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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창조절 조회 수 12308 추천 수 0 2017.10.01 20:00:02
설교듣기 : https://youtu.be/Vd5Hz1OfiCk 
성경본문 : 출애굽기 17:1-7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17:1-7, 창조절 다섯째 주일, 2017101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이스라엘의 긴 역사에서 신앙의 토대가 잡힌 때는 광야 40년 시절입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까지 그들은 유목민처럼 미디안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요즘 식으로 보면 낭만적이었을 겁니다. 저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사막이나 아주 넓은 초원에서 밤하늘을 보고 싶습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을 가도 좋고, 몽고 초원 지역을 가도 좋겠지요. 누워서 보면 온통 어둠과 별빛만 보일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런 낭만적인 것만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런 걸 느낄만한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생존이 위태로웠기 때문입니다. 생존의 위기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양식과 물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가 광야생활을 다룬 출애굽기 16장과 17장에서 나옵니다.


16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16:3). 하나님은 이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아침과 저녁의 먹을거리로 제공해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자라는 식물의 열매인 만나와 철새인 메추라기는 광야에서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이 먹을거리였습니다. 굶어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그거라도 먹고 살면 된다고 알려준 것으로 보입니다.

 

맛사 또는 므리바

오늘 설교 본문인 출 17장에는 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사정이 얼마나 딱했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그들이 지금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은 척박한 광야입니다. 물을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마실 물도 부족했으니 몸을 씻는 건 언감생심입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는 양식보다 물이 더 중요합니다. 밥을 먹지 않고는 한 달 이상 버텨낼 수 있지만 물을 안 마시고는 일주일을 버텨내기 힘듭니다. 그들은 서로 다투면서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17:3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의 입장이 난처합니다. 자칫하면 폭동이 일어날 겁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 광야로 끌고 나오기 전에 이미 40년 동안 양을 키우며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어디에 샘물이나 우물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물이 제때에 나오는 것도 아니라서 백성들의 요구를 당장 들어주기 힘들었습니다. 지금의 어려운 시기를 백성들이 참으면 다시 물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백성들은 참을성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곤란한 입장을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호렙 산의 반석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지팡이를 손에 잡아야 합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이 바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행하셨던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첫 번째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7:14절 이하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나일 강을 지팡이로 치자 나일 강 물이 피로 변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 지팡이로 반석을 쳤습니다. 그러자 거기서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법합니다. 그리고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로 치켜세우거나 최소한 고맙다는 말이라도 했을 법합니다. 성경은 이에 관해서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회중들의 무반응은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 기자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핵심적인 것만을 붙들고 전하고 있습니다. 7절이 그가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모세)가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지명이 맛사 또는 므리바로 나옵니다. 지명은 어떤 사건과 연결되어서 붙여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대구 동쪽에 안심(安心)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927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의 군사에게 쫓기다가 겨우 목숨을 건지고 이곳에 피신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서 안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맛사는 신 6:16, 9:22절에서도 하나님을 시험한 곳으로 나오고, 므리바는 민 20:2-13절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다툰 곳으로 나옵니다. 맛사나 므리바가 언급되는 구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을 때 하나님과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것도 함께 언급됩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런 태도는 이해가 갑니다. 광야의 떠돌이 생활 자체도 피곤한 일인데 마실 물마저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을 의심할만합니다.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 기자는 지명과 연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당시 시대만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게 아니라 다음 시대의 신앙이 반영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여곡절 끝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정착했습니다. 광야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나안은 오랜 농경생활을 통해서 문명이 고도로 발전되어 있었던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곳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더 많은 걸 누리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풍요와 다산을 가리키는 가나안 바알을 섬기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묘사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다툼과 의심이, 즉 불신앙이 그들의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성경기자는 맛사 또는 므리바 사건을 통해서 짚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스라엘

이 사건은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반복해서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시험합니다. 왜 물을 안 주시는 거야, 왜 돈을 안 주시는 거야,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삶을 자기실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강렬한 요구가 자리합니다. 자기를 실현하려면 돈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하고, 사회적인 명예도 필요하고, 뭔가 인정받을만한 업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위협을 받으면 삶 자체가 흔들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자신을 실현하려는 욕망 자체를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삶의 추동력으로 작동됩니다. 눈이 밝아질 테니 선악과를 선택하라는 뱀의 말에 매력을 느낀 아담과 이브의 영혼에서 작동되던 호기심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분들은 옆에서 말려도 소용없으니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자신을 실현한 다음에는 더 높은 단계로 실현시키고 싶어질 것이며, 계속되는 목마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완성하려는 욕구를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것을 자기가 행하려고 하니 다툼과 원망과 불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할 때 마귀에게서 세 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말했습니다. 91:11,12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다치지 않게 지켜줄 것이라고 부추겼습니다. 예수님은 신 6:16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예수님도 자신에게 메시아로서의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해보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때 기적적으로 살아난다면 그걸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모를까, 믿음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은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하나님, 믿습니다.’ 하고 뛰어내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 문제는 우리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걸 의심합니다. 모든 걸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외의 모든 대상을 믿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살벌하니까 믿기 힘들기는 합니다. 밤에 낯선 사람을 보면 피하라고 딸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도 끊임없이 저 사람이 나를 정말 사랑하나?’라고 의심하고 시험합니다. 현대인들은 그런 삶의 태도에 길들여져서 냉소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까지 우습게 생각합니다. 죽을 때까지 시험하려고 할 겁니다. 서로 원망하고 네 탓을 입에 담고 의심하고 불신하고, 급기야 하나님까지 믿지 못하게 됩니다. 겉으로야 아파트가 몇 채나 되고, 은행 통장에 몇 억이 있어서 든든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든 걸 의심하는 사람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을 시험하는 삶의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지 아닌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게 된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마실 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단순히 물에만 한정된 게 아닙니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에 대한 염려입니다. 그런 염려는 어쩔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하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려면 생존 문제를 전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하루에 밥을 세 끼가 아니라 두 끼만 먹어도 생존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이런 생각의 전환은 일상을 거룩하게 경험하는 데서 출발하고 유지됩니다. 일상과 사물을 거룩하게 경험한다는 것은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저는 설거지 영성이라는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물의 촉감, 그릇의 질감을 느끼는 겁니다. 반찬 찌꺼기가 깨끗이 씻기는 기분도 느낍니다. 기름기가 씻긴 그릇을 손으로 문지르면 투명한 소리가 납니다. 수천만 원짜리 바이올린 소리 못지않습니다. 설거지 행위 자체가 위대한 이벤트입니다. 손이 없으면, 손이 있더라도 손가락이 없으면, 손가락이 있어도 마비가 오면 설거지를 못합니다. 앞으로 로봇이 크게 발전된다고 하더라도 손 설거지를 하는 로봇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 가지 예로 설거지를 말씀드렸지만 우리 일상과 세상 모든 것이 이처럼 거룩합니다. 그것을 안다면 불편한 일상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이 지점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겁니다. 어떤 경우가 여러분에게 해당되는지를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1) 일상이 거룩하다는 정 목사의 말은 뜬구름 잡는 것처럼 거리가 멀다. 2) 그런 깨달음은 굳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3) 불교가 이런 점에서는 한 수 위가 아니겠는가. 4) 나에게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한 용무라서 그 외의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여러분이 처한 형편이 제각각이라서 제가 모든 분들에게 딱 맞는 대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세상과 생명과 구원 문제를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아는 것만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삶과 생존 문제를 세상이 강요하고 유혹하는 것과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반복해서 원망하고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게 바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그 다른 차원이 무엇인지도 제가 알고 있는 기독교 전통에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게 된 이유는 앞에서 반복해서 본 것처럼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해결책은 목마르지 않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한 물은 마신다고 해도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집과 옷과 돈에 목말라 할 겁니다. 이사야는 55: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사야가 말하는 물은 실제 마시는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사람의 영혼이 해갈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씀만이라도 확실히 인식하고 믿을 수 있다면 다른 문제로부터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목마름과 생수에 대한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한 편 전합니다. 소위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예사롭지 않게 정오에 물 길러 온 여자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물 좀 달라. 물 달라 하는 이가 누군지 알았으면 네가 그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거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다른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갑자기 들으면 사이비 교주가 나타나셨군, 할 겁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다시는 물 길러 나오지 않도록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자는 일단 말을 잘못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을 생명 충만하게 하는 생명수가 바로 예수 당신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현실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실제로 아무런 걱정 근심 하지 않고 영혼의 깊이에서 충분히 만족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실제 인생살이에서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영적인 만족이 계속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 잘 믿어도 죽을 때까지 우리는 갈등을 겪고 싸우고 치열하게 고민하게 될 겁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우리 영혼도 계속 흔들릴 겁니다. 더군다나 악과의 선한 싸움을 위해서 감수해야 할 고난도 일시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일이 우리 인생에서 반복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를 영원한 생명수로 경험하고 그런 경험이 더 깊어지기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의 인생에는 신앙의 힘에 사로잡히는 시간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삶을 신뢰하고 평화와 해방을 지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불신앙의 늪에 점점 더 깊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을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자기연민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쪽으로 가고 있습니까


<설교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Vd5Hz1OfiCk

<설교 보기>  http://afreecatv.com/nfermata



 


profile

[레벨:17]홍새로

October 01, 2017
*.151.83.22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했고,
물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물뿐만 아니라 풍요와 다산과 명예, 업적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군요. (이것은 인간들의 생각)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에게 필요한것은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가르쳐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영혼의 해갈을 얻을수 있다고 하셨네요.
영혼의 해갈이 없으면 우리는 계속 목이 마를것 이라고, 물과 온갖 물질들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인간 뿐만아니라 온우주를 

창조부터 종말까지 사랑 하신다는 것이군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수 있나요? 일상과 사물을 

거룩하게 경험할때 가능하며,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할때 가능 한것이네요.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 하는자는 평화와 해방속에 있게 되네요.
목사님,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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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2, 2017
*.182.156.135

설교 압축 요약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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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October 03, 2017
*.139.82.200

밤늦게 밤을 까면서 이 설교를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주변이 고요해서인지 아니면 제 영혼이 갈해서인지

오늘따라 목사님의 설교 한 귀절 한 귀절이 쏙쏙 들어옵니다.


아무리 자기실현을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함을

우리는 익히 경험을 하면서도 거기에 대한 집착과 생존에 대한 불안을 

끈질기게도 놓지 못하는 걸 보면

참 죄의 뿌리가 질기고도 질기다는 걸 절감합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우리 영혼은 계속 흔들릴 것이고

불안할 것이라는 우리의 한계도 절망이 아닌 위로로 다가오는군요.

그걸 정직하게 받아들일 때 영적으로는 한 단계 도약하는 지점이 될 것 같아요.

그럼에도 구도의 길을 꾸준히 지향한다면 

생명의 힘에 사로잡히는 경험, 또 완전한 평화의 순간이 늘어갈 것이라는 것 또한 

설레임으로 제 중심 깊이 받아들여 집니다.

나의 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온전히 이끌어주시기만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는 기도가 왜 필요한지 이해되는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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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3, 2017
*.182.156.135

다행스럽게도 제 설교가 웃겨 님의 영혼에 공명을 일으켜서

설교자와 듣는 회중과 그걸 옆에서 보는 사람 모두에게

특별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의 역사'가 진행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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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성령강림절 가난한 자의 피난처 (시 14:1~7) [2] 2021-07-25 4035
910 성령강림절 예수 십자가와 세계 평화 (엡 2:11~22) [2] 2021-07-18 3793
909 성령강림절 왕-선지자-그리스도 (막 6:14~29) [1] 2021-07-11 3807
908 성령강림절 열두 제자 파송 이야기 (막 6:1~13) [2] 2021-07-04 4486
907 성령강림절 "딸아!" (막 5:25~34) [4] 2021-06-27 4539
906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4991
905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막 4:26~34) [4] 2021-06-13 4168
904 성령강림절 왕의 출현 (삼상 8:4~11, 16~20) [1] 2021-06-07 3805
903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4957
902 성령강림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 16:5~15) [2] 2021-05-23 5350
901 부활절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시 1:1~6) [8] 2021-05-16 4759
900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4377
899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526
898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4888
897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555
896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5913
895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154
894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5830
893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397
892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295
891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342
890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5841
889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393
888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288
88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714
886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326
885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634
884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7856
883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440
88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5827
881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352
880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61
879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0763
878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0800
8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8481
876 창조절 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3] 2020-11-22 8013
875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8481
874 창조절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2] 2020-11-08 8037
873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12
87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145
8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163
870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245
869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7931
868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292
86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651
866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8007
865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566
864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156
863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717
8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4876
861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7763
860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341
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354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4938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13425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8366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5834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461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6475
85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286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4519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278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5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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