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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702 추천 수 0 2011.08.29 09: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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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태복음 16:21-28 

종말과 생명 완성

마태복음 16:21-28, 성령강림절후 11째 주일, 2011년 8월28일

 

     “예수는 누군가?”라는 질문은 복음서의 중심 주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서 신앙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훌륭한 윤리선생이나 사회운동가였다면, 또는 복을 불러오고 화를 내쫓는 심령술사였다면 우리의 신앙은 그런 수준에 떨어지겠지요. 이 질문을 가장 분명하게 다루고 있는 본문은 마태복음 16:13-20절(막 8:27-30, 눅 9:18-21)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대답이 당시에 예수님을 비교적 우호적으로 본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유대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도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베드로의 입을 빌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변입니다. 선지자라는 대답과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은 천양지차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선지자는 대사이고, 그리스도는 대통령입니다. 선지자는 중매쟁이라면 그리스도는 신랑이나 신부입니다. 선지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그리스도는 복음 자체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신앙을 걸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믿지만 예수님 당시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바울은 그 상황을 고전 1:23절에서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인류를 구원해야합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는 마치 조난당한 사람을 구출하러 온 사람이 사고로 죽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죽은 자를 구원자로 인정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도 교회 밖의 사람들 중에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교회 안의 사람들도 상당한 경우에는 예수님을 오해하거나 십자가 사건을 오해합니다. 지금도 그렇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의 항변

     마태복음 기자는 이런 상황을 오늘 설교 본문인 마 16:21-28절에서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제 이런 정체성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결국 죽은 뒤에 제삼일 만에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셨습니다.

본문 22절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이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항변했습니다. 의외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그런 길을 가야만 했다면 제자를 대표하는 베드로는 힘을 내시라고 하든지 자신들이 도울 일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말하는 게 당연합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부활까지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겁니다.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우선 베드로는 고난과 죽음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부활이라는 말을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또는 당시에 부활은 별로 실질적인 개념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부활을 고난과 한 묶음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이런 대목을 놓고 본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의 실질적인 의미를 몰랐다는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즉시 아주 심하게 책망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 바로 직전에 최고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이제는 혹독한 책망을 받은 겁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24-26절에서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의 일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25절) 가능한대로 고난당하지 않고 죽지 않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쌓는 길입니다. 그것이 곧 ‘온 천하’를(26절) 얻는 길입니다. 그것은 아주 합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돈이 있어야 교육도 잘 받고 의료혜택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돈만 많다면 무상급식만이 아니라 무상교육과 무상의료까지 아무 잡음 없이 처리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인생을 그런 것을 얻는 데에 쏟습니다. 예수님은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절) 정리하면, 제 목숨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사람의 일이고,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결국 목숨을 잃게 하고, 하나님의 일만이 목숨을 찾게 합니다. 이런 설명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이해가 가나요? 아니 동의할 수 있나요?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이 생명이 오늘 본문에는 ‘목숨’으로 표현됩니다. 생명을 가리키는 헬라어는 두 가지입니다. 조에와 프쉬케가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 14:6절에 나오는 조에는 일반적인 생명이라고 한다면 위 본문에 나오는 프쉬케는 내적인 생명을 가리킵니다. 헬라어가 이렇게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생명의 실체를 아직 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큰 틀에서는 조에나 프쉬케나 그냥 똑같이 생명이라고 번역해도 좋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프쉬케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에 따르면 온 천하를 얻는 것과 생명을 얻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모든 기업체의 주식을 손에 넣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5분만 숨을 멈추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온 천하를 얻는 일에만 마음을 두는 것이 곧 25절이 말하는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23절이 말하는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비교적 분명한데 반해서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의 일은 생명을 잃게 된다면 하나님의 일은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절)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냥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잃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교를 말할까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런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반드시 순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24절이 말하듯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제 목숨을 구원하려는 수고와 반대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각자 다릅니다. 각자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자기 절대화, 즉 자기 숭배로부터의 해방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을 얻습니다.

 

     인자와 영광

     이 생명도 어떤 분들에게는 막연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서 산 사람들은 오히려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실제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생명은 그것과 다른 것입니다. 이 생명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생명은 무상합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똑같이 죽고 썩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흔적은 되지만 궁극적인 생명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생명은 종말로부터 옵니다. 이 사실은 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기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종말에 올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영광은 궁극적인 생명의 능력입니다. 천사들은 그 능력을 실행하는 메신저를 가리킵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는다는 말은 사람의 일만 생각했는지, 또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했는지에 따라서 생명을 허락하기도 하고 거절당하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온 천하를 손에 넣은 것처럼 떵떵거리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이 종말론적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비록 고난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참여하게 된다면 실제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닥쳐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종말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 완전히 치우쳐서 살아갑니다. 그 종말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오해가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지난날 신자들을 피안적인 신앙으로 몰아가서 역사 앞에서 무책임하게 살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일종의 역사 허무주의에 빠진 겁니다. 생명을 종말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것과 다릅니다. 생명의 근원이 종말로부터 주어진다는 인식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원인들이 미래를 기계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능력이 오히려 과거를 끌어간다는 영적 통찰입니다. 바로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바로 이 종말론적인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사실과 온전히 하나가 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님이 바로 종말론적 생명의 주체가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인자이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종말에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분이라는 겁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생명이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닙니다. 그것을 본문 28절이 이렇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제자들이 죽기 전에 종말이 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런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그는 묵시적 열광주의자에 불과했을 겁니다. 이 말씀은 종말의 참된 생명이 신비의 방식으로 오늘 우리 삶에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역에 없으시겠지요.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지만 곧 죽음의 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개인적으로 종말입니다. 지금의 우리와 죽을 때의 우리는 신비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의 선을 물리적으로 따라갈 수는 없지만 실재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죽는 순간을 생각하기 어렵다면 지금과 10년 전의 여러분을 생각해보세요. 오늘의 여러분이 10년 전의 여러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의 실존이 10년 전의 실존에 신비한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생명을 완성하실 종말의 빛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역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론적 생명 완성의 역사적 선취사건입니다. 하나님 홀로 주인이신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세상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온 천하를 얻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아니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생명이 완성될 종말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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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August 29, 2011
*.179.178.110

목사님,

은혜로운 설교문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 14:6절의 생명(조에)를 "일반적인 생명"으로 풀이하셨는데

예수님이 과연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조에로 지칭했을 때는 일반적인 생명 보다는

오히려 참 생명을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길, 진리, 생명과 일치시켜 설명했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생명만이 <일반적인 생명>을 뜻한다면 일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구원의 상태에서 누리는 인간의 복된 삶(이것은 반드시 지상의 목숨이 끊어진 후 부활체로서 사는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속박에서 해방된 삶, 정말 사는 것처럼 사는 참된 삶이 헬라어 조에의 본뜻이 아닌가 싶은데요. 

조에를 푸시케와 대비하는 바람에 조에의 의미가 일반 목숨과 비슷하게 처리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 비스무리하게 여쭈어 봅니다.

의혹은 생겼지만 그래도 설교의 내용은 이해하기가 쉬워서 아주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참 본문과는 상관없는 질문인데요

오늘 성경을 읽다가 사무엘 하(24장)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감동시켜 인구조사를 하게 후에

다윗을 벌 주는 장면이 나오는군요.

차라리 <여호와> 대신 <사탄의 유혹>으로 기록되었다면

독자들이 훨씬 더 이해하기 좋았을 텐데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군요.

하나님께서 충동질 시켜 놓고 벌까지 주시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요.

이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에 속하는 영역인지....

 

그런데 똑같은 사건이 역대기 상에서는 <여호와>가 아닌

<사탄>으로 기록해 두었더군요.

왜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런 차이가 나는걸까요?

이런 차이는 보통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엄청난 차인데 말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정확한 건가요?

다윗을 격동시킨 주체가 사단이라는 역대기상이 옳은지,

여호와로 기록된 사무엘 하가 옳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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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9, 2011
*.185.31.7

오메가 님,

좋은 부분을 지적하셨네요.
조에와 푸시케가 어떻게 다른지는

내가 아직도 정확하게 모릅니다.

생명을 가리키는 그런 단어가 신약에 나온다는 걸 말한 것뿐이에요.

헬라서 사전을 다시 찾아봤는데도

여전히 명확하지가 않군요.

이럴 때는 신약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데요.

다비안 중에서 이걸 좀 잘 설명해주실 분이 없을까요?

사전에 조에는 생명(life)로 나와 있네요.

그 뒤로 부연설명은 여럿 나와요.

타나토스(죽음)에 반대되는 의미로 '육체적 생명에 대해'라고 되어 있기도 하구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 생명이라는 뜻도 있네요.

푸시케는 soul, life라는 뜻으로 나와요.

또는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이라는 뜻도 있구요.

복잡하지요?

문맥에 따라서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가 설명해줄 때까지 기다려봅시다.

 

두번째 질문은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에요.

동일한 사건이라도 성서기자의 관점에 따라서

하나님의 행위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의 일이기도 합니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책임을 물어서 징벌을 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그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말이 됩니다.

이 세상의 궁극적인 통치자는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다윗을 격동시킨 주체는 하나님이지만,

악한 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탄이 주체가 되겠지요.

하나님이 유일한 창조주라는 사실도 진리이고,

악의 현실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도 진리거든요.

그렇게 이해가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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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August 29, 2011
*.23.36.90

먼저 그의 의와 그의 나라를 구하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을 동시에 섬겨야하는 삶 속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오늘 설교 말씀을 읽으며

이천년 전 십자가 사건이 지금 바로 제 눈 앞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식하며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조금이나마 동참하기 위해

하나씩 하나씩 자신을 부인해 가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시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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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9, 2011
*.185.31.7

눈사람 님,

신앙적인 큰 틀과

실제 삶의 작은 틀을 균형 있게 살아가기가 쉽지 않지요?

그냥 버텨내는 게 최선입니다.

자기에게 나타나는 부끄러운 모습도 그냥 안고 가는 거에요.

자신을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그게 잘 되지는 않을 겁니다.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주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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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August 29, 2011
*.109.42.2

목사님 여름 수련회 건강하게 잘 다녀오셨습니까? 정말 뵙고 싶구요 수련회 가고 싶었는데 집안일과 회사일이 같이 겹쳐서 못갔습니다.

많이 힘드셨죠 다음에는 꼭 가겠습니다. 그리고 가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을 느끼고 바라보는 사람에게 인지 되는 특별한 생명사건임을 믿습니다.  생명경험을 하루에도 수많이 하면서도 인지하지 못하듯이 종말에 대한 경험도 멀리만 있는 것은 아닌데 제영성의 부족함을 반성합니다. 하루하루 예수님의 말씀을 그냥 치는 삶을 살지 않으며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말씀에 귀기울이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종말과 생명완성의 의미를 어렴픗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정말 부족합니다.목사님! 답답하기도 하구요  몇번씩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겠습니다. 말씀.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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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9, 2011
*.185.31.7

삼송 님,

예, 수련회 잘 다녀왔습니다.

종말과 생명완성의 의미를 어렴풋이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명확하게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 어렴풋한 시야가 조금씩,

정말 시나브로 선명해질 겁니다.

단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조명이 전제될 때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 신학, 예전 등을 공부하는 것도

성령 조명의 매우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구도적인 길을 잘 가보세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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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August 30, 2011
*.99.193.27

"궁극적으로 생명을 완성하실 종말의 빛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역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이것이 복음일텐데..이 사실에 각성되는 또는 지적 호기심이 총족되는 전율을 느낍니다.

 

어떻게 이 현실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이런 사실에 접근할수록 가끔 외롭다는 인간적인 생각도 해봅니다...

 

매번 그렇지만 놀라운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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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30, 2011
*.185.31.7

상수리 님,

.... 충족되는 전율을 느끼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앙경험은 놀라움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행위에 놀라운 거지요.

외롭게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 사실 앞을 혼자 직면해야만 하기 때문이에요.

외롭지만 자유로울 거에요. ㅎㅎ

진도를 잘 나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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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삐쭉이

August 31, 2011
*.182.131.202

목사님 설교는 아직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금씩 이해가 되는군요. 감사^^

 

궁극적인 생명이라는 존재가 정말 현실의 지금 감각사회에서는 잘 와닿지가 않는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그 존재를 확신하게 됩니다. 그런 확신이 자라는데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한지...

그렇게도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데 유대인도, 한국인도, 나도 그누구도 쉽게 되질 않으니...ㅎㅎ

 

하지만 목사님! 목사님의 '투쟁'이라는 말이 이럴때 깊이 와닿습니다. 절대 이길수없는 실존앞에 우리의 삶의 자리에 대한 정확한 표현인것 같아요^^ 그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물론이고 인간간의 연결도 이루어지는것 같아요.

또한 현재는 과거로 인한것이 아니고 미래가 당기는 것이다는 말씀도 너무나 우리에게 힘이됩니다.

 

아무리 봐도, 지난번 나무앞에서 팔짱낀 사진보다는 바다에서 찍은 지금사진이 더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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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1, 2011
*.185.31.7

삐죽이 님,

'...조금씩... 확신하게...얼마나 많은 수고가...'

이런 표현들이 대단히 중요한 거에요.

구도와 수행의 삶이 거기에 표현되어 있어요.

세상 안에 던져진 우리의 실존이 바로 거기에 있어요.

그 사태를 아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느슨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가능하면 예민하게 느끼면 살아야겠지요.

잘해 봅시다.  

profile

[레벨:3]jhon

September 02, 2011
*.111.243.242

샬롬! 

정목사님!

폭염과 폭우에 건강하게 잘 지내셨는지요?

로그인 하지 않고도 글을 대할 수 있어서 회원 자격으로 접속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매주 목사님의 설교를 대하는 것이 제겐 큰 기쁨이자 도전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늘 새롭지만, 금주의 '종말과 생명 완성'은 더욱 빛을 발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신 나날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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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2, 2011
*.185.31.7

요한 님,

안녕하세요?

제 설교에 공명이 되었다니 저도 기쁘군요.

시시할 때도 좋게 읽어주세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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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더럼

September 03, 2011
*.69.124.34

정 목사님

자기 절대화 즉 자기 숭배화에서 해방

이라는 말이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구조를 탓하지만

그 이면에서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숨기는 경우도 없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해방의 길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 주었는데도 

은폐된 자기 중심의 사고와 행동에서 한 발짝 증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회개와 반성을 한다고 하지만...

생명의 열매를 맺을 때 까지 그 분을 생각하면서 한발짝

나아가야 한다는 미션을 설교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습니다.

 

행복한 주일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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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3, 2011
*.185.31.7

예, 더럼 님,

지난 수련회 때 함께 시간을 보낸 걸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제 한국에서,

특히 포항에서 더럼 님이 할 일이 많겠지요.

그동안 고생하면서 마친,

아니 기초를 다진 공부가 큰 결실로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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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September 04, 2011
*.220.104.49

자기 절대화, 자기숭배로부터 벗어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

그때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생명, 생명 하니까 죽는 것부터 생각을 해왔었습니다. 죽는 것, 끝나는 것, 그리고 죽음 뒤는 ?

사실 이런 생각을 늘 성경을 읽으면서 잊으려 애써 왔었습니다.

 오늘 오전 새로운 생명의 의미를 또 알게 됩니다. 100% 모양은 같아 보이는 하루하루 이지만

머릿속은 새로운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생명, ,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 나아가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차이는 01의 차이 입니다.

이게 글로 표현이 잘 안 되는 군요. 새롭게 사는 것은 새로운 삶이요, 그게 새 생명을 얻는 결과 인 것 같습니다. 왜 새롭게 살게 되었나, 나를 놓아 버렸다. 아까운 것 같지만 구조 변경이 안 되는 나를 버렸습니다. 병 속의 커가는 병아리를 해결한 기분입니다.

오늘 아침 새 생명을 얻는 순간과 과거의 생명을 신령한 종말이 선을 그어 놓았습니다.

이 새로운 생명이 나를 이끌어 가다가 주님 앞에서 또 다른 종말을 맞이 하게 하겠지요.

새로운 사실을 아는 것보다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의 순간 만큼 가슴 벅차 오릅니다.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4, 2011
*.185.31.7

진인택 님,

병 속의 커 가는 병아리... 음,

화두네요.

자신을 옥죄고 있는 병을 깨버린 건가요?

매 순간이 깨우침으로 이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삶이겠지요.

이제 내일부터 추석을 앞둔 한 주간이 시작되네요.

좋은 시간들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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