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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받는다는 것 (마 10:40-42)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784 추천 수 0 2014.06.29 21:52:18
설교듣기 : https://youtu.be/pa3MKXupHJk 
성경본문 : 마태복음 10:40-42) 

상을 받는다는 것

10:40-42, 성령강림후 셋째 주일, 2014629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답은 각각 다를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등등의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옳은 대답도 있고 틀린 대답도 있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한 20세기의 순교자 본회퍼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뒤따름’(Nachfolge Christi)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누구냐에 대한 고백이자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3 독서로 읽은 본문이 포함된 마 10장에서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가룟 유다까지 열두 명의 제자를 선택하고 그들에게 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을 향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든 사람과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제자의 존재이유입니다. 거꾸로 이 사명을 잃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자로서의 이런 사명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사명에서 나름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시련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시련과 박해 문제가 거론되면 제자로서의 삶이 부담스럽습니다. 10:16-1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제자들을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시련과 박해를 실제로 받았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당한 박해를 지금 우리가 실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잡혀가거나 재판을 받지 않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엄연하게 분리되어 있고, 종교의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당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 정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정략적 판단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을 범법자로 몰아갔습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 대화재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묻기까지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랑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이런 시련과 박해는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시련과 박해를 견딜 수 있도록 두 가지 사실을 짚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의식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겁니다. 하나는 그들을 괴롭히는 세속 권력의 한계를 뚫어보라는 것입니다. 세속 권력은 사람의 몸만 죽일 뿐이지 영혼은 죽이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정말 두려워할 대상은 몸과 영혼을 심판하는 분, 즉 창조주 하나님입니다(10:28). 이런 믿음이 있다면 시련과 박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두렵기는 하겠지만 굴복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순교의 용기도 이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상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상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마 10:40-42절에서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우선 4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격려가 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분명히 제자들의 기를 세워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제자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논리를 잘 보십시오. 제자, 예수님, 하나님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결국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게 사실일까요, 비약일까요? 제자들은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들을 하나님처럼 내세워야 했을까요?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해야 할 일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선포해야 하고, 왜곡된 세상의 근원적인 변혁을 추구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 사명에 의해서만 정당성이 확보됩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선포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임박한 천국에 근거해서 세상을 변혁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40절 말씀은 제자들의 사명이 중요하니 시련과 박해를 받아도 힘을 내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제자의 사명과 관련된 문제는 깨끗하게 정리된 겁니다. 그런데 41절과 42절에서 갑자기 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체 문맥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4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0절과 연관해서 본다면 41절에 나오는 상을 받을 사람은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형식적으로는 그런 뜻으로 읽히지만 실제로는 다른 뜻입니다. 마태복음 기자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태는 제자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중입니다. 극심한 시련과 박해를 받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41절과 42절이 말하는 상 받을 사람은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상이 언급됩니다. 하나는 선지자의 상이고, 다른 하나는 의인의 상입니다. 선지자는 당시 유랑 설교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탁발 수도승처럼 빈손으로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최소한의 경비를 제공받았습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활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태 공동체에도 이런 유랑 설교자들이 간혹 들려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제자들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 의인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이런 의인에 대한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기독교인들이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한국교회 신자들은 상을 정말 좋아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는 늘 그런 상을 떠올립니다. 한국교회에서 한 때 천국의 상급에 대한 논란이 크게 벌어진 적도 있습니다. 천국에 상급이 있느냐, 그 상급에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런 논란이 희극처럼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오막살이집에서 사는 사람도 있고 큰 저택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개털모자밖에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멋진 황금면류관을 쓸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부흥회 강사들만이 아니라 신학교 교수들도 이런 말을 합니다. 고려신학대학원 변 아무개 교수는 천국에 상급이 있는가?’라는 글에서 여러 성경구절에 근거해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면서 구원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상급은 행한 대로 차별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구원과 상급을 구분함으로써 천국 상급론이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나 하나님 나라와 구원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좀 부족해서 저런 논리를 펴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태양빛이 비치고 있으면 손전등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태양은 구원이고 손전등은 상급입니다. 자신이 선물로 받은 손전등이 국산이냐 독일제냐, 자동이냐 수동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옥신각신 한다는 것은 아직 태양빛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상벌 원리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은 모든 걸 돈이라는 상으로 처리합니다. 능력이 있으면 연봉을 많이 주고 없으면 적게 줍니다. 돈이 안 되는 건 안 하려고 하고, 돈이 되는 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대학교도 돈에 의해서 돌아갑니다. 돈벌이가 안 되는 학과는 폐과하고,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더 받기 위해서 거짓 서류까지 꾸밉니다. 정부는 돈으로 학교와 시민단체를 컨트롤합니다. 모두가 돈이라는 상을 받기 위해서만 애를 씁니다. 기독교인도 이런 세상 원리에 길들여져서 하나님 나라를 상급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세상 원리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아야만 성경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왜 나왔는지를 돌아보십시오. 모든 성경말씀은 전후 맥락이 있으니까 그런 것을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 제자들은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청중들이 외면해도 오로지 하나님의 영에 의존해서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이며, 온갖 시련과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의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이 선지자의 상을, 그리고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잘 들으십시오. 선지자와 의인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즉 제자로서의 삶 자체가 상입니다. 왜냐하면 제자의 사명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상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상은 없습니다. 제자가 된 사람은 제자로의 삶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고, 만족해야만 합니다. 다른 것은 더 준다고 해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에게는 그 외의 것들은 다 군더더기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군더더기에 마음을 빼앗기면 하나님의 일에 집중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처럼 제자로서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상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닐는지요.

  

예를 들어, 여기 시인이나 화가가 있다고 합시다. 그들도 시집을 내거나 그림을 그려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습니다. 그걸 시 쓰는 행위와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상이라고 여긴다면 그들은 참된 시인이나 예술가는 못 됩니다. 시 쓰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상입니다. 거기서만 그는 영적으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제자로 사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꾸로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어 천국에 가서 아무런 상도 없다는 말이냐,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상에 대한 성경구절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2:10b절은 이렇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이런 구절들을 사실적인 것으로 읽으면 성경을 오해하는 겁니다. 생명의 관을 받는다는 표현이나 상을 받는다는 표현은 메타포, 은유입니다. 어떤 근원적인 세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그 근원적인 세계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아주 놀랍고 매혹적이어서 우리를 죽도록 충성하게 만들고, 전력으로 달음질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거기에 휩쓸리게 만듭니다. 칼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입문>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휩쓸리는 것이 신학적 실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신학적 실존은 곧 제자의 실존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거기에 휩쓸리는 걸 거부할 수 없습니다. 구경꾼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자로서 구도적인 삶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삶 자체가 생명의 관이고, 받게 될 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상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의 삶 자체입니다.

 

제자로서의 삶에 나타나는 특징을 본문 42절이 실감 있게 묘사했습니다. 제자의 이름으로 하는 행위는 냉수 한 그릇이라도 상을 잃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멋있는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냉수 한 그릇의 영성입니다. 제자의 정체성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냉수 한 그릇도 하나님의 일로 여깁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제자로 사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비록 그것이 냉수 한 그릇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상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제자의 삶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소명으로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제자로서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제가 대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삶에서 각자가 찾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제자로서의 삶 자체를 하나님의 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만 집중합니다. 이게 억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제자의 삶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이를 위해서 더 공부하고, 거기에 동의하고, 거기서 기쁨을 느낄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금 제자의 삶에 실제로 집중하고 있을까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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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또다른세계

June 30, 2014
*.98.145.105

최근에 밝혀진 사회과학적인 분석에서도

물질적인 부가 인간을 결코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실증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네요.

그저 쌓아져 올라가는 물질만큼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니

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제 주변의 거의 모든 크리스챤들이

그들의 행위만큼 공정하게 하늘나라 상급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면서요...ㅡ.ㅡ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렇게 정리를 해줍니다. 

상을 받으려고 하는 목적은 행복과 기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더 큰 상을 받는다'는 것은 '더 큰 기쁨을 받는다' 라고 치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하나님과의 온전한 깊은 관계속으로 들어가고, 부족하나마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참여할 때 우리는 더 큰 상, 곧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이거... 제대로 인도하고 있는 건가요??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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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30, 2014
*.94.91.64

ㅎㅎ 하늘나라 상급과 하나님의 공의를 연결시키는 상상력이라,

정말 놀랍군요.

또다른세계님의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재미있다기보다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즉 예수 제자로서의 삶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게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거로 경험되지 않으니

자꾸 다른 것에 한눈을 파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쨌든지

우리가 그 길을 잘 가고 있는지

깨어 있는 영성으로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제대로 인도하고 있는' 거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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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July 01, 2014
*.194.68.54

제자의 삶 자체가 상이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 세계가 점점 선명 해 질수록 달음박질 칠 수 밖에 없겠네요.

저도 그 세계에 완전히 몸을 맡기게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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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01, 2014
*.94.91.64

문전옥답 님의 가슴에 닿은 그 사실이

더 깊어지고 넓어져서 온 영혼을 가득 채우는 순간이 오기를

저도 옆에서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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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햇빛처럼

July 01, 2014
*.37.133.135

이미 하나님의 상을 받으신 목사님은 이제 저의 형광등 같은 감사한 마음을 (상으로) 또 받고 계시네요?  '상급'을 한번 적용~~

상과 구원은 결국 동의어!

5:41(지가 젤 좋아하는 구절임), 능욕받음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 받는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났던 제자들의 그 능욕받음도 바로 기쁨으로 표현되는 상이며, 그 능욕받음이 바로 구원받음의 증거이죠? 그리스도인됨 자체, 존재와 존재목적 역시 동일한 표현일 수 있겠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1:12),

이것보다 더 큰 상이 없겠죠? 냉수 한 그릇의 영성을 지닌 자는 이미 상을 받은 제자이며, 그는 상주시는 이를 늘 의식하며 다른 목마른 이들에게 냉수를 건네주며 살아간다는 것이죠?

목사님의 '냉수 한 그릇의 영성', 멋진 표현으로 인해 제 다듬어지지 않았던 여러 생각들이 고리를 만들기 시작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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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햇빛처럼

July 01, 2014
*.37.133.135

하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신앙이면, 하나님 한분이 너무 커서 내게 다 담을 수도 없는데 무슨 딴 것(상)이 필요하며 거기에 마음이 가겠는가... 신랑을 맞는 신부가 신랑 하나면 가슴이 벅차 그 기쁨을 감당할 수 없는데 무슨 신랑이 가져온 봉다리(상)에 마음을 주겠는가...이미 너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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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01, 2014
*.94.91.64

햇빛처럼 님이 어디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신앙의 어떤 근원을 힐끗이나마 엿보신 분 같네요.

그 힐끗 보는 게 중요하고,

더 이상은 볼 수도 없지요.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개념이 있어요.

혹시 모르시면 나중에 인터넷 검색해보세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고 싶어서 콕콕 두드드리는 게 '줄'이고,

어미닭이 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쪼아주는 게 '탁'이에요.

그게 같이 일어나면 병아리가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결정적인 역할은 병아리 자신이 해야하고,

어미닭은 조금 도와주기만 합니다.

동양의 선승들이 하는 이야긴데, 그럴 듯합니다.

냉수 한 그릇의 영성이라는 한 마디가

햇빛처럼 님에게 '탁'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다비아에 글 쓰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니 두려워하지 않아야 신앙공부를 할 수 있답니다.

참된 배움은 그냥 들어서 '그런가' 하는데 머물지 말고

자기 말로 자꾸 표현할 때 깊어지는 거에요.

잘못 말해서 챙피 당할까 걱정하는 분들이

다비안들 중에서 좀 있어서 노파심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용기 내서 길을 가봅시다.

가다가 잘못 간 게 확인되면

되돌아와서 다시 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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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우쿵

July 01, 2014
*.35.47.50

 

제게 신학교수가 된 두 사람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기동창이

있는데, 위 변모 교수가 그 중 한 명입니다.

마침 정목사님의 설교에 그의 이름이 등장해서  그가 쓴 글을 찾아서 읽어 보았습니다.

아래에 첨부하니 다비안께서도 참고로 한 번 읽어보시죠.

아울러 이 곳에 있는 정목사님의 신학단상 #188 '천국 상급론'

같이 읽어보시고 두 분의 관점이 어떻게, 얼마나 다르며, 그러한 주장의 신학적 배경은

무엇일까도 한 번 정리해 보시면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천국에 상급이 있는가?

 

  요즈음 천국에 상급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신실한 성도들조차도 과연 천국에 상급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의문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성도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과연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는 것이며 또 상급에 차이가 있는 것일까?

 

상급의 차이?

  천국의 상급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만일 그런 차별이 존재한다면 그런 곳을 과연 천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천국에는 차별도 없고 시기심도 없고 위화감도 없는 곳, 완전히 평등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천국에 가서도 그런 차별이 존재한다면 천국은 천국답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상’이란 말은 모든 성도들이 공평하게 받는 ‘구원 자체’ 또는 ‘천국 자체’를 의미하며, 성도 각자가 다르게 받는 ‘차등 상급’은 아니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금 면류관’을 받고, 다른 사람은 ‘개털 모자’를 받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얼핏 듣기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 세상에서 차별받고 서러움 받으며 한평생을 살았는데 천국에 가서 또 다시 차별을 받는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금 면류관’과 ‘개털 모자’ 이야기도 우습고, ‘맨션’과 ‘초가집’ 이야기도 우습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그렇게 감정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다. 성경을 펴서 차근차근히 살펴보고 성경을 따라 생각해야 한다. 과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늘에 상이 많다

  신약 성경에 보면 ‘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 많다. 예수님 때문에 욕을 얻어먹고 핍박을 당하는 천국백성을 향해 예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 너희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신다(마 5:12). 여기서 ‘상’(misthos, 미스또스)은 원래 노동자에게 노동의 대가로 지급하는 ‘임금, 삯’(pay, wages)이란 뜻인데, 또한 어떤 일에 대한 대가로 갚아주는 ‘보상’(reward, recompense)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이 구체화될 때에는 보상(報償)으로 갚아주는 ‘상’(賞, a reward)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상’을 모든 성도들이 동등하게 받는 ‘구원’이나 ‘영생’의 의미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크다’(polus, 폴뤼스)는 말은 원래 ‘많다’는 뜻이다. 상이 ‘많다’는 것은 ‘적다’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즉, 상을 많이 받는 사람도 있고 적게 받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의 주장처럼 ‘천국 자체’를 ‘상’(보상)이라고 했다면 ‘많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약속된 ‘많은 상’은 예수님 때문에 욕을 얻어먹고 핍박을 당할 때에 주어지는 보상이다. 이것을 ‘천국 자체’로 본다면 우리의 ‘행위’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행위구원이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마 10:41-42) 여기에 보면 각자 자기가 행한 대로 받는 ‘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냉수 한 그릇으로 얻는 ‘상’은 ‘구원’이나 ‘영생’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자기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상’은 각자의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보상으로서의 ‘상’이란 뜻이다. ‘구원’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상급’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

  그 외에도 성경에는 ‘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 아주 많다. 그 중에는 물론 천국에 들어가는 것, 영생 얻는 것 자체를 ‘상’ 또는 ‘보응’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계 11:18, 롬 2:6-7). 이 경우의 ‘상’ 또는 ‘보응’은 구원이나 영생과 동일시할 수 있다. ‘영생’ 또는 ‘구원’은 모든 성도들이 받는 ‘기본적인 상’이며 ‘제일 큰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 외에 구원받은 자가 각자 행함에 따라 받게 될 ‘상’ 또는 ‘보상’에 대해서도 많이 말하고 있다(마 6:1, 눅 6:35, 고전 3:8, 14-15, 9:17,18, 고후 5:10, 빌 3:14, 히 10:35, 11:26, 계 22:12; 또한 마 16:27, 막 10:40, 롬 14:10-12 등). 이 ‘상’ 또는 ‘보상’은 사람마다 다르며, 각자의 행함을 따라 하나님이 주신다.

  이렇게 상급에 차이가 나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며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한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다 똑같으며 상급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을 따른 것이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마치 공(功)을 많이 세운 신하에게 임금이 상을 내리려 할 때, 신하들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된다는 이유로 상을 반대하는 것과 같다. 그런 신하는 임금의 호의와 기쁜 뜻을 무시하는 대죄를 짓게 된다.

 

영광에 있어서의 차이

  그러나 우리가 선한 일을 했으니 마치 마땅히 상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것은 가톨릭의 공로사상이다. 상은 ‘권리’(權利)가 아니라 주는 자의 ‘호의’(好意)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다 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여야 한다(눅 17:10). 마치 상을 받는 신하가 “성은이 망극합니다. 신은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상’은 어디까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서 받게 될 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성경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모두 다 천국에서 영생과 구원을 누리고 또 천국의 기쁨과 주님과의 복된 교제를 누릴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다 받는 공통의 상이다. 그러나 그 외에 각자 행한 대로 받는 상(보상)이 또 있다.

  이 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며 또 굳이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이에 대해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그의 「개혁교의학」 제4권 제일 마지막에서 각자 ‘영광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그러나 빛남과 영광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par. 580)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아 다 천국에 가지만, 각자 행한 일을 따라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과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족하며 이에서 지나치는 것은 인간의 사변이며 교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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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01, 2014
*.94.91.64

고신대학교 변 아무개 교수 님이

우쿵 님의 친구가 되는군요.

재미있네요.

구원은 동일하나 영광에서는 차이가 난다는 말이

그분이 인용한 바빙크의 책에 있나보네요.

그러나 영광이 바로 하나님의 현현이고,

하나님이 구원이라는 엄연한 사태 앞에서

구원과 영광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동의하기 어렵군요.

목회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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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anuary 07, 2015
*.206.242.56

제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마음으로 확신하겠습니다.

영광의 상을 받은줄도 모르고 상 받으려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둔한 생각으로 남들에게 내가  신자라고 자부심가지고 자랑 많이 했었습니다.

산속에서 홀로 사는 사람이 인터뷰하는 걸 보았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혼자서 일어나는 데도 밖을 보면 설레인다고.

눈만 뜨면 차와 돈과 사람을 생각하고 그 숲을 헤처 나가는 내가 만약에

매일 마다 설레인다고 누군가에게 말하면...  뭔가 하나 빠져서 약간 모자란다고 소리 들을것입니다.

그건 설레다고 하는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일어나서 기도하면 설레입니다.

그리고 너무 작은 나의 믿음의 촛불이지만

꺼지지않음에 다시 설레입니다.

제자의 역할을 하려고 다짐합니다. 어제는 실패 했지만 오늘을 또 주셨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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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8, 2015
*.94.91.64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상을 충분히 받았으니

제자로서의 삶을 성실하게,

그러나 고유하게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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