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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빛 (사 2:1-5)

대림절 조회 수 15275 추천 수 0 2013.12.01 23: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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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이사야 2:1-5 

여호와의 빛

이사야 2:1-5, 대림절 첫째 주일, 2013121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선지자는 이사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가 기록한 이사야 서()의 길이가 자그마치 66장이나 됩니다. 이사야와 더불어 대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각각 52장과 48장으로, 이사야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길이만이 아니라 신약성서기자들이 이사야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사야는 분명히 다른 구약성경과 구분됩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사야 66장은 한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게 아니라 시대를 달리하는 세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겁니다. 그래서 편의상 제1 이사야, 2 이사야, 3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사야로 부르는 선지자는 사 1-39장을 쓴 제1 이사야로서 기원전 736년부터 701년 사이에 남유대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대략 30 여 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그 시대는 격동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시대에 민심이 떠난 북쪽 지파들이 여로보암 장군을 중심으로 독립해나갔습니다. 그렇게 분열된 채로 수백 년 지나면서 북 왕국과 남 왕국 모두 국력이 쇠퇴했습니다. 앗수르라는 초강국이 패권을 행사하면서 주변을 정복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북 왕국과 남 왕국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북 왕국인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패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애굽과 블레셋의 압력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반()앗수르 동맹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721년 북 왕국은 결국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은 앗수르에게 포위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남 왕국은 멸망만은 모면했습니다. 그 이후로 앗수르의 피식민 국가로 지냈습니다. 이처럼 나라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엄중했던 시절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대림절 첫 주일을 맞아 제1 독서로 읽은 본문 사 2:1절에 따르면 이사야는 유대와 예루살렘을 향해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사야는 왕족의 한 사람이거나, 또는 예루살렘 왕실과 가까운 귀족 계급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실과 국제 정세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시온과 다윗 왕조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그는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였습니다.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산이 가장 높은 산이 될 것이고, 온 세계가 여호와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그것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말일에 이루어집니다. 이 말일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그 하나님의 때는 지금 숨어 있으나 결국 드러나게 될 겁니다. 그때에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지를 확연하게 알게 되어 모두 여호와의 전에, 여호와의 산에 모여들 것입니다. 3a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이방사람들이 여호와께 모여드는 이유는 율법이 시온에서 아오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기’(3b) 때문입니다.

 

유대와 다윗 왕조의 입장에서 세계 역사가 이렇게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와 이방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우습게봅니다. 시온산을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율법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포식자가 토끼나 노루를 노리듯이 남 유대를 엿보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듣고 있는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도 이사야가 지금 한가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지금은 말일에 일어날 일을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라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들을 모색할 때입니다. 외교정책도 잘 수립하고 군사력도 증강해야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변의 패권국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만합니다.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도 않은 여호와의 승리를 말할 게재가 아닙니다.

 

누가 옳을까요? 여호와의 승리를 믿고 기다리라는 이사야의 주장이 옳을까요? 아니면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서 건져낼 구체적인 방안들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 옳을까요? 각각 나름으로 일리가 있는 주장들입니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승리를 말한다고 해서 두 손 놓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준비할 건 당연히 해야 합니다. 문제는 역사의 주인이 누구냐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의 차이입니다. 당시 정치인들은 앗수르를 비롯한 여러 패권 국가들이 역사의 주도권을 행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는데 급급했습니다. 반면에 이사야는 앗수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힘이 강하지만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국가들은 힘이 있을 때 잠시 힘을 쓰다가 다른 힘에 의해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패권 국가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역사를 홀로 주관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옳을까요?

 

당시 모두가 벌벌 떨던 앗수르를 이사야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하나님 경험이 놓여 있습니다. 6장은 이사야의 소명 장면입니다. 성전에서 그는 천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는 찬송을 들었습니다. 6:3절은 이렇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거룩한 하나님을 경험한 이사야는 자기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자기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외칩니다. 왜냐하면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완전히 부정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한 겁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이사야는 앗수르라는 패권 국가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의 승리가 드러나는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놀라운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역사의 완전한 변혁을 노래하는 겁니다. 4절 말씀입니다.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와 똑같은 메시지를 미가 선지자도 선포했습니다(4:3). 2:2-4절과 미 4:1-4절은 약간의 단어와 문구만 다르지 전체적으로 비슷합니다. 미가는 보습과 창 이야기를 한 다음에 다음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고대인들에게 전쟁과 제국들은 두려움 자체였습니다. 이사야와 미가는 평화로운 일상이 보장된 세계를 하나님께서 이루실 미래로 제시한 겁입니다. 이를 위해서 일단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문명의 극치를 달리는 21세기에도 이런 일들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칼과 창에 매달려서 살아갑니다. 모두가 강제적인 힘으로 다투고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현재 국방예산의 반만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생각해보십시오. 반이 너무 많으면 30%만 생각해보십시오. 줄잡아 10조원은 될 겁니다. 이 예산으로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몇 개나 만들 수 있을지 계산해보십시오. 연봉 3천만 일자리 30만 개 이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교육과 복지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게 현실적인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을까요?

 

반론이 가능합니다. 국방 예산이 줄어서 최신 전투기를 구입하지 못하면 군사력의 약화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주변의 중국이나 일본, 특히나 호전적인 북한을 맞설 수 없습니다. 주변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게 되고, 그런 위협은 경제적인 경쟁력도 약화시킵니다. 결국 국방비를 줄여서 강화해보려고 했던 복지 국가 실현도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지금과 같은 남북분단 체제와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이사야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현실화되기 어렵습니다.

 

이사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단순히 낭만적인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국제 정세도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정치와 군사 문제를 직접 거론하는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실 일의 비전을 전하는 겁니다. 보습과 낫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죽었다 깨도 그런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일이기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일지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그 일이 바로 우리의 궁극적인 현실(ultimate reality)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칼과 창이 없는 세계가 오고 있다는 설렘과 희망이 우리의 삶을 끌어가는 현실이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에게 현실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루실 장래의 일을 현실로 경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만 본다면 하나님의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을 무조건 적대적으로, 냉소적으로, 현실 도피적으로, 또는 영합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현대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증상들입니다. 겉으로는 아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불안과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전혀 다른 현실에 대한 경험이 그 답입니다. 앞에서 이사야가 성전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경험한 것과 같은 경험이 바로 다른 현실입니다. 그걸 오늘 본문은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서 행하자.

 

여호와의 빛은 이사야의 영혼을 지배한 현실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빛에서 그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현실과 질적으로 다른 현실에 눈을 뜨는 것이 바로 영적인 경험입니다. 마치 국악에서 창을 하는 분들이 득음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눈이 없으면 우리는 잘해야 합리적인 현실주의자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그냥 착하게 세속적인 가치로 사는 겁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성서의 세계가 남의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여호와의 빛은 실제로 무엇일까요? 빛은 하나님의 힘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가시덤불의 불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천둥과 번개, 또는 화산폭발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불과 빛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일반 사물과는 그 성격이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사물을 태우기도 하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갑자기 나타나기도 합니다. 고대인들에게 불과 빛은 질적으로 다른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 불과 빛이라는 메타포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여호와의 빛에서 행하자는 이사야의 말은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방식으로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그런 시각 앞에서는 앗수르 제국도 하나님의 손에 들린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는 힘이 있지만 하나님이 버릴 때는 그냥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오늘은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는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이를 상징하는 의미로 하나의 촛불에 불을 붙였습니다. 앞으로 대림절이 반복되면서 촛불이 늘어나다가 네 번째 주일에 네 개의 촛불을 붙이게 될 겁니다. 대림절에 촛불을 켜는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전통을 단순한 종교의식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왜 세상의 빛인지를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칼을 보습으로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드는 놀라운 일들이 여호와의 빛에서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그것보다 더 큰 세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라는 빛에서 죄와 죽음을 극복했다고 하면서도 온갖 종류의 두려움에 지배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할까, 가난하게 될까, 전세와 월세 신세를 면치 못할까 등등, 염려와 걱정이 태산과 같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원망도 많고 적대감도 많습니다. 병적인 증상입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그런 증상을 앓고 있습니다. 북한 포비아(phobia), 즉 북한 증오와 공포 현상이 만연합니다. 자신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종북 좌파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북한이 여러 면에서 불량국가이기에 그런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포와 증오와 적대감은 생명의 빛를 거스르는 죄와 죽음의 열매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타종교에 대한 공포가 큽니다. 그들을 마녀처럼 미워합니다. 심지어는 자연과학과도 싸웁니다. 진화론을 적대시하고, 동성애자들을 미워합니다. 이런 모습은 빛에 들어간 사람들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들입니다. 여전히 죄와 죽음의 공포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생명의 빛을 무시하고 부정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칼과 창을 준비해서 상대방을 제압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세상의 요구에 제압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시대도 사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앞에서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여호와의 빛으로 경험하는 게 칼과 창의 질서, 즉 죄와 죽음의 질서로부터 해방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한 빛인 부활의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믿는 사람들은 앗수르의 패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않아야 합니다. 않게 될 겁니다. 오히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게 되는 하나님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 설교듣기 파일은 서울샘터,
   설교보기 파일은 대구샘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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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쩡쩡이

December 03, 2013
*.150.95.127


대학시절 늘 실습이 많아 왁스와 알콜램프를 끼고 살았습니다
간혹 실습실의 물려받은 알콜램프에 깨알같은 글씨가 적혀있어서 뭐지?하고 가까이 들이대면 '머리카락 조심!'이라 되어있고 친구의 머리는 이미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못된 선배의 장난이죠!옷도 많이 태워먹고 작은 불꽃의 위력을 실감하며 지내온 학창 시절 이었습니다...

일생을 갈고 연마한 저의 창과 칼들 그리고 하루에도 몇번씩 오토매틱으로 디자인되는 창과 칼을 여호와의 빛앞에 가져다 놓는건 분명 무서운 일입니다. 왁스가  녹듯 스르르 녹아버릴테니까요.하지만 그 빛 앞으로 턴 할때야 녹인 왁스로 새로운 크라운을 만들었듯 비로소 '음 이 맛이야!하며 궁극의 현실을 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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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쩡쩡이

December 03, 2013
*.150.95.127

예배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사람에 따라 설교중에 사고의 shift가 많이 일어나겠구나...
설교 비평이 아니라 청중비평입니다 ㅎㅎ
설교를 쭉 따라오다 어느한곳에서 이해가 안되거나 여러 이유로 생각이 shift되었다 다시 따라 오거나 다른데로 다시 shift될 수 있다는..
글 쓰면서도 무섭습니다 쓸데 없는 말일까봐ㅎㅎ
하지만 오늘까지도 계속 생각이 되어집니다.
설교의 압축 풀기는 설교자의 바램되로 항상 잘 되기는 참 어렵겠지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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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3, 2013
*.94.91.64

쩡쩡이 님이 점심 먹기 전에 한 개의 대글을,
점심 먹고 난 뒤에 또 한 개의 대글을 올린 것 같군요.
덕분에 심심하던 설교 메뉴가 재미 있어졌습니다. 
칼과 창, 그리고 여호와의 빛!
여기서의 현실과 저기서의 현실!
그 틈바구니에서 오락가락하는 인간 현실!
칼과 창이 지배하는 세상이 견뎌내기 힘들면서도 
거기에 매달리는 게 우리의 모습인 거 같습니다. 
여호와의 빛을 경험하는 게 관건인데,
이게 손에 잡히지 않으니 악순환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뭐.
나를 비롯해서 우리 각자 자기 수준만큼 사는 수밖에요. 
성서가 말하는 여호와의 빛이라는 압축파일을 풀기가 어렵네요. 
세계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shift(전이)가 일어나야 하는데, 
참 요원한 일입니다. 
수도승들이 출가한 이유를 이젠 조금 더 확실하게 알 것 같네요. 
재가 수도승으로 살아야 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여호와의 빛을 경험한 이들과의 소통을 반복하는 것이겠지요. 
성서읽기, 설교, 예배가 다 그런 수행입니다.
스승을 따라 꾸준히 소리 공부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 득음을 깨닫듯이(설교에서 말한 거지만)
2천년 기독교 전통을 꾸준히 학습하다보면 
여호와의 빛이 궁극적 현실로 경험될 겁니다. 
그런 경험이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복되어야합니다. 
그래도 안개낀 항해처럼 그 경험이 흐릿해질 때가 많아요. 
눈이 더 밝아지는 순간이 오기를 기도해야겠지요. 
그 길을 가봅시다. 
약속을 믿고. 

사랑채에 오늘 제가 '강추' 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라레의 노래가 다 좋은데, 
특히 마지막 곡 'color'을 들어보세요. 
성찬식 때 빵의 색깔과 포도주의 색깔을 
황홀하게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영성이 
그 노래에 담긴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영어 가사래서 내용을 직접 알아듣기는 곤란했지만 
노래에서 전달된 느낌만은 그랬습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시는 쩡쩡이님께 
대림절의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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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December 04, 2013
*.192.53.116

호렙산에서 모세가 경험한 하나님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경험한 주님
오늘 인용된 성전에서 이사야가 경험한 하나님

그 하나님 경험은 구원처럼 예고치않은 전적인 간섭하심인가요? 아니면
구도정진 하는 자의 보상인가요?

열거한 세 선지자를 보면 전적인 은혜같기도 하고
목사님 설교로는 전적인 우리의 열심의 결과같고.

목사님 설교는 거의 하나님 경험 또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의 정진으로 귀결되지요
그게 쉽게 잡히지 않을거라는 답답한(ㅎㅎ)단서와 함께요

구도정진의 하루 하루 속에서 그 " 하나님 경험"이
도무지 진척되어 보이지 않는
그래서 오리무중 속에서 문득
무지개를 잡으려다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어느 소년의 이야기가 떠오를때면
죽는 날까지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못할
내 영성으론 가당치도 않을 경지에 이르려는 무모함 아닌가
괜시리 다비아에 빠져 신앙 여정의 목표를 잘못 정하고 신앙생활 하는것 아닌가 ...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지요 ㅎㅎ

그래도 여전히 다비아를 기웃거리게 되는
이 치명적인 중독증상의 비밀은 무엇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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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4, 2013
*.94.91.64

부스러기 님 덕분에 내 설교의 허점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어서 좋네요.
설교자는 청중의 영적 상태를 잘 모를 수가 있는데
이런 대글을 통해서 따라잡을 수 있거든요.
위에서 열거한 세 사람의 경우가
구도정진의 결과냐, 위로부터의 전적인 은총이냐, 하는 게 핵심이군요.
1) 호렙산의 모세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미디안 토착종교의 제사장인 이드로의 사위로 살면서
애굽의 소수민족으로 고난당하는 자기 민족의 처지와
그 상황을 그냥 방관하시는 듯한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처지와 역할 등에 대해서 매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성경 기자가 그런 상황을 말하지 않지만
독자들은 그걸 읽어내야 합니다.
제가 다른 글에도 썼지만 호렙산은 미디안 종교의 성지입니다.
장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뭔가 많은 걸 그가 배웠겠지요.
2) '거룩하다...'는 천사의 노래를 들은 이사야
선지자들은 모두 역사학자들이며 영성가들이고 문학가들입니다.
그들은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 그리고 세계 역사 등에 대해서
매일 구도정진의 태도로 하나님께 묻고 듣고, 묻고 듣고를 반복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3) 다메섹 도상의 바울
그는 가말리에 문하생으로 유대교 신학박사 쯤 됩니다.
신흥 종교인 기독교 현상 앞에서 크게 당황했겠지요.
유대교의 율법으로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서
이미 절망하고 있었던 터였구요.
그는 예수 추종자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며,
그들과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을 겁니다.
성경은 그걸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당연한 일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위의 세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성서의 인물들과
기독교 2천년 역사에 등장했던 신학자와 영성가와 교회지도자들은
모두 수행의 과정을 철저하게 거쳤습니다.
수행 없이 깨달음 없고,
깨달음 없이 영적 경험이 없고,
영적 경험 없이 믿음의 경지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주 특이한 경우도 있긴 합니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는데도, 
일자 무식자인데도 깊은 영성을 경험한 분들 말입니다. 
그분들에게도 어떤 훈련의 과정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그런 방식이 아니었을 뿐이지요. 

신앙적 수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어요. 
수행없으면 구원도 없는지를 설명하지 않겠지만, 
그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만은 알아두는 게 좋습니다. 
명목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영적인 시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시인이 되는 과정이 어떤지 아시지요? 
시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무언지 아시지요? 
시인이 못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시를 이해하는 수준은 필요하다는 것도 아시지요? 
부스러기 님이 다비아에 중독성을 느끼신다면
신앙의 수행적 차원이 무언지 느끼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ㅎㅎ

마지막으로, 
신앙적 수행은 결국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엄청난 사실을 
영혼(온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게 간단한 게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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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December 04, 2013
*.36.141.49

목사님의 댓글을 읽은 지금 ,
성경 읽기가 앞으로는 두려워질 것 같습니다

성서 행간에 녹아있는
성서 기자가 언급하지 않은 그것!
바로 그것을 제 영적 시각으로 어떻게 꿰뚫어 볼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다메섹 도상의 바울에게
호렙산의 모세에게 임하신
그분의 현현이
일방적인 간섭이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오늘 목사님의 댓글을 통해 이제사 제대로 깨닫게
되었지요

그러니 앞으로는 목사님의 영적 통찰력에
더욱 더 의존해질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것 같습니다

이번 설교는 오히려 댓글을 통해 더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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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December 06, 2013
*.164.11.151

 목사님, 은혜로운 말씀 잘 읽었습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장래에 (혹은 곧) 오신다는 말씀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다시 오실 일도, 또 그럴 필요도 없을 터인데
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다시 오신다면 이는 곧 예수님이 현재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뜻 아닌가요?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과
"내가 다시 오리라"는 이 두 명제가 서로 모순과 대립적인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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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6, 2013
*.94.91.64

 아우 님이 좋은 질문을 주셨군요.
서로 충돌하는 명제들이 성경과 기독교 교리 안에 적지 않습니다.
그 충돌 사이에 놓인 오솔길을 찾아야만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답니다.
그런 길을 찾는 게 한편으로는 골치 아프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미 있지요. ㅎㅎ
교과서적인 대답을 드리면,
이미와 아직의 변증법적 긴장관계가 그 답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이미 함께 하시지만
아직은 완전하게 함께 하는 거는 아니라는 거지요.
후자는 종말에 일어나는 거구요.
그런 상태를 실증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고
철학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죽음을 생각해보세요.
아직 우리는 죽지 않았으나
지금 우리의 삶에 이미 죽음이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지금 살아 있으니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고집을 피울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니까 삶과 죽음은 동시적 사건이에요.
죽은 순간이 되면 그걸 절감하게 되지요.
살아있을 때 그걸 절감하는 사람은 구도자, 신비주의자, 또는 도사라고 하는 거구요.
아직과 이미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해하려면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데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아우 님은 이미 다 알아들으셨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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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나무늘보

December 08, 2013
*.204.222.192

이미와 아직을 '삶과 죽음은 동시간적'이라는 설명으로 풀어내시는 지점에서 무릎을 치게 됩니다... 설교 못지않게 귀한 댓글들이네요... 질문할수 있는 설교.... 다미아의 매력중 으뜸입니다! 올 겨울 나기전에 하양에서 국밥 한그릇 소주 한병... 과 함께 마주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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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8, 2013
*.94.91.64

ㅎㅎ 하양을 떠난지가 벌써 10달 가까이 됩니다. 
하양 돼지국밥을 먹으려면 차 타고 따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도 그 맛이 그리우시면 가보지요, 뭐.
영천 시장에도 분명히 괜찮은 국밥집이 있긴 한 텐데
아직 자세하게 살펴보지 못했네요. 
장날을 택해서 한번 나가봐야겠습니다. 
영천에 좋은 막걸리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아직 시음해보지는 못했어요. 
그것도 알아봐두지요. 
세월이 하 수상하지만 
대림절의 영성을 잊지 말고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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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나무늘보

December 08, 2013
*.204.222.192

이사하신 주택도 하양 근처려니 착각했네요... 영천은 젊은날 군사훈련 받으며 무지무지 추위에 떨었던 기억만 있는데요... 목사님 덕분에 포근한 장소로 바뀔것 같네요... 막걸리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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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pril 16, 2014
*.220.104.49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이 말에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쓰고 읽기만 하여도 가슴이 뜁니다.

내가 감히 그럴 자격이 있는가?

지금도 아침에 지은 죄의 끝에 서서 있는데.

어제 지은 죄 10년 전에 지은 죄..

내 등뒤에는 많은 종류의 죄가 세월의 길이만큼 길고 짧은 것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연줄처럼 팔랑거리는 느낌입니다.

하나의 죄를 디디고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난 무죄라고 나에게 판결해버립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다 뒤집을까 봐 크게 염려 됩니다.

내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궁극적인 현실의 순간이

무척이나 가슴 뜁니다.

아마 그 죄의 무게가 큰 만큼 가슴이 더 뛰는 모양입니다.

예수님의 빛이 내가 지은 죄에 가려지면 어쩌나

걱정합니다. 이런 걱정도 나의 연민인가요.

목사님. 정말 거저 주시는 은혜에 내 모든걸 걸기만 하면

인생전체에 답답하게 걸린 체증을 내려 주시는지요?

죄와 죽음이란 말씀을 하시니까

내 죄를 깊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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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6, 2014
*.94.91.64

가슴이 뛴다니, 좋습니다.

복음은 우리 영혼을 근본에서 설레게 하지요.

죄는 단지 파렴치한 행동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반생명적인 우리의 모든 본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본성들이 죽음을 몰고 옵니다.

살아 있다 하나 죽은 거와 같지요.

예수에 의해서 전혀 다른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볼지 몰라도

기독교 영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확신하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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