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 10:1-10)

부활절 조회 수 17566 추천 수 0 2014.05.11 21:47:33
설교듣기 : https://youtu.be/L25vB0qjAVM 
성경본문 : 요한복음 10:1-10 

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 10:1-10, 부활절 넷째 주일, 2014년 5월11일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우리는 왜 교회에 다닐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왜 믿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불행해지는 일은 없으며 부도덕한 사람이 되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편하고 재미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 고독이 두려워서, 또는 죽어 천당에 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요소들입니다. 핵심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전체 운명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믿습니다. 왜 옳은지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합니다. 즉 진리논쟁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우격다짐으로 우리가 옳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조건 우기면 신앙이 아니라 광신에 떨어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진리논쟁을 벌였고, 그런 진리논쟁의 과정에서 출현한 게 신약성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3독서로 읽은 요 10:1-10절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10절까지이지만 그 내용은 18절까지 이어집니다. 전반부인 1-10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셨고, 후반부인 11-18절에서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의 문이나 선한 목자나 의미는 같습니다. 양들은 문을 통해서만 우리에 들어갈 수 있고, 선한 목자를 만나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고 생명의 인도자라는 겁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양을 도적질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넘어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양을 지키는 게 아니라 도적질하려는 삯군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누굴까요? 이 이야기의 전후 맥락을 아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설교 본문에 앞서 나오는 요 9장은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을 고친 이야기를 자세하게 전합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사건을 두고 논란이 이어집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과 그의 부모를 불러다가 달래기도 하고 협박을 가하기도 하면서 예수님의 범법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안식일 법을 수호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런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발끈해서 ‘우리도 맹인인가?’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어서 오늘 설교 본문인 ‘양의 문’과 이어서 ‘선한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요 10:19절 이하에서 또다시 논란이 벌어집니다. 예수가 귀신에 들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서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면 분명하게 대답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리스도다.’하고 직접 대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발언은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정말 황당한 일입니다. 전도관의 박태선과 통일교의 문선명을 우리가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주변에 선포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해보라고 하며, 돌을 들어 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만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대담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이비 그리스도를 도둑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본문 10절은 그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이 하는 일은 도둑질과 살해와 멸망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대상을 파괴합니다. 문제는 이게 겉으로 확연하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도둑이 표시를 내면 도둑도 아닙니다. 작은 도둑은 표시가 나지만 큰 도둑은 아주 은밀해서 웬만하면 눈치를 챌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율법은 대단히 합리적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전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베풀 수 있는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그들은 확 드러날 정도로 틀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선을 행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고친 날이 안식일이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을 매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도 장애 치유를 좋은 것으로 봅니다. 만약 예수님이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날에 장애를 고쳤으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굳이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한 겁니다. 바리새인들도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지를 깊이 생각했을 겁니다. 장애를 고친 게 좋은 일이니 안식일 문제는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예외를 허락하면 또 그런 일이 반복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일벌백계로 처리하는 게 옳은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 이런 판단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기자는 이 사태를 아주 엄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태도를 도둑놈의 그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 규정으로 예수라는 존재와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합리성이 있더라도 근본이 잘못되었다면 결국 생명을 파괴합니다. 당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맙니다.

 

세월호 여객선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 가까이 되었는데도 대한민국은 지금 총체적인 난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승객들을 선실에 남아 있게 하고 자신들만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들의 행동은 불가사의입니다. 사고 직후 적극적으로 인명 구조에 나서지 못하고 며칠을 허송함으로써 삼백 여명의 실종자들 중에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해경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질의 종합세트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세월호와 다를 게 없습니다. 입만 열면 경제발전, 경쟁력 제고, 수출, 한류 등을 외칠 뿐이지 생명 존중, 생태 윤리, 정의와 평화, 노동해방, 남북화해, 전인교육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입니다. 교회의 모든 에너지를 교회 성장에만 투입한 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한국교회도 역시 비슷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 돌로 치려한 바리새인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세련된 복장과 언어구사 능력을 지닌 도둑입니다. 도둑은 은밀하게 도둑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풍성하게 얻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양들이 구원받고 꼴을 얻으려면 이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문, 생명의 문이라는 사실은 요한복음 곳곳에 나옵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비롯해서 모든 신약성서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둑은 양을 훔치지만 예수님은 양에게 풍성한 꼴을 줍니다. 삯꾼은 위험이 처했을 때 양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다. 도둑과 삯꾼이 어떻다는 건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건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배고픈 거보다는 배부른 게 좋습니다. 아픈 거보다는 건강한 게 좋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으면 나름으로 만족감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즉 도둑질을 통해서라도 그런 조건들을 획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습니다. 이 시대가 그걸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아무도 거기서 벗어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다음은 무엇인가요? 그 모든 것의 마지막은 무엇인가요? 죽음입니다. 죽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는 게 우리의 실존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제가 인생이 뭔지를 아는 척하면서 고상한 인생론을 펼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생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설명하려는 하는 것뿐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생명에 대한 성경의 설명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생명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은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걸 단순히 공자 왈로 들으면 곤란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을, 즉 인생을 자기의 소유로 여깁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정로도, 또는 넘치거나 모자라는 정도로 진행될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걸 생명이라고, 즉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 설명이 너무 막연하다,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거는 좋은데, 그 다음에 우리의 삶에 무슨 일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라고 요구할 분들도 있겠지요. 설명한다고 해도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소유에서만 삶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존재라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에 마음이 꽉 묶여 있으면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립니다. 수능시험에만 영혼을 맡긴 입시생에게는 바람이 흔들리거나 햇살이 반사되는 참나무 잎을 보라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디에 우리의 영혼을 맡기고 있는지를, 그리고 영혼의 소리를 들을 귀가 준비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설명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풍성하게 얻는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라고 저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생명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노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노력과 업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물을 받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힘이 들어가면 갈수록 이 생명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삶, 생명, 인생에 대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이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쉬운 예로 우리가 세상에 어떻게 왔는지를 생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결합되어 배아가 되고, 그것이 자라서 태아가 되고, 때가 되어 어머니의 몸에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 우리 자신의 노력과 의도가 개입되어 있을까요? 이 위대한 생명 사건은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삶도 사실은 다 주어진 것입니다.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더 근원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이런 생명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해서 더 근원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을 근원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전의 생명은 근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죽음 이전의 생명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죽음 이전의 생명은 죽음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생명과 비밀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 이전인 지금 여기서의 삶에 종말의 궁극적인 생명이 숨어 있습니다. 마치 화려한 꽃이 씨앗 안에 숨겨 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화려한 꽃과 같은 생명이 기다려지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이 근원적인 생명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하고 인식했습니다. 이 생명은 곧 부활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방식으로 채워도 다 채워지지 않는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행하시는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워진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그 부활생명을 요한복음의 다른 말로 바꾸면 영생입니다(요 11:25,26). 그것을 하나님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풍성하게 받는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풍성하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부족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의 조건들은 늘 부족합니다. 돈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부족합니다. 친구와 가족이 우리를 실제로 풍성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런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외로워도, 병들어도 하나님의 생명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런 풍성한 생명을 알고 계신가요? 경험하셨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의 문입니다. 선한 목자이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이 엄청나게 놀랍고 새로운, 그래서 기적 중의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풍성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받았습니다.


profile

[레벨:13]진인택

December 25, 2014
*.44.68.212

생명의 탄생은 출산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 해놓은 셨습니다.

보이는 탄생이전 알지 못하는 탄생이 이미 있었습니다.

모든 생명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신비롭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모습을 나 자신을 통해서

양의 문을 주관하시는 주 예수님을 통해서 봅니다.

불안해하는 생명들에게 시작과 끝을 예수님께서 양의 문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의심하고  기적을 확인하려는 마음을 용서하셨습니다.

세상에 모든 당연한 일들이 생명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숨쉬고 해를 보고 잠을 자고 물을 마십니다.

양의 꼴을 누가 자라게 했는지 알았을 때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받았던 풍성한 은혜를 늦게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님 양의 무리에 제가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이 사실이 어제도 새로웠고 지금도 새롭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것을 오늘도 어떻게 써야할지 기뻐하고 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December 25, 2014
*.94.91.64

진인택 님의 그런 기쁨이

내년에도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565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4557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338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5970
848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5021
847 부활절 성찬 예배 공동체 (행 2:42-47) [2] 2020-05-03 4072
846 부활절 눈이 밝아진 제자들 (눅 24:13-35) [2] 2020-04-26 6450
845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8811
844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8709
843 사순절 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6] 2020-04-05 5610
842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5293
841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6725
840 사순절 생존의 위기 앞에서 (출 17:1-7) 2020-03-15 6236
839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5325
838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5589
837 주현절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2020-02-23 4064
836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7113
835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5736
83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9517
833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5188
832 주현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7] 2020-01-19 4819
831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6959
830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6521
829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5583
828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9616
827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9331
826 대림절 "파루시아" (약 5:7-10) [5] 2019-12-16 6388
825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11921
824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6652
823 창조절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골 1:1-20) [6] 2019-11-24 7788
822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6901
821 창조절 두려워 말라! (학 1:15-2:9) 2019-11-10 5552
820 창조절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9] 2019-11-03 10792
819 창조절 여호와의 날에 구원 얻을 자 (욜 2:23-32) 2019-10-27 7640
818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955
817 창조절 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2] 2019-10-14 5819
816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7093
815 창조절 투쟁적인 믿음 (딤전 6:6-16) [4] 2019-09-29 8112
814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303
813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7245
812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6891
811 창조절 복 있는 삶 (눅 14:7-14) [2] 2019-09-01 7783
810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4925
809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139
808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7089
807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755
806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4893
805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7165
804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686
803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6524
80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100
801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0775
800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6603
7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7374
798 부활절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4] 2019-06-02 15905
797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8526
79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7273
795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4524
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7831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7030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5871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5990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5814
789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6240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5426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5772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6932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5721
78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332
783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0753
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8510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6690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714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6427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5492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329
776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6809
775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6735
774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8730
7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8812
772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8414
771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233
770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850
769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16449
768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7565
767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13204
766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6293
765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4] 2018-10-15 6269
764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7105
763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742
762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5828
761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5457
760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6288
759 창조절 말씀과 삶의 일치로 인한 복 (약 1:17-27) [4] 2018-09-02 8160
758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5567
757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7094
756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6419
755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6227
754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6187
753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384
752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6907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