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020 추천 수 0 2013.06.02 22:13:45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0602.mp3 
설교보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130602.wmv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1:1-10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성령강림후 제2주, 6월2일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예수님의 제자는 열두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시몬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에 이릅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명단에서 빼고 맛디아를 충원했습니다. 사도들을 말할 때 논란이 되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생전에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제자로 부름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맛디아는 그런대로 초기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람이지만 바울은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자칭 사도였습니다. 신약성서에 들어온 그의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사도성을 일관되게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주장할 수 있었던 근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나도 사도다.’ 하는 바울의 태도가 못마땅했을 겁니다. 바울도 주변의 그런 시선을 의식했습니다. 그게 일종의 자격지심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편지를 쓸 때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사도직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또 자기의 사도직이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했다는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상황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사람들인데, 왜 사도직 문제로 갈등을 보이느냐 하는 겁니다. 사실은 사도직은 부차적인 겁니다. 더 본질적인 차이는 복음의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 논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런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로 분리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 기독교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이방 기독교만 살아남았습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신학적 갈등의 단초가 갈라디아서에 소상하게 나옵니다.

 

다른 복음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우선 간단하게 인사를 한 다음에 다짜고짜로 이렇게 질책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표현이 거칩니다. 상황이 상당히 다급해 보입니다. 바울이 정신적으로 좀 과민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갈라디아 신자들의 신앙이 크게 흔들린 건 분명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더 나가서 바울은 8,9절에서는 그들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외칩니다. 그가 말하는 다른 복음이 뭐기에 위대한 신학자이고, 영성가이며, 선교사이자 목회자인 바울이 체면 불구하고 저주를 입에 담는다는 건지요. 여기에는 뭔가 그럴만한 사연이 숨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바울은 갈 1:11절 이후부터 그 사연을 상세하게 언급합니다. 그는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3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베드로를 만났고, 또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이나 지도자들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를 별로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14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신학도 더 깊어졌습니다. 복음 사역의 성과도 나타났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일단의 사람들이 바울의 선교사역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 가서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 겁니다. 바울은 갈 2:4절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이 거짓 형제의 목소리가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이 상황을 여러분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금 바울과 대립하고 있는 이들은 사이비 이단이 아니라 정통 기독교에 속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구성원들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사도들과 함께 교회를 꾸려가던 사람들로서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처음 모임을 시작한 120 여명에 속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 중의 일부는 사도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서 소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교회를 관리했습니다. 이들의 수고로 초창기 기독교가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의 초석을 세운 이들로서 존경을 받아야 할 분들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거짓 형제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바울이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그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이방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화를 낼만 합니다. 미국의 노예 해방을 돌아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흑인들을 향해서 다시 노예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시다. 노예 해방을 위해서 투쟁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런 이들의 말은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바울의 입장이 바로 그와 같은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출교를 각오하고 당시의 로마가톨릭 교황주의에 저항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과 대립하고 있던 이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복음에만 머무르지 말고 토라와 할례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통칭 그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한 마디로 거절합니다. 갈 2: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의 이런 신학적인 진술이 단순히 교리논쟁이 아닙니다. 그는 율법이 복음을, 그리고 교회의 공동체성을 어떻게 훼손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 2:11절 이하에서 안디옥에서 벌어졌던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게바(베드로)는 안디옥에 들려 이방인과 함께 밥을 먹다가 예루살렘의 야고보가 파송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피했습니다. 바나바를 비롯한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를 따라서 자리를 피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유대인이 이방인과 밥을 같이 먹으면 안 됩니다. 트집잡힐까 염려해서 아예 빌미를 주기 않으려고 베드로 일행은 자리를 피한 겁니다. 당시 그 자리에 함께 밥을 먹던 이방인들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베드로 일행이 평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라고 말하던 것과 전혀 다른 행동을 보였으니까요. 노예 해방을 외치던 사람이 노예였던 이들과 함께 어울려서 밥을 먹다가 노예 제도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온다는 말을 듣고 자리를 피한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그걸 외식이라고 규정하면서, 베드로 일행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고(갈 2:14) 비판했습니다.

 

복음의 자유

바울이 신앙의 동지로 여기던 베드로나 바나바를 비판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복음의 진리는 무엇일까요? 아미 앞에서 언급한 겁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갈 2: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게 하거나 상대화하는 세력과는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폐기처분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갈 2:21절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가 오늘 바울의 말을 빌려 ‘복음의 자유’라고 멋지게 말은 할 수 있지만 그런 세계에 들어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흔들린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는 사실 위태롭습니다. 그게 방종으로 떨어질 위험성도 큽니다. 앞에서 예로 든 노예 해방 사건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여기 평생 노예로 살던 사람이 이제 자유인의 법적 지위를 얻었다고 합시다. 그 뒤로 그에게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이전보다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일단 본인 스스로 자유가 두렵습니다. 주인의 눈치를 보던 습관도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습니다. 독립된 개체로서 당당하게 행동하지도 못합니다. 거친 행동도 나옵니다. 이 사람은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게 편하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노예해방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노예제도가 오히려 나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복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예루살렘에서 파송받은 할례파들이 율법을 다시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율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지역 신자들이 크게 흔들린 겁니다.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키는 게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볼 때 믿음과 율법을 병행하는 유대 기독교와 그 성격이 비슷합니다. 그 내용을 제가 여기서 일일이 지적하지 않겠습니다. 복음의 자유보다도 교회법과 교회 체제가 신자들의 마음을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율법적으로 믿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자체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고 그걸 핑계로 교회 생활에만 열광적으로 매달립니다.


신자들이 이렇게 복음과 율법의 문제에서 혼란을 겪는 이유는 복음과 율법 사이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복음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고, 율법은 형식입니다. 그 둘을 완전히 나눌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치자면 옷과 같습니다. 옷을 벗고 살아도 되겠지만, 문명사회에서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 자체입니다. 옷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옷이 존재합니다. 요즘은 간혹 옷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긴 합니다. 지금도 교회에 여러 제도가 있습니다. 목사, 전도사, 예배, 운영위원회, 교인총회 등은 다 율법적인 요소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몽땅 빼버리면 교회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고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불가능한 거는 아니지만 바람직한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신앙형식에 노예처럼 묶이는 데에 있습니다. 마치 옷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과 율법 사이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은 이 현실 교회에서 최선의 길은 끊임없이 교회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토론하고 합의를 통해서 과감하게 개혁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가리켜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 에스트’(끊임없이 개혁되는 에클레시아). 이렇게 구도정진의 태도로 간다고 해도 교회는 본질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교회는 현실안주의 경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대구샘터교회는 시작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2003년 6월1일 주일에 하양에 있는 천호아파트 206호에서 저희 부부와 큰딸, 그리고 권현주 선생, 이렇게 네 명이 첫 예배를 드린 게 그 출발입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교회 개척은 아니었습니다. 10년 후에 지금과 같은 교회의 모습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생각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고 싶다는 겁니다. 이런 전통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본질은 바로 예배에 오로지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대구샘터교회는 여전히 여러 가지 점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미숙한 부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교우들은 영적으로 건강하고 풍성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즉 복음이 주는 해방과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런 복음의 역동성이 앞으로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요? 그게 10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울답지 않게 할례파들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저주를 입에 담기까지 했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절절이 묻어납니다. 바울은 복음의 훼손을, 그 변질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열정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겁니다. 그의 진리 싸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독교가 가능했습니다. 그게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로 전락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지 맙시다. 그 중심으로 깊이 들어갑시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종으로 삼으려는 목소리와 싸웁시다. 대구샘터교회는 이런 복음의 진리 싸움에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령께 미래를 맡기고, 우리 모두 신앙적으로 연대하여 거룩한 싸움의 길을 함께 갑시다.


profile

[레벨:2]겐스데이

June 05, 2013
*.191.31.144

바울이 당시 고민했던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윤리적 가르침에 국한된 
생명이 잘 드러나지 않는 목사인 저부터의
문제인것 같습니다.

바울이 한 개혁을 상품처럼 
개량해서 또  율법과 윤리로  
성도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정작 내용상 고민없는 우리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만을 드러내는 사역을 언제 할지요
고민하며 해나가고 있긴한데  쉽지 않네요.

바울처럼 치열하게~!!!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05, 2013
*.94.91.80

겐스데이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로 산다는 게,
특히 기성교회의 조직체 안에서
목사로 산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인식한다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하루에 몇 번이나 들겠지요.
그래도 목사님은 고민을 하시니, 됐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을 안고 가다보면
어딘가 길이 보이겠지요.
주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를...

profile

[레벨:9]길위의벗

June 18, 2013
*.34.77.19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 에스트. 이 말이 크게 와닿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끊임 없이 질문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어느 샌가
율법적으로 신앙생활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 속해 있던 교회에서 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던게 생각납니다.
얼마 살진 않았지만 이제까지 가져왔던 신앙에 회의도 많이 했고요.

아마 평생 질문하고 고민하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막막하지만 설레기도 합니다.

profile

[레벨:5]루이스

August 16, 2013
*.150.178.63

얼마 전 활짝 피어오르는 목화꽃을 바라보고 감상하던 중  시를  적어보았습니다

믿음이 들어오면 세례가 되고 세례가 되면
주님과 한 몸 한 운명이 되고
 내 사상과 언어와 가치관과 무게중심을  그 분께 옮겨가게 되지요
주권이 그 분 임을 범사에 시인하면 자연법칙에 의해
죽은 내 토양위에 새 종자가 와서 그 형상과 모양으로 자라고 열매가 맺히게 되지요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켜지는 것이라는 당연한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지키는것과 지켜지는 것의 차이에 신학(자)과 설교(자)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한 알의 목화씨
생명 깨뜨리고
캄캄함에 눈뜨지 못했다

공허하고 혼돈하여
언 땅에 숨 죽이던
두려움의 때에
소리가 들려왔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실아간다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라고

사노라니 흐르는 눈물
소쩍새가 울어줄때
생명싸개 날실과 씨실
내 안에 엉글어갔다

태양을 몰라도
빛에 끌리고
생명을 모르고도
그 빛에 나아가도다

태양의 속삭임
태양의 어루만짐
사랑의 뜨거운 입김
바다를 흔들어 수증기를 올린다
이른비에 입맞추고
늦은비로 속살 헤집는다

아 이것이 생명이던가
이것이 사랑이던가
이것이 기쁨이던가

신음할 목소리조차 없어
순결한 기쁨
하얗게 터져나오는 구나

빛과 물과 바람의 품안에 언제나 있나니

소쩍새야
너는 나의 목소리였고
나는 너의 깃털옷 이었구나

생명의 근원
빛의 빛
그리스도안에서
네 날개와 내 노래로 춤추며 노래하자

만물들의 오케스트라
한번 나는 기쁨도 이러하거늘
거듭남의 즐거움을 어디에 비기랴

내 짐은 쉽고 가벼움이라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16, 2013
*.94.91.64

예, 루이스 님의 신앙 시 잘 읽었습니다.
이제 봤더니 시인이시군요.
마음이 전달됩니다.
율법이 지켜지는 차원,
삶이 살아지는 차원을 맛보셨군요.
믿음의 성육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도 분발해서 그 차원으로 들어가기를...
profile

[레벨:5]루이스

August 17, 2013
*.150.178.63

목사님 아직 저는 아닙니다 마음이 급해지네요 ㅎㅎ
저는 단지 누구나 믿는 자연법칙을 믿습니다
그 분이 제 안에 오셨을때
확실한것은 저의 겨울이 지나갔다는것이고
봄을 지나 여름을 나고있는 중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의 계절을 살고 있다고나 할까요
쭉정이는 되지 말아야죠
하늘위의 비를 맞고
하늘의 만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먹고 마시며
오늘 올려주신 글속의 감자처럼
누군가의 손에 눈에 귀에 입에
하늘감자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싶을뿐입니다
고구마라도 좋구요 

제가 관찰한 그 법칙에 의하면
감자나 고구마가 분발할 필요가 없던데요 ㅎ
식물의 분발은 꼭 붙어있기만 하면 되겠드라고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17, 2013
*.94.91.64

앗, 내가 하고 싶은 말씀을 꼭 짚어 하셨네요.
분발이 아니라 그냥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붙어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겠지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려고 하지 않는 거죠.
나부터.
profile

[레벨:13]진인택

March 13, 2014
*.220.104.49

올리신 글들을 전부 읽고나니 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전 지금도 한번 당하고 나니까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기까지 했었습니다. 한국 10대교회, 대형교회에 목을 메는 집단들에 왜 나를 인도 하셨는지.  그리고 충동적인 사람모으기 순회 설교에 신물 났었습니다.  내가 그 땐 아마 성령의 충만함에 나에게 없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리고 멀리서 바라보면 그들만의 세속적인 웃기는 질서들이 어둔밤에 불꽃 놀이 처럼 하늘로 튀어 오르는게 잘 보입니다. 저보다 목사님께서 더 이런류의 상황들을 잘 아시기에 증상들을 부연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 사람들속에서도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결국 그들이 다비아로 올수도 있고 그때 얼굴보면 부끄러울까봐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복음을 진리를 놓고 논쟁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을 뿐아니라. 상처의 결과가 너무크기에 대립을 피해 버립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이렇게 잘 배우고 있습니다. 전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나자신에게 약속을 하였습니다. 욕하지 말자, 그리고 큰소리로 화내지마라.  나에게 개혁은 주님의 복음에 가까이  가는 속도를 개혁하는 것 이외에는 별로 없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3, 2014
*.94.91.64

예, 잘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좋거나 아니거나...) 관심을 줄이고

자신의 내면 세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게 좋습니다.

주님의 복음에 가까이 가는 일에 푹 빠지시기를...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81
748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비유 (막 4:26-34) [5] 2018-06-17 6666
747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10] 2018-06-11 5484
746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10611
745 성령강림절 거듭남과 성령 (요 3:1-13) [2] 2018-05-27 8083
744 성령강림절 성령이 도우시리라! (롬 8:22-27) [4] 2018-05-20 5827
743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6980
742 부활절 성령 임재의 증거 (행 10:44-48) 2018-05-06 7670
741 부활절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4] 2018-04-29 7250
740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5571
739 부활절 예수의 살과 뼈 (눅 24:36-48) [4] 2018-04-15 7831
738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9025
737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561
736 사순절 예수의 죽음과 매장 (막 15:33-47) [4] 2018-03-25 7378
735 사순절 예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요 12:20-33) [4] 2018-03-18 6629
734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11822
733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22
732 사순절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7] 2018-02-25 8348
731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8
730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7310
729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619
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5844
727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6487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7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08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657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7414
72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7743
721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3] 2017-12-11 15696
72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0822
719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6764
71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23
717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6584
716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630
715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09
714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7569
713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34
712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2017-10-08 8196
711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08
71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26
709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780
708 창조절 죽음 넘어! (출 12:1-14) 2017-09-11 8187
707 창조절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6] 2017-09-03 7806
706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473
705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2888
704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91
703 성령강림절 빈 들에서 배불리 먹다 (마 14:13-21) [8] 2017-08-06 8053
702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4993
701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51
700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881
699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243
698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114
697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1
696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374
695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813
694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275
693 부활절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8] 2017-05-28 7743
692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477
691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829
690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22
689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754
688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404
687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654
686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6894
685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5984
684 사순절 영적 시각 장애 (요 9:35-41) [2] 2017-03-26 8185
683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658
682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360
681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33
680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679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07
678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7
677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771
676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07
67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403
674 주현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4] 2017-01-15 8235
67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40
672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2985
671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010
670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709
66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26
668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61
66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093
66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7
665 창조절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4] 2016-11-14 8232
66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4
663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715
662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36
661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589
660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467
659 창조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15] 2016-09-04 8272
658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270
657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051
656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50
655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7
654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080
653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111
65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15] 2016-07-17 15087
65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골 1:1-14 [9] 2016-07-11 7998
6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16] 2016-07-03 6508
649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5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