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성령강림절 조회 수 17502 추천 수 0 2011.07.24 22:30:56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2011/dawp_0724.mp3 
설교보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110724.wmv 
설교구독(아이튠즈) : itms://itunes.apple.com/kr/podcast/id458569912 
성경본문 : 마태복음 13:44-52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마태복음 13:44-52, 성령강림절후 6째 주일, 2011년 7월24일

    

신약성경에는 똑같은 의미지만 표현이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천국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천국은 한자이고 하나님 나라는 순전히 우리말입니다. 그런 탓에 서로 다른 말처럼 들립니다. 성경을 번역한 분들이 왜 그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헬라어로 천국은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고, 하나님 나라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입니다. 양쪽 모두 ‘나라’라는 뜻의 바실레이아를 똑같이 사용합니다. 우라논은 하늘이라는 뜻의 우라노스의 2격 변화이고, 데우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데우스의 2격 변화입니다. 두 단어를 한자로 일관성 있게 하려면 하나님 나라를 신국(神國)이라고 번역해야 하고, 우리말로 하려면 천국을 하늘나라로 해야 합니다. 어쨌든지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똑같은 의미입니다. 고대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두 가지 단어를 똑같이 사용했습니다. 천국은, 즉 하늘나라는 무엇인가요? 오늘 설교의 성경본문인 마태복음에 나오는 천국의 비유는 곧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비유라고 봐도 좋습니다. 세 가지가 나옵니다.

 

     보화, 장사꾼, 그물

     첫째,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했습니다.(44절) 보화는 천국을 수식합니다. 천국이 보화처럼 귀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비유라는 걸 다시 생각하십시오. 천국을 실제적인보화, 또는 돈으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천국마저도 돈의 가치로 환산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보화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라는 의미일 뿐입니다.

     보화가 밭에 감추어졌다고 합니다. 밭의 흙속에 묻혔다는 뜻인지 한 구석에 다른 것으로 덮여 있다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천국의 속성은 은폐성입니다. 어린 시절 소풍 나가서 보물찾기를 한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보물 이름을 적은 종이쪽지는 나뭇가지 사이에, 낙엽 밑에, 돌 밑에 숨어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면서는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천국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크게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동시에 설명하기도 어려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화를 찾은 사람에게만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아노 건반이 깊다.”는 백건우 피아니스트의 경험이 그와 비슷합니다. 피아노 음악의 어떤 경지에 들어가야만 경험될 수 있는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메시아성은 은폐되었습니다.

     천국이 은폐되어 있다는 말은 곧 생명이 은폐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직 모릅니다. 돈만 많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빠른지 한 평생이 번갯불의 한 순간 같습니다. 생명의 나라인 천국은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거가 충동질 하는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고 통치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밭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기쁨이 어떨지 상상이 갈 겁니다.

     둘째,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했습니다.(45절) 첫째 비유가 천국을 보화라고 했다면 둘째 비유는 진주라고 해야 하는데, 장사와 같다고 합니다. 첫째 비유는 천국의 속성을 말한다면 둘째 비유는 천국을 경험한 사람의 태도를 말합니다. 천국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심정이 어떨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직 그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치 참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구도자와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천하에서 가장 좋은 진주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일지 모릅니다. 우연은 곧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좋은 진주를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를 따라나선 것과 비슷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손에 넣었습니다. 첫째 비유에서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요즘말로 ‘올인’했습니다. 그에게 다른 것은 무의미했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좋은 진주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영적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천국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상투적인 것으로 듣지 마십시오. 교회에 열심히 나오라는 말로 들으면 곤란합니다.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처리되는 문제들입니다.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교회봉사와 세상봉사에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천국과 천국의 소유한 속성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거기에 던집니다. 자기에 대한 관심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천국을 그물과 같다고 했습니다.(47절) 세 번째 비유는 앞의 것들과 차이가 납니다. 그물을 다루는 어부라고 하든지, 아니면 그물에 걸려든 좋은 물고기라고 하는 게 일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 차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서기자는 그물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물을 다루는 어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물에 고기가 가득 잡혔습니다. 그러자 어부는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버렸다고 합니다.(48절) 이 비유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세상 마지막 때 천사들이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서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는 지난 주일의 본문인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와 비슷합니다. 세 번째 비유에서 핵심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마지막 때에 새롭게 구성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천국의 속성입니다. 그 천국이 아직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뒤섞여 있는 그물처럼 이 세상에 사이비 생명이 뒤섞여 있지만 결국에는 참된 생명의 세계가 올 것입니다.

 

     질적인 변화

     우리는 위에서 천국에 대한 세 가지 비유를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감춰진 보화였고, 두 번째는 진주 장사였고, 세 번째는 그물이었습니다. 약간씩 다른 방식으로 전하고 있는 이 비유의 공통점을 무엇일까요? 천국이 어떻다는 말인가요? 공통되는 요소는 변화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모양의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입니다. 첫 비유를 보십시오. 보화가 밭에 감춰진 상황과 그것이 발견된 상황은 완전히 다릅니다. 모든 것이 바뀝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치웠습니다. 둘째 비유에서도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보화와 진주를 발견한 뒤에는 이 사람들의 모든 삶이, 가치관이, 세계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셋째 비유에서도 한 그물에 섞여 있던 좋은 물고기와 못된 것이 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적으로, 질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생명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곧 천국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지구가 앞으로 45억년 후에 어떻게 될지를 말하라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지구가 우주에 태어난 세월이 45억년인데, 앞으로 그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 없어진다는 사실 말고는 우리가 더 정확하게 말할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지구에서 경험하는 생명 현상을 따라가기에도 벅찬 마당에 지구 너머의 생명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것을 실증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이비 이단의 교주들뿐입니다. 과학적으로는 그렇지만 신앙적으로는 분명하게 말해야 하지 않느냐, 요한계시록 등이 명확하게 말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그 나라의 생명을 비유적으로 말할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비유 중에서도 훨씬 극단적인 비유로 기록된 묵시문학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려는 것은 이 세상의 생명이 질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지 그 변화된 생명의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아닙니다. 성경은 궁극적인 진리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자체는 아닙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입니다. 피조물의 근본 한계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받았다고 성서기자들이 전합니다. 모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주의 영광을 생명이라는 낱말로 바꿔도 됩니다. 모세는 원초적 생명을 경험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허용되지 않습니다. 얼굴에 신적인 후광이 서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영적인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모세마저 생명의 근본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인데, 지금 우리가 그것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설명을 너무 멀게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지금 여기서 생명을 생생하게 경험한다고 말입니다. <나는 가수다> 같은 오디션 방송을 보면서, 또는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경쟁을 보면서 살아있다는 경험을 합니다.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사업을 확장합니다. 이런 생명 경험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죽은 뒤 천국에 가서도 그런 방식의 삶을 기대합니다. 소위 천국 상급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늘 경쟁 논리에서만 생명을 경험합니다. 매스컴의 광고와 기업 논리에 얼마나 철저하게 길들여지는지를 보십시오. 교회생활도 그런 방식으로 합니다. 신앙의 내용이 거의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비하듯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개인의 신앙에서, 그리고 교회 구조에서 생명이 철저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몇 달 전에 스티븐 호킹(69세)은 영국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에서 ‘천국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내용이 전 세계 매스컴을 탔습니다. 그가 한 말은 전혀 틀린 게 아닙니다. 천국은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생각한 천국은, 그리고 적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그들은 우주 공간 어디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자리를 생각합니다. 좋은 집, 좋은 가족과 친구, 멋진 공원과 식탁, 완전한 복지 시설을 머리에 그립니다. 그런 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땅의 나라입니다. 이는 포이에르바흐나 니체 등이 비판했던 자아 투사적인 종교에 불과합니다. 공주와 왕자처럼 살고 싶다는 염원의 표출일 뿐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절대 행복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런 차원의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이 질적인 변화의 세계라는 말은 천국이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지 모르겠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설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창조의 하나님만이 새롭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세상이 곧 부활생명의 세상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그 부활생명의 세계가 곧 천국입니다. 그게 어떤 세계일지 여러분은 아예 상상하지 마십시오. 상상할수록 왜곡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천국을 기다리십시오. 그런 기다림을 아는 사람은 보화와 진주를 발견하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보화와 진주를 손에 넣은 사람처럼 기쁨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아멘.


profile

[레벨:2]imagoDei

July 25, 2011
*.33.25.38

예전에 어느분이 제게 당신이 상상하는 천국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는데, 그러자 우리 목사님도 금은보화가 있는 천국을 상상하고 기대하듯이-아마 성서의 비유적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겠죠-자신도 역시 상상하건대 오아시스가 있고(?) 안락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각자 천국을 그려보고 소망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라고 하더라고요.

저보다 한참 나이가 많으신 분이셨는데 순수하시단 생각이 든 적이 있어요. 그때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는 글쎄, 그러한 천국에 대한 이미지 트래이닝을 안 거쳐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설교에서도 나오듯이 우리가 보는 가시적인 세계가 그대로 투사된 것 같아 더더욱 천국같아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딱 그때 일이 생각납니다.

말씀 앞에서는 내내 겸손하게 됩니다. 제가 그래서 믿고 있다고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묵묵히 기다리는 구도자의 길 한 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기로는 좀 더 제자신이 겸손해질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25, 2011
*.120.170.250

이마고 데이 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군요.  

어떤 사람은 천국을 아예 보고 왔다고 큰소리 칩니다. ㅎㅎ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일들을

파수꾼의 심정으로 기다려 봅시다.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18]르네상스

July 26, 2011
*.155.16.192

아직까지도 한국교회는 '천국 상급론'이 강하게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상을 바라고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하는 것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것이니까

비판할 필요 없다. 상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고 좋은 것인가!"라는 말씀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현대인들 심성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가 아닌 것 같아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을 이 세상의 모습이나 어떤 체제로 이해들을 많이 하고 있죠.

저도 지금 현실이 그렇다 하는 것을 인정하고 공감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오디션 열풍이 불고 있는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승자독식' 구도죠.

너도 나도 일등, 일류를 지향합니다. 말 그대로 무한경쟁이죠.

 

그런 것들을 보면서

도대체 믿음이라고 하는 것,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에서 믿음이라는 말만큼 많이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곡해되고 있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탐욕, 이기심, 욕망, 인간이 만든 어떤 체제나 논리,

자기 중심적 가치관,  세속적 처세술 등을 믿음 혹은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이런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같이 고민하고 대화를 나눌

사람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한국교회에서는 이단적(?) 행동이니까요.

 

저도 앞으로 질적인 변화의 세계로서의

그 하나님나라를 바로,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아니면 비겁하게 현실과 타협하여 이 때까지

한국교회가 외쳤던 '천국복음(?)'을 전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 사역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닐까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26, 2011
*.120.170.250

김종원 님,

잘 지내지요?

요즘 여름 행사로 정신 없이 바쁠 것 같군요.

나도 왕년 전도사 시절에

여름을 온통 교회 일을 쫓아다니면서 보냈어요.

교회 일보다는 공부를 좀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요.

천국 상급론?

좀 웃기는 이야기에요.

천국에도 상급의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런 천국을 사양할랍니다. ㅎㅎ

사람을 보지말고 하나님만을 보도록 해 봅시다.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17]아우

July 26, 2011
*.179.178.110

신성종 목사님이 몇 해전(2년전?)에 환상 중에 천국을 여행한 경험을 책으로 냈다고 하더군요.

그 분은 합동측을 대표하는 목회자이면서 신학자인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 분도 여느 평신도와 비슷한 방식으로 천국을 묘사하더군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같이 기독교 신앙을 믿어도 천국에 대한 표상이 이토록 차이가 나다니...

 다만, 새겨들을만한 부분도 있더군요.

한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들과 장로들의 탈선과 비행,

번영설교와 기복신앙을 주입하고,제자훈련의 이름아래 자기제자를 만드는 목회자들이

받을 형벌이 얼마나 엄중한지 경고하는 대목은 섬뜩하더군요.

간증문을 읽어보니 한편으로는 종말에 그런 화가 일어나야 옳겠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찜찜한 부분도 없지는 않더군요.

 

아래는 신성종 목사님의 <내가 본 천국> 간증 요약문입니다.

http://blog.naver.com/kym3288?Redirect=Log&logNo=90110801903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26, 2011
*.120.170.250

오메가 님,
신성종 목사라는 분이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링크 해 놓은 그 사이트의 내용을 읽어보니

좀 심하게 말해서 임상 치료가 필요한 분이군요.

요한계시록 비슷한 방식으로 천국과 지옥을 묘사했는데,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30대로 보인다는 대목에서

완전히 돌아버리겠네요.

예수님이 30대였기에 그렇다는군요.

개그도 이보다 더한 개그가 없네요.

저런 간증은 들을수록 영성이 훼손됩니다.

오메가 님이 섬뜩한 느낌을 받은 것이 바로 훼손의 증거에요.  

자신이 천국을 오가면서 예수와 직통으로 대화한다는

문선명의 간증과 다를 게 없어요.

천국을 보았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이 되는데,

모세도 못 본 하나님을,

하나님을 본 자는 모두 죽은다는 성경 말씀도 있는데,

누가 본단 말이에요?

제가 보기에 신성종은 사이비입니다.  

 

profile

[레벨:2]imagoDei

July 26, 2011
*.33.25.38

@오메가님

기존 개신교에서 저러한 류의 것들을 많이 접해서 그런지, 이제는 상당히 무덤덤하기까지 한데

쉽사리 단언하거나 직접적인 평가를 첨가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저 분이 본 것을 맞다고 가정하자면 이것은 성서보다 더 사실적이고 임팩트가 있지 않습니까.

저만큼 생동감 있고 상세하게 기술로 묘사하고 있다면, 성서 텍스트의 메시지를 이미 뛰어넘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저 글은 책으로도 나와있는 것 같습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7802573

그리고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최근 내신 저서 제목이 '나는 목사다'이시네요(!).

profile

[레벨:2]주님의평화

July 27, 2011
*.239.149.84

오랜만에 들어와 좋은 설교문을 보고 갑니다.

약간은 성서 텍스트를 더 건드려주셨더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하네요. 

물론 어떠한 '묘사'나 '이미지'를 투영하시지 않고자 노력하셨기 때문이라고 이해는 됩니다. ^_^


그나저나 약간은 걱정도 됩니다. 이 정도 내용이면, 몇몇 잘못된 신념을 좋은 믿음으로 착각하시고 계신 목사님들은 정목사님을 이단정죄하려고 노력할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앞섭니다. 문단 한 두군데서 몇줄씩만 보여주면 완벽한 이단이세요. 하하하하.  


(예) 정용섭 목사는 그의 최근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meta charset="utf-8">

몇 달 전에 스티븐 호킹(69세)은 영국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에서 ‘천국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내용이 전 세계 매스컴을 탔습니다. 그가 한 말은 전혀 틀린 게 아닙니다. 천국은 없습니다. 


어쨌든, 정목사님께서 크게 이권에 연루(?)되어 계시지 않으셔서 그럴일은 없겠죠. ^_^

항상 좋은 설교들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배움을 얻습니다. 힘내세요.

</meta>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27, 2011
*.120.170.250

주님의평화 님,

글 발췌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저렇게 쓰니 완전 이단이군요.

비슷한 경우를 메이저 신문에서도 좀 본 것 같네요. ㅎㅎ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3]떨기나무

July 27, 2011
*.114.20.94

마태가 "하나님" 칭호를 피하기 위해서 천국(하늘 나라)이라고 말한 것을 감안하면, "하나님 나라"가 본래의 뜻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복음서들이 천국대신 하나님 나라라고 말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천국이라고 말을 하면, 죽어서 가는 천당, 어떤 우주 공간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스티븐 호킹이 말한대로 그런 천당은 없다고 봅니다.

목사님은 "하나님 나라는 질적인 변화이며, 하나님의 소관이며, 하나님의 통치이며, 부활생명의 세상이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것은 신비이며 상상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렇게 신비의 영역으로 빠져나가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 땅에서 펼쳐질 새로운 생명 세상이 아닐까요? 이 지구를 떠나서 어딘가 별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이 아니라 이 지구가 새하늘과 새땅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세상, 그러나 정치/경제/환경으로 오염된 이 지구를 떠나서 어디서 천국을 경험한단 말입니까? 저는 하나님 나라를 피조(지구) 세계의 변화로 이해합니다. "지구도 45억년이 지나면 없어질 것"이라면 지구를 떠난 하나님 나라가 과연 존재할까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27, 2011
*.120.170.250

떨기나무 님,

재미있는 말씀을 주셨네요.

두 가지입니다.

1) 천국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요?

사람에게서 그것이 가능할까요?

천국은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냐,

아니면 사람과의 협동적 사건이냐 하는 것은

지난 2천년 동안 계속된 논쟁이기 때문에 여기서 길게 말할 수는 없겠지요.

나는 전자에 무게를 둡니다.

2) 천국은 변화된 지구다.

지상천국을 말하는 거는 아니겠지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가 소중하다는 사실,

그래서 지속가능한 지구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옳습니다.

예수님도 다시 우리에게 오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이런 문제도 간단한 게 아닌데요.

휴거가 옳으냐, 지상천국이 옳으냐 하는 논쟁이겠지요.

자는 지상천국에 내 운명을 걸지 않겠습니다.

공간적인 차원의 휴거는 문제가 있겠지만

질적인 변화를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의미라면

휴거에 걸겠습니다.

어쨌든지 주님이 빨리 오셔야 할텐데요. 

profile

[레벨:13]진인택

July 28, 2011
*.239.93.193

교회의 신자들은 벽돌이 아니다. 퍼즐조각이다. 하지만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 퍼즐조각이라면 미지근하게 사양한다. 그 큰 부동산을 축적해서 뭐 하려나? 전도하는 자체가 경쟁구도 속에서 분주히 전화 받고 뛰어다니는 비즈니스맨의 007 서류가방 속 내용물 같다. 사도들이 가난하게 몸으로 뛰었던 방식을 간교하게 차용한다. 자동차, 네트워크, 메일, 허울좋은 직제로 발 품을 살짝 비켜나가고 전도의 성스러움만 립서비스를 한다. 천국을 당근으로 전도를 채찍으로 몰아치는 목회자들을 심사 숙고해서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그들도 밭을 보았는지 진주를 보았는지, 뭔가를 본 모양인데 질주하는 교회의 등에서 못 내리는 것 같다. 그들이 오히려 수고하고 짐을 진 자들 같다.

 

 목사님 내가 소유한 것은 변덕스런 마음과 주님께 받은 은혜입니다. 모두 팔아서 진주를 살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내 마음이 소유의 뇌가 될지라도 숨쉬는 동안에는 가져가야 할 것 같습니다.  버리지 않고 펴서 주님 오실 때까지 보화가 묻힌 밭을 일구는 쟁기를 쓰겠습니다. 끝이 무디어서 인생의 밭이 제대로 갈아 엎어지지 않을 때마다 말씀으로 벼르고 날을 샤프하게 만들겠습니다.

 

질적인 변화의 기분을 조금은 느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답을 본 게 아니라,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뭔가 바뀌었습니다. 그 작은 순간이, 내 인생 전체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트랜지스터의 아주 작은 베이스 전기가 흐르지 않던 큰 전기를 왕창 보내 주듯이 작은 깨달음의 질적 변화가 큰일을 일으켰습니다. 그 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28,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답을 본 게 아니라 알게 된 느낌이라구요?

예, 정확한 표현이군요.

아무도 절대적인 세계는 볼 수가 없습니다.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느꼈다고 보는 게 더 옳겠군요.

지금 이 순간에 내 서재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게 어디서 시작했는지 아는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하지만

그것을 느끼긴 합니다.

우주 전체의 한 자락에 살짝 기대어서

엄습하고 있는 어떤 것을 느낄 뿐이지요.

가능한 대로 그 느낌이

더 정확한 내용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면서요.

좋은 밤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2]yeosim

July 29, 2011
*.101.29.10

천국 보상을 두고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이 뭔가 꼭 보상을 바라는 속물적 사고방식 같은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할 지 모르나, 괘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보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보상에는, 당신이 하는 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그런 종류의 보상이 있다. 이런 보상은 사실 엉뚱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돈이라는 보상은 사랑이라는 행위에 자연스럽게 따라나는 보상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남자가 여자의 돈을 보고 그녀와 결혼한다면 그를 엉뚱한 걸 바라는 속물이라고 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보상은 진실한 연인에게 주어지는 합당한 보상이다. 그러므로 연인이 결혼이라는 보상을 바란다고 해서 그가 속물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귀족자리 하나를 얻어볼까 노려서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장군이 있다면 그는 속물이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싸우는 장군은 속물이 아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마치 결혼이 연인에게 주어지는 바른 보상인 것처럼, 그 장군에게 있어서는, 전투에 대한 합당한 보상인 것이다.

 

즉, 진정한 보상이란 단순히 어떤 행동의 결과로 그것에 덧붙여지는 무엇이 아니라, 그 행동 자체의 절정이 곧 그 행동의 진정한 보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C.S.루이스, 영광의 무게 中 -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29, 2011
*.120.170.250

yeosim 님,

루이스의 좋은 글을 달아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루이스의 글을 문학적으로 세련되었으면서도

신학적으로 깊이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의 글은 안심하고 읽어도 좋습니다.

위 인용한 글도 그렇습니다.

나도 완전히 동의하는 것들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 멋지군요.

진정한 보상이라는 행동 자체의 절정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절정이 바로 보상인 거지요.

우리 모두에게는 부활생명이라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아멘.

profile

[레벨:5]lutecia

August 10, 2011
*.49.227.237

오늘도 말씀의 은혜를 받았읍니다.   주님께 감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항상 성경 안에 있는 신비가 풀려갑니다.

주님의 은총이 언제나 목사님께 있기를 기도합니다.   

profile

[레벨:29]최용우

August 10, 2017
*.62.42.226

너무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글을 쓰는데 몇줄 인용하였습니다.

쓴 글이 학문적인 글은 아니고 가벼운 칼럼이라 출처 이런것은 안 밝혔습니다.

이렇게 댓글을 다는 것으로 목사님의 글을 인용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가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10, 2017
*.201.102.200

앗, 6년 전 설교를 읽으셨군요.

제 글을 인용해주셨다니

제가 오히려 감사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05
748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비유 (막 4:26-34) [5] 2018-06-17 6662
747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10] 2018-06-11 5477
746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10603
745 성령강림절 거듭남과 성령 (요 3:1-13) [2] 2018-05-27 8078
744 성령강림절 성령이 도우시리라! (롬 8:22-27) [4] 2018-05-20 5824
743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6973
742 부활절 성령 임재의 증거 (행 10:44-48) 2018-05-06 7661
741 부활절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4] 2018-04-29 7244
740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5562
739 부활절 예수의 살과 뼈 (눅 24:36-48) [4] 2018-04-15 7825
738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9014
737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513
736 사순절 예수의 죽음과 매장 (막 15:33-47) [4] 2018-03-25 7363
735 사순절 예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요 12:20-33) [4] 2018-03-18 6625
734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11819
733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16
732 사순절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7] 2018-02-25 8338
731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1
730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7300
729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611
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5838
727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6487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2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01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648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7401
72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7726
721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3] 2017-12-11 15683
72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0812
719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6759
71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16
717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6578
716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620
715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08
714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7566
713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30
712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2017-10-08 8191
711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05
71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18
709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774
708 창조절 죽음 넘어! (출 12:1-14) 2017-09-11 8183
707 창조절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6] 2017-09-03 7801
706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468
705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2881
704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83
703 성령강림절 빈 들에서 배불리 먹다 (마 14:13-21) [8] 2017-08-06 8049
702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4987
701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47
700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881
699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240
698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108
697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59
696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368
695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807
694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266
693 부활절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8] 2017-05-28 7741
692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474
691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826
690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19
689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742
688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393
687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650
686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6888
685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5978
684 사순절 영적 시각 장애 (요 9:35-41) [2] 2017-03-26 8181
683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653
682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357
681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29
680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7
679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03
678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5
677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770
676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03
67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399
674 주현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4] 2017-01-15 8231
67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34
672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2979
671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000
670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700
66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19
668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54
66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076
66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1
665 창조절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4] 2016-11-14 8227
66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39
663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695
662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32
661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586
660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465
659 창조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15] 2016-09-04 8269
658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267
657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048
656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47
655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4
654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072
653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106
65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15] 2016-07-17 15084
65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골 1:1-14 [9] 2016-07-11 7994
6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16] 2016-07-03 6506
649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2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