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부활절 조회 수 6913 추천 수 0 2015.04.05 23:48:30
설교듣기 : https://youtu.be/CzAakE6F2Ic 
성경본문 : 요한복음 20:1-18 

내가 주를 보았다!”

20:1-18, 부활 주일, 201545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저는 오늘 여행사 가이드처럼 여러분들을 2천 년 전의 한 공동묘지로 안내하겠습니다. 거기서 벌어진 사건은 너무 신기해서 어떤 사람은 쉽게 믿지 못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이를 통해서 영혼의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공동묘지로 안내하기 전에 미리 알아두어야 정보를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이탈리아 콜로세움을 직접 가기 전에 거기에 얽힌 정보를 알아두는 게 여행을 알차게 하는데 필요한 준비인 것과 같습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온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제자들이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그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뤄보려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들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몇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수고도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는 자기 선생을 배신했고,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기에 바빴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이 주모자로 되어 있는 집단에 속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신세를 망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절망감, 자책감, 무력감이 제자들의 영혼을 가득 채웠습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을 겁니다. 만사가 끝났으니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여론이 어떻게 될지 좀 기다려보겠다는 제자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 와중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의 가족묘지에 안장했습니다. 그 날은 금요일입니다. 그리고 다음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그렇게 무덤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시체 도난설

오늘 설교 본문은 안식일 다음 날부터의 이야기입니다. 요즘의 요일 계산으로 하면 일요일입니다. 20:1절에 따르면 어둠이 걷히기 전 새벽녘에 막달라 출신의 여자 마리아는 예수가 묻힌 가족 묘지에 왔다고 합니다. 당시 가족 묘지는 동굴로 되어 있었습니다. 동굴 입구는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 무덤에 왜 왔는지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설명이 없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그녀가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요셉의 무덤에 안장할 때는 안식일 법 문제로 인해 적절한 장례의식을 거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자들이 합법적으로 그런 일을 처리하려고 무덤에 간 겁니다. 공관복음서는 여러 명의 여자들이 함께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갔다고 했으며, 마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라는 여자를 언급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여러 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가복음을 제외한 모든 복음서에 등장합니다. 이로 미뤄보면 무덤에 처음으로 찾아간 이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중심인물이었다는 게 확실해보입니다.

 

요한복음 이야기로 다시 돌아옵시다.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보니 묘지 동굴 입구를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이게 마리아에게는 예상외의 상황입니다. 장례를 치루는 시간이 아니라면 동굴 입구는 늘 닫혀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치운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소위 예수 시체 도난설은 마태복음이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27:62-66절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의 시체가 아리마대 요셉의 가족 묘지에 안장된 다음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와서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다른 데로 옮기고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 세상이 더 혼란스러워질지 모르니, 무덤을 사흘 동안 단단히 지켜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빌라도는 이런 일에 더 관계되는 게 잃어서 당신들에게도 경비병이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말로 그 요구를 피합니다. 이어서 마 28:11-15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대제사장들은 경비병들을 매수해서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난처한 상황을 혼자 판단하거나 해결할 수 없어서 급히 베드로에게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다른 제자가 한 사람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들에게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황당했겠지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막아내지도 못한 마당에 시체마저 분실한다면 정말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달리기 경주를 하듯이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요한이 먼저 도착해서 동굴 안의 이상한 모습을 보긴 했지만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곧 도착한 베드로는 동굴 묘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시체를 놓아두었던 석판 위에 시체의 머리를 쌌던 수건과 몸을 쌌던 세마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는 뒤따라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무덤이 빈 것을 확인하고, 예수의 부활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제자는 일단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리아의 예수 경험

무덤 앞에 혼자 남은 마리아는 답답한 마음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바르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사라진 겁니다. 베드로를 통해서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울면서 무덤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흰 옷 입는 두 천사가 시체를 올려놓았던 석상의 위쪽과 아래쪽에 각각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놀랄 법도 한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를 찾지 못해서 당황스러웠던 탓인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왜 우는가?’ 하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했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다 옮겼는지 알 수 없어서 갑갑하다고 말입니다(13). 바로 그 순간에 마리아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봤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인 줄 몰라봤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천사들과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지금 이 이야기는 공동묘지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굉장히 섬뜩한 이야기입니다. 보통 때라면 마리아는 무서워서 도망쳤을 겁니다. 공관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지금 막달라 마리아도 역시 속으로는 무서워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누군지에 대해서 요한복음 기자는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이 여자를 일곱 귀신 들렸던 마리아라고 했습니다(16:9, 8:2). 귀신은 여러 모양과 행태로 삶을 파괴하는 악한 힘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해서,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그 악한 힘으로부터 벗어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잃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극에 달한 상실감은 사람으로 하여금 보통 때 겪게 되는 두려움을 넘어서게 합니다. 그럴 때 어떤 근원적인 사태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불쌍한 막달라 마리아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말하자면 공동묘지 관리인으로 착각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시체를 옮겼으면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주세요. 그러면 내가 그분의 장례를 잘 치르려고 합니다. 이게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이 어떠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마리아의 눈이 뜨여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랍오니!’ 하고 대꾸했습니다. 그 단어는 히브리말로 선생님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들려고 했습니다. 손이었을까요? 옷자락이었을까요? 뭔가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습니다. 오죽 반가웠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해서 죽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정도였을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17).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제자들에게로 갔습니다. 앞에서 동굴 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갈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달려갔겠지요. 그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주님을 보았다.’는 마리아의 말을 제자들은 그럼 그렇지.’ 하고 곧이들었을까요? ‘그건 말도 안 돼.’ 하고 코웃음을 쳤을까요? 제자들에 따라서 반응이 달랐을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빈무덤에 들어갔을 때 이미 그 사실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믿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도마 같은 제자는 자기가 직접 확인할 수 없는 한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다른 이의 말을 듣고서는 믿지 못할 정도로 이상한 사건이니까 다른 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현대인들도 대체로는 믿지 못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말로만 그런가 보다 할 뿐이지 실제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생각이 짧다거나 신앙이 깊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활 사건 자체가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를 보았습니까? 이런 질문이 불편하게 들릴 겁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못 보았다고 대답하기는 부끄럽고, 그렇다고 해서 자신 있게 보았다.’고 대답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설교자인 저에게 당신은 주를 보았소?’ 하고 반문하고 싶은 분은 안 계신가요? 제가 대답을 하긴 하겠지만, 그 전에 예수부활 사건에 대해서 먼저 몇 가지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도 마리아를 비롯한 제자들,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초기 기독교인들과 똑같은 차원에서의 부활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승천 이후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하는 마리아의 이 진술은 예수의 승천 이전에나 가능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경험을 똑같이 공유한 이들의 목록이 오늘 제2독서로 읽은 고전 15장에 나옵니다. 게바, 열두 제자, 오백 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바울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부활의 처음이자 마지막 목격자들이요, 증인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을 뿐입니다. 그 증언을 통해서 예수의 부활을 간접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나이가 좀더 들면 목회 현장에서 은퇴할 것이고, 좀더 세월이 흐르면 죽을 겁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죽을 분들도 좀 계시고, 먼저 가실 분들도 있겠지만, 저보다 젊은 대다수는 나중에 죽겠지요.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 우리 교회에 들어온 후대 교인들은 정용섭 목사를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남아 있는 저에 관한 이야기나, 또는 지금 아주 어린 친구들로서 50년 후에도 교회에 남아 신앙생활을 할 이들의 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의 주님에 대한 마리아의 경험을 다시 읽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서 부활의 주님을 간접 경험하려는 것입니다.

 

부활의 리얼리티

복음서는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말만 하지 부활 현상 자체에 대해서는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막달라 마리아가 경험한 부활의 주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봤다는 걸 전제하면 살아있을 때의 그 모습인 것처럼 보입니다. 24:13 이하에 따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서 동행했는데도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른 부활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님은 문을 닫아 두었는데도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빛과 소리로 부활의 주님을 경험했습니다. 신약성경의 부활에 대한 설명에는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전승의 과정에서 신화적인 성격도 끼어들었습니다. 천사가 등장하는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이야기를 근거로 부활 현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부활 경험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거 아니냐, 헛 거를 본 거 아니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런 주장들이 초기 기독교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그리워한 제자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환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환영으로 보듯이 말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제자들이 환영(ghost)과 실체(reality)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거나 교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 부활 경험을 각본에 따라서 세련되고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의 심장이 다시 뛰고, 숨을 쉬고, 눈을 껌뻑이다가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확인한 것처럼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자신들의 경험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 앞에서 무조건 순종했을 뿐입니다.

 

합리적인 세상의 논리와 실증에 근거하지 않으면, 즉 자기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지 않으면 예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제가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부활에 대한 성서기자들의 경험을 진리로 받아들일 때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설교자로서 기독교 신앙을 진정성 있게 대하지만 부활만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조언을 드립니다. 예수 부활에 여러분의 운명을 맡기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여러 가지 논리에 여러분의 운명을 맡기시겠습니까? 저는 당연히 전자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까지 전해 듣고 배우고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와 운명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총합보다 저에게 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운명과의 일치에서만 종말론적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제가 믿고,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과 희망 안에서 저는 마리아와 똑같은 심정으로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profile

[레벨:6]사막교부

April 06, 2015
*.4.157.63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믿음에 이르게 된 것,

이 또한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06, 2015
*.94.91.64

다음 주일의 성서일과에 따르면

실증주의자 도마가 나오는데,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더군요.

너는 나를 보는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우리를 복되다 하셨으니

이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의 평화가...

profile

[레벨:6]수가야

April 07, 2015
*.112.106.152

  

불트만이<죽은 자는 다시 살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케리그마에의 부활>로 본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reality'란 말과 '케리그마'라는 단어의 의미를 따라잡기 힘들군요.

"내가 주를 보았다."는 선포된 말씀은 참으로 환희에 찬 부활절을 난생 처음 맛보게 하시는군요. 

그러나 불트만은 신학자입니까? 하이덱거를 지지하는 철학자입니까?

그것도 예수님의 肉的 부활을 부인하는

<위대한 신학자 불트만> 그런 제목으로 

책을쓰신 교수님은 그 심정이 어쩼을까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07, 2015
*.94.91.64

안타깝고 죄송하게도

수가야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따라가기가 쉽지 않군요.

불트만이 위대한 신학자라는 것은,

그의 신학에 동의하든 않는 상관없이,

분명한 사실이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profile

[레벨:43]웃겨

April 09, 2015
*.252.49.18

목사님의 설교를 두번 꼼꼼히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제게도 오랫동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설교문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의 이성과 합리적 이해를 넘어서는,

제자들의 그 부활경험을 상상해 봅니다., 

그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그 부활의 세계를 

이제 저도 경험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처럼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 위에서만이 

구원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신통할 게 하나두 없는 제가 조금씩

이런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바로 부활의 실증이 아닌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09, 2015
*.94.91.64

'부활'을 들은풍월로가 아니라

영혼으로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군요.

부활경험이나 신앙이 우리의 이성과 합리적 이해를 넘어서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 좀더 깊이 들어가려면

이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도 약간 알아두는 게 좋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등등의 이야기는 들어보셨지요?

그분들이 복잡하게 설명하는데,

보기에 따라서 간단하기도 합니다.

거칠게 말해서,

순전한 이성으로 인식되는 것만이 진리가 아니라,

기독교의 입장에서 계시의 빛에서 인식되는 것이

오히려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이런 점에서 이성과 신앙은 접합되는 부분도 있고

떨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 부활 경험자들의 특징은 

사전에 예수를 알고 믿었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예수의 가르침, 행위, 운명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없다면

부활 경험은 불가능한 거겠지요.

바울은 예수를 처음에 부정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예수 자체에 대한 관심은 많았겠지만, 

그는 사도들이나 그 추종자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부활을 경험한 거에요.

지금 자유혼 님은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실질적으로 맛보았거나 그런 욕구가 분출되는 것 같군요.

그동안 말씀샘교회에서 신앙훈련을 잘 받으셨나봅니다.

설교문을 두번이나 꼼꼼이 읽어주셔서 고맙고,

기회가 되면 소리로 들어주시면

무지하게 고맙겠습니다.

목소리가 시원치 않지만요. 

profile

[레벨:13]진인택

June 22, 2015
*.176.175.19

목사님 반갑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부활을 믿는다는 사실은  제가 만든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제가 믿게 되었는지는 저도 설명을 못합니다.

설명이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감사할 뿐입니다.

부활을 이해하려고 나를 태우고 다른사람에게 묻고 보채는 짓으로는

부활을 보는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의 어느 부분에서 언젠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성령이 임하셨겠지요.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22, 2015
*.94.91.64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궁극의 생명인

부활에 대한 참된 신뢰와 확신이 있다니

그것보다 더 소중한 신앙 경험은 없습니다.

부활 신앙의 더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78
848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4979
847 부활절 성찬 예배 공동체 (행 2:42-47) [2] 2020-05-03 4026
846 부활절 눈이 밝아진 제자들 (눅 24:13-35) [2] 2020-04-26 6347
845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8677
844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8599
843 사순절 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6] 2020-04-05 5556
842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5251
841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6697
840 사순절 생존의 위기 앞에서 (출 17:1-7) 2020-03-15 6195
839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5288
838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5526
837 주현절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2020-02-23 4034
836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7060
835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5691
83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9462
833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5146
832 주현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7] 2020-01-19 4778
831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6926
830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6389
829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5470
828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9524
827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9005
826 대림절 "파루시아" (약 5:7-10) [5] 2019-12-16 6147
825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11564
824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6429
823 창조절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골 1:1-20) [6] 2019-11-24 7753
822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6862
821 창조절 두려워 말라! (학 1:15-2:9) 2019-11-10 5513
820 창조절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9] 2019-11-03 10739
819 창조절 여호와의 날에 구원 얻을 자 (욜 2:23-32) 2019-10-27 7614
818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901
817 창조절 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2] 2019-10-14 5774
816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7049
815 창조절 투쟁적인 믿음 (딤전 6:6-16) [4] 2019-09-29 8062
814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266
813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7220
812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6844
811 창조절 복 있는 삶 (눅 14:7-14) [2] 2019-09-01 7705
810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4893
809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086
808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7017
807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696
806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4853
805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7110
804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651
803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6488
80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048
801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0732
800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6545
7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7327
798 부활절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4] 2019-06-02 15829
797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8483
79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7229
795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4471
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7710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6998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5804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5956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5781
789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6206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5374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5715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6898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5678
78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278
783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0698
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8391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6638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672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6389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5444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304
776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6705
775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6447
774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8442
7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8602
772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8093
771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189
770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809
769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16336
768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7534
767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13086
766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6263
765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4] 2018-10-15 6213
764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7050
763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652
762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5781
761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5419
760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6263
759 창조절 말씀과 삶의 일치로 인한 복 (약 1:17-27) [4] 2018-09-02 8111
758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5524
757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7039
756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6369
755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6198
754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6152
753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349
752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6866
751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6905
750 성령강림절 연보도 은혜다! (고후 8:7-15) [6] 2018-07-01 6425
749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1166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