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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고 무익한 것 (렘 2:4-13)

창조절 조회 수 13570 추천 수 0 2013.09.01 22:5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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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예레미야 2:4-13 

헛되고 무익한 것

렘 2:4-13, 창조절 첫째 주일, 9월1일

 

 

4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9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렘 2:4-13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 즉 그의 설교입니다. 그 내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말씀의 배경을 따라가기는 까다롭습니다. 선지자들의 설교, 또는 신탁은 구체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나온 것이래서 그 배경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만약 저의 설교를 천년쯤 후에 접한 어떤 사람이 설교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20-21세기 대한민국이 처한 여러 가지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레미야는 힐기야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전의 제의를 많이 경험하면서 자랐겠지요. 제사장들은 대개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보수적인 종교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교육받은 엘리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고향은 베냐민 땅 아나돗입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깝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국내외 정치 상황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렘 1:2, 3절은 그가 소명을 받고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로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 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여기에 세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요시야와 여호야김과 시드기야입니다. 요시야는 8세의 어린 나이로 기원전 640년에 유대의 왕위에 오릅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와 나이가 비슷합니다. 요시야 재위 13년, 그러니까 기원전 627년에 예레미야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예레미야가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한 5년 뒤인 기원전 622년부터, 그러니까 그가 27세 되었을 때부터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게 고대 유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요시야의 개혁운동입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성공했다면 유대의 역사도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겁니다.


요시야 왕에게 선택의 순간이 왔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을 가운데 두고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바벨론이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두 나라는 모두 당대의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제국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대가 처한 상황은 마치 일본과 중국, 또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서 우왕좌왕 했던 이씨조선 말기의 형국과 비슷합니다. 요시야는 바벨론 편에 섰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으로 밀고 올라오는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와 맞붙었습니다. 요시야에게 무슨 베짱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버티면 바벨론이 내려와서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 전쟁에서 요시야는 전사했습니다. 그때가 개혁을 시작한지 13년 밖에 되지 않은 기원전 609년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서른아홉 살이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는 자기 마음대로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여호야김을 유대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자기 말을 잘 들을 사람을 왕으로 세운 겁니다. 여호야김은 왕의 자질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위 구절에 두 번째로 언급된 유대의 왕입니다. 그렇게 억지로 나라가 굴러가다가 결국 위 본문에서 세 번째로 거론된 시드기야 재위 11년, 그러니까 요시야가 전쟁터에서 허무하게 죽은 지 22년만인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왕족을 비롯해서 귀족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모두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고 유대 땅은 바벨론 총독이 와서 다스렸습니다. 이제 나라가 없어진 겁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 시기에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그의 나이 20대 초로부터 시작해서 60대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시대를 보는 눈이 남다르게 명민했던 예레미야는 불운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예감했습니다. 남이 눈치 채지 못한 민족의 어떤 불행을 미리 내다본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이는 마치 자기 가족이 치료 불가능한 말기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의사의 심정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눈물의 선지자라는 말이 붙어 다닙니다.


더 큰 고통은 조국의 암담한 운명을 감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주민들은 예레미야의 설교를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모두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키고 축복해주신다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도 여전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며, 결국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설교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살아있을 때는 아무도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지자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고독한 선지자였습니다. 바벨론의 간첩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한 평생 마음 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는 불운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영혼에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예레미야의 설교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기독교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예레미야가 구체적으로 무슨 설교를 했는지 알아봅시다. 이미 앞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예레미야는 나라의 꼴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렘 2:5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했다는 말은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헤벨을 따른 결과 헤벨이 되었다.” 공허한 것을 따라갔기 때문에 결국 공허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헤벨이라는 단어는 풍요의 신(神) 바알을 연상시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다는 비판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8절에서는 이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여기에 열거되는 인물들은 모두 유대의 지도자들입니다. 제사장, 율법학자, 관리들(목자), 선지자들이 그들입니다. 주로 종교적인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바알이 제공하는 풍요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유대 민중들도 그것만을 요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보기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악이었습니다.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레미야가 자신들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비판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의 삼대절기인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도 잘 지켰습니다. 아무리 시국이 어렵고 국제 정세가 어수선해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는 믿음도 여전했습니다. 그들에게 예레미야의 설교는 공연히 트집을 잡는 것처럼 들렸을 겁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유대는 지금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처럼 헛된 것을 따른다고 말입니다. 누가 옳을까요?


고대 유대인들이 바알을 섬겼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유대 역사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바알을 섬기지 말라고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그 말은 곧 유대인들이 반복적으로 바알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그게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하나님이 출애굽을 비롯해서 40년 동안 광야생활 중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지켜주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왜 가나안의 토착신인 바알을 섬기느냐고 말입니다.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광야생활에서 큰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부터는 그런 경험이 시시해졌습니다. 광야에서 생존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심리입니다. 변소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속담과 비슷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광야의 유랑생활을 거쳐서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 보니 세상이 완전히 달라보였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농사를 통해서 부가 축적되었습니다. 각종 문화와 축제 등도 발전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가나안 사람들의 삶은 부러워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60,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간 분들의 기분이 어땠는지를 보면 됩니다. 재래식 변소를 사용하던 사람이 수세식변소를 사용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처럼 넉넉하게 살고 싶어졌습니다. 가나안에서 잘 살려면 가나안사람의 삶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의 문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에는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도 포함됩니다. 풍요를 약속하는 바알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이런 바알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때는 예루살렘 성전 안의 한 곳에 바알 신상을 세워놓을 정도였습니다.


바알숭배가 왜 문제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좀 잘 살면 안 될까요? 잘 살고 싶은 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 욕구를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풍요의 유혹에 빠져들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을 잘 믿어서 물질적으로 복을 받아서 잘 사는 사람들도 많더라,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을 봐라,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서약을 하는 나라답게 믿음도 좋고 잘 살기도 하지 않느냐, 하고 반문하고 싶으신가요?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에만 둘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보십시오. 물질적인 풍요에 영혼이 기울어지면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말할지는 몰라도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지는 못합니다. 예레미야가 앞에서 인용한 8절에서 제사장, 율법학자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지적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뱅이로 살아야 한다거나 물질에서 완전히 초연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재물 없이 세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거기에 영혼을 걸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물질에 영혼을 거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시대가 이런 삶의 한 전형이라는 사실을 제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것을 가리켜 헛된 것이며 무익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근거가 있는 말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교회에 잘 나오라는 종교적 충고일까요? 더 나가서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는 것이 바로 유대 멸망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제가 일일이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헛되고 무익한 것이라는 사실만 설명하면 다른 것에 대한 대답도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현대인들은 똑같이 물질적인 풍요가 바로 생명을 얻는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래서 문화적으로 세련되게 사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많은 걸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고, 유통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쟁력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실컷 먹고 쓰다가, 그리고 죽을 겁니다. 죽기 이전에 이미 그런 생산과 소비 중심의 삶 자체에서도 참된 삶의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삶을 가리켜 헛된 것, 무익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사람이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유일한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만 순종하라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하나님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은 생명의 유일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풍요로운 삶을 통해서도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이 거기서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허투루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했다면 무엇이 헛되고 무익한 것인지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헛되고 무익한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것들은 그런 정도의 수준에서 좀 쉽게 처리하십시오. 거기에 영혼을 걸어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참된 생명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그 놀라운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선물로 받습니다. 아멘.

* 설교듣기는 서울샘터교회, 설교보기는 대구샘터교회의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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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셀

September 03, 2013
*.204.17.94

아멘!
오늘의 설교는 가장 감명깊은 최고의 설교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 하세요. 감히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평가 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설교를 다 듣고 읽고 나오는 감탄사로 이해해 주시길... 마치 김연아의 스케이팅을 본 후 여과없이 터져나오는 외쿡 아나운서들의 멘트 정도로 용납해 주시길...)
물질의 풍요를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과 그로부터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
메마른 광야와 풍요의 헤벨 대비
십자가 예수의 극적인 반전과 부활
아직도 열려있는 구원의 문제

항상 새로운 영적 지평을 열어 주시는 군요
감사와 찬송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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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3, 2013
*.94.91.64

아셀 님은 어떤 분일까 하고
위 대글을 읽고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설교의 중심으로 뚫고 들어가는 힘이
설교자의 그것보다 더 강해보이네요.
생존의 저 밑바닥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원초적 생명에 대한 강력한 희망과 기다림이
바로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 경험의 토대입니다.
아마 인간은 풍요를 갈구하다가
그 풍요 가운데서 매너리즘과 허무에 빠지고
그런 악순환 속에서 멸망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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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September 03, 2013
*.177.209.210

변소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속담
Danger past, god forgotten

어쩌면 이렇게도 20년전 인도 처음왔을때 저의 모습과
현재의 저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요?

스쿠터를 타고 다니다 
800cc 소형차를 타게 되었을때의 그 감사함.
열대를 거쳐온 뱃짐속에 들은  스프가 비닐과 함께 붙어버린 삼양라면을 먹으며
제왕의 수라상도 부럽지 않고 오히려 감사함에 넘쳤던 시간들.

지금은 그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감사함은 그저 스쳐가는 감정으로 남고
실제적인 삶은 주어진 풍요만 누리기에 급급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등애처럼 귀찮게 들립니다.

들을귀 있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바알이 쏘는 독침에 찔려
울지도 힘쓰지도 못하는 이 불쌍한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저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믿고
다만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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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3, 2013
*.94.91.64

사띠아 님의 저 댓글이 생생하게 전달되는군요.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들었다 해도 남의 이야기에 불과하고,
그래서 청중들은 바알에 따른 설교에만 열광하고...
저도 이런 설교를 하면서도 예레미야가 지적했듯이 
광야에서 생존 자체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했던 고대 유대인들의 영적 경험이
실제로 나에게 있는지를 늘 반문합니다.
상대적인 풍요를 누리고 사는 사람이
이런 설교를 할 자격이 있는가 하고 말이죠.
설교 마지막 대목에서 짚었지만
물질적인 것들은 대충 처리하면서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그것을 완전히 배척할 수는 없으니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요.
모든 소유와 재물이, 나 자신의 건강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없어진 상태에서만 얻게 되는 영적 긴장을
실제 삶에서 살아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사, 기도해야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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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September 03, 2013
*.164.11.151

아멘!
설교문을 읽으면서 영혼이 흔들리는 걸 느낍니다.
그 흔들림이 오래 지속되어야 할텐데.....
은혜만 받고 갑니다.
다만 '이씨 조선'이란 표현은 "조선시대"로 고쳤으면 더 좋겠습니다.
정목사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데 실수한듯 합니다.
저도 알면서 실수 할때가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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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3, 2013
*.94.91.64

영혼이 흔들린다는 아우 님의 표현이 멋집니다.
그건 아는 사람만 아는 경험이겠지요.
어떤 미지의 세계로 한 걸음 내딛는다는 경험이지요.
나도 어떤 분의 설교를 접하고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씨조선이나 조선시대나 똑같은 거 아닌가요?
학계에서 조선시대로 생각을 모았다면 나도 따라야겠네요.
몰랐던 이야기입니다.
고맙습니다.
교정하겠어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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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September 04, 2013
*.164.11.151

이씨조선은 일제강점기때 일본이 조선의 국격을 비하하기 위하여 조선 앞에 "이씨"를 붙였다고 하니
그런 표현은 거부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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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주안에

September 06, 2013
*.99.212.113

평안하신지요 목사님의 메시지는 늘 감명깊게 읽습니다. 저도 지난 주에 같은 본문(렘2:1-13)으로 설교했습니다. 저는 메시지의 주제를 사랑과 전쟁으로 잡았습니다.  싸움을 거시는 하나님을 통해 사랑이 회복될 여지가 있다는 메시지 였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맘몬의 유혹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운수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됨을 고백하지만 스스로 웅덩이를 파놓지 않으면 불안하여 살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은 소송을 제기하시고 싸움을 거십니다. 저는 그 증거가 신자의 영혼속에 일어나는 갈등이며 고뇌라고 생각했습니다. 싸움을 거시는 하나님! 그분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롬8:35-39)그 사랑의 싸움의 결정이 600년뒤 십자가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목사님과 제 설교를 비교해보니 아직 해석학적 설교를 이해하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많은 지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성에서 주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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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6, 2013
*.94.91.64

주안에 님,
설교를 구정하는 모티브가 재미있네요.
위 대글에서 설명한 단어나 신학개념들이
다 본문과 연결되어 있어서 좋구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싸움걸기가 곧 그분이 사랑이라는 거지요?
십자가 사건에 이르기까지.
언제 기회가 되면 설교 본문 전체를 올려주세요.
다비안들이 서로 비교하면서 읽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겠군요.
주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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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주안에

September 07, 2013
*.36.142.146

격려주심감사합니다은혜로운주일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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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삐쭉이

September 06, 2013
*.223.57.197

하나님과 바알의 구별의 안이함에 대한 심각성을 경각시켰습니다.
그것을 구별하려고 고뇌하는 노력에 대해 인색해져가는 저를 되돌아보게 하시는 군요^^
겸손하시고 솔직하시면서 광야에서 일관되게 알려주시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사색의 계절에 영적인 각성이 조금이라도 진전되면 좋겠어요. 삐쭉이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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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6, 2013
*.94.91.64

삐죽이 님,
안녕하세요?
우리는 쉽게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진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구요.
삶을 수행으로 생각해야겠지요.
바울도 자기가 구원을 이룬 게 아니라
이루어간다고 말했어요.
기독교에는 수행의 차원이 많이 부족합니다.
너무 믿음만 강조하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사실 믿음 자체가 수행인 것을 모르는 거지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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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존재

September 30, 2013
*.174.6.34

헛되고 무익한 것이 헛되고 무익한줄 머리로는 알 것 같은데 몸은 이미 그 헛되고 무익한 것을 따라가고 있을때가 너무 속상합니다.
아니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하다가 헛되고 무익한 것으로 부터 어느 정도 진정? 되었을 때 속상한 줄 압니다.
솔직히 하나님 보다 이 사회의 법 시선이 두려워서 헛된 것을 추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있음을 봅니다.
신앙이 고상한 척, 해봐야 이런 곳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나도 알고 하나님이 아는데...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영혼을 걸고 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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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30, 2013
*.94.91.64

존재 님의 갈등이 그대로 전달되는군요.
헛되고 무익한 것 자체가 나쁜 거는 아닙니다.
그것 없이 우리가 세상에 살 수는 없지요.
그것이 무상하고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거기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게 문제겠지요.
그런 것들은 가능한 쉽게 처리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매달리게 되지요?
영적으로 자유로운 분량만큼
그런 것들로부터도 자유로워지니
하나님의 은총에 깊이 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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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26, 2014
*.220.104.49

생명의 근원을 버리고 채워지지 못하는 웅덩이를 파는 모습엔 다소 폭력적인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웅덩이를 팔 정도면 노력도 꽤 하는 모습입니다.

헛된 노력을 하는 모습입니다. 입맛에 맛는 생수를 더 파고 더 담으려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걸 더 파서 빵빵하게 담아서 결국 안고 가지도 못하고 터지고 맙니다.

당하고 나니까 그때서야 울며불며 후회 했었습니다.

욕심내고 빚내고 속이고 모든 수단이 나옵니다. 신뢰도 욕심을 위한 신뢰로 포장됩니다.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이 무겁고 겁나기도 합니다.

나의 마지막 결과는 어떨까...

말씀에 귀기울이고 부활생명의 귀중함에 항상 의지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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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6, 2014
*.94.91.64

치열하게 사신 흔적이 묻어납니다.

다 지나가네요.

오시는 주님을 향한 갈망이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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