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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질문 (마 11:2-11)

대림절 조회 수 13203 추천 수 0 2013.12.15 23:41:21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1215.MP3 
성경본문 : 마태복음 11:2-11 

메시아 질문

마 11:2-11, 대림절 셋째 주일, 2013년 12월15일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운명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친족 관계였고, 예수님의 출생을 천사가 알려준 것처럼 세례요한의 출생도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직접 베풀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는 각자 활동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서로 견제하기도 했는데, 세례요한의 제자 중에서 어떤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됐습니다. 이런 관계는 훗날 초기 기독교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세례요한 추종자들은 대세에 따라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 흡수되었습니다. 교회가 세례를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도 양측의 관계가 긴밀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대림절 셋째 주일의 제3독서에도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힌 이유는 헤롯왕의 부도덕한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요한은 헤롯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합니다. 절대 권력이 비판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히기 전에 요단강 근처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이에 대해서 마태복음 기자는 마 3:1,2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도 요한과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선포했다는 사실입니다. 두 분이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했지만 그 내용에서는 차이가 납니다.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몰아치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전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삶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위협이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선포한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전적인 사회개혁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선포하다가 헤롯에 의해 괘씸죄로 걸려 지금 옥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자기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도 어느 정도는 예감할 수 있었을 겁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히 변화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메시지가 한때 민중들을 각성시키기는 했으나 실제로 세상이 변화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자신의 거룩한 꿈을 실제로 성취할 있는 메시아를 생각했습니다. 메시아사상은 그가 구약성서에서 배운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가 메시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그 상황을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1:2,3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는 세례요한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실 그이’는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 민족이라 불릴만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기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메시아사상은 구약성경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로 읽은 사 35:1-10절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사 35:4절은 이렇습니다.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리고 이어서 모든 장애인들의 치유와 모든 왜곡된 삶의 원상회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이룰 세상입니다. 세례요한도 이런 메시아 전통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대망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는 주변의 강대국과 맞서 싸울 힘이 없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주변의 제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로마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나라를 완전히 잃은 적도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전세계에 퍼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시련 가운데서 그들은 신앙적인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자신들이 믿었던 하나님이 무능한 신이든지, 아니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민족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면서 자신들이 바로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런 수난을 당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 두 가지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선으로 노력했지만 유대민족의 상황은 별로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만연할 때 전혀 새로운 생각을 한 선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와서 이 세상을 직접 통치할 순간이 온다고 보았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세상에 완전한 정의가 실현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메시아사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인생의 실패자들만이 꿈꾸는 망상이라고 말입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미래의 세상에서, 즉 피안의 세상에서 이루어보려는 부질없는 욕망의 발현이라는 겁니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생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회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떨어질 위험성이 없지 않으나 알고 보면 메시아사상은 훨씬 적극적인 세계관입니다. 삶과 역사에 대한 본질적인 변혁이 그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세상의 삶을 개량하는 정도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겁니다. 그런 변화는 단순히 연봉을 늘리고, 취미생활을 다양하게 하고, 예술적인 감수성을 키우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새로운 세상을 가리킵니다. 어떤 교우는 세상이 재미없다고 말하더군요. 그가 비관주의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에 놓인 삶의 기쁨을, 존재의 기쁨을 잘 알고 있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는 참된 만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뚫어보는 겁니다. 어른이 되면 소꿉놀이에서 만족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것처럼 하나님을 옳게 찾게 됩니다.


요한이 던진 ‘당신이 바로 오실 그이오?’라는 메시아 질문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의 징표를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확실하지 않으니 메시아의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하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소문이 많았습니다. 엘리야, 요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훗날 제자들에게 그 소문에 대해서 물으면서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메시아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런 답변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대망에 부합됩니다. 앞에도 인용한 사 35장과도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파괴된 삶의 회복을 가리킵니다. 시각장애인, 걷지 못하는 사람, 나병환자, 청각장애인들의 모든 장애가 회복됩니다.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도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이런 사건들에 대한 보도가 종종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린 사건도 세 군데나 나옵니다. 여기에 가난한 자도 포함됩니다. 가난도 장애처럼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기에 이런 일들은 일어나야만 하고, 일어났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희망의 연장선 안에 자리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도 그런 확실한 답변을 듣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그대로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시각장애인을 고치셨듯이 감옥에 갇힌 자도 석방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읽으신 이사야 61:1절 이하의 말씀을 인용했는데, 그 내용이 오늘 본문과 비슷합니다. 거기에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이라는 구절도 들어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전통에 서서 활동하셨던 예수님이 사회정의를 외치다가 감옥에 갇힌 당대의 의인인 요한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6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뉘앙스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예수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고, 루터는 예수님에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현대어 영어번역은 예수님을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각각 느낌의 차이가 있긴 하나 전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복은 마 5장의 팔복에 나오는 것으로서, 구원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실족 운운하신 이유는 당시 예수님으로 인해서 실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세례요한도 실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을 풀어내지 않은 채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느냐, 당신은 거짓 메시아가 아니냐, 하는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거짓 메시아가 많았습니다. 요즘도 메시아 연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모든 문제에서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무턱대고 우기거나 또는 그렇게 확신하는 이들은 유사 메시아입니다. 독재자들에게서 그런 일들이 흔히 일어납니다. 부모들도 자칫하면 자녀들 앞에서 메시아처럼 행동합니다. 이렇게 메시야 연 하는 사람들이 반복해서 출몰하였기에 예수님도 그런 유에 속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당시에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로마 당국에 고발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실족한 사람들입니다.


실족은 그 사람의 인격이 비뚤어졌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는 어떤 사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이비 메시아로 단정한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유대인들의 메시아 희망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완벽하게 개혁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을 하늘나라로 바꾸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세상에는 달라진 흔적이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개별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질문, 또는 반론은 예수를 믿는 않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명백한 증거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을 풀어달라고, 온갖 좋은 삶의 조건을 허락해달라고 떼를 씁니다. 옥에 갇히는 억울한 일을 왜 방관하느냐, 악을 왜 용납하느냐, 이 고달픈 삶에서 나를 당장 구원해주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하소연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시험에 드는 겁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게 바로 실족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아님’의 긴장 가운데 있습니다. 이걸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already but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 아님)이라는 성격이라고 표현합니다. 영국 성공회 신학자 톰 라이트는 교회력 성서일과 A년 성경묵상에서 ‘now-and-not-yet’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메시아는 이미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가 초림의 예수님입니다. 그걸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창조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생명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우리는 메시아가 다시 오시길 기다립니다. 다시 오실 이가 재림의 주이십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온갖 모순, 딜레마, 비밀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를 우리는 기다립니다. 그런 신앙이 바로 대림절 신앙입니다.


‘이미’와 ‘아직 아님’이라는 신학개념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초림의 예수가 자기 사명에서 실패한 것을 변명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런 비판은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모를 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더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하지 못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음이 이미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죽음은 아직 아니지만 이미 와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결정되는 종말 생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이미 비밀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메시아가 행하신 구원이 아직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우리 현재의 삶에 비밀한 방식으로 이미 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지금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요 17:3)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대림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어둡습니다. 폭력과 싸움이 그치질 않습니다. 여전히 온갖 불행을 부둥켜안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현실을 마음 아파하고, 그런 세상을 바꿔보려고 애쓰고 투쟁하는 것은 좋습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메시아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인정하신 세례요한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뭐 이따위냐, 내 인생이 뭐 이리 안풀려, 하나님이 없는 거 아니냐, 하고 실족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런 세상에 이사야의 메시아 희망이, 세례요한의 메시아 질문이 가리키고 있는 궁극적인 정의와 평화가, 곧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비밀한 방식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완성될 순간을 지금 치열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대림절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늘 제2 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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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길위의벗

December 16, 2013
*.187.222.15

역사의 예수가 메시아이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신비인 것 같습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듯한 말씀(마 10:18)도 하시고,

하나님께 기도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사실은

스스로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존재라는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부정하심으로써 

오히려 참된 하나님으로 높임을 받으셨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스스로 암흑으로 던지심으로써 빛이 되셨고,

스스로를 비우심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함과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의 神 표상도 뛰어 넘는 것이라서,

또 유다교의 메시아 표상을 뒤엎는 것이라서,

메시아의 신비 앞에서

감히 두려우면서도 거룩한 어떤 느낌에 휩싸이게 됩니다.

 

메시아의 신비가 늘 제 일상을 사로잡으면

좋을 텐데요.

그게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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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6, 2013
*.94.91.64

엔크리스토 님이 생물학적인 나이는 어린데
영적인 나이는 제법 들어보이네요.
'메시아 신비'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그 증거에요.
저 말을 아무나 쓰지 못한답니다.
물론 저 말에 깊은 의미를 다 알지 못할 수 있어도
일단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용했다는 게 대단한 거에요.
신학, 신앙, 영성은 언어(term)와 연관됩니다. 
궁극적인 것은 물론 언어를 뛰어넘지만 
그것 역시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신앙언어, 성서언어, 신학언어를 잘 배워보도록 하세요.
그것은 단순히 사전의 낱말풀이가 아니라 
아는 것만큼 보이는 개념의 세계랍니다. 
메시아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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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길위의벗

December 17, 2013
*.187.222.15

아는 것만큼 보이는 개념의 세계라는 말씀

쬐금은 느껴 본 것 같습니다.

새겨 듣겠습니다.

신앙언어, 성서언어, 신학언어 열심히 배울게요.

평생의 제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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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영육치료

December 16, 2013
*.187.32.49

목사님 설교말씀 잘 읽고 있습니다. 한가지 질문이 있어 이렇게 댓글을 달게 되었음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현재는 구약시대가 아닌 복음시대라 알고 있습니다. 샘터교회 설교문을 접하다 보면 케토릭에서 사용하고
있는 절기를 계속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시대인 현 시점애서 궅이 절기를 사용해야 하는것이 합당한지 궁금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10절에서 바울 선생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일갈하고 있는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것이 헛될까 하노라"라고 말한 것과 배치되지 않는지요? 현재와 같은 복음시대에도 유대인들이 사용한 절기를 필히 사용해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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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6, 2013
*.94.91.64

영육치료 님,
안녕하세요?
약간의 오해가 있어서 풀어드려야겠네요.
구약시대와 복음시대를 구분하면서
가톨릭과 개신교를 거기에 대비시키셨군요.
가톨릭은 구약시대의 종교가 아니라 신약시대의 종교에요.
이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구요.
개신교 목사가 왜 절기 설교를 하느냐, 하는 거지요?
세계 모든 중요한 개신교는 다 절기 설교를 한답니다.
주류 개신교는 대부분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lectionary)가 있어요.
영육치료 님이 어떤 교파의 교회에 나가는지 모르겠으나
담임 목사님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참고적으로 샘터교회의 예배 예전은
미국연합 장로교회에서 나온 예배안내서를 기초로 한 겁니다.
위에서 인용하신 갈 4:10절이 말하는 것과 절기설교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서일과에 따른 절기설교는 예수님의 케리그마(구원사건)에 집중하는 설교입니다.
요즘 대림절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기억하고 재림을 기다리는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지요?
설명이 미진했으면 더 물어보세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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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December 17, 2013
*.192.53.116

우리 안에 선취된 부활생명을
얼마나 실감나게 매일 경험하며 살아가느냐...

이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느냐,
예수님의 구원사건에 얼마나 천착하며 살아가고 있느냐...에 비례하는 것이겠지요?


선취된 부활생명에의 경험이 곧 하나님 나라를
여기서 사는 것이겠고요

하루에도 몇번씩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오락가락 하며 살고있고,
평안과 두려움을 냉온탕 드나들듯 번갈아
경험하고 있고,
오늘을 그분의 선물로 여기며,
여기서 하나님 자녀된 존재의 충만함을
누리기를 소원하다가도,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자청하는 엘리야처럼
탄식과 절망 가운데 어서 주님이 재림하시길 소원하기도 하고...

도무지 진척이 없어보이는 이 몰골로
부름받기 전날까지
이 땅에서 구원의 부요함과 풍성함을 ,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아된 신비를 제대로 맛보기나
해볼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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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7, 2013
*.94.91.64

ㅎㅎ 부스러기 님, 
그렇게 고민하다가는 출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힘들기는 하겠으나 고민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좋은 자세입니다. 
그런 고민의 순간들이 좋게 축적되면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가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예를 들면 어떨지요. 
물리학자들을 생각해보세요.
각각의 실력에 차이가 많습니다.
형편없는 사람도 있고 뛰어난 사람도 있는데,
아무리 뛰어나도 물리의 모든 세계를 뚫어볼 수는 없잖아요. 
각각 자기신의 경지만큼 물리의 세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가능한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면 좋고,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 세계를 직면하기만 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물리학도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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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December 17, 2013
*.36.149.200

목사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대망했던 메시아관과
지금 우리의 메시아 관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들이 가진 메시아관이 결국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았듯
우리 또한 저들과 동일하게 십자가에 못박는
오늘 표현으로 실족하는,
목사님 말씀처럼 복, 구원과는 무관한,
오로지 자기의에 갇힌채
그래서 우린 저 유대인들과는 다르겠지,
다를거야 ..
스스로 속으며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돌아볼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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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7, 2013
*.94.91.64

예, 부스러기님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도 잘 하셨네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메시아관은
부분적으로 동일하고 부분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유대교 안에 머물지 못(않)하고 분리된 거지요.
우리는 지금도 메시아관을 놓고 서로 다투는 중입니다.
진리논쟁이지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완성의 길에 대한 겁니다.
오늘 우리가 유대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업적에 떨어져 있다면
건강하지 못한 메시아관(기독론)에 치우쳐 있는 거겠지요.
어쨌든지 종말까지 우리는 메시아가 누구냐를 놓고
다른 종교나 세상과 경쟁하고, 변증하고, 논쟁해야 합니다.
성령이여,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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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콰미

December 17, 2013
*.132.143.139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설교본문이 되었네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했던 메시아의 정체성을 마태기자는 요한과
예수를 대비시키면서 변증을 하고 있습니다.  이원론과  일원론   개인영성과 사회영성  정의인가? 사랑인가? 등의 논쟁요인들이
본문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논쟁은  숨겨진 메시아관의 등장으로  일단락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성서기자들의
이렇게 친절한 해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겐 예수의 메시아성은  도전적인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머리로
이해한 고난당하는 메시아는  오늘 우리의 삶과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의 삶이 성공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으면서 구원을 경쟁에서의 최종승자 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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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7, 2013
*.94.91.64

기독교인들이 각각 좋아하는 성구들이 있는데,
저 본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 드물지요? ㅎㅎ
가짜 메시아에 속지 않도록 노력해봅시다. 
가짜 메시아에 속아도 그 순간만은 환희에 빠지겠으나 
결국 영혼은 크게 상처를 받겠지요. 
바알과 제국 이데올로기를 넘어 
하나님이 비밀스럽게 행하시는 구원의 깊이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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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갈매나무

December 21, 2013
*.51.94.7

세례 요한의 메시아 질문은 차라리 쉽게 느껴집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이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의 질문의 틀이 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예수가 이 틀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물으면 되었을 것입니다.
제게는 답보다는 메시아 질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곤혹스럽게 느껴집니다.
예수의 재림으로만 궁극적인 생명이 완성된다는 것,
이것이 메시아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것도,
삶 전체로, 온몸으로, 절실하게,
메시아 질문을 던지고 난 뒤 얻어질 때 진정한 답이 될 수 있을 텐데요.
어쩐 일인지, 아마도 교회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겠지만,
제게는 이 물음이 잘 잡히지 않아서 글을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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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2, 2013
*.94.91.64

갈매나무 님,
그렇습니다.
메시아 질문 속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보통 화두를 붙잡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쩌지요?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받는지,
어떻게 성령 충만해질 수 있는지,
이런 질문과 비슷한 겁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다보면 성령이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성령 자체에 대해서 질문하지는 못합니다.
갑자기 성령이 낯설어지는 거지요.
'익숙함으로부터의 벗어남'이 필요합니다.
언젠가 그런 순간이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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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영육치료

December 22, 2013
*.187.32.49

 

목사님 저의 질문에 대한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답변을 통해 목사님들이 설교에 이용하는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성서일과에 따른 역사적 배경과 성서일과에 대한 장단점이 존재하고 있음도 알수있어서 유익하였습니다. 당초 제가 목사님께 질문한 요지는 성서일과에 따른 대림절에 대한 설교인용을 말씀드린 것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주된 질문의 요지는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의문점으로 남아있는 개신교 목사님들의 신앙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의 경우 복음시대를 맞이하였건만 아직도 율법신앙에 젖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 새 계명을 지키는 것 보다는 인간의 모습을 입고 성육신 하신 메시아의 질책을 삼가 분별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돌아가게 하신 유대인들이 지켰던 절기를 강조하며 그 절기에 감사헌금등을 강요하고 있는 현장의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4장10절을 인용하여 현재와 같은 복음시대에도 필히 각종의 절기를 지켜야 하는지 개혁성향의 목회를 하고 계시는 목사님께 질문한것 입니다. 저의 주된 질문의 요지에 대해서 목사님의 신앙관을 말씀해 주시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2013년 한해 수고하신 목사님께 감사드리며 2014년 새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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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2, 2013
*.94.91.64

영육치료 님, 잘 알겠습니다. 
율법 신앙이 한국교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는
여기서 일일이 말할 필요도 없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 십일조 헌금이 그렇습니다. 
말라기에 근거해서 그걸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그래도 한국교회에서 구약의 절기는 별로 강조되지 않을 걸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강조하는 교회는 없지요?
맥추감사절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좀더 구체적으로 어떤 절기인지를 말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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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pril 24, 2014
*.220.104.49

실족하지 않으면 복이 있다는 말씀이 눈으로는 보입니다.

그러나 실족의 가능성이 비닐봉지에 담아둔 액체처럼 이리저리 흘러가려 합니다. 늘 실족의 가능성은 떼지지 안는 샴 쌍둥이처럼 달라 붙어있습니다.

긴 풍선의 가운데를 비틀어 보면 겉보기엔 두 개처럼 보입니다. 한 쪽에 의심과 불만이 들어있습니다. 없애버리고 싶은 맘이 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쪽의 풍선에 바람을 빼려면 전체 풍선 바람이 빠지거나 심지어 터집니다.

그냥 가둬놓고 지냅니다.

불만과 불공평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지만 거기에 전력으로 나를 쏟아 붓지는 않습니다. 이미 주신 구원을 보는데 나의 눈이 멀어질까 그리고 지나친 불평이 구원을 덮을까 브레이크를 겁니다. 죽음이 내 삶의 전반에 와 있듯이 구원, 궁극의 종말이 와있다는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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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4, 2014
*.94.91.64

좌고우면 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향해서 주파수를 맞추고 살기가 만만하지 않지만

그게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는 걸 알기에 실족했다가고 다시 일어서서 가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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