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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창조절 조회 수 18302 추천 수 0 2011.11.21 21: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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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명기 8:11-18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명기 8:11-18, 창조절 열둘째(추수감사) 주일, 2011년 11월20일

 

     오늘 설교 본문인 신 8:11-18절은 진부해 보입니다. 소위 ‘신명기사관’의 논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신명기의 역사관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이런 말씀은 마치 조상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섬기지 못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동양의 유교적 가르침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신명기의 이런 말씀을 좀 유치하다고, 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일단 세상살이를 겉으로만 보면 그런 주장이 옳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늘 복을 받았거나, 거꾸로 불순종했다고 해서 늘 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복과 벌은 기계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생활이 아무리 좋아도 복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도 복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명기 기자가 이런 세상살이의 이치를 모르고 하나님의 복과 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고유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천천히 따라가겠습니다.

 

     광야와 가나안

     신명기는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행한 모세의 연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충고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모세의 연설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가나안에 들어가서 왕조를 세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예언자들의 설교입니다. 미래에 벌어질 문제라기보다는 과거에, 또는 현재 벌어진 문제에 대한 예언자들의 영적 통찰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든다면 신자유주의 체제 앞에서 살아가는, 특히 FTA 체제 앞에서 살아가야 할 대한민국 사람들을 향한 목사들의 설교와 비슷합니다. 신명기 본문은 관념적이고 일반적인 종교적 훈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 대한 분석, 경고, 대안 제시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본문에서 광야의 삶과 가나안의 삶을 대비합니다. 광야의 삶은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던 시절을 가리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이스라엘은 소수민족으로 소외당하던 애굽을 탈출한 뒤에 광야에서 생존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을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신명기 기자는 이 끔찍한 광야시절을 오히려 복된 시절로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존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이 낮아졌기 때문입니다.(16절) 겸손해졌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겸손해진 이유는 생존의 근원이 자기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겸손이 바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는 겁니다.(16절)

     이와 달리 가나안 시절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의 가능성이 높은 시절이었습니다. 이유는 풍요에 놓여 있습니다. 광야의 유목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정착해서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소유가 늘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가나안에는 아름다운 여인들과 잘생긴 남자들도 많았습니다. 풍년과 다산을 기념하는 축제도 흔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을 엔조이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추어졌습니다. 거칠고 척박한 광야와는 완전히 다른 삶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이런 풍요의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교만해진다고 보았습니다. 교만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가나안의 풍요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교만해졌다는 사실은 좀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어야만 했는데, 왜 교만해졌다는 것일까요? 신명기 기자가 현실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난은 겸손하게 하고, 부는 교만하게 하나요? 그리고 실제로 가난한 사람은 겸손하고, 부자는 교만한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교만한 사람도 있고, 부자지만 겸손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전체로 보며, 즉 시대정신에서 보면 가난이 겸손하게 만들며, 부가 교만하게 만든다는 말을 옳습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나라 사람들은, 졸부가 된 대한민국에서 그런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듯이,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과 부의 문제는 아주 미묘하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는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전인수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의 첫 항목은 가난한 자에 대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누가복음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나 누가복음이 말하는 가난한 자나 기본적으로는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면 마음도 가난하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신명기 기자의 표현으로 바꾸면 겸손입니다. 이것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난한 자는 자기의 능력을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는 이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무언가를 소유하기 때문에 복되다는 게 아니라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복되다는 겁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가난한 교회가 복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거꾸로 부자교회는 교만할 위험성이 많습니다.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문제를 세상의 법정에 끌고 가서 해결하려는 교회들을 보십시오. 거의 다 부자교회입니다. 이런 점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 부자교회가 된다는 것, 부자나라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나라들은 정말 예민하게 자기를 통찰해야 합니다. 그런 영적 성찰을 게을리 하면 순식간에 교만에 떨어집니다. 혹시 교만해지더라도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또는 부자가 되더라도 겸손하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분들이 계신가요? 예, 여러분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그러나 가나안의 풍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는 신명기 기자의 경고를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기억하라

     지금 저는 여러분들에게 가난의 미학을 음미하라고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가난은 부 못지않게 우리의 삶과 영혼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가치와 질서를 파괴시킬 수도 있습니다. 가난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기자도 생존이 위태로웠던 광야시절도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게 아닙니다. 그 시절은 이미 지났습니다. 아무도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5백 년 전 농경문화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를 하던 우리의 어린 시절이 아무리 낭만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신명기 기자는 지금 풍요의 신 바알로 대표되는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언급하는 중입니다. 이들은 가나안에 집단 이주해서 자기 명의의 집도 장만했고, 잔액이 넉넉한 저금통장도 마련했고, 노후연금도 갖췄습니다. 어느 정도 살만하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바로 이 순간에 영혼의 위기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그 위기는 앞에서 말씀드린 자기신뢰인 교만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명기 기자의 대답은 18a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가나안의 풍요로 인해서 영적인 교만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상투적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교회생활을 잘 하라는 말씀으로만 받으면 안 됩니다. 교회생활은 물론 필요합니다. 가능한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훨씬 근원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그가 누군지를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요? 그분이 어떻게 세상을 통치하시나요? 신명기 기자에 따르면 하나님 여호와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살아갈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8b절)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실을 실제로 안다면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더 나가서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모든 소유, 자기가 이룬 모든 업적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재산은 물론이고, 학문적 업적과 예술도, 그리고 자식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따로 있는데 어떻게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추수감사절이기도 합니다. 땅에서 나오는 모든 먹을거리들이 결국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그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먹을거리를 독차지할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는 하지만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이요, 수여자로 생각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집중, 자기관심, 자기연민이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는지 모릅니다. 마치 그림자와 같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죄의 본질을 교만(휘브리스)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걸 우리의 노력으로 떨쳐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운명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는 인간 본성과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하나님 말씀 사이에 오도 가도 못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두는 것 같고, 또 어떤 때는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중첩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시계추처럼 오갈지도 모릅니다.

     이 딜레마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요? 죽기 전까지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만, 즉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생명체로 변화되어야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때를 우리는 기다립니다. 우리와 더불어 이 세상 모든 피조물도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립니다. 아직 종말이 오기 전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 딜레마를 그냥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체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종말의 생명을 기다리면서 구도적인 태도로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게 최선입니다.

     구도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생명이 어디서 왔느냐에 대한, 그리고 그 생명이 어떻게 완성되느냐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이며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죽음을 극복하신 유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기억을 통해서 여러분은 어떤 형편에서도 영적으로 겸손하게 될 것이며, 당연히 하나님의 놀라운 복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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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참믿음

November 23, 2011
*.177.73.140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 신명기 설교하실때면 항상 신명기사관을 언급하시네요ㅎ

오늘 우리들 신앙이 대부분 신명기사관을 문자적으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대부분 목사님들 설교 또한 그렇습니다. 심층적 깊이를 들여다 보지않지요

역사의 흐름을 조금만 비춰보면 알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중심에 근거해서 역사를

끌고 가신다는것에 집중해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흐름에 속지말고

세상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와 져야 겠지요

 

자유를 세상에 외치는게 그리스도인의 사명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유는 곧 예수님 희생의 값진 선물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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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3, 2011
*.185.31.7

앗, 여기 다시 참믿음 님이 대글을 다셨군요.

세상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지적은 정말 중요한 겁니다.

그게 물론 자유방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묶인 자의 자유지만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계는 참으로 넓고 깊습니다.

우리 신앙 선배들이 2천년동안 닦아놓은 길이 있어요.

천천히 그 길을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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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天命

November 23, 2011
*.62.0.143

가난한 자가 복이 있드시

가난한 교회가 복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물론 가난한 교회란 있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

 

모든 지체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아끼고, 귀하게 생각하는 그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누리고 맛보고 있는 교회가

이 땅에 더욱 퍼져나가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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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3, 2011
*.185.31.7

이재천 선생님,

그렇지요?

가난이 풍요이고,

풍요가 가난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가난한 교회이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으니 풍요로울 수밖에요.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세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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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November 23, 2011
*.220.104.49

마음이 가난한자, 겸손한자, 자기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기가 쉽지 않고 잊고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형편이 나아지면 가난한자를 우습게 보고 형편이 어려워지면 가진 자에게 가난의 원인을 돌립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 새로운 색깔의 안경을, 형편에 맞는다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안경을 슬며시 바꿔 낍니다. 때로는 알면서 때로는 남들 몰래... 부자였다가 망해서 가난하면 차도 버리고 집도 버리고 카드도 버리고 심지어 핸드폰도 때로는 반쪽만 작용하고 전화도 받을 때면 구석에 가서 조용조용 받습니다. ,네 몇 마디 하고 알았습니다...로 끝납니다. 더 나아가서는 벌이도 밑바닥에 가서 온갖 몸으로 굴리는 일들을 하고 그 동료들로부터 포기와 안주와 이기심을 습득합니다. 가난이 겸손을 빈 맥주 캔처럼 쭈그려 트려 버립니다.

어제까지, 작년까지 집주인 눈치보다 제집 장만하고 차 굴리고 카드 부담 없이 긋고 최고급 핸드폰으로 큼직하고 시원스런 언성으로 손사래를 쳐가며 남들 들으라는 듯이 으스대면서 통화 합니다.

겸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짜증내는 가난한자, 으스대는 약간 부자

양쪽을 모두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난한자는 부자에게 빌 붙으려 하고 부자는 자신에게 더욱더 의지하려 합니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가장 큰 것 같은 기둥이지만 가장 얇은 기둥에 자신의 희망을 붙들어 매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기둥이 나를 지켜줄 것 같았지만 넘어지고 깨지고 부러질 때서야 가진 것이 없다는 걸 알곤 하였습니다. 마음 또한 우울하고 부와 가난은 어디서부터 오고 나가는가에 만 매달려 왔습니다. 짜임새 있는 전략과 경영이 능률을 올리고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가는 것 같지만 머릿속이 너무 달아오르고 맥이 과도히 뛰면 이미 그건 겉은 성공이지만 속은 여러 명 명단축하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매일 아침 내가 복을 받는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전에는 생각에 생각을 하면서 출근했었습니다. 아침부터 부담스럽게 입장하면 저녁에는 파김치 되는 것 보장해놓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 일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내 마음의 이 끝과 저 끝 사이를 비워둡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의 문을 열고자 기도하고 노력합니다.

내 마음에 온갖 생각을, 그것도 성공을 당겨와서 미래상을 꿈꾸지 않습니다. 내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주시고 결과가 나를 이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일의 결과는 실패와 성공이 섞여 있을 지라도 성공에 호들갑 떨지 않고 실패에 낙담과 원망을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실패는 은혜를 더 크게 주시려는 또 다른 하나님의 새로운 손길입니다. 수많은 땀과 노력과 시도는 헛된 욕망과 교만한 것이 아니고 은혜의 문을 크게 열려고 하는 부지런한 종의 고유의 모습니다. 너무 견디기 힘든 업무의 압박에도 하나님께 기도를 잊지 않습니다. 나를 비우고 나를 낮추고 아는 것이 없다고 간절히 기도 할 때 마다 한걸음씩 한 단계씩 나아갔습니다. 오늘 오후에도 정말 부담스런 테스트가 있지만 계획보다, 기술보다는 기도를 드립니다.

목사님,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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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3, 2011
*.185.31.7

진인택 님은 생각도 많으시고,

관심도, 질문도 많으시고,

할 말씀도 많으시군요.

근본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나타나는 겁니다.

어떤 결과에 이르든지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선한 뜻이며,

거기서 참된 영적 만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거지요?

그게 순간적으로 흔들릴 때가 있겠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능력만 있으면

우리의 영적 성장은 분명히 주어질 겁니다.

주님이 도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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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November 23, 2011
*.214.88.117

목사님, 말씀 잘 읽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신대로 회개가 인간의 마음중심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라고 했는데

부패한 인간이 마음을 하나님께 두며 산다는 게 가능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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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3, 2011
*.185.31.7

오메가 님의 질문은 중요하고도 대압이 어렵기도 합니다.

회개는 불가능한 거 맞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만족하실만큼의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이 말은 곧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회개는 '믿음'과 같은 차원의 문제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믿으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믿는 만큼 회개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완전한 믿음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가능합니다.

하나의 과정으로 믿음의 길을 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회개의 삶은 가능합니다.

하나의 과정으로 회개의 길을 가는 겁니다.

칼 바르트 식으로 말해서

회개는 불가능한 가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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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November 24, 2011
*.157.235.2

한동안 뭐가 그리 바빴는지 최근 들어서 다시 목사님의 설교를 집중해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맞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 그 것 만큼 큰 불행은 없는데 우리의 삶의 행태는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네요... "우리" 라고 하면서 뒤에 살짝 숨을 것이 아니라 "저"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야지 더 맞겠지요...

 

있는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 그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닫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일용할 것 이상 넘치는 것이 있다면 일용할 것 조차도 박탈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것을 나눌 줄 아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더 큰 행복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우리의 삶, 저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매번 말 뿐이지만, 최근에 한진중공업의 김진숙 님의 희생을 보면서 깊은 부채 의식을 느낍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살아 계시는 예수는 이 순간에도 어떤 의로운 사람들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박하며 희생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 희생에 눈 길 조차 주지 않네요... 다들 대제사장, 빌라도, 헤롯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듯 합니다... 저도 포함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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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4, 2011
*.185.31.7

첫날처럼 님,

잘 지내지요?

귀여운 남매들도 많이 컸겠네요.

난세라면 난세인 이럴 때는

자기 한몸 건사하기도 버겁지요? ㅎㅎ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은 더 절실합니다.

그것은 곧 생명의 본질과 신비를 직면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것은 개체적이면서도 연대적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지요.

우리 곧 다 죽습니다.

힘을 내서 살아봅시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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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1, 2011
*.185.31.7

첫날처럼 님,

오랜 만입니다.

이 대글을 이제야 보았습니다.

이전에 보긴 했지만 아차 하고 지나쳤나 봅니다.

금년 한해도 한달밖에 남지 않았네요.

힘차게 살아봅시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고,

자책하지도 말고,

힘차게, 그러나 서두르지 말고,

점잖게, 그러나 밋밋하지 않게,

다른 이들과 더불어, 그러나 고유하게 살아봅시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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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November 26, 2011
*.154.137.83

교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설교 "하나님을 기억하라"

말씀 감사합니다.

매 순간 호흡하듯이

온 우주에 가득한 그분의 존재앞에

감사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림절의 빛이 하나씩

밝혀 질 때마다 하나님의 기다림, 하나님의 오심을

더 깊이 묵상합니다.

 

복된 주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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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1, 2011
*.185.31.7

달팽이 님,

이 대글을 놓쳤다가 이제야 봤네요.

대림절의 빛이 우리 인생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어야겠지요.

달팽이 님은 나처럼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대림절 영성으로 사는 분이니

부럽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12월이 시작되었네요. 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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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November 30, 2011
*.115.231.67

목사님,

내가 죽고 없는데 어떻게 종말에 예수님의 의를 확인할수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진정 종말에 새로운 차원의 궁극적인 구원이 일어난다면

그 구원이 과연 지금의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을지 난감하기도 합니다..

저는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 땅에서 실현 되어야할  운동이자

또한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키고자 한 본질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데 

종말에 궁극적인 구원이 일어난다는 오늘의 말씀은 다소 추상적인 말씀으로 들리기도 하는군요..

좋은 가르침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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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30, 2011
*.185.31.7

별달 님,

솔직한 질문을 하신 겁니다.

그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많은 이야기가 필요한데요.

줄여서, 간단히, 요점만(ㅎㅎ) 대답하겠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운동'이라고 하셨지요?

여기서 '운동'을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책임감으로 생각하면 틀린 말이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도록 인도해 달라가는 기도는 잘못된 거구요.

우리는 죽었다 깨도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없답니다.

이게 질문의 핵심은 아니지요?

종말의 생명이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는 거지요?

추상적인 거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니까요.

추상적이라는 말이 옳다고 한다면

세상의 모든 삶이 추상적인 거랍니다.

예수님은 사회혁명가가 아니에요.

도덕군자도 아니고,

상담가도 아니고, 점쟁이도 아니에요.

사회개혁 운동을 하려면 예수 믿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운동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부수적인 거라는 뜻이에요.

예수의 정체성을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부활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이 왜 재림을 희망했는지를 말입니다.

내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아도 실망하지 마세요. 

12월을 행복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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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December 01, 2011
*.115.230.157

목사님, 저의 우둔한 생각으로는

예수님은 죽었다 깨어나도 실현되기 힘든

그 하나님 나라 도래의 방식을 몸소 가르치시다가 결국 십자가에서 돌아 가신것 같은데요.. 

 

목사님의 말씀대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부활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이 왜 재림을 희망했는지를 

저는 아직도 정확하게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님께서 기회가 되신다면 이 다음에라도 좀 가르쳐 주십시요

목사님,

그러고 보니 한해의 마지막 달이로군요..

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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