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성령강림절 조회 수 18735 추천 수 0 2009.09.14 23:18:05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2009/dawp_090913.mp3 
설교보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090913.wmv 
성경본문 : 야고보서 1:17-27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약 1:17-27)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음은 있지만 행함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기독교인들과 목사들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함이 없다는 사실과 연관됩니다. 세상에서 실제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지적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회의 판단에 일희일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무조건 인정받아야만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공동체와 로마제국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원칙적으로만 말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사회의 걸림돌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시대 이념의 걸림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가 비판받고 있는 대목은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믿음생활은 그럴듯하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삶의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굳이 교회 밖에서 따지고 들기 이전에 우리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교회 일치만 해도 그렇습니다.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지체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따르면 교회는 그 보편성을 생명으로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분열의 극치를 향하고 있습니다. 같은 교파 안에서도 분열의 흔적은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일반 신자들에게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로 들릴 겁니다. 지금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것만도 힘에 부치는 마당에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겠지요. 일반 신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동일하게 믿는 기독교인들이 분열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믿음과 삶이 분열되어 있다는 증거이겠지요.

이런 문제가 멀게 느껴진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기독교인 개인들도 믿음과 삶의 불일치로 인해서 나름으로 고민합니다. 믿음은 어느 정도 깊이를 이룬 것 같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게 와 닿지 않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차이가 많겠지요. 어떤 분은 믿음의 경륜에 따라서 삶의 변화도 따라옵니다. 정말 바람직한 믿음생활입니다. 어떤 분은 거꾸로 가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의 세월이 길수록 더 완고하고 일방적으로 변합니다. 대개는 어중간한 상태로 살아갈 겁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입니다. 믿음이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나 믿지 않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도대체 내가 예수를 믿는 거야, 아니야 하고 자책합니다. 내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 하고 뭔가 불안해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문제가 없으신가요? 영적으로 늘 생명 충만감이 지속되고, 밖으로 그런 능력이 나타나고 있나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이런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영성의 대가인 바울도 자신의 내면에 두 자아가 충돌하고 있다고 토로했는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여기에 문제의식이 없는 이유는 다른 것에 한눈이 팔려서 이런 문제를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신앙적으로 진지한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크게 봐서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합니다. 하나는 행함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입니다. 전자의 특징은 주로 야고보에게서, 후자의 특징은 바울에게서 나타납니다. 어떤 쪽이 옳을까요? 단어로만 본다면, 특히 개신교회의 전통에 따른다면 율법주의는 틀렸고, 복음주의가 옳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주장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좀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말처럼 들립니다. 율법주의는 틀렸으나 야고보는 틀리지 않았다는 말이 성립되려면 야고보의 율법주의가 잘못된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복잡하게 들리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도대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에 대한 강조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삶이 왜 분열하는지, 그 긴장이 무엇인지, 기독교인다운 행함이 왜 없는지, 그런 문제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행함’을 강조합니다. 암시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강조합니다.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거울로 자기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서 말씀을 곧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당시의 거울은 청동이었습니다. 희미합니다. 희미한 모습은 깊이 각인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면 결국 말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진술은 옳은가요? 마틴 루터의 ‘솔라 피데’ 개념을 아는 분이라고 한다면 야고보의 이 진술이 매우 불편하게 들릴 겁니다. 루터는 신자가 의로움을 얻는 길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걸 강조하여 ‘오직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의로움을 얻는 데에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강력한 비판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행위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에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예컨대 여기 아들의 해외 유학을 보내려고 하는 사람이 같은 교회에 돈이 없어서 큰 수술을 받지 못하는 신자의 소식을 들었다고 합시다. 유학비용을 수술비용으로 내놓아야만 이 사람은 말씀대로 행하는 자일까요? 이와 비슷한 경우는 많습니다. 우리는 중간 어디쯤을 기준으로 살아가겠지요. 그런 행위들은 덕스럽기는 하지만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기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칭의는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는 내 딸이다, 내 아들이다, 할 때 딸과 아들의 행위를 보고 하는 게 아닌 것처럼 칭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입니다. 루터의 칭의론에 비쳐본다면 야고보의 행위 강조는 잘못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요한복음과 바울의 편지들, 즉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에베소, 그리고 베드로전서를 야고보서와 비교하면서 야고보서를 가리켜 지푸라기와 같다고 혹평했습니다. 그것을 신약성서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복음적인 요소가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루터가 그렇게 말할만한 근거가 신약성서에 없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와 로마서를 비교하면 근거가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물론 야고보가 행함만을 주장한 건 아닙니다. 믿음과 더불어 행함도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는 정 반대의 논리를 위한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똑같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야고보는 행위의 중요성을, 바울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전통을 이어받는 루터에게 야고보는 율법을 추종하는 유대인 선생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야고보의 편지와 바울의 편지를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우리는 당혹스럽습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합니까? 행함인가요, 믿음인가요? 훗날 하나님 나라에 가서 야고보와 바울을 데려다 놓고 삼자대면 식으로 물어보면 해결이 나겠지요. 그들은 그 나라에서 이미 이 문제를 해결했겠지요. 그 두 분 때문에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만 골치가 아프게 되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누가 옳습니까?

우리가 개신교 신자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야고보보다는 바울에게 기울어지는 게 분명합니다. 이것은 루터가 명확하게 분석한 뒤로는 더 이상의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입니다.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적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신교 목사로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생각에 신앙은 수행이 그 기초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한 행위보다는 자기 영혼의 존재론적 변화를 위한 수행이 우선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수행이라는 말을 단순히 도를 닦는다는 식으로만 이해하기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선한 행위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수행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행위는 넘쳐납니다. 교회 안에 말도 많고 행위도 너무 많습니다. 교회에 프로그램과 이벤트가 과잉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그런 프로그램이 신자들의 영성을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도 적지 않겠지요.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는 행사를 위한 행사로 떨어집니다. 수행의 성격이 축소되고 행위의 성격이 강조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차이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겠습니다. 젊은이들의 결혼식을 생각해보십시오. 두 사람이 이제 한 가족을 이뤄 삶의 여정에 나서게 되었다는 생명 중심적 깊은 의미보다는 온갖 행사로 뒤범벅이 될 때가 많습니다. 결혼식 며칠 전에 사진 찍기에서 혼이 빠지고 결혼식 날도 친구들과 친척들에 휘둘립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모든 결혼 이벤트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결혼을 비롯한 삶 전체를 수행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행위에 떨어지는 이 세태를 예로 든 것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국 하나님과 ‘나’ 개인의 영적인 관계로 침잠해 들어가는 수행입니다. 수행은 믿음의 차원이지 행위의 차원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그렇다면 이제 야고보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복음의 시대에는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철지난 유행가와 같은 것인지요.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폐기처분해야 할 지푸라기 문서가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는 일단 저는 루터에게 양해를 구해야겠습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진리투쟁에 급급하여 야고보서를 오해한 것 같습니다. 위대한 신학자라도 완벽할 수는 없으니 이 문제로 루터의 교회사적 무게가 손상 받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루터보다 5백년 이후에 태어났기에 성서의 실체를 따라잡는데 루터보다 조금 더 유리한 입장에 있을 뿐입니다. 

야고보와 바울은 큰 틀에서 분명히 신학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유대-기독교인들의 대표자였고, 바울은 이방-기독교인들의 대표자였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만 여전히 토라와 할례의 전통을 유지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으며, 바울은 그런 토라나 할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방 헬라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 완전히 달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야고보의 행위를 부정한 것처럼, 야고보는 바울의 행위 없는 믿음을 부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에서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대립적인 입장에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문제를 야고보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고보는 지금 믿음 일원론에 극단적으로 치우친 이들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 사람들입니다. 믿음 일원론에 치우친 이들은 믿음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했으며, 부활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행위 배척주의는 복음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복음이라는 명분에 숨어서 인간의 구체적인 윤리적 책임을 송두리째 부정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니골라 당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았습니다.(갈 5:13)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니골라 당이 에베소 교회에도 침투할 정도로 당시에 오랫동안 광범위한 세력을 형성했었습니다.(계 2:6)

한국교회에도 니골라 당의 흔적이 있는데, 구원파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세상에서 그 어떤 죄를 짓는다고 해도 믿기만 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한번 회개했으면 다시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죄 사함의 비밀,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단순한 구호에 병적으로 매달립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역사의 모순과 신비를 감당하기에는 그들의 정신세계가 지나치게 미숙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 치마폭에 감싸인 채 세상과 대면하지 못하는 마마보이와 비슷한 심리적 상태입니다. 윤리 폐기론과 역사 허무주의가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은 구원론의 왜곡이며 타락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니골라 당이나 구원파의 위험성은 없습니까? 구원과 믿음이라는 자기만의 성채에 숨어서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지는 않았을까요? 교회에 나오는 것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무슨 역사적 책임이냐, 하고 난처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당장 집을 팔고, 은행의 저금을 꺼내서 노숙자를 위한 단체에 몽땅 기부해야 하며, 사회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여러분이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결단하고 참여하면 됩니다. 핵심은 주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열매로 그 나무가 좋은지 아닌지 알 수 있으며,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마 7:20) 이 주님의 말씀은 믿음의 존재론적 깊이와 행함의 인격적 열정 사이에서 영적인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말씀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만 살아 있는 믿음이 가능합니다.(2009.9.13.)


profile

[레벨:16]정병선

September 15, 2009
*.80.35.197

목사님 잘 읽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도 문제고,

믿음이 없는 행함도 문제입니다.

제목처럼 이 문제는 긴장관계임이 분명합니다

현실을 보면 행함으로 믿음을 포장하려 하고

믿음으로 행치 못함을 변명하려 합니다.

내 안을 살펴보아도 그런 유혹이 있습니다.

아마 믿음대로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고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붙잡아야 할 것은

목사님 말씀처럼

믿음의 존재론적 깊이와 행함의 인격적 열정 사이에서

영적인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사는 것이겠지요.....

 

목사님!!

쉬지 않고 영성의 샘물을 길어올리시는 노고에

찬사와 감사를 보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5, 2009
*.120.170.243

예, 정병선 목사 님,

제 설교를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믿음과 삶의 영적 긴장을 칼로 선을 귿듯이 찍어낼 수는 없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늘 깨어 있는 영성이 필요하겠지요.

우리 모두가 달려갈 그 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ㅇ.

profile

[레벨:4]danha

September 15, 2009
*.102.75.228

목사님 오늘 말씀은 제 마음에 더욱 다가옵니다..

벌써 2년정도 지난거 같습니다..구원파에서 벗어난지....

담배를 끊을때 금단현상때문에 괴롭듯

그 동안 제 영혼이 그교회를 통해 세뇌된 그 니코틴같은것 때문에 딴 교회에 가도 적응도 못했는데...

시간이 약이듯 제 영혼이 조금씩 안정을 되찿는것 같습니다.형제들이 아직도 그 교회에 목을 메고 다니고 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장로나 목사와 상담을 시킬려 합니다.제가 하는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든 성경구절에서 변명거리를 찿아내고 ,제가 교회를 떠나는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나요....

그 교회 목사님이 장로교나 감리교도 구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경상도 시골에서 나무하다 박옥수목사님께 안수받고 목사님 되신분인데...사실 많이 유치합니다.

저도 성경지식이 많이 업고 해서 피하는게 상책이라고 생각하지만 형제들과 멀어지는건 마음이 외로와지네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5, 2009
*.120.170.243

단하 님,

구원파 문제로 힘들어 하신 기억이 남아 있으신군요.

그런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건 보통 결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데,

단하 님은 그 일을 해 내셨네요.

신앙은 기본적으로 평화와 기쁨을 선물로 주지만,

잘못된 신앙은 생명을 파괴한답니다.

영적 엑서더서의 길에서 뒤를 돌아보지 맙시다.

profile

[레벨:6]방랑자

September 15, 2009
*.109.153.12

이곳에서 발견하는 가장 큰 즐거움은 저와 같은 고민을 가진분들을 접할 수 있다는 거와

비록 미련하여 답을 잘 깨닫진 못하지만 몇십년 교회다니면서 가장 묻고 싶은 질문들을 바로

목사님께서 해주신다는 겁니다 ㅎㅎㅎ

섬기는 교회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말씀에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가

정말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루에 두가지의 상반된 듯한 말씀을 듣습니다.

예컨대 오전예배에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나며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받았으며 믿음을 시인하므로 모두가 구원받은 백성이다 ~

근데 오후예배에는 달란트비유를 말씀하시며(말씀중 달란트비유가 개인적으로 제일 두려움)

게으르고 악한 종이 되지 말라고 하시면서 바로 알곡과 가라지로 연계됩니다. 교회안에 믿는 자

중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있으며 가라지는 추수할때(심판날)에 버려질것인데 그가 바로 달란트

비유에서 나오는 게으르고 악한종인 거죠.(저는 뭘로봐도 게으르고 악한 종인데...)

그런날은 참 답답합니다. 결국 저와 같이 믿음도 약하고 행함도 없고 앞으로도 별로 나아질게

없는것 같은 사람은 버려질 게 뻔한데 과연 이러면서 계속 교회다닐 필요가 있는건지 참으로

많은 시간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조금은 깨달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어렴풋이 보이나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가다 보면 목사님을 만난 것처럼

하나님의 은총이 저에게도 임할 날이 있기를 바라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5, 2009
*.120.170.243

방랑자 님,

다비아를 통해서 진리의 빛을 조금이라도 느끼신다니

저에게도 큰 용기가 되는 말씀입니다.

다비아는 방랑자 같은 분들을 위한 온라인 공동체랍니다.

앞으로도 말씀의 나눔이 계속되고,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September 15, 2009
*.234.41.70

저도요. 목사님, 윗 분 방랑자님처럼 믿음과 행함의 문제는 늘 목구멍 가시 같았어요.

정말  일관성 없는 가르침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지요.

여쭤 보면, 형편없는 제 '믿음'만 지적 받을 뿐이었구요.^^

분명 믿음이 우선이군요.

그런데, 왜 우선인지를 그동안 저는 배우지를 못한 거구요.

아, 이제 빛이 보이네요. 목사님,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5, 2009
*.120.170.243

라라 님에게 빛이 보인다구요?

그 빛이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희미하게 비치겠지만,

그것을 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제 '블랙'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시각장애이며 청각장애인 주인공이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통해서

빛을 느끼더군요.

 

profile

[레벨:38]클라라

September 16, 2009
*.234.41.70

앗~! 목사님, 제가 <BLACK>을  흉내낸걸 금방 알아채셨군요.^^

 

저도 "워터!!" 소리 칠때 이미 그가  워터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때 워터는 그에게 있어서 더이상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이미 '어떤 빛'이 되어 있는 거라구요.

목사님을 통해서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배워 갑니다.

제가 그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그 또한 제게  말을 걸어 올때야,

비로소 저는 "워터!!" 소리 칠수 있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상호간의 교감,

주님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빛을 주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넘치는 기쁨으로 받게 되는 것은,

이 '교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블랙은 라이트로 가는 출구더군요.

profile

[레벨:5]퀄리아

September 15, 2009
*.111.172.208

후우~ 속이 후련해지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믿음'과 행함'은 이런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행함'이 믿음'을 받쳐주지 못할 때 사람들은 심한 절망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회개'로 시작해서, 지속되면 자책'이 나오고, 자책'을 넘어서면 정신병리'가 벌어져 버리는 상황이 생기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완전 보수적인 예장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해본 결과, 정신병리' 직전까지 갔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대로라면,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거등요.

"세상음악은 마귀음악! 듣지마라!" "영화는 뉴에이지!!" "마음의 품은 것들도 더러운 죄악이다." "무조건 순결하라. 뽀뽀 정도는 된다."  등등 ㅎㅎ

 

아무튼, 믿음'과 행함'이 분리된 개념으로 작용하는 건, 인간의 비열한 심성에서 비롯된 거라 생각합니다.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한 후 우산을 챙겨나가지 않는 건, 이미 두마음이 되어있는 제 마음을 잘 보여주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말씀이든 체화'시키는데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하고, 긴장을 놓지 않고 팽팽하게 깨어있어야하는 행위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ㅠㅠ ..

 

오늘도 좋은 말씀 너무 잘읽었습니다. 평온한 밤 되소서 !!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5, 2009
*.120.170.243

퀄리아 님,

많은 경우에 신앙현상이 병리적으로 나타나고 있답니다.

그런 것에 문제 의식이 있는 사람들도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맙니다.

퀄리아 님은 늘 깨어 있는 영성으로 살아가기시를.

profile

[레벨:9]김용남형제

September 16, 2009
*.162.15.166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새로이 알게 된 단어들 중 가장 인상 깊은 말이 '종말론적'이라는 형용사 같습니다.

철학에서의 하나님 이야기를 보면 실존론은 엄청 늘어놓지만 예수가 없기 때문에 '구원의 하나님'이 안 느껴지고,

그렇다고 신학에서의 하나님 이야기를 보면 예수는 있지만 성령이 종종 소외되기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잘 안 느껴집니다.

비록 지금 내게 행함이 없더라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실 것을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는 종말론적인 삶이 신앙생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명하신 새 계명도 그냥 "(혼자서) 사랑하라"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니까... 성령만 이루실 수 있으니까요.

종말론의 근거이신 성령을 자꾸 빼놓기 때문에 다급해지니까 '시한부 종말론'도 판치게 되는 것이겠죠?

중요한 주제에 관해 묵상할 수 있게 해주신 설교말씀... 이번에도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7, 2009
*.120.170.243

김용남 군의 대글을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네.

벌써 '종말론' 개념에 눈을 뜨다니 대단하네.

좋은 계절, 좋은 젊은 시절을 보내시게나.

 

profile

[레벨:9]김용남형제

September 17, 2009
*.117.246.250

아직 부족하고 미숙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격려와 칭찬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사유하는 공부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느끼는 것이 참 좋습니다.

목사님을 안 것이 젊은 시절의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8]최성웅

September 16, 2009
*.227.156.48

저도 오랫동안 이와 같은 문제들로 조금 심하게 고민했습니다.

성경의 모순되는 듯한 가르침이나 기독교인으로서 내면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는 교회 어디서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도 없었고 겨우 용기를 내서 질문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너..조금 이상하다.." 거나

"남들에게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데 너에게만 문제가 된다면... 너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게 아니겠니."

"너무 깊숙히 파고 들지마라,  깊이 들어가면 다친다...따지지 마라... 자꾸 따지는 사람치고 잘 되는(?)사람 못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폭력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지금이나 그 때나 모두 저를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시던 분들이라

더욱 마음이 아프군요.

 

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미덕은  갈등과 긴장상태에 있으며

모든 것에 초연하고 수정같은 맑음을 유지 한다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바깥의 가르침이라는 것과

다행히도 저 뿐만 아니라 모두들 그 긴장과 갈등을 견디기 힘들어 하며 자주 넘어지고

도망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제서야 겨우  안도할 수 있었습니다. ^^ ;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7, 2009
*.120.170.243

예, 최성웅 님,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영적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해야 한다는 이 모순, 이 딜레마, 이 역설은

구름타고 사뿐히 넘어설 수 있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profile

[레벨:3]떨기나무

September 17, 2009
*.255.84.98

목사님의 설교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역설과 긴장이 잘 이해되었습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해 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8, 2009
*.120.170.243

떨기나무 님,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내가 썩 잘한 것 같지는 않은데,

좋게 봐 주셨네요.

믿음과 행함이 각각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의 적당한 결합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또는 그 중간의 어느 한 지점을 선택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에요.

믿음과 행함은 각각 고유한 영적 지평을 확보하고 있으나

변증법적인 긴장 안에 있다는 뜻이에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건 자기 자신이 각각 매순간마다 선택해야 할 몫이겠지요.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5]희락당

September 17, 2009
*.12.62.93

설교로 재구성된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 중에서 첫 번째 장(Chapter)인 "믿음의 정체성과 관련성(The Identity and Relevance of Faith)"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세상과 관련을 맺으면 기독교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지고,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키려다보면 세상과의 관계가 묘연해지고... 이 딜레마 앞에서, 몰트만은 십자가 신학을 바탕으로 두 개의 모순됨을 극복하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몰트만이나, 목사님 말씀처럼, 우리가 십자가에 진심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관심을 둔다면(이 말을 두 자로 줄이면 '수행'이 되겠죠), 우리 앞에 당면해 있는 모순적인 문제들이 그 안에서 해결되는 것을 보겠지요. 그런데 저는 아직 수행이 부족한 연고로, 문제들만 보일 뿐 그 해결책들은 아직도 묘연해 보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8, 2009
*.120.170.243

희락당 님이 위 설교를 몰트만의 신학을 통해서

정확하게 해명해 주셨군요.

한국교회 신자들이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명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만 있다 하더라도

신앙의 경지와 성격이 훨씬 본질에 가까워질 텐데요.

해결책은 아지 묘연해보인다구요?

해결책을 완전히 확보한 사람은 없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분의 긍휼로만 살아갈 뿐이죠.

profile

[레벨:1]신학도

September 18, 2009
*.39.0.162

정교수님  조은 주석집 추천해주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8, 2009
*.120.170.243

신학도 님, 나는 게을러서 주석집을 많이 읽지는 못해요.

주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나오는 "국제성서주석"을 읽습니다.

한글로 된 주석집에서 학문적으로 최선인 책인 것 같더군요.

profile

[레벨:17]아우

September 18, 2009
*.179.178.15

좋은 설교문 잘 읽었습니다. 설교문을 읽어가면서 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몇개 있는데요

하나는, 바울은 야고보서를 알고 있었을까? 반대로 야고보는 바울의 로마서를 알았는가? 하는 의문이고요

또 하나는,  로마서와 야고보서 이 두 문서가 역사적으로 어느 것이 먼저 출현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를 작성할 때나, 반대로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쓸 때 

서로 반대편에 있는 상대방의 서신들을 각각 의식하고 썼을까요?

그리고 야고보는 예수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유대교 율법주의로 기울어질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셨는데

근거가 있는지요? 제가 알기로 신약성서는 세련된 고급 헬라어로 작성된 문헌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어학실력이 헬라어로 신학적인 주장을 펼칠만큼 언어실력이 뛰어났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마지막 질문은 이 설교문에서 별로 중요한 대목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떠오른 생각이어서 질문해 보았습니다) 결코 목사님을 골탕먹이거나 난처하게 만들 동기로 질문한 게 아님을 알아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크게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8, 2009
*.120.170.243

화들짝 님,

님의 대글을 읽고 내가 화들짝 놀랐어요.

떠오른 생각이라고 열거하신 내용 있지요?

지금 화들짝 님이 신학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는 증거에요.

그런 문제를 꼼꼼이 따져가는 게 성서신학이죠.

본인 스스로 생각해보세요.

좋은 주말.

 

profile

[레벨:17]아우

September 18, 2009
*.179.178.15

오늘 제가 상당히 운수가 좋은 날이네요.

질문을 올렸는데 답글이 금방 달렸으니 말입니다.

생각을 해 보라고 하시니...

생각에 잠길 때마다 머리털이 몇 개씩 쑹쑹 빠집니다.

이러다 대머리 될까 걱정입니다.^^

예수 제대로 믿기  참 힘드네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28
648 성령강림절 귀신 이야기 (눅 8:26-39) [43] 2016-06-19 11923
647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37] 2016-06-13 8219
646 성령강림절 울지 말고, 일어나라! (눅 7:11-17) [16] 2016-06-05 14457
645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3
644 성령강림절 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11] 2016-05-22 11525
643 성령강림절 교회는 성령공동체다 (행 2:1-21) [10] 2016-05-15 12145
642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05
641 부활절 바울과 루디아 (행 16:9-15) [9] 2016-05-01 13915
640 부활절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15] 2016-04-24 15132
639 부활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 (요 10:22-30) [13] 2016-04-17 6631
638 부활절 죽임 당한 어린 양 (계 5:11-14) [9] 2016-04-10 7741
637 부활절 부활의 증인이란? (행 5:27-32) [9] 2016-04-03 7708
636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240
635 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file [7] 2016-03-21 9029
634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2840
633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147
632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516
631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3] 2016-02-21 7299
630 사순절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 (신 26:1-11) [6] 2016-02-14 7736
629 주현절 변모의 예수, 하나님의 아들 (눅 9:28-36) [3] 2016-02-07 8490
628 주현절 사랑, 하나님의 존재 방식 [9] 2016-01-31 7904
627 주현절 종말의 능력과 현실 (눅 4:14-21) [5] 2016-01-24 5923
626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466
625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눅 3:15-17, 21-22) [4] 2016-01-10 8256
624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415
623 성탄절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file [5] 2015-12-27 9715
622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2
621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353
620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82
619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file [7] 2015-12-06 8449
618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9717
617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8997
616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8] 2015-11-15 7141
615 창조절 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14] 2015-11-08 11060
614 창조절 쉐마 이스라엘! (신 6:1-9) [4] 2015-11-01 15507
613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175
612 창조절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히 5:1-10) [8] 2015-10-18 8223
611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0
610 창조절 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14] 2015-10-04 10853
609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436
608 창조절 고난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11:18-20) [12] 2015-09-20 8195
607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4
606 창조절 행위와 믿음 (약 2:1-10, 14-17) [4] 2015-09-06 7717
605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36
604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846
603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693
602 성령강림절 하늘의 양식 (요 6:35, 41-51) [8] 2015-08-10 7828
601 성령강림절 영원한 생명의 양식 (요 6:24:35) file [15] 2015-08-02 8048
600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568
599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625
598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455
597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741
596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7
595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21370
594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695
593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209
592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076
591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898
590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780
589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0
588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323
587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195
586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2969
58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41
58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6901
583 사순절 고난의 그리스도 (사 50:4-9) [8] 2015-03-29 8291
582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460
581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651
580 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10] 2015-03-08 8513
579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332
57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28
577 주현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막 9:2-9) [4] 2015-02-15 8332
576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758
575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644
574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8987
573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30
572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783
571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214
570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544
569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1722
568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2
567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18
566 대림절 그 날과 그 때 (막 13:24-37) [8] 2014-11-30 14690
565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4] 2014-11-23 16790
564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2
563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2
56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874
561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204
560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258
559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5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5
557 창조절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4] 2014-09-21 13013
556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353
555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4
55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7] 2014-08-31 13299
553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879
552 성령강림절 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17] 2014-08-17 7645
551 성령강림절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18] 2014-08-10 14744
5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171
549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28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