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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창조절 조회 수 14721 추천 수 0 2013.11.04 01: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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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하박국 1:1-4, 2:1-4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창조절 열번째 주일, 11월3일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 설교 제목을 미리 보신 분들은 어딘가 친숙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런 표현은 신약성경에만도 세 군데에 나옵니다. 롬 1:17, 갈 3:11, 히 10:38절이 그것입니다. 복음서에도 표현이 다르지만 비슷한 개념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믿음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기에 마치 만병통치 비술처럼 언급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믿음을 이해와 대립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어떤 대상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진리로 받아들이는 신앙적 태도가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대표적으로는 안셀름의 다음과 같은 경구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 이해보다 믿음을 우선적 가치로 놓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이치를, 더구나 하나님을 뜻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능력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경구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입장을 오해하거나 극단적으로 적용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믿음’과 결부시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하고, 교회의 결정에 반대 의견을 내면 믿음이 없다고 몰아붙입니다.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정당한 질문을 해도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남편에게 습관적으로 구타당하는 여자들에게 믿음으로 무조건 참으라고 말합니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회부한 당시 교회는 자연과학 까지 종교적인 믿음으로 재단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요즘도 일어납니다. 믿음은 가장 높은 수준의 영성이지만 자칫하면 퇴행적 광신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도대체 성서가 말하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문장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에는 세 단어가 나옵니다. 의인, 믿음, 산다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간단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과 고백에 이르는 과정은 복잡합니다. 우리는 지금 돈이 있어야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려면 물론 돈이 필요합니다. 생활환경도 쾌적해야 합니다. 혼자 살면 외로우니까 가족도 필요하고, 친구도 필요합니다. 사회로부터 받는 존경도 우리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요소입니다. 이런 식의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어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비교적 건전하고 상식적인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것이 좋은 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위에서 제가 믿음으로 산다는 문장이 신약성서에 세 군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구절들은 모두 구약 하박국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말을 갑자기 내던진 게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하박국 1장과 2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과 하나님의 대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3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시편과 비슷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합 1:1-4절은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이고, 5-11절은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12-17절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이 다시 나오고 이어서 합 2장에 하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이 대답 중의 하나가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하박국의 탄원 끝에 나온 내용입니다.


하박국의 탄원은 아주 분명합니다. 몇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합 1:2절은 이렇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어지는 구절도 이와 비슷합니다. 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두 번째 탄원도 이와 비슷합니다. 13b절은 이렇습니다.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두 가지 문제를 탄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준동하는 악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도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합 1:3절에서도 분명하게 그 사실이 드러납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하박국은 악이 의를 박해하고, 악인은 무죄한 이를 괴롭히고, 불의가 판을 친다는 사실을 보고 그냥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게 문제라는 걸 사람들은 인식하지만 대개는 귀찮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또는 공연히 나섰다가나는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그걸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탄원하고 호소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이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합 1:2절에서 그는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라고 했고, 1:13절에서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는 지금 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버려진 느낌입니다.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걸었던 선지자에게 이런 상황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탄원하고 호소합니다.


하박국의 이런 탄원과 호소는 구체적으로 유대의 역사에서 나왔습니다. 하박국이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기는 여호야김 재위 기간(기원전 608-598)과 거의 일치합니다. 당시는 유대를 개혁해보려고 애를 썼던 요시야가 죽고(기원전 609년) 유대가 1차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기원전 598년) 그 시절입니다. 신흥제국 바벨론이 아시리아를 굴복시키고 인근 지역을 정복해나갔습니다. 그들의 폭력 앞에서 유대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한 나라가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를 핍박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불의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왜 그런 불의를 방관하시냐고 탄식하고 탄원을 올립니다.


합 1:5-11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바벨론 제국을 하나님 당신이 일으키셨다는 겁니다. 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 제국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폭력적인 바벨론 제국을 통해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논리를 하박국 선지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의인이 나서서 악을 심판하면 모르겠지만 더 나쁜 악인이 나타나서 덜 악한, 또는 의인을 심판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12-17절에서 검사가 피의자를 심문하듯이 다시 이렇게 따지고 듭니다.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말을 한 뒤에 그는 2:1절에서 하나님이 무슨 대답을 하실지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따져보십시오. 그것이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합 2:2절 이하에 하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 당신의 생각을 전해주실 것이고, 하박국은 그것을 판에 새겨서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성전에 걸어놓으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을 본문은 묵시라고 표현했습니다. 묵시는 선지자들의 신탁을 가리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 묵시를 통해서 대답을 찾았습니다. 묵시, 또는 신탁, 즉 하나님의 뜻은 다 하나님의 고유한 ‘때’가 있다는 게 핵심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박국 선지자는 썩어빠진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영혼이 피곤하였으며, 그런 세상을 그대로 놓아두시는 하나님이 못마땅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능력한 게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지자는 묵시를 전해 듣고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즉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거짓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영성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정의로운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소위 ‘갑을’ 관계는 더 강화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대기업 밑에 1차 하청, 2차 하청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관급 공사를 수주한 기업이 실제 공사는 하청 업체에 다 맡기고 자신들은 그 차액을 수입으로 잡습니다. 거의 불로소득에 가깝습니다. 얼마 전에 삼성 서비스 하청업체에 근무하는 분이 실제적인 경제적 어려움과 인격 모독적인 대우로 인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겁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 계속해서 불법 선거 문제가 불거지고 있습니다. 국정원을 비롯해서 기무사와 보훈처 등등, 법적으로 국내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관련 기관이 인터넷 선거 운동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앞으로 법원의 판결이 나와야 전반적인 정황을 알겠으나 그동안 매스컴에 나온 보도와 국정감사, 그리고 검찰의 기소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것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는지 개인적인 것이었는지는 불문에 붙인다 하더라도 국기를 흔드는 불법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경제 수준에서는 세계 선두 그룹과 함께 하는 대한민국이 빈부격차 문제와 복지,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점에서는 수준이 한참 떨어진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로 더 이상 국론이 분열되고 삶이 파괴되지 않는 때가 오긴 올까요? 하박국 선지자에 의하면 그런 때가 반드시 옵니다. 다만 우리가 예상하는 때와는 다르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런 말씀만으로는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탄원을 올리곤 했습니다. 저의 경우라면 한국교회의 분열과 미몽과 개교회 이기주의, 성장우선주의, 기도 만능중의 같은 현상으로 마음이 답답해서 영혼이 궁핍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박국의 묵시를 전합니다. 앞에서 한번 인용한 합 2:4절입니다. 루터 번역으로 잃겠습니다.

 

보라. 목이 곧은 자는 그 마음에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이 비교됩니다. 목이 곧은 자, 즉 교만한 자와 의인입니다. 교만한 자는 마음에 안식과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마음의 안식보다는 몸의 안식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가 불의한 방식으로 얻은 어떤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시 불의한 수단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발을 뻗고 잘 수 없습니다. 그런 주장은 원론적인 것이지 실제 세상살이에서는 돈과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총체적으로 악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히틀러 시대에 독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반복되기는 합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런 교만한 생각과 행동은 잠간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깨우침이자 외침입니다.


교만한 자와 달리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미 전달되었을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패배주의,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영적 촉수를 맞추고 살기에 비참한 현실 앞에서도 생명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이미 보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승리가 성취되기 전까지는 어둠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느냐가 문제이겠지요.


현실적으로 본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자신의 기대에 조금만 빗나가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지고, 거꾸로 조금만 좋아져도 하늘을 날 것처럼 우쭐해합니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삶을 경험합니다. 그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이런 마당에 어떻게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박국은 아예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은 일을 당했으나 믿음을 잃지 않았던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청중들에게 말씀하셨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병 든 자를 고치셨고, 죄의 용서를 과감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이분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억울하고 불의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믿음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즉 믿음의 능력이 없습니다. 믿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일치입니다. 그분의 믿음으로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믿음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하박국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예수님에게서 완성된 그 믿음에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 설교듣기는 서울샘터교회,
설교보기는 대구샘터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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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November 05, 2013
*.192.53.116

내 믿음이 아니요 그분의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
고 하셨는데
그 진리에 내 운명을 온전히 의탁할수있으려면
거기에 내 믿음이 필요한것 아닐까요?

내 믿음으로 생명을 얻지 못함을 알기에,
그래서 그분께 전적으로 내 운명을 맡겨야만 그분의 믿음에 연합되어 생명을 얻음을 알기에
결국 그분께 온전히 의탁 하는것
거기에 내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는것 아닌가요?
그러니 내 믿음이 반드시 요구되는것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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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5, 2013
*.94.91.64

부스러기 님,
안녕하세요?
옳은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의 믿음이 전제되는 거 맞습니다.
예수의 믿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필요한 거지요.
이것은 의에 대한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의로운 게 아니라
예수님만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의 의를 우리가 옷처럼 입고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거지요.
우리의 믿음은 늘 흔들립니다.
다만 예수님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믿음도 물론 흔들릴 때가 있었으나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거와는 차원이 달랐구요.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 유일한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부활이구요.
부활이 생명이지요?
우리와 똑같이 인간적 한계와 실존을 그대로 안고 살았던 예수님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어요.
그 덕분으로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지만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에 이르는 참된 믿음을 허락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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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November 05, 2013
*.9.118.42

목사님의 설교는 늘 퀘션 마크를 품게 합니다.
그러니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이야?..   하는요
늘 결론을 명쾌히 맺어 주시지 않지요.
독자들의 대다수는 목사님의 영적 통찰력의 한수 아래일진데 (아닌 분도 있나요? ㅎㅎ)
그 한수 아래 영적 수준으로 목사님이 남겨준 여백을 채워가기가 역부족입니다.
그 덕분(?)에 설교를 읽고난 그 다음날이면 머리에 각인되어 있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대체 어제 설교 제목이 뭐였지?..  제목조차 가물가물
..
바로 그 이유때문에 번번히 다시 정독하게 되는군요.
또 다시 곰씹어 보게되면 1회독때보다는 
실체가 어렴풋하지만 무엔가 잡힐듯 말듯.. 하지요.

고맙습니다.
안믿는 부모님을 모시고 나가야 해서
당장은 서울 샘터교회 출석이 어렵지만
언젠가는 뵐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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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5, 2013
*.94.91.64

ㅎㅎ 부수러기 님,
하루만 지나면 설교에서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하셨군요.
그게 좋은 설교입니다.
나중에 어떤 계기가 되면 뭔가 다시 기억으로 살아날 겁니다.
잡힐듯 말듯 하는 현상도 바람직합니다.
그 누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면할 수 있겠어요.
겨우 그 근처에서 얼씬 거리면서 기웃거리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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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거인삭개오

November 14, 2013
*.109.154.157

목사님 설교 항상 잘 읽고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좀 어렵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이제는 설교란 이런 것이구나하고 이해가 되고  커닝(?)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설교를 여러번 보았지만 성서 텍스트에 충실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정치, 사회, 문화 현실을 꾀 뚤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다는 말씀이 너무 멋집니다. ㅎㅎ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14, 2013
*.94.91.64

삭개오 님, 안녕하세요?
저의 설교가 공허한 메아리로 떨어지지 않고
삭개오 님 같은 분 때문에 영적인 공명이 일어나는군요.
성서 언어가 인간과 역사를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를 알면
설교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도 알게 되겠지요.
이런 부분을 삭개오 님이 저와 공유하게 되었네요.
고맙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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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pril 09, 2014
*.220.104.49

멜 깁슨 영화가 곧잘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꾀나 역할을 하는 걸 보고 있습니다.

저도 영화의 장면 장면에 몰입이 되어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유를 놓쳐 버렸었습니다.

오늘 또 목사님의 촌철살인,화룡점정과 같은 예를 드셔서 나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십니다.

믿음과 의심으로 교차되는 나의 신앙생활이지만 자꾸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하니 참으로 달라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월만 흘러가면 되겠지. 그저 기도만 하면되겠지가 아니였습니다.

막막하게 생각하는 나의 믿음은 깃털과 같았습니다.  기본적인 신앙의 중력이 있음에도 날라다니는 나의 믿음에 확신을 심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밝히고 따지는 걸 좋아하고 그 결과를 신봉하는 전 아직도 믿음이 약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알아내는 삶을 살아가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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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9, 2014
*.94.91.64

예, 힘을 내고 가는 길을 잘 가봅시다.

profile

[레벨:18]은나라

February 25, 2015
*.105.196.66

"비밀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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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5, 2015
*.94.91.64

예, 은나라 님이 저의 설교를 맛있는 영의 양식이라 인정해주시니

고마우면서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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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7 주현절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2020-02-23 4086
836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7133
835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5748
83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9527
833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5197
832 주현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7] 2020-01-19 4831
831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6971
830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6542
829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5604
828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9636
827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9367
826 대림절 "파루시아" (약 5:7-10) [5] 2019-12-16 6420
825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11954
824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6677
823 창조절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골 1:1-20) [6] 2019-11-24 7796
822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6910
821 창조절 두려워 말라! (학 1:15-2:9) 2019-11-10 5563
820 창조절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9] 2019-11-03 10800
819 창조절 여호와의 날에 구원 얻을 자 (욜 2:23-32) 2019-10-27 7643
818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969
817 창조절 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2] 2019-10-14 5834
816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7096
815 창조절 투쟁적인 믿음 (딤전 6:6-16) [4] 2019-09-29 8120
814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312
813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7256
812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6897
811 창조절 복 있는 삶 (눅 14:7-14) [2] 2019-09-01 7789
810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4933
809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144
808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7097
807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775
806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4903
805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7172
804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691
803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6529
80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112
801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0788
800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6615
7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7384
798 부활절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4] 2019-06-02 15918
797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8534
79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7283
795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4531
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7843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7041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5885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5997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5826
789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6247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5431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5784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6947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5737
78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344
783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0764
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8516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6704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725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6435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5503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338
776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6833
775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6765
774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8766
7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8835
772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8441
771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241
770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858
769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16462
768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7571
767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13214
766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6303
765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4] 2018-10-15 6281
764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7115
763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757
762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5834
761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5468
760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6298
759 창조절 말씀과 삶의 일치로 인한 복 (약 1:17-27) [4] 2018-09-02 8171
758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5579
757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7103
756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6424
755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6236
754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6196
753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390
752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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