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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넘어! (출 12:1-14)

창조절 조회 수 8228 추천 수 0 2017.09.11 09:16:51
설교듣기 : https://youtu.be/3Pg313SjviA 
성경본문 : 출애굽기 12:1-14 

죽음 넘어!

12:1-14, 창조절 둘째 주일, 2017910

 

1.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이중에 예수님의 운명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절기는 유월절입니다. 예수님은 성지 순례 전통에 따라서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성전을 방문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말씀도 전했습니다. 유월절 전날 밤에 유월절 만찬 의식을 제자들과 함께 행했습니다. 그 내용이 마 26:17-29절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면서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말씀하셨고, 이어서 포도주 잔을 주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은 유대교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 의해서 체포당하고 심문당한 뒤에 빌라도 총독에게 이송되어 다시 심문당하고 십자가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 십자가형이 집행되었고,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유월절에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출 12:1-14절은 유월절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백여 년 동안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 자기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는 내부의 결속입니다. 애굽의 고센 지역에서 터전을 잡은 이스라엘 민족을 설득해내는 작업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이라고 일러주신 가나안에서의 삶은 애굽에서의 삶을 포기할 정도로 매력적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의 삶은 비록 소수민족의 한계는 있었지만 안정적이었던 반면에 가나안에서의 삶은 불확실했습니다. 모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해냈습니다. 말을 잘 하는 형 아론의 도움도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하나는 외부 문제로 애굽의 왕인 바로에게서 허락을 받아내는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바로와 흥정을 벌였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당분간 애굽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모세의 요청을 바로는 거절했습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7:13). 하나님은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다음과 같이 아홉 가지입니다. 물의 오염, 개구리, , 파리, 가축 전염병, 악성 종기, 우박, 메뚜기, 흑암입니다. 바로는 재앙이 내릴 때마다 매번 모세의 요구를 허락했다가 재앙이 그치면 자기의 말을 거둬들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마지막 하나의 재앙만 남겨놓았습니다. 가축의 맏배와 가정의 장남이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떼죽음의 재앙이 애굽 지역에서 일어나기 직전에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어떤 일을 지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재앙을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겁니다. 그 내용이 오늘 설교 본문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니산월(태양력으로 3,4) 10일에 식구 수에 맞춰서 어린 양을 골라야 합니다. 식구가 많으면 두 마리, 식구가 적으면 이웃집과 함께 계산해도 됩니다. 일 년 된 수컷을 선택해야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 염소도 괜찮습니다. 4,5일 정도 양을 데리고 있다가 니산월 14일 해질 녘에 모든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잡습니다. 4,5일 데리고 있다는 건 어린 양과 사람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것인지 모릅니다. 잡는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몽고의 유목민들은 특별한 손님이 올 때나 명절에 양을 잡는데, 양이 고통을 가장 적게 받는 방법으로 잡는다고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양의 피를 대문의 양쪽 기둥과 대들보 기둥에 바릅니다. 그 피는 이스라엘 백성의 집이라는 표시입니다. 그 표시를 보고 죽음의 천사가 그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피 바름의 의식이 끝난 뒤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양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먹는 방식이 특이합니다. 불에 구워서 누룩을 넣지 않는 빵과 쓴 나물을 겸해서 먹어야 합니다. 날 것으로나 삶아서 먹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양의 머리와 다리와 내장도 다 불에 구워서 먹고, 아침까지 다 먹지 못하고 남은 것은 불에 태워서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다 있을 겁니다. 남은 것을 싸들고 다니다보면 자칫 부패한 것을 먹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냥 놓아둔 채 길을 떠나면 다른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되고 맙니다. 먹을 때 자세가 특이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하게 먹어야 합니다. 이런 의식을 행하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본문은 마지막 13,14절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유월절에 대한 요약입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로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이 유월절 이야기에는 인류가 겪은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벌어진 열 개의 재앙은 고대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한 민족이 멸절하느냐 아니면 생존하느냐가 실제로 그런 재앙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들로서는 그런 천재지변에 대처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야기하는 세력을 사탄, 마귀, 귀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그런 재앙을 일으키는 이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재앙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습니다. 노아 홍수가 대표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재앙으로 징벌한다는 생각은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시 파괴한다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런 모순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이 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멸절했다고 말한 이유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돕기 위해서 애굽 지역에 있는 모든 가축의 맏배와 가정의 장남을 모두 죽였다는 것 역시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이해해야지 실증적인 사실로 주장하면 안 됩니다.


유월절 이야기에서 더 깊은 차원은 생존을 위협하는 재앙에 대한 공포심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 하리라.’ 유월절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페사흐는 영어로 ‘pass over’, 즉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이 위협당하는 재앙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이게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뛰어난 생각입니다. 그들은 자연이 아무리 위대하고 폭력적이라고 하더라도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숭배하지도 않았습니다. 완악한 역사도 그들을 좌절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을 넘어가게 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희를 넘어가리라.’는 말씀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전혀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 넘어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낭만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실감하려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먼저 절감해야 합니다.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이 끝나거나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면 지구의 생명 현상도 끝장입니다. 지구의 생명은 지금의 생태환경에 최적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손을 쓸 수 없는 재앙은 반복됩니다. 옛날보다 오히려 더 많아진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말 그대로 자연 재해만 있었지만 지금은 인간에 의한 재앙도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살충제 달걀, 교통사고, 핵공포 등등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요행히 그런 재앙을 다 피한다고 하더라도 늙음과 죽음이라는 재앙은 아무도 피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고대 이스라엘이 유월절 의식을 행하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은 이유를 알만 합니다. 여기서 곧 떠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우리의 실존이 불안하다는 뜻입니다.


현대인들은 재앙을 추상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어느 정도로 생존의 위협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빙하기는 책을 통해서 얻어들은 정보일 뿐이지 실질적인 것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금 일어나는 모든 재앙도 설마 나에게 그런 재앙이 닥치겠냐.’ 하고 생각합니다. 돈만 많으면 얼마든지 멋진 인생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이 현실을 못 보게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린 양을 잡아 불에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을 겸해서 먹으라는 유월절 의식도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넘어간다.’는 말도 남의 말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과 대면한다는 것은 일종의 백척간두에 오르는 경험입니다. 한걸음 잘못 디디면 삼십 미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아찔한 경험입니다. 백척간두에서는 자신을 지탱해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 작동됩니다. 마틴 루터 신학의 가장 중요한 관점이 솔라 피데(sola fide)입니다. 루터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보았습니다. 오직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삶의 태도가 바로 솔라 피데의 근본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는 은총에 완전히 기대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이외에 의지할 게 너무 많지 않으신가요? 그런 의지할만한 것들을 찾는 데에 인생을 소비하는 건 아닐까요? 내 인생을 설계하는 작업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을 보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교회의 힘이 소진되고 있습니다. 그런 일에 마음이 분주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인 세상살이나 신앙생활에서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영혼의 자유와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유월절 만찬 자리에 모인 고대 이스라엘의 한 가정을 상상해보십시오. 모세를 대표자로 내세운 그들은 애굽 왕과 마지막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아홉 번의 재앙도 바로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오늘의 미국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초기라고 한다면 모세가 바로와 적당하게 거래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애굽에 머물러도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만한 때가 지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배수진을 친 겁니다. 그들은 일 년 된 양 한 마리를 잡아서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구워 먹었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앞으로 이런 만찬 자리는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죽음을 면하고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그들의 하나님 신앙은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저는 매월 성찬예식을 집전하면서 유월절 의식을 행하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정이 되곤 합니다. 빵을 손에 들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고 말하고, 포도주 잔을 들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의식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실존이고 운명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경험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더 이상 빵과 포도주를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 못하게 됩니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먹을 수 있는 마지막 먹을거리라고 생각한다면 소박한 빵과 포도주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비싼 것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곧 그 자리를 떠나야 할 것처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급히 먹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유월절 영성은 바로 성찬예식에서 현실성(reality)이 되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월절에 잡는 어린 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월절 행사에서는 어린 양의 피가 중요합니다. 죽음의 천사는 피를 보고 그 집을 그냥 지나쳐갔다고 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생명을 얻었고 애굽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이제 죽음과 삶의 문제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실제적인 재앙이나 정치적인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요 해방이라고 여겼다면 초기 기독교인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요 해방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된 어린 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도대체 지금 나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나의 삶과 운명은 나의 책임이지 어떻게 예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교리적으로 생각하기 싫으면 실제의 삶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에 숙명적으로 묶여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사심 없이 사랑을 베풀고 싶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영혼의 평화가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 평화에 다가가는 듯하다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곤 합니다. 참된 평화와 해방이 우리의 삶에서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수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어 보려고 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만 확증할 뿐이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되어도,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업적을 남겨도 인간은 그것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평화 비슷한 것을 얻을 뿐입니다. 사이비 평화입니다. 사이비 구원입니다. 사이비에 취해 있으면 참된 평화나 구원에서는 점점 거리가 멀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죽음이 극복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성취하려고 수고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미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광풍이 몰아치는 밤에 혼자 집에서 무서워하다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을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참된 자유와 해방과 만족입니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죽음 넘어의 생명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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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628
898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061
897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739
896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6045
895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354
894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5937
893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468
892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381
891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406
890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5913
889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500
888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346
88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773
886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387
885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694
884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7919
883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495
88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5993
881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492
880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10274
879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1190
878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1171
8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8868
876 창조절 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3] 2020-11-22 8086
875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8534
874 창조절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2] 2020-11-08 8108
873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94
87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221
8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229
870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341
869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7981
868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342
86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717
866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8073
865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630
864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215
863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784
8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4935
861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7842
860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431
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412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5007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13557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8434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5919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513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6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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