상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더러운 귀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삶을 파괴하는 존재론적 힘이 더러운 귀신입니다. 정신 나간 사람은 자기의 삶을 파괴합니다. 자폐증도 그런 증상의 하나입니다. 요즘 많은 이들에게 나타나는 우울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병은 삶을 파괴합니다. 그걸 야기하는 힘을 귀신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의지와 별개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자폐나 우울증, 또는 그와 유사한 정신질환은 의학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는 제어됩니다. 정작 큰 정신질환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그건 약으로 치료가 안 됩니다. 치료받아야 할 질병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예컨대 정치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지역감정이나 남북관계를 이용하는 것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히는 일입니다. 묻지 마 부동산 투기도 역시 귀신의 일입니다. 자신의 욕망은 채울지는 몰라도 다른 이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로 대변되는 미국 우선주의도 귀신 현상입니다. 극우주의자들에게 나타나는 행태 역시 귀신 들림이 아니고는 해명이 불가능합니다. 요즘 저는 대한민국의 일부 언론이 보여주는 행태 역시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것으로 봅니다. 일종의 더러운 편집을 통해서 사실을 왜곡합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겁니다. 남북관계가 나빠져야만 이득을 보는 집단이 있다면 그들은 모함과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남북관계를 위태롭게 하려고 할 겁니다. 지난 정권의 국정원과 기무사에서 벌어진 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세금으로 먹고사는 국가 공무원들이 정권 수호 차원에서 반헌법적인 행위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맹목적인 헌신과 열정을 끌러내기 위해서 이슬람교를 증오하게 하고 동성애자들을 죄인 취급하게 만드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다른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만 귀신과 상관없이 정신이 말짱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 귀신 들림과 온전한 정신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그러니 귀신 현상을 주술적으로만 대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이 정신 이상인지 아닌지, 똑바로 살펴봐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귀신의 지배에서, 개인과 사회를 파괴하는 더러운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게 쉽지 않습니다. 우선 자신이, 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귀신 들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알지 않고는 대처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얼굴에 얼룩이 묻은 걸 알아야만 씻을 생각을 합니다. 얼룩을 보려면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도 이와 비슷합니다. 옳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자신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간혹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소개를 받거나 우연하게 대구성서아카데미를 알게 되어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찾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전에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뭔가 불편한 게 많았지만 그게 손에 확실하게 잡히지 않았다가 이제 알게 되어 신앙의 해방감을 맛보았다는 겁니다. 우리의 삶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있어야만 귀신 들림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거울이 없으면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지, 하면서 경련과 고함에 묻혀서 살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영혼의 거울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한 자

오늘 본문에서 더러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에게 한 말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 앞에서만 자신이 더러운 귀신에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과 거룩한 자라는 표현을 대립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생명을 파괴하는 힘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자는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주는 자 앞에 서야만 생명 파괴가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저는 이 질문을 제 삶의 영적인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대구샘터교회 목회 15년 동안 행한 설교는, 그 이전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은 한 번의 대답으로 끝나는 질문이 아닙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자리에서 내려올 때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질문입니다. 제자들도 이런 질문에 근거해서 더러운 귀신마저 예수에게 굴복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전하신 첫 메시지이자, 그의 전체 운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 통치는 생명의 다스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니 하나님 나라는 창조의 능력이고 구원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이미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겁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더러운 귀신은 제압당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우리의 일상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이야기들도 많지만 비열한 사건들도 못지않게 많습니다. 요즘 자주 일어나는 대형화재 참사를 보면 기가 막힐 뿐입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꼴 보기 싫은 사람들도 없지 않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삶의 조건이 좋아도 권태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좋은 친구들이 많아도 궁극적인 고독을 떨쳐낼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생명을 파괴하는 것들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눈 부릅뜨고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어 보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못 보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빛이 더 밝습니다. 흔한 표현으로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인의 마음으로 차 한 잔이나 햇살에 빛나는 빨래를 보고 삶의 절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압니다. 그걸 안다면 다른 사람보다 연봉이 작아도, 불편하긴 하겠지만 영혼의 상처는 받지 않습니다. 거꾸로 다른 사람보다 연봉이 서너 배 많다고 해도 그것으로 행복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거기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은 더러운 귀신들이 유혹하거나 강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데서 주어집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절감할 겁니다.


더구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렸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습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여기 온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승리를 약속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경련을 일으키고 고함을 지르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반복되고 있지만 그것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 나오라.’는 주님의 명령에 그것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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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January 3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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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안식일에, 거룩한 회당에 나와, 거룩한 말씀을 듣는, 한 사람으로 상징되는 당시 회당에 모인 전체 유대인들을 향한, 그들의 신앙의 가식과 위선의 질타를 오늘 우리가 듣게 된다면 우리의 반응은 과연 어떨까요?

작금의 교회 강단에서 이런 "꾸짖음'은 커녕,
아멘과 할렐루야로 화답되는 '은혜로운 설교를 위해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에 여념이 없겠죠

더러운 영에 뼈속까지 길들여있음을 탄식하고 아파한다면, 이젠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을 연발하기 보다는 차라리 입술을 다물고 귓볼이라도 붉히는게 그 분 눈에 불쌍히 여김을 받지나 않을런지요

자신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있음을 부끄럽게 여길줄 아는만큼 자기부인의 개연성이 열려있고, 그만큼 깨끗하고 거룩해질수 있겠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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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3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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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가식과 위선'을 외면하게 하는 행태가

오늘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값싼 은혜에 도취하게 만드는 거지요.

거기서는 안식과 평화가 불가능합니다.

안식과 평화는 커녕 온갖 포비아(공포증)에 사로잡히고 있지요.

한편으로는 존재의 용기가 없고

다른 한편으로 약자를 타자화합니다. 

한편으로는 비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늘 '남은 자'를 챙기시니

정신 바짝 차리고 한편으로 저항하며 다른 한편으로 인내하면서 살아가야지요.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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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김사관

January 3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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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같은 이야기가 판치는 오늘, 귀신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성경의 본질을 아는 게 먼저라는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

귀신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것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 같습니다. 

소견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어쩌면 귀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을 포함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 제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을 스스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가, 목사님 말씀을 통해 공감하는 게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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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3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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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평리 사관님의 소견처럼

하나님을 아는 깊이만큼 귀신의 정체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구원의 은총을 실질적으로 아는 사람은

그것을 파괴하는 세력이 저절로 눈에 들어오게 되는 거지요.

목사나 사관 개인의 힘이 약하지만

성령과 악령을 분별할 수 있는 은사를 구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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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384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698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11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756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283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601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5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57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49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2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6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00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12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6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50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45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9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60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3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4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2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30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32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90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8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18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66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22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8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80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82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5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8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5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9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60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5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7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4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3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2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6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9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7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6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6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3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2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43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5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6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8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3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5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7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42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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