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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심판이다

부활절 조회 수 13801 추천 수 0 2011.05.29 22: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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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도행전 17:22-31 

부활은 심판이다

사도행전 17:22-31, 부활절 여섯째 주일, 2011년 5월29일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계신 동안에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도 예수님의 사도로 불립니다. 자칭 사도라고 말하는 게 옳습니다. 바울과 열두 사도 사이는 불가근불가원의 관계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쟁쟁한 사도들이 많았는데도 사도행전은 주로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이름만으로 본다면 사도들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지만 실제로는 바울의 입장을 변호하는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그리스도교가 시작할 때는 열두 사도들의 권위가 더 컸지만, 여기에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도 포함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바울의 권위가 올라갔습니다. 거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어떤 속사정이 있습니다. 바울은 활동 초창기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에서 힘에 밀리면서 어쩔 수 없이 선교 지역을 그리스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 지역에 세운 교회가 세계 교회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방문한 그리스 도시 중의 하나가 아테네입니다. 성경 식 이름으로는 아덴입니다. 아덴, 즉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입니다. 고대 아덴은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플라톤은 아덴에 지금의 대학교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를 세워서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안타까워서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논쟁을 벌인 사람들 중에는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행 17:18) 그들은 바울과 본격적으로 논쟁하기 위해서 바울을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거기서 행한 바울의 연설이 오늘 설교 본문인 행 17:22-31절입니다. 바울의 이 설교는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한 것입니다. 청중들은 철학적으로 상당히 세련된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작심하고 논쟁할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청중으로 놓고 설교하는 일은 고달픕니다. 그래도 그들을 설득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의 미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울이 처한 상황만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철학으로 정신 무장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변증해야 할 사명이고 책임입니다. 또한 오늘 최고 문명을 구가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변증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고 책임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이름으로 선포된 당시의 그리스도교 변증이 어떤지를 보십시오.

 

 

     사람의 기술과 고안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종교심을 거론하면서 변증을 시작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7:22) 당시의 아덴은 로마가 지중해 연안을 지배한 뒤로 그 명망을 상당하게 잃었지만 여전히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더 나가서 종교적으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들의 조각과 건축은 지금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뛰어납니다. 아덴 거리 곳곳에 그런 조각과 건축물이 세워졌습니다. 그 정신적 모태는 신화입니다. 신들의 우두머리는 제우스이고, 그의 아내이며 누이이면서 여신 중의 우두머리인 신의 이름은 헤라입니다.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냥과 출산의 여신은 아르테미스, 곡물의 성장을 주관하는 여신 데메테르, 화로의 불을 주관하는 헤스티아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많은 신들이 신화에 등장합니다. 각각 그들을 섬기는 단들이 아덴 거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단을 만들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의 상황을 알만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 ‘알지 못하는 신’이 누군지를 알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청중들은 흥미가 끌렸겠지요. 자신들도 여러 신의 형상을 만들기는 했지만 신의 세계는 물론이고 세상의 이치도 다 알지 못했으니까요. 바울은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1) 그는 만물 가운데 계시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2) 그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 3)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4)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다. 5) 모든 사람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 6)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신다. 이것은 성서적인 하나님 표상이지만 구약성서의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바울의 연설을 듣고 있는 아덴의 철학자들도 인정할만합니다. 만물의 근원을 이데아라고 한 플라톤의 주장에서 보더라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세상이 조화롭게 구성되고 유지된다고 본 스토아 사상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세상을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동의할만한 내용입니다. 일종의 자연신학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여기까지는 아덴 사람이나 바울이나 서로 크게 이견이 없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금, 은, 돌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형상은 앞에서 말씀드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겼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기술을 Kunst(예술)라고, 고안을 Gedanken(사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매우 세련되어 보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존경받고 그만한 대가도 받습니다. 지금도 어떤 화가의 그림은 수억 원, 수십억 원을 호가합니다. 인류는 그런 기술, 예술, 사상을 발전시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것이 발전한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노골적으로 신이라고 믿지 않겠지만 실제로는 신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기술’은 오늘의 기술공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전공학, 토목기술도 모두 쿤스트입니다.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처럼 따르는 사상도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는 바로 그런 사상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신으로 모십니다. 그게 우리의 정치, 교육, 예술, 심지어 종교까지 지배합니다. 아마 우리의 잠재의식까지 지배할지 모릅니다.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듯이 우리도 지금 우리의 기술과 고안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그런 단을 마음 한 구석에 만들어 놓고 사는 건 아닌지요. 저금통장의 액수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는 삶이 바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매일 매달려 있는 티브이 방송이 우리의 ‘알지 못하는 신’은 아닐까요? 도대체 지금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그래서 결국은 허무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우상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물질주의, 성공주의, 자기 구원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그런 것을 제쳐두고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이나 교도소 같은 곳에 들어가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세상이 요구하는 온갖 것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실제로 미래가 불안해집니다. 다른 나라보다 우리의 경제발전이 늦으면 국민들이 모두 불안해합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우리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힘입니다. 마치 죄가 우리를 존재론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걸 억지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길은 한 가지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참된 것이 오기 전까지는 가짜를 가짜로 분간하기는 어렵습니다. 명화도 짝퉁만 놓고 그냥 보면 구분이 잘 안 됩니다. 오리지널을 놓고 봐야 구분이 됩니다. 지금 사람들이 섬기는 모든 문명도 그것만 놓고 보면 그런대로 괜찮아 보입니다. 나름으로 살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고, 실존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다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행 17:30) 모를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는 길이, 즉 생명을 얻는 길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부활

     바울은 그 길이 무엇인지를 오늘 설교 본문 31절에서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이 31절이 바울 설교의 결론이고, 동시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여기서 심판은 생명이냐 죽음이냐를, 구원이냐 멸망이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를 쓰고 살아갈 궁리를 짜는 ‘기술과 고안’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심판할 날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을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판사가 피고인을 감옥에 보내거나, 옥황상제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림들이 성서에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생명의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입니다. 심판은 생명이며, 구원입니다. 심판의 날은 생명의 실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날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심판은 두 가지 기준으로 일어납니다. 하나는 ‘공의’, 즉 정의입니다. 이 정의를 실정법, 율법으로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심판 기준이 정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믿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셨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추구하던 기술과 고안은 이 더 이상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을 심판, 즉 생명을 주십니다. 이것이 철학의 도시에 살고 있던 아덴 사람들에게 전한 바울의 설교입니다. 동시에 지중해 연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초기 그리스도교가 전한 복음의 진수이고,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심판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요? 부활은 한 유대인 남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 이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전제해야 만합니다. 십자가 처형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역입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거부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부정입니다. 무죄한 이들의 고난과 죽음의 극치입니다. 유대 종교와 로마 정치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고유하고 종말론적인 능력으로 인간의 반역을 해체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종교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무장해제 시키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이제 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허위의식이, 권위주의가, 사이비 메시아주의가 폭로되었습니다. 그 폭로가 심판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해방이 주는 기쁨의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삶의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무엇이 참된 생명인지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년 들어서 KAIST 학생이 4명이나 자살을 했습니다. 교수 한 분도 자살을 했습니다. 며칠 사이에 젊은 가수와 아나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특히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가장 높습니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에 완전히 예속된 탓이 아니겠습니까. 참된 생명이 어디서 주어지는지 다시 생각하십시오. 예수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생명이고 심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의 심판을 받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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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May 31, 2011
*.144.233.29

근거도 없는 낙관적 환상을 전하는 설교에 익숙한 한국사회에서  복음을 듣게 되어서 기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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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31, 2011
*.120.170.250

웃음 님,

근거를 찾는 작업이 쉽지 않지요?

특히 한국교회 설교에서 근거가 취약한 이유는

텍스트를 해석하지 않(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우격다짐으로 몰아가거나

감성적 접근을 할 수밖에 없겠지요.

내 설교를 복음으로 들었다니,

들을 귀가 있으시군요. ㅎㅎ

돌아오는 주일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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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June 02, 2011
*.54.137.164

목사님,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설교 말미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부정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부정 " 이라는 내용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다시한번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정한 구원의 능력에 참여 하고 싶은 별,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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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2, 2011
*.120.170.250

별달 님,

좋은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선포하시고,

그 사실에 근거해서 말씀을 선포하고 행동하셨어요.

그 선포와 행동이 곧 하나님의 정의,

즉 하나님의 옳음이에요.

그 정의는 구원이고 생명이에요.

하나님의 정의는 세상의 정의와 격이 다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비유에 많이 나와 있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은

바로 그 사실을 부정한 거지요.

이런 말이 실질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좀 멀게 느껴지지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말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행위, 그의 계시, 그의 나라를

우리의 세계 경험과 일치해서 설명할 수는 없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천천히 그쪽으로 나가보세요.

언젠가는, 모세의 경우로 말하면 하나님의 정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등을 볼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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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June 08, 2011
*.54.137.164

목사님,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 그분의 선포와 그분의 행동,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했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계속 밝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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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선비다움

June 02, 2011
*.15.25.90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역삼각형이 보입니다.

불안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한 꼭지점을 향하여 집요하게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마치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가

어느 순간 손을 놓는 모습이 보이니까요.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아덴과 오늘이라는 현실이 만나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끌리는 경험을 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고안해 내고 새기며 몰두하는 현실(그리고 자신)을

심판하신 하나님 경험말입니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것이 참된 것이라면

인간반역을 해체시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것이군요.

양파껍질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져 나가듯 서서히

그러나 집요하게 파고 들어오는 참된 것에 대한

해명 앞에 왠지 모를 희열이 솟아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한 사람’과

인간의 기술과 사상을 신으로 따르는 ‘모든 사람’이 절묘하게 대비되면서

결국 가야할 길을 발견하네요.

죽음에서 부활한 한 사람 예수에게 내 운명을 맡기며 사는 것이

참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바른 지혜이겠군요.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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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2, 2011
*.120.170.250

선비다움 님,

누구신가요?

내가 설교한 것보다

더 정확하게 설교의 요점을 정리하셨네요.

본문을 그냥 발췌한 게 아니라

본인이 충분히 소화해서

다시 정리하셨네요.

이런 작업이 그냥 되는 건 아니거든요.

머리가 아주 뛰어나든지

아니면 신학이나 인문학 공부가 탄탄한 분 같네요. ㅎㅎ

설교의 핵심을 잘 정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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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une 03, 2011
*.239.93.193

역시 인간의 심판이란 단어가 하나님의 심판을 처음부터 모호하게 하는군요. 법원에서 쓰여지는 심판, 월드컵 축구에서 긴장한 변방의 선수들에게 불쑥 내미는 레드카드의 종결자인 심판에게 너무 쏠려서인지 정작 하나님의 심판은 와 닿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단어 일지라도 분별력을 착실히 주시는 인도자가 계시기에 예전에 비해 지금은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한 십자가 죽음으로서 내가 일소 시킬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고, 그런 상태의 죽음만이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증거로 예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집착하는 생명이 썩어질 것임을 알게 시고 그걸 내 던져 버리게 하셨습니다. 그 생명의 실체가 기술과 윤리와 모자라는 자들끼리의 팀워크입니다. 정말로 버려야 할 것을 , 끝까지 버려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통해서 보여주심을 이제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판촉용 샘플과 같이 취급 당하는 그런 생명 말고 존귀하고 샘플의 실체인 생명을 받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옵소서.

나는 달라 졌습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은 모습 그대로지만 나는 덩치에 겁내지 않고 혼자서 웃으면서 걸어 갑니다. 지금을 죽이고 예수님께서 주실 부활의 생명을 빌려서 무제한 거치, 원금상환은 죄 사함 받은 나를 담보물로 드리렵니다.

어려운 내용을 알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03,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잘 지내시지요?

제가 어려운 내용을 알기 쉽게 전했다기보다는

명료한 것은 조금 까다롭게 전했는지 모르겠네요.

복음은 아직 완전히 결정된 게 아니라

종말까지 꾸준히 변증되어야 할 그 어떤 것이랍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도 빙산의 일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교 복음의 체계를 모른다는 게 아니라

그 실체에 접근하기 힘들다는 거지요.

바울도 거울로 보는 것과 비슷하고 했으니,

그냥 위로를 받아야겠지요.

진인택 님이 작심하고 그리스도교 세계로

치고 들어가려고 애를 쓰시는군요.

그런 과정이 바로 영적인 훈련이기도 합니다.

큰 결실이 주어지리라고 기대합니다.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4]선비다움

June 03, 2011
*.15.25.90

그저 정 목사님의 필치를 흉내 냈을 뿐입니다.

저는 신학적 인문학적 식견도 없구요.

제 앞가림도 못하는 코흘리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웃나라에 살고 있구요.

예수님이 좋아서 따르다보니 여기까지 왔지만

날마다 고민을 안고 살아간답니다.

인생은 공부하면서 진지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만은 붙들고 있지요.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profile

[레벨:2]뿌리깊은

June 04, 2011
*.155.167.16

어리석은 질문 하나드려도 될까요?

 

그렇다면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혹은 예수를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 에 대해서는 어떻게 정리를 하고 이해하면 좋을까요?^^"

 

그냥 불가지론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하나요???^^;;

 

물론 제 스스로가 복음의 빛 가운데 하루x2 살아가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이겠지만, 늘 어리석은 질문이 고민으로 ~ 때로는 그 고민이 답답함으로 이어져서 질문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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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5, 2011
*.120.170.250

뿌리 님,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라 본질적인 질문을 하셨네요.

여러가지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살았던 이들의 운명에 대한 질문이잖아요.

질문은 중요한데 대답은 좀 궁합니다.

그래도 간단히 답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예수 사건은 우주론적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모든 이들에게,

구체적으로 예수 공동체와 연결되든 않든 열려 있다고 봐야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빛이

그 이전과 이후, 우주 전체에 미치는 거지요.

창조주는 그 우주를 지으신 분이니까요.

예수를 믿든지 않든지 상관 없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봐야합니다.

1) 직접 선택의 여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예수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빛이 전달되겠지요.

2)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히 세례문답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만을 믿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그런 명시적인 신앙의 내용이 없다고 하더라도

   진리에 빛에 거한 사람들의 삶도 믿음이라고 봐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일단 예수가 절대적인 사건입니다.

그분의 초청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중요한 거지요.

그리스도교 밖의 사람들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걸 우리의 관점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요.

판단하기는 하지만 절대화할 수는 없겠지요.

가능하면 모든 이들이 구원받는 것을 기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누가 그런 말을 했다는데요.

하나님은 지옥을 비워두신다고 말입니다.

행복한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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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5
730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7309
729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615
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5843
727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6487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6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05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654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7413
72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7739
721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3] 2017-12-11 15695
72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0818
719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6764
71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23
717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6582
716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626
715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09
714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7568
713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34
712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2017-10-08 8196
711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08
71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22
709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778
708 창조절 죽음 넘어! (출 12:1-14) 2017-09-11 8185
707 창조절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6] 2017-09-03 7804
706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470
705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2887
704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87
703 성령강림절 빈 들에서 배불리 먹다 (마 14:13-21) [8] 2017-08-06 8053
702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4992
701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50
700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881
699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241
698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111
697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1
696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372
695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812
694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273
693 부활절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8] 2017-05-28 7743
692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476
691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827
690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21
689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753
688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398
687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654
686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6892
685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5981
684 사순절 영적 시각 장애 (요 9:35-41) [2] 2017-03-26 8184
683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656
682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358
681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31
680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679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06
678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7
677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771
676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06
67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400
674 주현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4] 2017-01-15 8234
67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39
672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2984
671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009
670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707
66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26
668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60
66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090
66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6
665 창조절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4] 2016-11-14 8231
66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4
663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707
662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34
661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587
660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466
659 창조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15] 2016-09-04 8271
658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270
657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051
656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50
655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7
654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079
653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110
65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15] 2016-07-17 15085
65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골 1:1-14 [9] 2016-07-11 7997
6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16] 2016-07-03 6507
649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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