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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과 예수 부활 (요 20:1-18)

부활절 조회 수 12954 추천 수 0 2014.04.20 22:48:40
설교듣기 : https://youtu.be/7SIbUCDDfuA 
성경본문 : 요한복음 20:1-18 

빈 무덤과 예수 부활

요 20:1-18, 부활 주일, 2014년 4월20일

 

 

오늘 부활주일 설교 준비가 저에게 힘들었고, 지금 설교하는 것 자체가 곤혹스럽습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에는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상황이 너무 절망스럽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짐을 포기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들은 부활 주일을 맞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매년 반복되는 절기라서 이렇다 할 감동 없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부활주일을 맞는 분들도 계시고, 또는 부활 신앙이 감동을 맛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세상살이와 교회생활 자체에 바빠서 부활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는지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신자들 개인에 따라서 다 다를 겁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은 부활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부활의 리얼리티에 가까이 가려는 생각 없이 무조건 믿거나, 또는 무조건 외면합니다. 이건 기독교인들에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 또는 부활 경험에 가까이 가려면 우선 예수 부활에 대한 첫 번 증인들의 이야기를 선입견 없이 들어야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부활주일의 제3독서인 요 20:1-18절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 20:1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 오전에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안식일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금요일 오후 늦은 시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원래 로마법에 따르면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시체는 짐승들이 뜯어먹도록 십자가에 매달아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예외였습니다. 로마 정부로서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을 정도의 사회적 지위가 있었던 아리마대 요셉이 손을 썼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곧 시작된 탓에 매장은 졸속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시신을 깨끗이 씻기지도 못하고 기름을 바르지도 못했습니다. 이를 눈여겨보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난 첫날,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전에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무덤으로 갔습니다. 공관복음에 따르면 몇 명의 여자들이 동행한 것으로 나오지만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 한 여자만 언급합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막달라 마리아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매장된 요셉의 무덤은 가족 묘지로서 동굴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가까이 와보니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데 옮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자신들의 태만으로 인해 분실됐을지 모른다는 자책감이 컸겠지요. 무덤에 도착해서 보니 마리아가 말한 그대로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었고, 시체를 쌌던 수의만 남아 있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또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보십시오. 빈 무덤을 보고 즉시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공생애 중에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셨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나, 그걸 들었을 때 제자들은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9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그렇습니다. 빈 무덤과 부활은 직결되는 게 아닙니다. 빈 무덤으로만 예수 부활의 확실성을 주장하면 시체 도난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숨겨 놓고 부활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마리아가 무덤에 왔을 때 돌문이 열려 있었다는 사실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돌문과 상관없이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요 20:19절에 따르면 안식 후 첫날 저녁 때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문을 닫아걸고 모여 앉았던 제자들 앞에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빈 무덤과 예수님의 부활이 직접 상관되는 게 아니라면 복음서 기자들은 왜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걸까요? 실제로 빈 무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 전승에서 중요합니다. 다만 전후관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로부터 부활 신앙이 일어난 게 아니라 부활 신앙으로부터 빈 무덤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이런 설명이 약간 까다롭게, 또는 불필요하게 들릴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무조건 믿으면 되지, 전후관계 등을 따질 필요가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제자들의 부활 경험과 부활 신앙을 오해하지 말라는 데에 있습니다. 부활의 첫 증인들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만 우리도 그런 부활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실질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주 명백한 사건이었습니다. 숨이 끊기고 심장이 멈추고 뇌 활동이 정지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과 똑같이 죽을 수 있냐,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었다면 예수님은 신이 아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은 실제가 아니라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교부들에 의해서 이단으로 판정받았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와 똑같은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할 때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매장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이야기합니다. 사도신경도 그렇고, 복음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사에 빠진 게 아니라 실제로 죽었다는 뜻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가족 묘지에 홀로 매장된 예수님의 시체는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이 죽으면 피가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세포가 죽기 시작합니다. 죽음과 더불어 부패가 시작합니다. 이에 대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말이 없지만 예수님의 시체도 당연히 그런 과정을 거쳤을 겁니다. 기독교의 정통 신앙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합니다. 부패 중이었던 예수님의 몸이 어느 순간부터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일까요? 심장이 다시 뛰고, 숨을 다시 쉬고, 뇌파 활동이 일어난 순간은 언제일까요? 시체의 몇 퍼센트가 부패한 다음부터인가요? 제가 이렇게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처럼 따지듯이 질문하는 이유는 앞에서 짚었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열린 문과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는 것일 수는 있으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명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 부활의 확실성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우리는 의학이나 생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따르는 사람이기에 앞의 질문보다는 다음의 질문을 하는 게 옳습니다.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경험한 것일까요?

 

오늘 설교 본문의 후반부는 다시 마리아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전반부에서 마리아는 빈 무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하고 일단 뒤로 빠졌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간 뒤에 마리아만 혼자 무덤 앞에 남았습니다. 그는 울면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상하지 못한 현상을 보았습니다. 흰 옷 입은 두 천사를 보았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하소연합니다. 당시 마리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시체가 없어진 일로 충격을 받았고,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별 도움도 받지 못한 가운데 천사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한두 마디 대화를 나눈 천사들은 사라지고, 대신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천사들은 무덤 안에 있었으나 예수님은 무덤 밖 마리아 뒤편에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처음에는 그가 예수님이 아니라 동산을 지키는 사람일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과 똑같은 질문을 마리아에게 합니다. 마리아는 다시 예수님의 시체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옮겼으면 그 장소를 알려 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자기 이름을 듣는 순간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선생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랍오니’ 하고 부르면서 반가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붙들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부활의 주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이 말씀은 특이합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곧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올라가지 않았으나 곧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승천을 가리킵니다. 승천 이야기는 막 16:19-20에, 그리고 눅 24:50-53과 행 1:6-11에도 나옵니다. 사도신경도 승천을 말합니다. 기독교 전통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함께 언급하는 이유는 부활과 승천이 같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를 오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습니다. 우주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사람들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초보적인 이해만 있어도 예수님이 우주 공간으로 올라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승천에 대한 성서 이야기가 우주 물리학에 대한 오해에서 벌어진 오류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약성서의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곳을 하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부활의 예수님이 은폐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하나님께 올라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제2 독서인 골 3:1-4절은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위의 것은 하늘입니다. 거기에 참된 생명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3절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숨어 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부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드러나 있는 방식으로 이해하는데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드러나 있는 것은 때가 되면 다 사라집니다. 우리도 세상에 드러나는 방식으로 살다가 곧 죽습니다. 이게 삶의 모든 거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냥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그래서 여전히 드러나야 할 하늘의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은폐된 생명이 현실(reality)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이 곧 영생이며 부활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서만 우리는 사탄처럼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16일(수요일) 오전에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비통한 사고를 접했습니다. 인천에서 제주도로 항해하던 여객선이 진도 해역에서 침몰해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 이백 몇 십 명과 일반 승객 수십 명이 사망했거나 지금까지 실종 상태입니다. 국가적 대재난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들은 늘 일어납니다. 그건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이번 참사의 결과는 대한민국의 총체적 부실이 압축적으로 나타난 사고이기에 분노와 절망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곳곳에 잠복해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배가 침몰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그 순간에 승객들을 객실에 남아 있으라 한 세월호의 선장이나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교회에만 붙어있게 만들려는 교회 지도자들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참담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와 죽음의 악한 영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시시때때로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마지막 승리자는 창조와 부활의 영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2014년 부활절을 맞는 우리는 아직 십자가의 참혹한 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곧 부활의 영광스런 시간이 옵니다. 아니 그 십자가와 무덤 안에 이미 부활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빛을 보고 힘을 내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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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또다른세계

April 21, 2014
*.98.145.105

매주 월요일 아침...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며 그것을 화두삼아 한 주를 보내곤 했는데..

오늘은 저도 참을 수 없는 울분과 분노와 절망으로 한 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찬디찬 물속에서 비명과 공포에 떨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리조트에서 대학생들이 죽은 것이 엊그제인데

또 어처구니 없는 어른들의 이기심과 탐욕, 무관심, 부주의가 

어린 생명들을 제물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생 이런 짐들을 안고 어찌 살아갈까요...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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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1, 2014
*.94.91.64

다른세계님,

그렇습니다.

분노와 절망이 바닷물처럼 우리를 덮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후진국에서나 일어나는 거라고 말하지만,

후진국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거라고 말해야합니다.

이 잔인한 4월에 4월과 같은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네요.

입시중심의 공교육이 이미 저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긴 했지만요.

삶의 패러다임을 총체적으로 바꿔야 할텐데,

그게 가능할지, 음

가슴이 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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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이신일

April 21, 2014
*.163.192.36

목사님, 저 역시 지난 고난주간에 이어 어제는 너무나 힘든 부활주일을 보냈습니다.

부활절 달걀을 준비하면서 울었고, 부활절 성찬식을 집례하면서 또 울었습니다.

부활, 아직도 대부분의 신도들이 죽은 자의 소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에

어제 제 설교는 목사님의 옛 설교, 다비다-쿰을 모티브로 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죽은 자의 소생이 아니라 부활 즉 영원한 생명에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 억울하게 죽어간 불쌍한 영혼들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이 비극의 책임을 저를 비롯한 살아있는 자들에게 물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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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1, 2014
*.94.91.64

이신일 목사님,

이번 부활절기는 정말 잔인합니다.

예수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느꼈던 그런 절망이

큰 파도가 되어 우리를 덮는군요.

목사님의 기도를 저도 똑같이 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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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지랑이와종달새

April 25, 2014
*.96.142.228

목사님 저 역시 지난 주 슬픈 부활절을 보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슬픔과 분노에 빠져있는 듯 합니다.

 

절망의 한 복판에서 어떻게 희망을 말할지

평소 자신있게 말하던 부활절 설교가

정작 슬픔의 정 중앙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저 언어의 유희처럼 느껴져 당혹스럽습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드러나 있는 것은 때가 되면 다 사라지는데

너무 잔인한 방법으로 사라져서 분노가 일기도 합니다.

 

부활의 복음이 한낱 관념이 아닌 리얼리티로

아직은 제 가슴에 다가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승리자는 창조와 부활의 영이신 하나님이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셔서 위로를 받고 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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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5, 2014
*.94.91.64

아, 한석문 목사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넷으로 인사를 나누게 되는군요.

부산은 배가 많은 곳이라

이번 대재난이 더 절절하게 느껴지겠습니다.

 

설교자는 다 아는 것만 전하는 게 아니라

인식의 한계로 인해서 미처 깨닫지 못한 것까지

성령에 의지해서 용감하게 선포해야 할 경우가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있습니다.

그 경우가 지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어둠과 절망의 시절에

우리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전통에 의지해서  

그분이 종말론적인 승리자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외쳐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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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April 26, 2014
*.56.59.65

정 목사님.. 

힘드셨어도..

은폐된 생명에 시선을 두어야한다는 말씀에 새로운 각오를 해 봅니다.


근데.. 아직 오지 않은 4월 30일이란 날짜가 위에.. 4월 20일로 수정해 주심 더 좋을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26, 2014
*.94.91.64

예, 모래알 님의 예리한 눈에 걸려든 오자를

수정했습니다.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13]진인택

December 19, 2014
*.206.242.56

제가 어제 살았고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일은 난 모릅니다. 제가 할수 있는게 없다는게 너무 명백해서 겁도 납니다. 그러나 나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 조심스럽게 목사님 말씀으로 알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오늘 주제는 중요해서 뭐라 말하기가 힘이듭니다. 부활은 영생에서 보면 작은 문을 지나는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 문이 죽음이기에 생각들이 복잡하고 생각조차 안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향해가는 괴로운 인생들에게 주 예수님의 부활이 생명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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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0, 2014
*.94.91.64

부활 문제를 생각하면 아득하지요?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 사건인 부활을

지금 여기서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는 없습니다.

사도들의 경험을 깊이 있게 따라가는 게 최선이겠지요.

성탄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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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34
712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2017-10-08 8196
711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08
71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24
709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780
708 창조절 죽음 넘어! (출 12:1-14) 2017-09-11 8186
707 창조절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6] 2017-09-03 7806
706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473
705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2887
704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90
703 성령강림절 빈 들에서 배불리 먹다 (마 14:13-21) [8] 2017-08-06 8053
702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4993
701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50
700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881
699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243
698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113
697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1
696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374
695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812
694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275
693 부활절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8] 2017-05-28 7743
692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477
691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829
690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21
689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754
688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400
687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654
686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6894
685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5983
684 사순절 영적 시각 장애 (요 9:35-41) [2] 2017-03-26 8185
683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657
682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359
681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32
680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679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07
678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7
677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771
676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07
67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403
674 주현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4] 2017-01-15 8234
67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39
672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2985
671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009
670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708
66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26
668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61
66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092
66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7
665 창조절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4] 2016-11-14 8231
66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4
663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714
662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36
661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588
660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466
659 창조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15] 2016-09-04 8272
658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270
657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051
656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50
655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7
654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080
653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111
65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15] 2016-07-17 15086
65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골 1:1-14 [9] 2016-07-11 7998
6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16] 2016-07-03 6508
649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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