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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자유 (마 5:13-20)

주현절 조회 수 10561 추천 수 0 2014.02.09 22:49:07
설교듣기 : https://youtu.be/un6eIxL-izY 
성경본문 : 마태복음 5:13-20 

법과 자유

마 5:13-20, 주현절 다섯째 주일, 2014년 2월9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신약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의 구체적인 역사에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을 이해하려면 당시 기독교의 처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당시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기초를 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했던 이들이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이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이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있었지만, 동시에 산헤드린이라는 유대교 최고 법정에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유대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게 이치적으로 옳습니다. 그들이 여전히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게 오늘 우리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원래부터 유대교인들입니다. 유대교를 떠난다는 건 아예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안에서 하나의 파를 형성했습니다. 유대교 안에 있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처럼 나사렛파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유대교 당국도 나사렛파를 인정했습니다. 이들 초기 기독교는 그렇게 유대교 안에 머물면서 재림 공동체로서의 신앙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유대교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곧 율법에 따라서 사는 것과 같았습니다. 율법의 내용은 주로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요약은 십계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본적으로는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 이방인들이 들어오면서 율법에 대한 문제가 복잡해졌습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 즉 복음에만 신앙의 중심을 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계층과 여러 민족에 속한 이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초기 기독교 안에 여러 분파가 생겼습니다. 크게 나누면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입니다. 유대 기독교는 율법을 지키면서 복음을 따르는 교회이고, 이방 기독교는 율법 없이 복음만 따르는 교회입니다. 이방 기독교는 결국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습니다. 이들의 대표자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들이 주축이 된 유대 기독교는 신학적인 고민에 빠졌습니다. 바울처럼 유대교의 율법을 부정하고 완전히 딴 길을 갈 수는 없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유대교와 똑같이 율법을 강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복음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들의 신학적인 고민과 나름의 대안 모색이 오늘 설교 본문인 마 5:13-20절에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17,18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묘사된 이 문장에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초기 기독교의 많은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율법 폐기론, 율법 해체론, 무율법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주장의 단초를 우리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벌어진 안식일 논쟁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막 2:23-28절에 따르면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그걸 본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구약의 어느 한 사건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은 기본적으로 율법 이데올로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킵니다. 즉 복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합니다. 이걸 놓치면 기독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복음이 왜 자유인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다른 복잡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예수를 믿고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해도 이건 분명합니다. 이것은 바울도 말한 거고, 루터도 말한 겁니다. 칼 바르트도 말한 겁니다. 바르트는 <복음주의신학 입문>에서 복음주의신학의 핵심을 ‘자유’라고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의와 구원이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이뤄진다면 인간은 모든 수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모든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은 율법을 성취해야 한다는 수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이 복음의 자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문제는 복음의 자유를 극단으로 끌고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근거로 율법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계 2:6,15절에 나오는 니골라당이 그런 이들입니다. 구원받았으니 모든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해방 받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도덕, 윤리, 법도 무시합니다. 우리나라의 구원파도 성격이 비슷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과거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사죄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 분들이 우리교회 예배의 사죄기도라는 순서를 보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생각하겠지요.

 

극단적인 율법 폐기론자들의 잘못은 복음의 자유를 오해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복음의 자유는 유기적이고 다층적인 삶의 구체성과 유리되었습니다. 자신의 자유가 다른 이들의 자유와 충돌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겁니다. 한편으로는 순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숙한 생각입니다. 오늘 교회에 올 때 차를 끌고 오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배 시간은 촉박한데 신호등은 자꾸 걸립니다. 신호등으로 인해서 자신의 자유가 훼손되는 걸 느낄 겁니다. 신호등만이 아니라 다른 차들도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다른 차들이 자꾸 끼어들기를 합니다. 내가 끼어들기를 할 때는 다른 차가 야박하게도 틈을 주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겸손하고 인간성도 좋은데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해지고 성질이 사나워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운전자들의 자유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충돌을 잡아주는 게 신호등이고 교통법규입니다. 교통법규가 우리의 자유를 훼손하니 없애버리자는 주장이 바로 율법 폐기론입니다.

 

이 사실을 뚫어본 마태복음 기자는 오늘 본문 17절에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하려고가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간과되면 안 됩니다. 이런 입장을 20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피력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의’는 율법의 핵심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으로 자유를 얻은 기독교 신자라고 하더라도 율법을 무시하면 안 되고, 더나가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훨씬 더 율법적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여기서 서기관은 율법학자이고 바리새인은 율법 수행자들로서, 모두 율법에서 전문가들입니다. 저는 앞에서 마태복음 공동체가 신학적인 고민에 빠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유대교와의 관계설정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마태복음 공동체의 입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율법주의를 대표하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보다 기독교인들이 훨씬 더 높은 차원에서 율법의 본질에 부합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제자들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꼼꼼히 지켜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누가 더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누가 더 십일조 헌금을 잘 드리는지 경쟁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야말로 율법주의입니다. 사람의 업적을 기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점수를 얻으려는 태도는 복음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20절이 가리키고 있는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도 율법 준수라기보다는 율법의 본질에 천착하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의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의는 유대교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앞서야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게 아니면서 어떻게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초기 기독교가 의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했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그들에게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7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려고 온 게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율법 폐기가 아닌 건 맞지만, 율법 실천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실천하려고, 그런 모범을 보이려고 오신 게 아닙니다. 그런 정도였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유대교의 뛰어난 랍비에 해당되지 그리스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율법의 완전한 성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온전한 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율법은 좋은 것이기는 하되 의의 길은 아닙니다. 의와 비슷한 것을 맛보게는 하되 의 자체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가능하지 않은 것을 요구함으로써 자유를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많은 신자들이 복음을 율법처럼 따릅니다. 자기의 믿음을 업적으로 판단합니다. 자기를 닦달합니다. 마치 수능점수를 높게 따지 못하는 학생들이 자기를 닦달하듯이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통해서 의를 얻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완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미 율법의 완전을 이룬 사람이며,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에 이른 사람입니다.

 

이런 설명이 추상적으로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가장 실감 있게 들리는 게 돈벌이니까 그걸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연봉 3천만 원인 사람과 1억 원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액수의 차이만 놓고 사람과 그의 삶을 평가하는 건 율법주의입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어느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1억 원의 연봉도 2억 원의 연봉 앞에서는 시시해보이니까요. 삼시 세끼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 기준으로 놓고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연봉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3천만 원으로도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지만 1억 원으로도 소화불량에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왕이면 1억 원을 받고 밥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겠지요. 맛있게 먹는다는 사실이 그의 영혼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면 그 차이는 미미하게 됩니다. 그걸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연봉을 의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겁니다. 복음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은 율법을 이미 성취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에서 마태복음 공동체가 유대교와 선을 긋고 떠난 이방 기독교와 신학적인 입장이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대로 유대교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점점 더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마태복음 공동체는 오늘 분문에서 자신들의 신학적인 견해를 분명하게 피력한 것입니다. 율법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율법을 복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들은 이제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더 강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율법이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의로운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공동체가 이런 문제에서 마지막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 및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이라거나, 윤리 폐기론자들이라는 오해 말입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주의를 경계하면서도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을 역설했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은 율법주의자들보다, 그리고 도덕교사나 윤리선생보다 더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마태는 오늘 본문 13-16절에서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 불립니다. 고대사회에서 소금은 태양과 더불어 생존에 절대적인 요소였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금과 빛처럼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걸 다시 율법의 요구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억지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소금과 빛이라는 존재론적 능력이 우선입니다. 소금이 소금으로 있으면 당연히 짠 맛이 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세상은 소금기를 머금게 됩니다. 태양은 태양으로 존재하면 충분하지만 일부러 빛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존재론적으로 새로워진 나무는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마 7:15-18). 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존재론적 변화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많은 신자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잘 모르겠다고 하소연합니다. 또 구체적으로 교회생활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도 판단하기 어려워합니다. 저도 목사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는 게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복음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으로만 모든 실제적인 삶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과 율법, 그리고 자유와 책임은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이런 긴장관계를 단숨에 해소하고 도사처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16절 말씀에 기대서 이렇게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자유를 실제로 알고 믿고 산다면 여러분의 삶이 소금과 빛으로 드러날 것이며, 세상은 여러분의 그런 삶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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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삐쭉이

February 11, 2014
*.7.19.254

목사님
성경을 읽어보면 자주드는 생각이 주제가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율법도 종점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통한 무엇인데. 그 핵심의 정확한 모습은 찾기가 어렵군요. 책에서 인물에서 역사에서 그로 인한 작용만 짐작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겪는 문제는 그 율법의 유권 해석에 있습니다. 그것은 때와 장서에 따라 적절해야 한다는 쪽에 서게되고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고 정죄당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시 자기를 부인하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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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1, 2014
*.94.91.64

그렇지요, 삐쭉이 님, 성경의 주제가 아주 다양하지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하나로 집중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하라는 거지요.

우리가 직면해야 할 그 하나님이

손에 잡히는 게 아니기에 좀 복잡해보이는 겁니다.

이건 뭐 다 아는 이야기고요.

문제는 기독교인이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이

신앙을 그대로 대입해서 해결하기 어렵다는 거지요.

이건 각자가 주어진 분량 만큼, 

그러나 안주하지 말고 선한 싸움의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내면 충분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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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February 12, 2014
*.192.53.116

율법 아래 포로된 자에서 복음 안에서 자유로운 자로의

신분의 코페르니쿠스적 대변환!

이 신분의 비약적인 변환의 증거가

바울같은 극적인 회심의 사건을 겪어 구원의 문턱을 넘어서지 않은 우리로서는,

영적인 개안외엔 달리 외형적으로 내세울만한 증거가 없겠지요?

 

우리의 회심엔

우리가 도무지 감각하지 못하고 있는 우주론적 신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너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노라"는 선언을

여전한 죄의 지배 아래 살고 있는  우리의 실존속에서는

여전히 실감하지 못한 채 사는 것 같습니다.

어떨땐 새로운 피조물 되었음 실감했다가, 또 어떨땐 여전히 변하지 않은 옛사람임을 통감했다가..

경계선을 들락날락 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복음의 세계로 들어간 자는 율법을 이미 성취한 것이다.

 율법을 복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복음 안에서 율법이 완전해졌다"는 말씀은 따라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포로되어 살던 자리에서 믿음의 고백으로 자유한 자리로의 신분의 비약적인 도약을

선언받은 것 만큼이나,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살고 있고, 율법적 자의식 아래 살고 있는데

복음아래 있기에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였다는 말씀은 ,

물론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셨지만

도무지 가슴에 와닿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지만  Aiready와 Not yet 사이의 긴장관계에 있듯이

우리의 정체성도 그와 동일한 논리인지요?

즉 신분으로는 선언을 받았지만, 실존은 여전히 긴장관계속에서  갈등과 들락날락이 

자연스런 모습이요, 이게 바로 성화의 과정인지요?

 

우리의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는  구원의 섭리를

우리가 온전히 납득하고 승복하여 따라갈려고 한다는게

가당치 않은 오만인지요?

 

의문만 더 커진 말씀이었습니다.

그 의문이 새로운  기도제목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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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2, 2014
*.94.91.64

부스러기 님의 고민이 잘 전달됩니다.

사는 곳이나 시간 등, 형편이 어떤지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3월부터 시작하는 '신학공부' 모임에 오시는 게 좋겠어요. ㅎㅎ

위에서 거론하신 문제는 다 신학적인 거랍니다.

그런 한 두 문장이나 대화로 해결할 수는 없어요.

성악을 배운다고 합시다.

득음, 또는 소리의 자유에 들어가려면

레슨 한 두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복적인 훈련과 레슨이 필요하답니다.

소리가 막히다가 다시 뚫리고... 하는 반복과정이 필요한 거지요.

제가 여러번 짚은 말이지만

신앙(신학)언어가 자신과 일치되어야 하는데,

그건 사전적인 낱말풀이로 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위에서 진솔하게 자기를 표현하신 그 문제도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기독교인의 실존을 이렇게 말했어요.

'죄인이면서 의인, 의인이면서 죄인'

이건 언어유희가 아니라 어떤 궁극적인 실체에 대한 진술입니다.

저런 진술을 실질적으로 느끼기 전에는

부스러기님의 그런 문제의식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을 갖는 거 자체가 사실은 좋은 거지만요.

일반 신자들은 그런 문제의식까지 없이 그냥 신앙생활을 할 뿐이지요.

한 가지만 더 보충한다면

칭의는 법적인 차원이지 실증적인 차원이 아니랍니다.

이 말도 아마 가슴에 닿지 않을 거 같군요. ㅎㅎ

기독교 신앙에는 길이 있답니다.

그 길로 들어서는 게 중요해요.

제가 보기에 이를 위해서 신학공부는 필수입니다.

늘 친구와 내기바둑이나 두면서

이세돌같은 프로 9단의 바둑을 이해할 수는 없는 거랍니다.

천천히 가봅시다.

길로 아직 들어서지 못했다 하더라도

길이 있을 거라는 짐작만 해도 대단한 거랍니다.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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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meditatiocrucis

February 12, 2014
*.104.3.61

1세기 유대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에 대한 이해는 복음서와 서신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만큼이나 학자들에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뜨거운 감자'와 같은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목사님의 설교문에 유대기독교와 이방기독교의 구별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요. 그래서 이방기독교는 율법없이 복음만 따르는 교회라고 설명하고 있고요.

저가 보기에 목사님은 1세기 유대교와 기독교 문제를 전통적인 종교개혁적 관점에 서서 믿음과 행위의 이분법적 틀 안에서 신약텍스트를 해석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저는 목회실천적으로나 그리고 성서주석적 차원에서 이신칭의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하여 보았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목회자가 처한 상황이 기존의 신학적인 전이해로 인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고 때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신칭의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의 틀인 믿음과 행위의 분리, 대립적인 이해가 너무나 목회실천현장에서는 적실성이 없다는 점,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전혀 앞뒤가 맞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작금의 교회공동체의 갈등과 분쟁과 분열의 핵심원인을 저는 개인적인 윤리적 실패 이전의 신학적 요인과 얽혀있는 문제이며, 적실성을 잃어버린 주석적 토대위에 세워진 이론적 신학에 대한 전이해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요점은 1세기 당시 율법을 행하는 것이(소위 행위구원론)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를 외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들이 율법의 정신을 살려 율법을 올바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바울의 진단이고, 그 피할 수 없는 열매는 위선적 행위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그리고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는)  율법을 제대로 잘 지키는 자들을 타박한 게 아니라,  정작 율법은 율법의 정신을 살려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도, 할례나 절기준수 등의 특정 계명들을 구원의 무슨 결정적인 외적  표지로 삼아  결국은 위선적 영성과 행태로 나아가는 자들을 맹렬히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저가 보기에 이 문제제기가 목회현장에서 고투하는 분들에게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검토할 때가 되었다고 보는데, 목사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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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2, 2014
*.94.91.64

메디타치오 님,

신학적으로 복잡한 문제들이 위의 대글에 얽혀있어서

핵심이 무엇인지 따라가기가 쪼끔 어렵네요.

믿음과 행위를 이분법적으로 내가 해석한 것도 아닌데요.

그게 긴장관계에 있으니 그걸 놓치면 곤란하다고 분명하게 언급했어요.

어쨌든지 말씀하시려는 핵심은 이신칭의가 이원론적인 관점이기에

오늘의 목회 현장에서 적실성이 떨어진다는 거지요?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바로 이런 신학적 오류에 기인한다는 거지요?

그렇게 종교개혁 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겠으나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비판이랍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비인격적인 행동들은

신앙 이전에 인간 됨됨이, 또는 기질에 속합니다.

이신칭의가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구요.

행위나 업적을 내세우는 것을 비판하는 거지요.

오늘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잘못이 바로 이거에요.

이신칭의 신앙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거지요.

제가 보기에는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는 바울을 오해한 게 아니라

바울 신학을 더 적실하게 해석한 것이고,

따라서 지금 목회현장에서도 더 강조되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거듭 밝히지만 이신칭의는

행위와 믿음을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는 게 아니라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엄정한 사실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심화한 것입니다.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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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meditatiocrucis

February 13, 2014
*.104.3.61

목사님, 답글 감사합니다.

저의 요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서 다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견해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요점은 이러합니다.

바울이 비난한 대상은 (1)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들을 제대로 지키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2)할례, 식탁규정, 안식일 규정 등 율법의 일부를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정체성의 표지로 삼았던 유대인들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의 공격대상은 롬2장에 나오듯이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면서도 같은 행위들을 일삼는" 자들, 곧 유대인(선민)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 하지만 정작 그 삶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할례와 율법의 소유을 자랑하지만 정작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 한마디로 자가 당착적 혹은 위선적 선민사상에 빠진 사람들이란 겁니다.

문제의 핵심은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들''(에르가 노무', 롬3:20; 갈2:16; 갈3:5 등)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에 있다고 보는데요,

전통적 해석은 이를 '모든 율법 이 요구하는 행위들' 혹은 '모든 율법(의 규정들을) 행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다루는 문맥에서 본다면,  '율법의 행위들'이 도덕적으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삶 전반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유대인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드러내며 그들을 이방인과 구분해주는 정체성의 표지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목회현장에서 저가 경험하는 많은 문제들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겠다는 상황과는 정반대라고 봅니다.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되려고 노심초사하는 경우가 아니라, 행위가 없어도 믿음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까불다가 벌어지는 상황들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들'을 전통적으로 해석해서 율법전반을 지키는 것으로 해석하면 문맥가운데 논리적으로 모순되고 충돌되는 곳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약본문의 주석적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는 점과 샌더스와 던의 견해를 전부는 아니지만 전체적인 틀은수용하면서, 목회적으로도 좀 더 적실성이 있다고 보는 견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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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3, 2014
*.94.91.64

메디타치오 님의 목회적 심정이 무엇인지 저에게 전달됩니다.

소위 말하는 값싼 은혜에 빠져서

제자로서의 삶을 가볍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의 잘못은 크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신칭의에 목회적 적실성이 떨어진다고 보면 곤란합니다.

메디타치오 님이 거론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주석학적 분석도

제가 보기에는 일부만 보고 큰 줄기는 놓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민입네 자랑하면서 행실이 전혀 그렇지 못한 유대인들만을 향한 비판이 아닙니다.

그런 이들은 아예 거론할 대상도 아닌 거에요.

복음이 기껏해야 말과 행동이 다른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거라면

정말 시시한 겁니다.

그런 시도는 유대교 안에서 자주 있었던 갱신운동에 불과한 겁니다.

복음은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는 겁니다.

인간의 종교적, 또는 윤리적 노력과 업적으로부터

예수 사건과의 일치로 뿌리 자체가 바뀌는 겁니다.

이 부분을 메디타치오님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셔야됩니다.

교회 신자들의 삶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별개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건 마치 안티 기독교에 속한 사람들의 관점과 비슷한 겁니다.

그들은 오늘 교회 현상이 잘못되었으니 기독교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개혁될 부분은 그것대로 다루고

신앙의 본질은 그것대로 깊이 들어가는 게 옳습니다.

메디타치오 님이 안티 기독교 집단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게 아니니

오해 마시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영천에도 눈이 많이 오네요.

오늘도 하루종일 눈과 비가 뒤섞여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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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meditatiocrucis

February 13, 2014
*.104.3.61

네..목사님 .감사합니다. 

저의 주장이 안티 기독교 집단의 어떤 주장과 흡사하던지 말던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겠습니다. ㅎㅎㅎ.

저에게 있어서는, 안티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라면 왜 무엇때문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지가 중요할 따름이며 그러한 이유로 소중한 대화의 파트너로 인식할 뿐입니다.

목사님께서는 댓글의 답글에서 바울의 비판이 선민입네 자랑하면서 행실이 전혀 그렇지 못한 유대인들만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런 이들은 아예 거론할 대상도 아니라고 까지 단언하셨습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복음이란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는 것이요, 예수 사건과의 일치로 뿌리 자체가 바뀌는 것이라는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을 도출하는데 있기 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신약텍스트는 다분히 역사적인 삶의 자리를 가진 상황적 문서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서신의 경우에도 이 서신이 무슨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신학적 논문으로 쓴 글이 결코 아니라 그 때 그 때 특수한 상황에 응답하는 글이라는 사실입니다. 

범위를 좀 더 좁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칭의론은 그 배후에 분명한 신학적 대화상대자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경우는 실제로 교회로 침투한 유대주의적 선동자들일 것이고, 로마서의 경우는 2장에서 비판되는 자칭 유대인들일 것입니다.중요한 점은 신약본문 특히 바울서신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다루는 문맥에서 보아야 된다는 점이며 이런 관점에서 저의 주장을 댓글에 언급하였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런 선동자들이나 자칭 유대인들의 주장에 의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가 복음의 본질에서 이탈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러한 위기감이 바울로 하여금 중요한 서신을 쓰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비판했는지에 대해서 목사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였습니다. 

조금 아쉬운 점은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를 긍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펠라기우스나 알미니우스와 같은 부류의 신학적 종북세력으로 인식되고, 루터와 칼뱅의 거룩한 이름으로 종교개혁 보안법의 엄격한 검열을 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이신칭의의 주제가 저가 보기엔 16세기의 소리에 압도되어, 바울의 비판이  1세기 당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어디에서도 행위없는 칭의나 구원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다는 주석적 인 분석의 결론이 저의 확신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럼 주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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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3, 2014
*.94.91.64

예, 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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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February 13, 2014
*.213.170.45

목사님 설교를 읽고 들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명불허전이네요...


규범적인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존재론적인 의... 


그 "의" 속에서만 율법의 정수가 완성될 수 있다는 말이군요...


여전히 신자들은 규범적인 신앙에 빠져 있고, 목사님들도 규범적인 신앙 강요를 버리지 않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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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3, 2014
*.94.91.6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존재론적 의'라고 말씀하시다니,

그것도 평신도(?)가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놀랍군요.

저 진술을 이해하는 기독교인들이,

아니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저런 진술의 깊이로 들어가려면

어느 정도는 철학적이, 또는 인문학적인 사유가 필요한데,

그걸 갖춘 기독교인들이 많지 않거든요.

씨앗에 이미 꽃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게

바로 존재론적 관점이잖아요.

예수 안의 의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그걸 볼 수 있는 눈과 비슷한 거지요.

이게 말장난으로 떨어지지 않고

신앙의 능력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음

갈길이 멀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걸 눈치 챈 사람에게는 즐거운 길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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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February 13, 2014
*.36.143.220

다비아의 은혜스러움이 이 댓글 기능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설교 말미에 "존재론적 능력...
존재론적으로 새로와진..."
이 말씀이 참 모호했는데
두분이 주고 받은 댓글을 통해
안개가 한꺼풀 걷혀진듯한 느낌입니다

'씨앗에 이미 꽃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볼수있는게
존재론적 관점이다'
여기서 존재론적 관점을 '종말론적 관점'으로 바꿔도 괜찮은지요

예수님의 오심을 통한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의
성취를, 복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가
오늘 미리 당겨서
적용(?)하여 사는것
즉 구원얻은 우리가 아직도 이 모양이지만
로마서 8장인가요?
"....영화롭게 되었는니라"
하는 예언적 성취!
그래서 그분이 볼때 이미 우리는
영화롭게, 의롭게 된자로 스스로 여기는것
이것이 율법의 성취요 존재론적 변화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의미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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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4, 2014
*.94.91.64

예, 부스러기 님,

한꺼품 걷힌 느낌이라니, 좋습니다.

그런 느낌은 개안이고, 득도이고, 돈오입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느낌으로 어딘가에 가까이 가는 거 말입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그리고 질문하신 게 다 옳습니다.

그렇게 쭈욱 진도를 나가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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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流水不爭先

February 13, 2014
*.173.40.132

목사님 안녕하시죠 늘상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전케 됨은

오직 복음안에서만 율법이 완성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이신칭의를 깨닫고 행하는 순간에서만 율법의 행위가 완전하여지듯이

 

설혹 온전한 마음으로 모든 율법을 행하였어도

복음을 모른다면 불완전한 행위임을 말씀이 전해주네요

평소 본문 말씀을 대할 때마다 궁금했었는데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자유를 실제로 알고 믿고 산다면 여러분의 삶이 소금과 빛으로 드러날 것이며, 세상은 여러분의 그런 삶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의 유무를 논하기보다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명하시네요

복음없는 율법의 행위와 복음안에서의 율법의 행위

왜 바울이 그토록 투쟁했던가 이해가 되는군요

 

세월이 흐를수록 이신칭의라는 단어를 저에게 전해준

모든 인물들에게 감사 할 따름입니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들은

 

샬롬 주님의 은총이 목사님께 함께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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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3, 2014
*.94.91.64

흐르는물 님도 여기서 좋은 점을 지적해주셨네요.

율법 행위의 유무보다 그 관계를 아는 게 중요하다는 거 말입니다.

복음은 세상이나 다른 종교의 선한 행위들과 결코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배척하지도 않습니다.

위에서 첫날처럼 님이 표현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존재론적 의에 집중함으로써

모든 율법적 부담과 업적의와 자기의로부터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소금과 빛으로 드러나는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신칭의를 깨닫게 해준 분들에게 감사하신다니, 음

저도 늘 그렇게 신앙의 선배들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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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December 06, 2014
*.44.68.212

태어날때는 어머님의 도움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제 다시 주님안에서 나의 믿음과 의를 인정받아서 태어난다는 사실이 참으로 커 보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향함이 큰 만큼 걸리는 것도 많습니다. 반대, 충돌,갈등,선택, 구별.. 인생이 이런 상황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율법과 자유 둘 다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의 연료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추운날씨에 항상 어께와 목을 감싸서 감기를 예방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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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6, 2014
*.94.91.64

예, 걱정해 주신 대로

추운 날씨에 감기 걸리지 않고

씩씩하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신앙의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겠지요.

대림절의 평화와 기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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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7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771
676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06
67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399
674 주현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4] 2017-01-15 8231
67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35
672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2983
671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002
670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702
66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20
668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57
66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082
66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2
665 창조절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4] 2016-11-14 8229
66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0
663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699
662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33
661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586
660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465
659 창조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15] 2016-09-04 8269
658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267
657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048
656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49
655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6
654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072
653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107
65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15] 2016-07-17 15084
65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골 1:1-14 [9] 2016-07-11 7994
6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16] 2016-07-03 6506
649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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