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성령강림절 조회 수 7470 추천 수 0 2017.08.27 20:42:17
설교듣기 : https://youtu.be/m05M91MFqtA 
성경본문 : 로마서 12:1-8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12:1-8, 성령강림후 열둘째 주일, 2017827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신앙 열광주의를 넘어서

설교 제목을 정할 때 처음에는 영적인 예배로서의 일상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예배는 설교 본문인 롬 12:1절 끝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이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성경에는 로기코스로 나옵니다. 로기코스는 영어 rational에 해당됩니다. 합리적이라거나, 또는 이성적이라는 뜻입니다. 루터 번역은 ‘vernünftig’(페어뉜프티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 역시 이성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영이라는 뜻의 헬라어는 프뉴마입니다. 프뉴마를 으로 번역한다면 로기코스는 당연히 이성적이라는 단어로 번역해야 합니다.


영적인 예배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이성적인 예배라는 표현은 낯섭니다. 낯설 뿐만 아니라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영적이라는 말과 이성적이라는 말을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어떤 사람이나 그의 말을 평가할 때 이성적이야.’라고 하면 그건 영적이지 못하고 인간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은 반대되는 것은 아니고, 분리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곧 영적인 사람입니다. 4:22절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은 헬라어 프뉴마이고, 진리는 알레테이아입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만이 아니라 복음서 기자들도 이미 예배를 진리와 이성의 차원에서 파악했다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의 기독교는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교리도 없었고, 조직도 없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방언을 하고, 병을 낫게 하고, 예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들은 부동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왔고, 그걸 서로 분배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열광적인 행태를 많이 보였습니다. 요즘의 은사주의 운동과 비슷합니다.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경험한 부흥집회가 바로 이런 행태였습니다. 지금도 금요심야집회는 이런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감정을 자극하는 복음찬송과 흥겨운 씨씨엠을 반복해서 부릅니다. 감정에 도취되어 팔을 위로 쳐들고 흔들기도 합니다. 대중가요 콘서트 장에서 볼 수 있는 뜨거운 환호와 열기가 집회장을 달굽니다. 집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는 아무런 이성적인 판단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무조건 아멘과 할렐루야로 반응할 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소소한 것들을 잊고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데 맛을 들인 사람들은 계속 그런 집회를 찾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그런 열광적 종교 행태를 자제시키려고 했습니다. 고전 14: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오늘 본문이 가리키는 이성적인 예배도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열광적인 종교 행태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신앙과 삶의 분리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 열정이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간과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열광적인 행태를 보이는 교단은 속칭 순복음교회입니다. 그 교단은 순전히 종교적인 것에만 몰두합니다. 기복주의, 방언, 신유, 교회성장 등등이 주요 관심입니다. 기복주의가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어울리는 탓인지 순복음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순복음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의 많은 교회는 비슷한 행태를 보입니다. 그들은 경제정의와 민주화에 대해서 입을 다뭅니다. 남북 분단 문제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도 비슷합니다. 열광적인 행태가 강할수록 삶과 신앙의 분리는 더 분명해집니다. 무당들의 종교 행태를 보십시오. 악한 귀신을 쫓아내고 좋은 귀신을 불러오는 것에만 매달리지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무당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살아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걸 말하면 손님이 끊어질 겁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했습니다.

 

제물로서의 삶

본문에서 바울은 이성적인 예배를 가리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물은 유대교 제사 행위와 연결됩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종교의식입니다. 실제로는 자기를 바칠 수 없으니 대신 동물을 잡아 바칩니다. , , 비둘기 등이 제물로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표면적으로 사물입니다. 그러나 제단에 놓이면 하나님의 거룩한 것이 됩니다. 질적으로 차원이 달라지는 겁니다. 빵과 포도주가 성찬식에서 예수의 몸과 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제물이 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의미가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독교인의 실존을 가리켜서 거룩하고 살아있는제물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우리는 그런 제물이 될 수 있을까요? 2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살던 세상은 로마 제국이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모든 것이 나쁜 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크게 오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교 고위 권력층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근거한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를 신성모독으로 오해한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 당시에 로마 제국은 모두가 추종해야 할 시대정신이었습니다. 그런 체제에 적응하는 것이야말로 출세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로마 체제와 다를 게 없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이 세대를 본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삽니다. 현실에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을 바울이 모르지 않았습니다. 로마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고 탈속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 체제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 길들여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쉽지 않겠지만, 우리도 세상 안에서 살지만 그 세상을 숭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바울은 살아있는 제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하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삶에서는 대개 이 세대를 따라갑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음을 접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통령 탄핵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보편 복지정책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이 너무 거창한 주제라서 어렵다면 우리 일상을 생각해보십시오. 직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동료와 어떤 관계를 맺는 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결정해야 할 모든 것들은 다 양면성이 있는 거라서 쉽게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삽니다. 그래서 열광적인 신앙행태로 빠지든지 아니면 신앙을 냉소적으로 여긴 채 살아갑니다. 양쪽 모두에게 문제는 신앙과 삶이 분열된다는 사실입니다.

 

은사의 단일성과 다양성

바울은 본문 롬 12:3절 이하에서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삶을 은사로 보았습니다. 은사는 헬라어 카리스마의 번역입니다. 카리스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은사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단일성과 다양성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몸과 지체로 설명했습니다. 이 내용은 고전 12:12절 이하에서 좀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먼저 본문 롬 12:4절과 5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바울의 몸-지체 신학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넓게 보면 세상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확대된 교회라고 보면 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신앙 안에서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이든지 밖이든지 막론하고 실제의 삶에서 바울의 이런 가르침을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라는 것보다는 다르다는 것이, 그래서 서로를 배척하려는 생각이 앞섭니다. 이 시대가 그렇게 하라고 한편으로 강요하고 다른 한편으로 유혹합니다.


궁극적으로 바울의 말은 옳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을 머리에 그려보십시오. 우선 빙하기가 바로 눈앞에 닥쳤다면 지금 원수처럼 싸우는 사람들이 공동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외계인이 지구를 엄청난 화력으로 침공했다면 우리는 공동으로 대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인류가 멸종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 살충제 달걀 문제가 일어난 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모두가 생물학적으로도 공동의 운명에 처한 생명체입니다.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같이 살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바울의 진술을 신앙적으로는 물론이고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라는 관점에서도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입니다. 각각 손이기도 하고, 발이기도 합니다. 발이 잘났다고 해서 몸으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지체가 똑같이 몸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지혜롭게 생각하면서’(3)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삶을 은사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의 능력이나 업적에 도취해서 잘난 척하지 않고, 남에게 앞서지 못한다고 해서 주눅 들지도 않고 겸손하게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서 즐겁게 산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삶의 태도와는 크게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면 무능력하다는 핀잔을 듣습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성장해야 한다는 욕망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를 경쟁의 대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우리 대구샘터교회는 이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우리교회 교우들은 저와 똑같이 우리의 분수에 맞는 교회를 꾸려가는 것으로 만족할 겁니다. 교회가 더 커지지 않는 것으로 불안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현재의 교회 모습을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저에게 이런 정도의 카리스마를 허락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은사의 존재론적 깊이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삶의 태도가 소극적인 것으로 비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은사로서의 삶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모든 삶이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투쟁하는 데까지 확장된다는 점에서 가장 적극적인 것입니다. 대형마트를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합니다. 대표도 있고, 청소원도 있고, 맛보기 먹을거리를 현장에서 만드는 사람도 있고, 계산대 앞에서 일하는 케셔도 있습니다. 이들의 일이 모두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카리스마라고 한다면 모두 똑같이 소중합니다. 어느 누구도 무시당할 수 없습니다. 무시당하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여러 방식으로 투쟁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에서 연봉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갑과 을의 관계를 완전히 해소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들이 카리스마라는 사실을 근본에 놓고 현실에 맞는 방법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할 용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삶을 은사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소극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에서 정말 중요한 관점은 다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만 바울이 이성적인 예배라고 표현한 신앙과 삶의 일치가 확보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6절 이하에서 교회 안에서의 카리스마를 열거합니다. 예언, 봉사, 가르침, 위로, 구제 등등입니다. 그런 일들을 흔들림 없이, 그리고 행복하게 수행하라고 했습니다. 8절만 읽겠습니다.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여기에 열거된 교회의 카리스마를 세상의 카리스마로 바꿔보십시오. 교사, 시민운동가, 정치인, 의사, 법조인, 벽돌 쌓는 사람, 택시 기사, 파출부, 은행원 등등이 다 해당됩니다. 자기의 일을 카리스마로 여기는 사람은 성실함과 부지런함과 즐거움으로 그 일을 행해야 합니다. 은사의 존재론적 깊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기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삶이 가능합니다. 대통령도 성실함과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해야 하고, 청소부들도 성실함과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들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직업의 차이는 없어지고, 모두 행복하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그건 신학적이고 문학적인 이상일 뿐이지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이에 관해서 저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현실은 달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 아예 기독교 신앙을 종교 교양쯤으로 대하고 실제로는 현실의 척박한 논리에 따라서 살면 됩니다. 그게 바울이 경계한 이 세대를 본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신앙과 삶이 분리된 신자들에게 이성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천년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여러분의 일상에서 이성적인 예배가 드려지기를, 그래서 삶이 거룩한 축제로 경험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profile

[레벨:17]김사관

August 28, 2017
*.81.137.191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속이 후련해지는 건 왜 그렇까요? ^^ 이것도 제가 듣기 좋은 설교에만 집착하는 건 아니겠지요! 목사님을 통해 영성과 지성과 이성의 차이를 알게 되었는데, 오늘 말씀 중 가장 확실한 한국교회의 사례를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말씀을 통해 '마음의 변화'란 한국교회처럼 그동안 잘못 알고있던 '지성의 무지'에서 변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에서 변화란 '지적 갱신과 윤리적 결단을 통한 도덕적 자기 쇄신'이란 자체 결론을 얻었는데,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삶을 은사로 받아들이고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이성적인 예배'에 대해 배웠습니다. ^^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28, 2017
*.201.102.19

낙평리 사관님,

어제 주일은 잘 지내셨는지요.

구세군 예배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기회 닿으면 소개해주세요.

'이성적인 예배'라는 저의 표현이

내가 봐도 정곡을 찌른 듯이 보입니다. ㅎㅎ

어제 설교 초반에 짚었지만

'로기코스'라는 헬라어를

성경번역자들이 왜 '영적'이라고 번역했는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과감하게 '이성적'이라고 번역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런 표현이 한국교회 신자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면

'살아있는'이라고 하는 게 그나마 괜찮지요.

'살아있는 예배'라고 하면 실제의 삶을 의미할 수 있잖아요.

우리말 성경을 전체적으로 다시 손을 봐야 하는데,

그런 일이 우리 세대에서는 일어나지 않겠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54
948 사순절 유월절 마지막 식사 (눅 22:14~23) [2] 2022-04-10 3217
947 사순절 하나님의 새로운 일 (사 43:16~21) [4] 2022-04-03 4159
946 사순절 예수의 하나님 (눅 15:1~3, 11b~32) [5] 2022-03-27 3044
945 사순절 목마름의 실체 (사 55:1~9) [4] 2022-03-20 3185
944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2] 2022-03-13 3303
943 사순절 시험받는 예수 (눅 4:1~13) 2022-03-06 3197
942 주현절 예수 변모 순간 (눅 9:28~36) 2022-02-27 3026
941 주현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창 45:3~11, 15) [2] 2022-02-20 3351
940 주현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2~20) [6] 2022-02-13 3181
939 주현절 첫 제자들의 출가 이야기 (눅 5:1~11) [7] 2022-02-06 3051
938 주현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1~6) 2022-01-30 3050
937 주현절 하나님 말씀의 성취 (눅 4:14~21) [3] 2022-01-23 3618
936 주현절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1~5) [7] 2022-01-16 3513
935 주현절 성령 받음이란? (행 8:14~17) [2] 2022-01-09 4657
934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0~18) 2022-01-02 4872
933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 그리스도의 말씀 (골 3:12~17) [3] 2021-12-26 4599
932 대림절 평화의 왕이 오신다! (미 5:2~5a) [1] 2021-12-19 6091
931 대림절 성령과 불 (눅 3:7~18) 2021-12-12 4511
930 대림절 빈 들에서 (눅 3:1~6) [2] 2021-12-05 5490
929 대림절 늘 깨어 기도하라! (눅 21:25~36) [1] 2021-11-28 6838
928 창조절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욜 2:2~27) [1] 2021-11-21 4185
927 창조절 하나님께 가까이! (히 10:19~25) [2] 2021-11-14 6509
926 창조절 불행한 서기관 (막 12:38~44) 2021-11-07 3523
925 창조절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 12:28~34) [4] 2021-10-31 5090
924 창조절 욥의 회개 (욥 42:1~6) [4] 2021-10-24 5999
923 창조절 속죄와 구원 (히 5:1~10) [2] 2021-10-17 3621
922 창조절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막 10:17~22) [5] 2021-10-10 5305
921 창조절 욥의 재난 & 욥의 믿음 (욥 1:1, 2:1~10) [1] 2021-10-03 3969
920 창조절 생명과 지옥 (막 9:42~50) [4] 2021-09-26 5324
919 창조절 지혜 그 '너머' (약 3:13~4:3) 2021-09-19 3785
918 창조절 지혜 & 그 너머 (잠 1:20~33) [3] 2021-09-12 4362
917 창조절 놀람의 근거 (막 7:24~37) 2021-09-05 4241
916 성령강림절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아 2:8~13) [1] 2021-08-29 4087
915 성령강림절 전투하는 교회 (엡 6:10~20) [2] 2021-08-22 4642
914 성령강림절 예수와 영생 (요 6:52~58) [2] 2021-08-15 5011
913 성령강림절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6:35, 41~51) [3] 2021-08-08 4697
912 성령강림절 만물의 충만-그리스도의 충만 (엡 4:1~16) [3] 2021-08-01 3554
911 성령강림절 가난한 자의 피난처 (시 14:1~7) [2] 2021-07-25 4031
910 성령강림절 예수 십자가와 세계 평화 (엡 2:11~22) [2] 2021-07-18 3790
909 성령강림절 왕-선지자-그리스도 (막 6:14~29) [1] 2021-07-11 3805
908 성령강림절 열두 제자 파송 이야기 (막 6:1~13) [2] 2021-07-04 4482
907 성령강림절 "딸아!" (막 5:25~34) [4] 2021-06-27 4537
906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4987
905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막 4:26~34) [4] 2021-06-13 4164
904 성령강림절 왕의 출현 (삼상 8:4~11, 16~20) [1] 2021-06-07 3802
903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4955
902 성령강림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 16:5~15) [2] 2021-05-23 5349
901 부활절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시 1:1~6) [8] 2021-05-16 4758
900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4374
899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524
898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4888
897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550
896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5911
895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144
894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5825
893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395
892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294
891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342
890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5838
889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388
888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288
88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713
886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323
885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632
884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7850
883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439
88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5826
881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350
880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60
879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0761
878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0797
8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8480
876 창조절 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3] 2020-11-22 8009
875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8479
874 창조절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2] 2020-11-08 8036
873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10
87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144
8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163
870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244
869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7929
868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288
86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647
866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8001
865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564
864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156
863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717
8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4874
861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7760
860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340
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354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4935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13423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8364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5833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455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6471
85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283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4519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273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590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