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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다. (출 24:12-18)

주현절 조회 수 11535 추천 수 0 2014.03.03 00:34:14
설교듣기 : https://youtu.be/BixItHJTdiI 
성경본문 : 출애굽기 24:12-18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다.

24:12-18, 주현절 마지막 주일, 201432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성경입니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상식과는 배치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로마 총독에게 넘겨준 이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전체 유대인은 아니라도 그들을 대표하는 유대교 고위층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복음서가 그걸 확인하고 있고, 이에 근거해서 지난 2천년 동안 유럽 사람들은 예수님을 살해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라고 보고,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초기 기독교는 구약성경을 거부하는 게 상식적인 겁니다. 그런데 그걸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구약성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한다고 생각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흔적은 성경 안팎에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성서일과로 주어진 제1독서와 제3독서의 연관성입니다. 1독서인 출 24:12-18절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 일어난 특별한 현상에 대한 이야기이고, 3독서인 마 17:1-9절은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에 일어난 특별한 현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에는 서로 통하는 게 많습니다. 비슷한 코드가 많이 숨어 있습니다. 먼저 변화산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초기 기독교가 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7:1절은 엿새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엿새 후에 예수님은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었다고 합니다.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처럼 희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거기 함께 가 있던 제자들은 생전 처음 보는 현상이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습니다. 늘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여기 산위에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초막 세 채를 만들어서 계속 머물자는 겁니다. 그 때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마 17:5절에 따르면 구름 속에서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은 엎드려 크게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일으켜 세우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주변을 다시 살펴보자 모든 게 원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초기 기독교에 아주 잘 알려진 것이었으며, 예수님의 정체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전승이었다는 게 분명해보입니다.

 

예수님의 이 변화산 이야기는 출 24:12-18절에 나오는 모세의 시내산 이야기와 직결됩니다. 모세는 지금 유대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횡단하는 중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게 출애굽의 일차 목적이기는 하지만 이방인 원주민들이 선점하고 있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소수 민족의 한계를 극복하여 자리 잡을 준비를 하는 게 또한 중요했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걸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이 준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율법의 체계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논의가 모세를 비롯해서 당시 지도층 사이에서 많았을 겁니다. 모든 결정은 모세의 이름으로 실행되어야만 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셨던 것처럼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산 아래까지만 그들을 데리고 갔고, 산위로 올라갈 때는 여호수아 한 사람만 데리고 갔습니다. 13절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장로들에게는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 까지 기다리라....

 

여기서 산위까지 모세를 마치 경호 실장처럼 단독으로 수행한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서, 모세가 죽은 뒤에 유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간 인물입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물꼬를 트고 방향을 잡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여호수아는 그것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재미있게도 헬라어로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모세가 예수님과 함께 했던 것처럼 모세의 시내산 이야기에서는 여호수아가, 즉 예수가 모세와 함께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이 두 이야기를 한데 엮어서 읽었습니다. 모세의 시내산 이야기를 좀더 따라가겠습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가렸습니다. 이 구름은 변화산 사건에서도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런 현상이 엿새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앞에서 짚은 것처럼 변화산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엿새 후에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변화산 사건에서도 예수님 모습의 변형이 일어난 날이 일곱째 날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모세 이야기를 염두에 둔 게 틀림없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사십일 동안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25장부터 나오는데, 그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입니다.

 

유대 백성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이 직접 내려주신 말씀입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종교적 전통이 되었습니다. 특히 기원후 70년에 끝난 유대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다음에는 성전 중심의 제사장 계급은 힘을 잃게 되었고,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유대의 종교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이런 율법 전통의 역사적 근거가 바로 오늘 설교 본문이 말하고 있는 모세의 시내산 경험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직접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강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의 생각은 좀 복잡할 겁니다. 도대체 저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저런 이야기는 자연현상을 알지 못하던 고대인들의 오해에서 벌어진 거라고 우습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현상은 화산폭발과 비슷합니다. 구름, 맹렬한 불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전하는 출 19:16절은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고 말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눈에 화산폭발은 당연히 하나님의 임재로 보였을 겁니다. 이들의 자연현상에 대한 오해는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그런 방식으로 전하려고 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미디안 광야에서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였지만 고대 유대인들이 광야를 횡단하면서 생존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이런 방식으로 경험했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습니다. 구름과 맹렬한 불로 묘사되는 시내산 전승의 핵심은 고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16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17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아무런 생존의 근거나 대책이 없었던 미디안 광야에서 그들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에 근거해서 그들은 광야의 악조건을 버텨낼 수 있었고, 가나안에 들어간 뒤에서도 하나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현대인들에게 낯섭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데, 거기에다가 영광이라는 단어가 겹쳐 있으니 엎친데 겹친 격입니다.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은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 건 몰라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서 이런 문제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기도 합니다. 취업, 융자, 부부생활, 자식걱정, 돈벌이, 노후설계 등등만으로도 삶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갈 정도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우리의 실제적인 삶과 하나님의 영광은 무관한 게 아니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게 남녀사랑이니, 그걸 비교하는 게 이해하는데 적합할 것 같습니다. 깊은 사랑에 빠져본 분들은 다른 게 좀 부족해도 삶의 활기가 넘친다는 걸 알 겁니다. 모든 게 새롭습니다. 그전에는 비가 오면 짜증이 나더니 이제는 낭만적으로 느껴집니다. 날씨가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다 멋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신 분들은 경험이 있으신 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문제는 이런 사랑의 상태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뜨겁다가 시간이 지나면 식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대상은 이걸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실존적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은 뜨겁다가 식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고 더 강렬해집니다. 바울이 고후 4: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설교 조의 그런 이야기는 우리가 다 알고 있으니, 시내산에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오늘 현실에 맞춰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라고 저에게 요구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지나친 요구입니다. 그런 설명은 아무도 못합니다. 그걸 설명할 수 있으면 그는 신을 직접 본 자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모세도 그걸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시내산 이야기가 거의 끝나가는 지점인 33장에서 이와 연관된, 약간 특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 있을 때 산 아래서 유대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다 지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문제를 해결한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33:18)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알려달라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33:23).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생명의 궁극적인 비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영광이 임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놀라움, 두려움, 떨림이 그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출 19:16절도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과 나팔소리 앞에서 백성들이 다 떨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본문인 출 24:17절이 말하는 맹렬한 불이라는 표현도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장 강도나 전쟁, 또는 불치병처럼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들게 하는 공포가 아니라 우리를 영혼의 저 중심부로부터 살리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루돌프 오토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누미노제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는 너무 작아지기에, 그리고 자아마저 없어져야 하기에 한편으로 두렵기는 하지만 우리의 유한성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의 불길에 휩싸이도록 하기에 황홀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있으신가요?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삶은 아주 단순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서 일정한 세월을 살다가 다시 무덤이라는 일종의 자궁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매 순간 우리는 일희일비 하면서 삽니다. 몸을 갖고 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생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분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의 일생 전체와 신비한 방식으로 함께 하는 분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미래까지 모든 것을 이미 내다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삶의 표면만 보고 살지만 그분은 삶의 중심까지 비밀한 방식으로 뚫어보시고 통치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상상할 수 있나요? 그런 분을 실질로 인식하고 느끼고 신뢰할 수 있으신가요? 모세의 시내산 전승에 참여한 고대 유대인들은 바로 그런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임재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자신들의 모든 예상과 기대를 넘어서는 능력이기에 맹렬한 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고대 유대인들의 인식과 경험을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즉 우리의 모든 생각과 경험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하게 나타났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앞에서 설명한 예수님의 변화산 이야기로 표현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거기서 정말 놀라운 것을 보았습니다.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은 생명의 궁극적인 비밀이었습니다. 초막 세 채를 짓고 거기에 그대로 머물자는 베드로의 제안은 허튼 소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천기누설과 같아서 아무에게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말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에게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도 제자들의 운명과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오기 전까지 그것은 비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불안해하지는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너무 떠벌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내산의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변화산의 예수님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사람은 생명의 극치인 하나님의 영광에 신비한 방식으로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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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March 03, 2014
*.34.241.31

하나님의 영광은 그것을 경험했던 고대인들이

정확하게 설명 할 길이 없어서

삶의 경험과 자연 현상들을 도구삼아

느끼고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는지요?

고대인들이 느꼈던 그 '거룩한 두려움'을

저도 느끼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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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3, 2014
*.94.91.64

오직은총 님의 생각은 옳습니다.

당시의 세계상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성서시대 사람들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해야겠지요.

물리적으로 우리가 훨씬 앞서 있지만

영적으로는 오히려 그들보다 우리가 미숙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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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March 03, 2014
*.9.118.42

기독교 용어중에 '하나님의 영광'이란 표현만큼 추상적이고, 실감나지 않는 단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예배의 대표 기도중에 흔히 나오는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옵니다"라는 기도문이

늘 공허하게 들림은 저의 불신앙 탓이겠지요?

 

목사님께서는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고 결론을 지으셨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 해석해도 맞는지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함은

결국 예수님과 연합되어 사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우리를 통해 우리 이웃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주인 되심을

도전받게 되고 증거받게 될 것이요,

그 일에 도구로 부름 받은 우리가 자연스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걸 내가 목도하려고, 경험하려고 안감힘을 쓰고, 이를 목표로 구도정진해야 할 어떤 대상이 아니요,

이 은밀한 구원의 비밀에 부름받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우리의 이웃들에게 증거해야 할 신비한 영역이요,

그런 매일의 제자 된 삶을 통해 우리가 자연스레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며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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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3, 2014
*.94.91.64

부스러기 님이 정리를 잘 하신 거 같습니다.

'매일의 제자 된 삶...'과는 어떻게 연관되는지

보충 설명이 있어야만 전달이 되겠군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이웃에게 증거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건 그분의 일이니까요.

다만 우리는 그 영광의 빛에 반사되는 삶은 가능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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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또다른세계

March 03, 2014
*.192.37.123

설교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지만

홈페이지를 관리해주시는 분의 노력으로

이제 핸드폰에서도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네요.

평소 아쉬웠던 부분이었는데...그 수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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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3, 2014
*.94.91.64

예, 앞으로는 다른 동영상 등등의 파일이

스마트폰으로 접속 가능한 쪽으로 가게 될 겁니다.

대구샘터교회 김태형 집사님이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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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March 04, 2014
*.194.68.54

그런데 저1독서, 제3독서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4, 2014
*.94.91.64

사진이 아들인가 보군요.

귀엽네요.

기독교 전통에는 성서일과라는 게 있어요.

매일 구약(제1독서), 서신(제2독서), 복음서(제3독서)가 주어집니다.

설교는 주일에 해당되는 성서일과를 따르면 됩니다.

이 세 본문이 서로 연관됩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 연관성의 강도에 차이가 있지만요.

어떤 교회는 제1독서라고 하지 않고 구약이라고 합니다.

샘터교회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다가

가끔 그게 맞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그냥 순서에 따라서 1,2,3 독서로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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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lutecia

March 05, 2014
*.212.3.56

오늘 주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늘은 두 번 재방송해서 들었습니다. ^^

( 솔직히,,,  목사님 인터넷 설교 들으면서 가끔 졸 때가 있었어요.  죄송~~^^)

 

근데요...  저는,  누구나,  "하나님!!~~"  하면,,,

요한 복음  1장 시작이 떠오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근데요, 

저 같으면 이렇게 번역하고 싶고, 이렇게 믿고 싶습니다.

왜냐면, 헬라어로 되어있는 걸, 영어로 번역했기 때문이거든요.

 

"태초에 진리가 있었다. 그 진리가 주님이시고, 그  진리는 하늘과 땅이 창조 되기 전 부터 우리 가운데 계시고 있으시다.  모두 그 진리로 창조되었고, 그 진리로 창조 되지 않은 것은 없다...  etc..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하늘의 뜻과 같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이 세상을 만드신 주님의 진리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돼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아닌가요??  

 

언제나 목사님의 성경의 묵상과 말씀을 감사드립니다.

 

허 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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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5, 2014
*.94.91.64

허근 님,

제 인터넷 설교를 듣고 졸린다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ㅎㅎ

로고스를 진리로 번역해도 됩니다.

단 그 진리를 왜 예수인지,

왜 예수이어야만 하는지는 생각해야겠지요.

주님의 평화가 임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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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lutecia

March 09, 2014
*.212.3.56

진리 = 예수, 

태초에 그 진리와 함께 계셨던 분 = 예수,

지금 이 세상에 성령으로 같이 계신 분 = 예수, 

신학적으로 삼위일체.

 

왜 진리가 예수님이신 지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이 틀리는지요?

 

허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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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9, 2014
*.94.91.64

예, 정리를 잘 하셨습니다.

 

profile

[레벨:13]진인택

December 08, 2014
*.206.242.56

저의 모든 인생을 이끌어주고 살게해주고 마지막문과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키를 누군가가 키를 쥐고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하게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요, 영광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에서 나타나심은 목사님의 여러번의 말씀 설명으로 보고 또 보면서 반복하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자주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또 보고 새롭게 느낍니다. 아마 이러한 반복이 끝까지 가겠지요. 하나님의 영광은 작게, 크게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나타난다고 전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런 시간에 목사님께 글을 쓰는 것도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엄연한 하나님의 영광속에서 생명의 살아있음을 알리는 메세지라 생각합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December 08, 2014
*.94.91.64

요즘 진인택 님이 제 설교를 자주 접하고 계시군요.

하나님의 영광은 작고 큰 건 없겠지요.

물은 한 스푼에 담겨도 물이고

드럼통에 담겨도 물일 뿐이니까요.

진인택님이 느끼고 있는 그 영광은

늘 최선의 것입니다.

주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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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11894
733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87
732 사순절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7] 2018-02-25 8406
731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263
730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7352
729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675
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5902
727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6537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72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76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807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7823
72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8159
721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3] 2017-12-11 16119
72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1101
719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6799
71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94
717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6639
716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683
715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63
714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7642
713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97
712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2017-10-08 8264
711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93
71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93
709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821
708 창조절 죽음 넘어! (출 12:1-14) 2017-09-11 8234
707 창조절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6] 2017-09-03 7866
706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518
705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2948
704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159
703 성령강림절 빈 들에서 배불리 먹다 (마 14:13-21) [8] 2017-08-06 8085
702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5024
701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92
700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917
699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305
698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174
697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10017
696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442
695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847
694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315
693 부활절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8] 2017-05-28 7782
692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527
691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875
690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70
689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863
688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504
687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698
686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6963
685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6084
684 사순절 영적 시각 장애 (요 9:35-41) [2] 2017-03-26 8222
683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708
682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453
681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77
680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945
679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53
678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618
677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812
676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42
67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458
674 주현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4] 2017-01-15 8281
67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91
672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3137
671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148
670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4052
66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896
668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646
66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531
66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423
665 창조절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4] 2016-11-14 8270
66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519
663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928
662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85
661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637
660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539
659 창조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15] 2016-09-04 8329
658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307
657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105
656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93
655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45
654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130
653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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