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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성령강림절 조회 수 9925 추천 수 0 2016.05.29 21:42:33
설교듣기 : https://youtu.be/B-LPHoD2rVU 
설교보기 : https://youtu.be/EPnpnCRwXrc 
성경본문 : 열왕기상 18:20-39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성령강림후 둘째 주일, 2016529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고대 이스라엘은 지금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린 것처럼 남왕국인 유대와 북왕국인 이스라엘로 나뉘어 지낸 기간이 깁니다. 통일왕국은 다윗과 솔로몬 재위 때뿐이었습니다. 정통성은 남유대에 있습니다. 정통성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윗 왕조에 뿌리를 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왕조가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려를 전복하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혈통이 흔들림 없이 왕권을 이어받은 거와 비슷합니다. 남유대와 달리 북이스라엘은 처음 나라를 세운 여로보암 이후에 여러 번에 걸쳐서 왕조가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왕권이 취약했다는 뜻이겠지요.


왕상 16:21절 이하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은 두 파로 갈렸습니다. 반은 디브나장군을 따랐고, 반은 오므리장군을 따랐습니다. 일종의 내전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므리가 이겨서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조가 시작된 겁니다. 당시가 기원전 9세기입니다. 오므리는 북이스라엘의 국력을 크게 키웠습니다. 주변의 다른 나라들도 당시의 북이스라엘을 오므리 왕조로 부를 정도로 북이스라엘은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아서 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아합 왕입니다. 아합이 건설한 수도 사마리아는 당시 근동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품격 높은 문명 도시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합은 요즘 말로 성공한 왕입니다.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했으니까 그렇게 불릴만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자들은 아합을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왕상 16: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아합이 행한 악행에 관해서는 그 다음 구절이 이렇게 적시합니다. 이방 나라의 공주를 아내로(이세벨) 삼고, 이세벨이 섬기던 바알을 나라의 중심 종교로 삼았으며,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건축했고, 아세라 상도 만들었다는 겁니다. 아합은 이런 비판을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 나라의 왕은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통합도 이루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자신들과 대립하고 있는 남유대에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예루살렘까지 가는 것도 어렵고, 남유대가 그걸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며, 왕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자기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기 시작하면 국민통합에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웅장한 신전을 사마리아에 세웠기 때문에 이제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왕으로서는 당연한 일을 한 겁니다. 만약 다른 일만 벌어지지 않았으면 아합은 오므리 왕조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었을 겁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고, 남유대 사람들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 모두 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오므리 왕조를 위기에 떨어지게 한 사건은 전쟁도 아니고 경제 위기도 아니고 왕의 도덕성이나 지도력의 상실도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의 강력한 저항이 그것입니다. 그 대표자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 중에서 초자연적 카리스마가 가장 강력한 선지자입니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미리 올 사람이 엘리야라고 사람들이 믿을 정도로 엘리야는 구약시대에 특별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의 종교 정책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바알숭배에 머물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제거했습니다. 추방하거나 죽이거나 했습니다. 당시 왕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는 그럴만한 힘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을 설득해서 아합에게 불리한 여론을 형성할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백성, 또는 국민들이 늘 옳은 걸 택하는 게 아닙니다. 대개는 당장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을 택합니다. 백성들은 아합이 나라를 크게 키웠기 때문에 바알숭배를 별로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런 게 지금 우리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만 외로운 가운데서 아합과 대결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북이스라엘에 대가뭄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뭄이 3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왕이라고 하더라도 가뭄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가뭄이 바알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자 심판이라고 말했습니다. 아합에게 잡히기만 하면 당장 죽을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엘리야는 아합 앞에 나타났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가 각각 종교적 능력을 발휘해서 어느 쪽의 하나님이 참된지를 확인해보자는 겁니다. 일종의 종교 배틀을 벌이자는 제안입니다. 아합은 엘리야의 제의를 받아들입니다. 가뭄으로 인해서 아합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을지 모릅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과 여호와 선지자 엘리야 한 사람과의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당연히 엘리야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엘리야는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낙심하고 로뎀나무 아래서 죽고 싶어 할 정도였습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의 대결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지요? 두 군데에 번제단을 차려놓았습니다. 하나는 바알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야를 위한 것입니다.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송아지를 잡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신에게 기도를 드립니다. 송아지가 번제물로 오른 제단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따라서 결판이 나는 겁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바알에게 기도를 바쳤습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열광적으로 바알을 향해서 울부짖었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자 그들은 제단 주변에서 춤을 추면서 더 적극적으로 신을 불렀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보였습니다. 저녁때까지 광란에 가까운 종교 의식을 벌였지만 제단의 장작과 송아지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제 엘리야 차례입니다. 엘리야는 자기에게 할당된 제단 주변에 도랑을 만들고 제단 장작과 송아지에게 물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물이 도랑까지 차고 넘쳤습니다. 그리고 저녁 때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바짝 말렸습니다. 그 광경을 본 백성들이 엎드려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고 두 번이나 외쳤다고 합니다(왕상 18:39).

 

어떻습니까? 이야기가 흥미진진하지요? 이걸 영화로 만들었으면 마지막 대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왕상 18:40절에 따르면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한 명도 빼지 말고 다 체포하라고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 기손 시내로 끌고 가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인 엘리야가 한 일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내전에서나 있을 법한 사건입니다. 도대체 갈멜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 바알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여기서도 분명하게 확인되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야기의 전개가 만화처럼 보인다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일이 실제로 당시에 일어난 것일까요?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장면과 똑같은 사건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의 기도에 응답해서 불을 실제로 내리는 분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옳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 신앙은 우상숭배와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기도만 하면 전쟁에서 늘 이기고, 시험에서도 뛰어난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다른 노력을 할 거 없이 기도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입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을 마음먹은 대로 행하는 존재가 여호와라고 한다면 그는 차라리 사람들이 기도하기 전에 세상의 모든 악을 제거하는 게 마땅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작동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늘 선이 승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갈멜 산 이야기는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라는 뜻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 이야기는 각각의 다른 경우가 오랜 전승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묶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해가 갑니다. 각각의 다른 경우라는 것은 다음을 가리킵니다. 당시는 3년 이상 가뭄이 계속되었던 때입니다. 나라의 위기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큰 가뭄이 들면 왕이 나서서 기우제를 드립니다. 아합 왕실의 바알 신앙을 대표하는 선지자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서 기우제를 드렸을 겁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보인 종교의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에는 목소리만 높였지만 다음에는 격렬한 몸동작이 따릅니다. 클라이맥스는 자해입니다.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찔러 피를 내는 겁니다. 이들의 기우제는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영성이 깊은 사람이기도 하고, 자연현상에 대한 통찰력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언제쯤 비가 내릴 것인지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합에게 자신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겠다고 알렸습니다. 그가 마련한 번제 제단은 먹구름이 만든 번갯불에 다 탔습니다. 그리고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대가뭄 시대에 벌어졌던 이 두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에 곁들여서 하나로 묶인 것입니다.

 

열왕기를 기록한 사람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한 메시지는 여호와가 바로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 한 가지입니다. 엘리야가 제단 앞에서 드린 기도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고, 여호와의 불이 내려 번제를 태우는 것을 본 백성들이 외친 내용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 즉 야곱의 하나님’(왕상 18:36)입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는 말이 당연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바알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엘리야의 제안을 받아들인 아합이 백성들을 갈멜 산으로 불러 모았을 때 엘리야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다그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백성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본문을 그대로 전합니다.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긴박한 순간에 엘리야 선지자가 간절한 심정으로 토로한 말을 저들이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 아합 왕이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기가 곤란할 수 있었지만, 백성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 기울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백성들에게는 바알이냐 여호와냐, 하는 게 아니라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런 백성들의 마음에 아합은 딱 맞는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하지 그 외에 무엇이 더 중요한 게 있냐,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오늘의 정치인들도 다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일단 말은 그렇게 합니다. 여기서 백성들과 선지자들의 생각이 갈립니다. 백성들은 배불리 먹고 사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면 선지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사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습니다. 이 두 생각이 충돌합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맞아 떨어지면 좋긴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돈독하면서 동시에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최선입니다. 우리들도 다 그런 것을 원할 것입니다. 저도 우리교회 신자들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우면서 신앙의 깊이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당연하거나 쉬운 게 아닙니다. 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신가요?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6:13).


엘리야는 무슨 이유와 근거로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지나칠 정도로, 아합의 입장에서는 국정을 끌어갈 수 없을 정도로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다.’는 사실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엘리야의 주장은 정말 옳은 것일까요? 독불장군 선지자의 독단이거나 공허한 관념은 아닐까요? 엘리아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주림의 고통을 받아도 여호와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보이는 성장과 물질 만능의 이데올로기라 할 바알숭배가 겉으로 매혹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자기 백성들의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기까지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1세기는 가장 전형적인 바알숭배 시대이기 때문에 엘리야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실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삶을 생산과 소비로 이해합니다.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게 삶이라는 겁니다. 대형마트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온갖 물품이 구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실정입니다. 연봉을 많이 받아야만 많은 걸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런 방식의 삶으로 우리가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운전기사가 모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파출부가 모든 집안일을 맡아주며, 매년 해외여행을 다녀와야만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삶의 과정입니다. 삶을 재미있게 하는 놀이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정신을 팔면서 매달리는 놀이와 비슷합니다.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어른이 된 사람은 그런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만족하는 것처럼 시늉을 내는 것뿐입니다. 매스컴에서 성공적인 삶이라고 내세우는 것들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것에 매달리게 됩니다. 저의 이런 설명이 비현실적인 것일까요?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는 문장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은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이상하게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다 태운 것 같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현상이 있어야만 약간의 감동을 느낍니다. 그런 감동도 잠시뿐이고 다시 모든 삶이 여호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차원으로 떨어집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선지자들과 신학자들은 왜 그 말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 마음에는 그 말씀에 대한 공명이 턱없이 부족한 것일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호와가 누군지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경험하는 데서만 주어집니다. 그 여호와는 구약성경이 증언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의 행위,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만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믿고, 그 사실에 의존해서 살아감으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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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02, 2016
*.97.90.75

목사님, 설교 잘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설교 내용 가운데 의문이 듭니다.


목사님은,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장면과 똑같은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고 하면서, 몇 가지 이유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각각 다른 전승이 하나의 이야기로 합쳐진 것으로 보셨습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보아야만 이해가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좀 지나친 게 아닐런지요. 

자의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은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일은 모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보시는지요?

아니면 경우에 따라 다른다고 보시는지요?

만약 경우에 따라 다르게 보신다면, 그걸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이를테면 3년 가뭄이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다"는 외침 같은 내용은 그대로 인정하면서

다른 사건은 그렇다고 보지 않고 계신데, 

그 기준이 분명치 않아 보입니다. 


사건은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대신에 거기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02, 2016
*.164.153.48

아름드리 님이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질문 겸 의견을 주신 것 같습니다.

은혜 받았다, 많이 배웠다 하는 게 아니라

납득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잘 하셨습니다.

그래야 저도 생각을 좀더 깊이 할 수 있지요.


말씀하신 문제는 성경이 무어야, 하는 질문에 관계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건 아니겠지요?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고대인의 눈으로 일단 들어야봐야합니다.

그들에게는 화산폭발이 하나님의 임재 현상으로 보였고,

휴화산에서 나오는 연기가 하나님이 인도하는 구름기둥으로 보인 거지요.

철새들과 광야의 먹을거리도 하나님이 특별한 은총으로 내려주신 거에요.

이런 거 따지자면 끝이 없습니다.

태양도 멈춰야 하고 달도 멈춰야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이 거부할 수 없는, 예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를 설명한 겁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은 다 과학적으로 설명 되는 현상들입니다.

갈멜 산 사건도 그런 것 중의 하나지요.


어떤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기준이 뭐냐, 하고 물었지요?

기준은 분명합니다.

성경기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하고 싶은 것을 전하기 위해서 사용한 고대인들의 세계관은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오늘의 시각으로 재해석해서 받아들이는 거지요.

제 설명이 부족한 게 있으면 다시 말씀해주세요.

그걸 통해서 저도 배웁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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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03, 2016
*.97.90.75

목사님, 

제 질문을 진지하게 여기고, 친절히 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제가 했던 질문은 목사님의 설교를 보면서 오랫동안 여쭙고 싶었던 내용입니다. 


성경엔 문자적 오류도 있을 수 있고, 고대인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말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고대인들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설명했다는 점도 수긍합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갈멜산 사건에 대해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질문의 알맹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고대인은 자기들의 세계관에 입각해서,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목사님은 그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어요.

왜 이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고, 거기에 담긴 의미를 설교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목사님은, 

"성경기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하고 싶은 것을 전하기 위해서 사용한 고대인들의 세계관은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오늘의 시각으로 재해석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성경기자가 말하고 싶은 것'과 그걸 전하기 위해 사용한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구분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 점에서 저는, 목사님의 자의적 판단이 설교에 지나치게 개입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바로 설교자의 몫이라고 하신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큰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성경의 사건에 대해

고대인들이 일어났다고 하는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물론 엘리야가 수많은 바알 선지자를 죽였다는 기록은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고대인의 세계관에서 승리를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런지요. 


목사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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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3, 2016
*.164.153.48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표현이 불편할 정도로 과격하지요?

여기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바알선지자들과 엘리야가 같은 시간 대에 갈멜 산에 모여서

하늘의 불을 끌어오는 게임을 벌였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건 동화 같은 이야기 아닌가요?

그래서 두 가지 사건이 하나로 결합된 거라고 설명한 건데,

그게 아름드리 님에게는 자의적 해석처럼 들린 거에요.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들은 작두 위를 걷는 무당과 비슷합니다.

삐끗하면 자기를 다치고 다른 이를 다치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각오를 해야겠지요.

저도 그런 각오를 한 채

양심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성경기자가 말하고 싶은 것과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구분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습니까?' 하셨는데,

다를 수가 없어요.

말하고 싶은 것은 본질이고

세계관은 형식, 또는 수단이라서 구분이 됩니다.

그걸 구분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해석이라는 단어는 헬라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에서 온 건데

제우스의 언어를 인간의 말로 통역하는 역할을 헤르메스가 한 거에요.

설교자는 바로 헤르메스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신의 말을 어떻게 인간의 말로 번역할 수 있을까요?

설교자의 경우에는 깊은 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통찰이 필수입니다.

생명, 존재, 시간, 논리, 이성, 은폐와 노출 등등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성서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기초를 배우는 거지요.

(말이 옆으로 나갔네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큰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성경의 사건'이라고 하셨는데,

갈멜 산 사건에는 누구나 거부감을 느껴야 합리적인 겁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유치원 어린이가 자기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라고 말했다 합시다.

그건 한편으로 옳지만 다른 한편으로 틀린 거에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표현이 계속 마음에 걸리지요?

일어난 것으로 보고 그 의미를 설교해도 되긴 합니다.

굳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세 가지로 생각한 건 아닌데 말하다 보니 그렇게 정리가 되네요.)

1) 일단 내가 그걸 일어날 수 있는 거라고 믿지 못한다.

2) 불편한 진실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는 게 신자들의 신앙성숙에 필요하다.

3) 내 설교의 위치는 전통적인 설교과 신학강의 중간에 자리한다.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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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June 03, 2016
*.69.199.48

야훼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시대와 처한 환경과 배움에 따라 천차만별처럼 다르다고 봅니다.

제가 어릴 때 믿었던 하나님과 지금 믿는 하나님이 다른 것처럼요.

하나님을 공부하며 알아 갈수록 그 기쁨은 배가 된다고 봅니다.

지금 사도신경해설 강독을 읽고 있는데

어렵지만 새로운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꿀맛입니다.

이 책을 만드신 분들과 보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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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4, 2016
*.164.153.48

'새로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우리의 신앙성숙에서 핵심입니다.

수학의 세계에 깊이가 있고,

음악의 세계에도 깊이가 있듯이

하나님의 세계에도 깊이가 있으니

깊이로 들어갈수록

우리는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겠지요.

주 안에서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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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05, 2016
*.97.90.75

목사님, 좋은 주일 보내셨나요?

바쁘신 중에 댓글 쓰는 일도 보통이 아닌데, 정성껏 답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얼굴을 뵙고 나누어야 할 생각을 표정 없는 글만으로 생각을 적다 보니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래도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바알선지자들과 엘리야가 갈멜 산에 모여서 하늘의 불을 끌어오는 게임을 벌였다는 것을 동화 같은 이야기로 보셨네요. 또 갈멜산 사건에는 누구나 거부감을 느껴야 합리적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 사건에 왜 거부감을 느껴야 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인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게임하듯이 그런 대결을 한다는 게 유치해서? 아니면 하나님이 불을 내린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어서? ... 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라고 봅니다.

 

물론,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목사님처럼 이 사건을 실제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누구나거부감을 느껴야 합리적이란 말씀은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들립니다. 저 같은 사람은 합리적이지 못한 건가요?^^

 

저는 오히려 목사님이 제시하신 생각이 동화 같습니다. 이 사건에서 '기우제'를 생각해 내신 것이나, 엘리야가 자연현상에 대한 감각으로 비가 내릴 것을 예측하고 있다가 번제를 드린 건데, 마침 벼락이 떨어져서 제물에 불이 났고, 이어서 비가 내려 불을 껐다는 생각... 벼락이 내릴 자리까지 예상했다는 것은 너무 자유로운 상상이 아닐까요? 게다가 그 두 사건이 합쳐졌다고요? 그럼, 세 가지 사건이나 네 가지 사건이나 혹은 그 이상은 될 수도 있는 건가요? 그렇게 사실은 하나가 아닌 두 개 이상의 개별적인 사건을 마치 하나인 것처럼 엮어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목사님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이게 더 동화 같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렇게 볼 필요도 없고, 굳이 그렇게 본다면 그 근거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셨어요. 그렇다면, 그냥 목사님의 생각이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요?

 

, 성경기자가 말하고 싶은 것과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구분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가 없다고 하셨네요. 그럼 저는 뭔가요? 저는 목사님과 다르잖아요. 저는 성경기자가 말하고 싶은 것과 고대인의 세계관이 적어도 이 사건에서만큼은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보거든요. 그런데도 사람마다 다를 수가 없다는 말씀은, 마치 목사님이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말하고 싶은 본질과 세계관이라는 형식을 구분하지 않으면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하셨나요? 저는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서도 이 기사에 대해 목사님과 같은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끝에 적으신 세 가지 이유 가운데 1), 일단 목사님께서 그걸 일어날 수 있는 거라고 믿지 못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건 목사님의 자유니까요. 3), 목사님의 설교의 위치가 전통적 설교와 신학강의 중간이라는 점도 괜찮습니다. 이를테면, 신학적인 설교라는 말씀이시지요? 저도 설교는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2)번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회 안에서 이 사건을 불편한 진실로 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요? 저는 이 사건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을 거라고 보는데요?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목사님께서 편하신 만큼 답해주셔도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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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5, 2016
*.164.153.48

예, 주일을 잘 지내셨지요?

주신 의견에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아마 다른 분들 중에서도 아름드리 님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거 같습니다.

대구샘터교우들과 오늘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도 나왔는데,

아름드리 님의 의견과 비슷한 것도 제법 됐습니다.

직접 보고 말을 하니 쉽게 해결되긴 했지요.

지적하신 내용의 핵심은

1) 갈멜산 이야기를 왜 사실 그대로 보지 않느냐,

2) 아무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하느냐, 하는 겁니다.

1)번은 대답할 필요가 없어요.

성서 이야기는 사실언어가 아니라 종교언어인데,

그걸 자꾸 왜 사실로 믿지 않느냐 하는 건 의미 없는 논쟁입니다.

2)번이 좀 문제가 되기는 합니다.

두 가지 이야기가 전승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로 편집된 것이라고

내가 약간 과격하게 말했으니까요.

과격하더라도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하니까 말한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거지요?

필요에 따라서는 근거를 정확하게 대기도 해야겠지만

근거라는 게 신학 전반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매번 근거를 대기도 힘듭니다.

성서해석학을 강의할 수는 없는 거지요.

설교자가 그동안 성서를 연구하면서 깨닫게 된 관점으로

본문을 읽고 전하면 충분합니다.

그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근거 있는 말씀으로 다가오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없는 것으로 다가오겠지요.

그런 차이는 어쩔 수 없습니다.

간접적으로 근거를 대긴 했습니다.

당시는 가뭄 3년차였고,

번제 뒤에 비가 내렸고,

갈멜산 승리가 엘리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 등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갈멜산 이야기는 아주 복잡한 전승 역사를,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투쟁 역사를 배경에 깔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서텍스트에 얽힌 역사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어둡고 깊고, 그래서 우리에게 은폐된 세계가 거기 있으니까요.

저는 설교자로서 그 세계를 일일이 정확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성서 안에 그런 세계가 있으니 그걸 들여야보다야 한다고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옳다고 여기고 들여다보는 사람에게는

말씀 자체가, 또는 성령이 깨우침을 주시겠지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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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June 06, 2016
*.69.199.48

아름드리님!

님의 지금의 생각은 맞습니다.

저도 님처럼 얼마 전 까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다르답니다.

정목사님의 말씀에 동의하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다비아의 샘터를 만나 진리의 말씀을 배운 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저도 가까운 얼마전 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믿음 최고로 좋은 사람었습니다

교회생활을(예배, 찬양, 기도, 봉사, 전도 행사 등등) 아주 열심히 하였습니다.

직장생활, 가정이나 가족보다 교회생활이 우선이었으니까요.

지금은 그러한 저의 생활이 후회된답니다.


님께서는 용기 있고 솔직하십니다.

이런 마음으로 여기에서 새롭게 하나님을 공부하시기 권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진리의 주님을 만나고 기쁨과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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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06, 2016
*.97.90.75

주안 님,

제게 의견 주신 글, 잘 보았습니다. 

저를 환영하고 초청해주신 뜻으로 보여, 우선 일단은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다비아, 샘터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계신가 봐요.

좋은 일입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기쁨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사알짝~^^ 불쾌한 말씀도 적으셨네요.

정용섭 목사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리의 주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기쁨과 자유도 얻지 못하는 것처럼 쓰셨어요.

물론 짧은 글이라서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고, 

의도하신 바와는 다르게 제가 읽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전에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것을 후회하신다고요?

그걸 왜 후회하나요?

교회에 잘못이 있었으면, 그걸 비판할 수는 있어도

마치 다른 교회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 수 없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안 님의 뜻을 제가 잘못 받아들였다면 미안합니다만,

위에 적으신 글은 정용섭 목사님과 저와의 대화에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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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June 06, 2016
*.69.199.48

아름드리 님!

저의 표현이 서툴러서 오해하시고 불쾌하셨다면 미안합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주님을 알아가는 도반들이라고 봅니다.

여러 종류의 형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요.

님의 생각이 저의 옛 모습과 비슷한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다비아를 통해서 잘 배우고 그래서 기쁘답니다.

學而時習之不亦說呼 의 뜻 처럼요.

제가 가는 이 길이 좋으니 함께 가자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전도하는 것 처럼요.


교회 예배공동체생활은 중요합니다.

제가 후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간은 별로 없이

교회생활에 너무 많은 것들을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홀했다는 뜻이지요.


님은 순수하십니다.

그래서 함께 이 길을 가면서 많은 것을 배웁시다.

정목사님이 진리는 아니지요.  좋은 도반이지요.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이끌어 주는 분이시지요.


주님의 평화가 님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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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06, 2016
*.97.90.75

주안 님, 

답해주신 글,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무얼 말씀하려고 하신지 잘 알겠습니다. 

열린 진리를 향한 초대인 줄 알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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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은목오크

June 06, 2016
*.104.250.13

아름드리님.

마음이 따뜻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진심)

진지한 질문과 답변으로 이어져서

저는글을 읽으며 생각이 정리되는 중이라 감사 할 뿐입니다.

편한밤 되시길.....

profile

[레벨:21]주안

June 06, 2016
*.69.199.48

고맙습니다~^^
앞으로 반가운 만남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profile

[레벨:3]아름드리

June 06, 2016
*.97.90.75

목사님, 바쁜 주일에 답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그곳 식구들과도 말씀을 나눠보셨다고요? 제 의견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었나 보네요. 저도 목사님을 직접 뵙고 말씀을 나누면, 쉽게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를 텐데...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쉽습니다.

 

세 번이나 답을 해주셨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해서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이젠 그만할까, 한동안 생각하다가

어제 설교하신 누가복음 7장 사건과 관련해서 한 말씀 더 여쭙고 싶었습니다.

 

1) 성서의 언어는 사실언어가 아니라, 종교언어라는 말씀...

성경의 어떤 내용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게 의미 없는 논쟁이라는 목사님의 생각이 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목사님은, 어째서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로 보시는지요?

혹시 부활조차도 종교언어로 적힌 것이며, 그러니 역사적 사실은 아니라고 보시는지요?

엘리야라는 인물이 살았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고,

천지창조나 출애굽도 사실이 아니라고 보시는지요?

이런 문제가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은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들립니다.

 

2) 자의적 해석에 관하여.

목사님이 하신 자의적 해석에 관한 근거를 여쭙는 제 질문에

목사님은 신학 전반, 성서해석학 강의 등을 언급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간접적인 근거'로 제시하신,

3년 가뭄, 번제 뒤의 비, 엘리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승리 등이

어째서 열왕기상 18장의 사건을 꼭 두 가지 따로따로 일어난 사건으로 봐야만 하는지

제겐 썩 다가오지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신학과 성서해석학이라는 것이

이 사건을 일어날 수 없는 일로 봐야 한다고 목사님께 일러주었다면,

매번 성서해석학을 강의할 수 없다며 학문의 방패 뒤로 피하실 게 아니라,

깊은 학문을 하신 분답게 그야말로 신학과 성서해석학의 진수를 선보여 주셔야 하지 않을는지요.

 

만약 학문이 그것을 공부하지 못한 사람들을 설득할 힘이 없다면,

그래서 결국 학문이 모자란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못하고,

배운 사람들의 한낱 어려운 소리에 머물고 만다면,

혹시 그 학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게 아니면 학문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의 문제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처럼 저도 성서의 역사를 대할 때마다 두렵고 떨리며

그런 세계를 더 깊은 눈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신학과 학문, 설교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함께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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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7, 2016
*.164.153.48

'설득할 힘'이라는 좋은 말씀을 하셨어요.

재미 있으라고 한 마디 하면,

예수님에게도 그런 힘은 늘 부족했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 해서

나를 설득해봐.' 하는 주장에

좀 엉뚱한 대답만 하셨거든요.

예수님의 일생 전체를 놓고 볼 때도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설득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요.

지금도 인류 과반이 기독교 신앙에 설득당하지 못하고요.

아름드리 님도 비기독교인들에게

궁극적인 진리인 예수를 설득시키지 못할 겁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을까요?

1) 상호간에 세계 패더라임이 다르다.

2) 언어이해가 다르다.

3) 세계가, 또는 그 현상이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깊다.

몇 가지 더 말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로 인해서 일정한 상황에서 설득은 불가능합니다.

창조론자들과 진화론자들의 논쟁이나

동성애에 대한 논쟁에서 보는 것처럼이요.

신학자들끼리도 설득은 안 되요.

20세기 위대한 신학자들인 에밀 브룬너와 바르트가 정색 하고

'네가 틀렸어.' 하고 싸웠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예장합동 교수들과 기장 교수들은

서로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2)에 관해서만 한 마디 하면,

사실언어와 종교언어라는 표현은

아름드리 님이 말한 거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성서에 당연히 사실도 있지요.

그 사실은 뉴스보도의 사실(fact)이 아니라

언어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사건(event)을 가리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성서를 시처럼 읽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고 있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에 관해서는

여기 말고 해당 설교 꼭지글에서 질문해주세요.

과부 아들이 죽은 아니었다는 저의 말을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불편하시지요?

아름드리 님의 질문이 다른 분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profile

[레벨:3]아름드리

June 06, 2016
*.97.90.75

오크 님,

인사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목사님과 대화하는 중, 

이곳에서 뜻밖의 말벗들을 만나게 되네요.

생명의 주님이 함께하시기 빕니다!

profile

[레벨:16]맑은그늘

September 08, 2016
*.212.139.114

설교링크입니다.

https://youtu.be/EPnpnCRwXrc

profile

[레벨:13]진인택

November 13, 2018
*.36.133.8

목사님. 아합왕과 왕비 그리고 450명 선지자를 보면 마치 미국에서 벌어졌던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좀 연결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황으로 잘 나가다가 벽에 부딪혔네요.

월가에서 약탈적 대출로 수백억씩 훑어간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징역형을 받은 기업, 책임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송아지에 불이 붙었다, 안 붙었다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엘리야의 퍼포먼스는 돈을 버는 것에서 뺏는 것으로 사는 인생이 결국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경고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은 잘사는 게 복수다, 가난하면 죽는다는 식으로 어린 생명에게 계속 경제관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생명의 소중함과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가까워지라 말씀하시는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 스티로폼 상자에 부엽토를 깔고 물기를 뺀 음식물 찌꺼기를 넣었습니다.

유튜브에서 본 게 있어서 아침 산책에서 지렁이 한 마리를 주워와서 상자에 넣고 대책 없이 지렁이 분변 토를 덮었습니다. 근데 좀 왠지 마음이 영 불편했습니다. 내가 괜히 멀쩡한 지렁이 한 마리 죽게 한 거 아닌가 싶어서. 매일 상자 뚜껑을 열면서 지렁이한테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렁이 참 대단합니다. 죽었겠지 하고 모종삽으로 흙을 뒤적이면서 쌀뜨물 EM 발효액을 분무하는데 어린 지렁이들이 몇 마리가 보였습니다. 제가 먹으려던 감을 잘게 썰어서 흙에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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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3, 2018
*.182.156.135

ㅎㅎ 지렁이를 기르시는 건가요?

삶은 아무리 재미있게 살아도 짧고 허무한데,

인간성이 마비될 정도로 이전투구한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렁이, 낙엽, 씨앗 등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거칠고 어둔 세상에서도 존재할 능력이 있으며,

조금씩이나마 세상을 밝혀나갈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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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5840
727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6487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5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04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652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7412
72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7739
721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3] 2017-12-11 15694
72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0814
719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6761
71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18
717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6578
716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624
715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08
714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7567
713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32
712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2017-10-08 8194
711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06
71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20
709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777
708 창조절 죽음 넘어! (출 12:1-14) 2017-09-11 8185
707 창조절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6] 2017-09-03 7802
706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469
705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2883
704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85
703 성령강림절 빈 들에서 배불리 먹다 (마 14:13-21) [8] 2017-08-06 8050
702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4989
701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48
700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881
699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241
698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109
697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0
696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371
695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808
694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268
693 부활절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8] 2017-05-28 7742
692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476
691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826
690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21
689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743
688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397
687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651
686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6890
685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5978
684 사순절 영적 시각 장애 (요 9:35-41) [2] 2017-03-26 8184
683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655
682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357
681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30
680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679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05
678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6
677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771
676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06
67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400
674 주현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4] 2017-01-15 8231
67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37
672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2983
671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005
670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705
66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23
668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58
66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085
66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2
665 창조절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4] 2016-11-14 8230
66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1
663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702
662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33
661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587
660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465
659 창조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15] 2016-09-04 8271
658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268
657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049
656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50
655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7
654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075
653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108
65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15] 2016-07-17 15084
65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골 1:1-14 [9] 2016-07-11 7995
6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16] 2016-07-03 6506
649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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