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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사랑, 가능한가? (마 5:38-48)

주현절 조회 수 15266 추천 수 0 2014.02.23 20:53:39
설교듣기 : https://youtu.be/Nc8lalnGPfk 
성경본문 : 마태복음 5:38-48 

원수사랑, 가능한가?

5:38-48, 주현절 일곱째 주일, 2014년 223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원수사랑, 가능한가?’라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보고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가능하다는 거야, 그렇지 않다는 거야, 하고 헷갈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해보면, 원수사랑은커녕 이웃사랑도 힘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 원수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합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보통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설령 개인의 높은 영성으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그게 바람직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반인륜적인 범죄자들을 원수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용서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 세상 윤리에서는 원수사랑이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을 정도로 원수사랑은 비현실적인 개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본문 43, 4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먼저 43절에서 원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통을 짚었습니다. 그 전통은 이웃 사랑, 원수 미움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각주에 따르면 이 구절은 레 19:18절의 인용입니다. 레위기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고 그 의미를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레위기에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직접적인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갚지 말며...’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감안하면 레 19:18절을 원수에 대한 미움으로 해석할 수 있긴 합니다. 시편에는 원수에 대한 분노가 자주 나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전쟁 이야기를 전하는 출애굽기에는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 민족을 이끌고 있던 여호수아는 노약자와 어린아이와 짐승까지 모두 박멸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어떤 유대 문헌에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만드신 이유가 지옥의 불쏘시개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모든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항상 증오심에 불탔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전통도 그들에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원수, 또는 악을 가능한 멀리하고, 분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만은 옳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들의 전통을 짚으신 뒤에 44절에서 이와 반대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원수 미움에서 원수사랑으로 관점을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이런 전환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반()명제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이 마 5:21-48절 사이에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해서 나옵니다. 원수사랑도 이런 반명제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앞 단락에 속하는 마 5:38-42절에 거론된 내용을 살펴보는 게 원수사랑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출 21:24절 등을 인용해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먼저 짚으셨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와 같은 전통, 또는 명제는 구약성경만이 아니라 함무라비 법전처럼 다른 고대 문헌에도 나옵니다. 남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그 사람의 눈도 뽑아야 하고, 이를 상하게 했으면 그 사람의 이도 뽑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눈은 눈, 이는 이라는 표현이 겉으로는 야만적으로 보입니다. 인권 개념이 없던 고대시대에나 해당되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원래 이 법의 취지는 남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끔찍한 징벌을 가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보호하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로 남의 이를 하나 다치게 했다고 합시다. 그렇게 당한 사람은 몇 배로 갚으려고 할 겁니다. 그걸 법으로 막아서 당한 것만큼만 갚으라는 의미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이 법은 사람들 사이의 다툼을 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 다루려고 한 일종의 사회 안전장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의 근본 취지가 흐려지면서 오히려 원수를 미워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에 대한 반명제를 네 가지의 경우로 말씀하셨습니다.

 

 

1) 39절에서 예수님은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 뺨을 치려면 손등으로 쳐야합니다. 유대사회에서 가장 모멸적인 행위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우리의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희사하거나, 오지에 나가서 자신의 인생을 다 바친 이들도 오른 뺨을 맞으면 왜 그러냐, 그만 해라, 하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왼 뺨까지 들이대지는 못할 겁니다.

2) 40절에서 예수님은 속옷을 가지고 싶어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라는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옷을 한 벌 마련한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율법도 어떤 가난한 사람이 옷을 저당 잡혔을 때 밤이 오기 전에 돌려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겉옷까지 주라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도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벌거벗고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3) 41절은 이렇습니다. ‘너를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말은 군사적인 의미라고 합니다. 로마 군대는 피식민지 사람들인 유대인을 강제해서 일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물건을 나르게 하거나 지리를 탐문하게 하는 겁니다. 유대의 혁명 지하운동 단체들은 유대인들에게 이런 일을 거부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일은 매국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로마 군대의 요구보다 더 많은 걸 감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42절에서 예수님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삽니다. 그 관계는 서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진행됩니다. 받을 건 가능한 많이 받고, 줄 거는 가능한 적게 주면서 살아가는 게 지혜롭다고 말들을 합니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경제 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거꾸로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의 필요를 거절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것도 그렇게 만만한 과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명령을 제자들에게 주신 걸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이 인용하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율법의 가르침이 더 현실적입니다. 그게 세상의 작동원리입니다. 개인들도 그렇고 사회와 국가들도 그렇습니다. 지난 21일 새벽에 소치 올림픽 여자 피겨 스케이팅에서 김연아 선수가 은메달을 땄습니다. 한번 은퇴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걸 감안하면 그것도 대단한 성적입니다. 근데 금메달을 기대했던 탓에, 그리고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인 탓에 국민들의 실망이 큰 것 같습니다. 금메달을 도적맞았다고도 말합니다. 해외 언론들도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편파적이었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자기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딴 러시아 사람들은 또 다르게 생각할 겁니다. 이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에 충실한 겁니다. 속옷을 원하는 이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김연아 선수 사태로 인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신적 상처는 치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현실적이지 않는 말씀을 하신 걸까요? 그는 몽상가인가요? 세상이 아무리 거칠어도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가르치는 도덕 선생, 윤리 교사, 극단의 휴머니스트인가요?

 

예수님이 무엇을 뚫어 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또는 원수를 미워하고 이웃만을 사랑하는 세상의 이치는 결국 인간 삶을 파괴합니다. 겉으로는 그게 정의처럼 보이긴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불이익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가 내편인지, 누가 원수인지를 가려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치에 길들여지면 결국 내편이 한 일은 그게 국가의 기강을 허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다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이런 게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아주 강합니다. 좋게 보면 온정주의이고, 나쁘게 보면 패거리주의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우리 편이면 무조건 잘한 거로 밀어붙입니다. 일반적으로 조폭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사회에 편 가르기 문화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겁니다. 저 사람은 진보야 보수야, 저 사람은 종북 좌파야 아니야, 하는 눈으로 사람을 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그게 그 나라의 철학이 되고 세계관이 됩니다. 이렇게 내편과 네 편을 가르는 방식으로 사회가 작동되면 양쪽의 모든 사람들은 영혼의 손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 구원, 불신 지옥이라는 슬로건을 떠벌리는 사람의 영혼까지 손상시키는 거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까지 이런 세상원리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랑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힘들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의심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말씀을 진리로 믿고 그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저는 지금 그 깊이의 한 자락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원수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45b절에서 이렇게 생생하게 와 닿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태양빛을 보십시오.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내리비춥니다. 비를 보십시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내립니다. 이런 걸 보고 불평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물론 속으로는 저런 나쁜 놈들에게는 빛도 비추지 말고 비도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똑같이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기독교신자냐 아니냐 하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에 필요한 조건들을 모든 이들에게 제공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창조능력이자, 창조은혜이고, 창조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대로 따라야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고, 시시비비를 따지면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46절에서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절에서는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말씀하면서, 결론적으로 48절에서 엄청난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제1독서의 한 구절인 레 19:2와 제2독서의 한 구절인 고전 3:17, 그리고 신 18:13절 내용과 비슷합니다. 온전, 거룩, 완전은 다 같은 말입니다. 실제로는 온전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우리가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우리가 신처럼 완벽한 의를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요구인가요? 억지로라도 원수사랑을 실행하라는 명령인가요?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완전하심처럼 완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 답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가 그 답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하나님의 사랑에, 하나님의 섭리와 완전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쯤으로 받아들이면 오해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의 상투성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에 자신을 비쳐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확인됩니다. 6:31-34절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생존의 최소 조건이며, 또한 최대 조건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이런 것으로 염려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것을 보장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나 깨나 늘 그것에 대한 염려뿐입니다. 물론 이런 염려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생존의 최소 조건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우리 사회에 위험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것을 구비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생존 조건에 만족하지 말라고, 더 많은 게 필요하다고 세상이 강요합니다. 거기서 벗어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세상의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미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런 자유를 알 때만, 즉 그 자유 안에 거할 때만 이웃과의 관계가 새롭게 열립니다. 그 새로운 관계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처럼 원수사랑은 가능할까요? 원수사랑이라는 말 자체에 겁먹지는 마십시오. 그렇다고 그것을 허황된 것으로 백안시하지도 마십시오. 원수사랑은 가능성 여부의 차원이 아니라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빛을 비추고 비를 내리시는 방식으로 생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여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로 그 하나님을 참되게 인식하고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분명하다면 이웃과 세상은 새로운 빛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분별심을 넘어서는 경험입니다. 그 경험이 원수사랑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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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February 24, 2014
*.194.68.54

조반석개하는 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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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4, 2014
*.94.91.64

예, 조변석개, 또는 조석변개의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공통되는 요소입니다.

광신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 있는 영적인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다 알기는 아는데,

그게 잘 안 되니 문제네요.

무릎만 차는 물에서는 수영을 배울 수가 없어요.

최소 가슴까지 오는 물로 들어가야겠지요.

님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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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February 24, 2014
*.194.68.169

오잉....오타 뭐지?^^;;

조급함을 버리고 깊은 곳으로 나아가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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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February 24, 2014
*.192.53.116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지요
신앙은 평행선의 대치라는..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하시고, 우린 신앙을 통해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원수 사랑의 문제도
우린 내 맘에 들지 않는 저 원수를 변화시켜 주시길 늘 간구하는데,
그분은 그런 이웃을 내 옆에 포진시켜 그를 통해 나를 변화시키려 하시겠죠?
종국엔 그런 원수가 내 옆에 너 댓이 있어도 까딱않는,

그들을 넉넉히 포용해 낼수 있는 그런 그릇으로 바꾸고야 마시겠죠?

어찌 원수뿐이겠습니까?
물질의 부족함 없이 살다가 어느 날 물질의 모진 핍절을 통해 물질에 자유한 자로,
죽을 병을 통해 건강에 자유한자로,
또 자식 농사의 모진 맘 고생을 통해...

 

내 기대가 산산히 무너져 가고,
내 소원이 물건너 가기만 하는 갖가지 절망스런 정황들을 통해
인생이 내손 안에 있지 않음을 통렬히 깨우치시고,
결국 하나씩 내려놓음을 통해
그 분의 소망에 시나브로 승복해가는,
그래서 세상것들로부터 포로된 자리로부터
그분안에서 자유한 자로 변화되어가는
그런 자리로 붙들린 인생이겠죠?

그러니 아직 아마 1급도 안되는 바둑실력이
프로 9단의 입신에 자리에까지 오르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롤러코스터를 타야할지
은근 걱정이 큽니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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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4, 2014
*.94.91.64

아마 1급과 프로 9단의 차이라, 음.

바둑에 대한 진정성만 있으면

아마 1급도 프로 9단 못지 않게

바둑의 맛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진정성이 없다는 건데요.

바둑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없고

일종의 떡고물에만 마음이 있으니

세월이 가도 진보가 일어나지 않는 거겠지요.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독교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거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동력을 다른데서 얻으려는 거지요.

그게 뭔지는 다 아실 거구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질문에 몰입할 수 있다면

다른 문제들은 아주 작아지는 겁니다.

다른 게 작아져야 실제로 자유를 얻는 거지요.

이건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으면 인정하기 힘든 겁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경험의 종교라고 하는 게 옳구요.

롤러코스터도 뭐 재미라면 재미지요.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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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lutecia

February 24, 2014
*.172.105.68

하나님은 실체이신가요??   

모두,  하늘에 있는 실체 처럼 사람이 얘기합니다.  오늘의 목사님 말씀도 실체인 거 같이 말씀하시구요...

하나님은 답답할 때 딱 두 번,  모세 앞에서( 뒷 모습만),  여인의 자궁 속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적 밖엔 없었잖습니까?

 

허 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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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4, 2014
*.94.91.64

허근 님,

우리말 '실체'가 오해를 불러옵니다.

그것이 reality라는 의미라면 하나님은 실체 맞고요,

그것이 substance라는 의미라면 실체라 할 수 없습니다.

허근 님은 아마 두번째 의미로 말씀하셨겠지요.

'내가 온전하지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분이 사람처럼 성대를 사용해서,

또는 암호를 사용해서 말씀하신 거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성, 완전성을 이해한 성서기자의 표현인 거지요.

하나님의 등만 보았다는 모세의 경험도 실체로서의 경험이 아니구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거에요.

여인의 자궁 운운은 재미있군요.

하나님을 실체로 이해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과정, 생기, 영 등으로 이해해야합니다.

위 내 설교도 그걸 전제하고 한 겁니다.

정용섭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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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lutecia

February 25, 2014
*.212.3.56

감사합니다.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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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lutecia

March 09, 2014
*.212.3.56

오늘 또 목사님 말씀 재방송들었습니다. ^^   언제나 감사합니다.

 

영어로는  God,  불어로는, Dieu,,, 등등...  나라마다  주님을 부르는 말이 다릅니다.

근데 유독 한국에서는 "~~ 님" 자를 붙여서 꼭 실체(reality)가 있는 듯 말합니다.  특히 목사님들이 ... ^^

마치 염라대왕을 대체해서 말하듯이 합니다.

 

그렇다보니 왠만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후에 내세에서  심판하는 염라대왕 같은 사람들로 생각을 하고있습니다.   꼭  나쁜다곤 할 수 없지만, -- 왜냐면 종교는 내세을 얘기하니까요-- ,   예수는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은 다음 세상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주님을 믿고 따르라고 말씀했는지요?  꼭 그런 건 아닌거 같어요.  근데 왠만한 목사님들은 모두 그렇다구 그렇네요...    

 

목사님의 설교 제목, "원수사랑" 하고는 조금 먼 얘기가 됐겠어요. 

말씀과, 진리와 영의 주체이신 주님의 뜻을 더 알고 싶어서 글 올렸습니다.

주님의 깊은 사랑이 목사님께!~

 

 허 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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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9, 2014
*.94.91.64

ㅎㅎ 재방송 들으셨군요.

하나님 표상이 염라대왕이면 곤란하겠지요?

이런 잘못은 두 가지 한계로 인해서 벌어집니다.

1)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2) 성경 언어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부족하다.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공부가 좀 필요하거든요.

교회 나가는 만도 힘에 벅차니

공부할 엄두는 내기가 더 힘든 거지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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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약속

February 24, 2014
*.182.37.159

원수사랑 가능한가?

제목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원수를 사랑할수 있는 사람만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할수 있겠죠.일반적인 사랑도 마찬가지고요.

원수를 사랑할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할수 있다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겁니다.

설령 원수를 사랑할수 있다해도 그것으로 온전해 질수 없겠죠.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이런 설명이 아닐련지요.

마태복음5장의 율법의 완성에 대하여 본장에서 율법의 해명과 설명으로

보여집이다.

예수님은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과 어떤 원한이 있습니까. 우리는 부지중에 예수님을

죽음에 던졌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고 왜!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외쳤습니까. 만일 나는 예수 죽임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십자가의 능력과 효력은 내게 미치지 않습니다(죄사함 얻지못함)

 그러므로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에 넘긴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경의로운 그 사랑앞에 무륲을 꿇습니다.오! 주여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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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4, 2014
*.94.91.64

약속 님의 해석이 재미있기도 하고,

제 해석보다 훨씬 은혜롭군요.

예수 죽음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가 예수님의 원수이나

예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사랑하심으로써

그분에게서 이루어진 원수사랑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이런 자세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겠지요.

다 좋은데,

두 가지만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1) 현대인들은 예수 죽음에 대한 책임의식을 별로 느끼지 못할 겁니다. 

'당신들은 살인자야.' 하는 식으로 몰아가면 반발심이 더 일어나겠지요.

2) 예수 죽음의 원인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상황을 더불어서 설명해야 할 겁니다.

종교권력과 정치권력, 거기에 부화뇌동한 예루살렘 민중 등등...

심리적인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넘어설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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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빈들

February 25, 2014
*.251.79.210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원수가 한 짓 까지 사랑하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하라는 것인가요

결국 그를 사랑하고 인정해 주는 것은 그가 한 행위까지 받아 주어야 한다면

상대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악에 대해서 용인하는 것 아닌가요

성전에서 상을 둘러 엎으시던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이라 하시던 주님의

음성은 무엇인가요

어느 한가지가 아님에도 마치 전체가 그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언젠가 살인자에게 가족을 잃은 분은 용서하시고 용서한 그 분 때문에

그의 가족은 더 상처를 받는 것을 보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은 전적인 동의를 하지만 목회자의 입장에서도

원수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저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참 쉽지가 않습니다.

나 역시 예수님의 원수인것은 분명하지만

원수된 입장에서도 용서가 안되는 원수는 너무 많아지네요 살아갈수록

내 눈의 들보도 문제지만 어떻게 품어야 하는지

마음은 있으나 삶이 힘이 듭니다. 중언 부언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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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5, 2014
*.94.91.64

빈들 님의 딜레마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원수사랑을 규범으로 적용할 수는 없어요.

원수가 아니라 친구들과도 원수처럼 싸우는 게

우리를 비롯한 세상 모든 이들의 일반적인 삶이죠.

제 설교도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공부하고

그 하나님의 구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리고 자기의 구체적인 삶은

상황에 따라서 잘 판단해서 살아가야겠지요.

빈들 님은 중언부언 한게 아니라 중심의 이야기를 한 겁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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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빈들

February 26, 2014
*.251.79.210

말씀에도 은혜 받게 하시고 늘 대답해주시는 성실함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과정 방법 수단 결과 다 선해야 하는 윤리가 짐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서가 문학이 아니라 삶의 실질적인 문제가 되고 적용을 하고 살려니

마음은 원이로되 법을 따라 살지 못하네요

중력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세상사가 어려워서...

정직한 말씀앞에 서보려 합니다.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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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파란하늘지붕

February 25, 2014
*.129.39.111

역시 목사님의 설교는 마지막 단락을 봐야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할때에 세상과 이웃은 다른빛을 내며 나에게 다가온다라... 그런 경험을 과연 할 수 있을런지요, 기대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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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5, 2014
*.94.91.64

파란 님이 솔직하게 말씀하셨네요.

다른 빛으로 다가오는 경험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능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가야할 방향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나도 설교는 저렇게 하지만

세상과 이웃을 새로운 빛으로 경험했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다만 이렇게만 말할 수 있어요.

세상과 사람에게 서운한 건 하나도 없어요.

이걸 새로운 빛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도

새로운 시각인 거는 분명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는 서운하게 생각할 때가 많아요. ㅎㅎ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실 거로 봅니다.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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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5, 2014
*.94.91.64

지난 설교를 찾아보았더니

똑같은 본문, 똑같은 제목으로

3년 전 2월22일에 한 설교가 나오네요.

3년 주기 교회력을 따라가다보니

똑같은 본문으로 설교하는 경우가 자주나옵니다.

앞서의 설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설교를 준비한 겁니다.

결론은 비슷한데 진행과정에서 차이가 나는군요.

3년 전보다 지금이 더 나은 설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링크를 겁니다.

 http://dabia.net/xe/index.php?_filter=search&mid=sermon&search_keyword=%EB%A7%88%ED%83%9C%EB%B3%B5%EC%9D%8C+5&search_target=extra_vars4&document_srl=485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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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약속

February 27, 2014
*.182.37.159

귀한글들을 마구퍼가니 죄송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모두는 예수죽인 부지중 살인자란말에 조금 설명을 해야 할것

같습니다.(부지중살인 민35:9-28절 우연히.과실로 저지른살인)

우리 모두는 부지중 예수죽인 살인자란 말은 살인을 저지는것 조차

모르는 예수 그리스도생명을 상실한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고해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율법을

지킨것이 될까요 아니죠 이말은 나는 하나님 앞에 죄가 없다는 말이됩니다

죄가없으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어주시려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아무련 관계를 맺을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지켰으니 의롭다 말해야 할것입니다

유대인의 비극이 율법이 선하고 의롭다는  것을  놓처버린 것입니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 지입니다.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니 율법을

지켰다고 말입니다 구약 성서를 통해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율법과계명들이 사회 실정법만이 아님을 예수님의 생명탄생을 통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 자체로만으로도 예수 생명이 나올수 있는데 .그곳에 죽음과 부활 영생

영원한천국까지 숨어있었는데요

(롬2:13 하나님 앞 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바울이 말하는 율법을 행하는자란 바리새인들의 율법관(육신의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킨 의로운

율법 곧생명의법을 말합니다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의 인간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고후4:4)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와 연합 되었을 때만이 하나님 형상의 인간이라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생명을 소유한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쫓겨난뒤 예수님 생명상실과 (이사건을 가리켜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의형상을 상실하게 된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요.

그래서 인간은 부지중예수생명 죽인살인자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말씀앞에  인간은 한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드시

얘수님의 십자가 의가 모든사람에게 미치게 된다는 말입니다.우리가 당신의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죽였습니다라고

고백하면 다시 부활의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기이닐까요(부활생명은 잃었던 예수생명이지 내생명이아님)

 

하나님의 구원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안에 예수그리스도 생명입니다 그생명으로 더불어 우리

또한 예수구원에 참예한는것 다  아는 것이지만요.

참고로 진술하면 성경에 있는 것이지만 예수님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쌍둥이 자매형제라는사실을..(마19:4-6)

 부끄럽게 내 신앙고백을 올려봅니다.

 건강하십시요.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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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7, 2014
*.94.91.64

예, 약속님, 많이 배웠습니다.

주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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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우쿵

February 28, 2014
*.35.47.50

  도미니크회 남아프리카 관구장이자  이 시대의 뛰어난 영성가의 한 사람인 앨버트 놀런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에 힘입어 예수님의 "원수 사랑" 가르침의 본 뜻을 헤아려 본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뜻하는 바는 네 이웃과 상대되는 개념인 원수를

네 이웃과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일한 사랑의 대상으로,  온전한 하나의 고유한

인격체로 새롭게 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러하시듯이  우리 사랑의 대상을 모든 인간으로

확장함으로써 파벌의식을 뛰어넘어 보편 인간 사랑에로 눈길을 돌리라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 사회에서 위신과 돈 다음으로 으뜸가는 주요 관심사는 파벌의 결속이었다고 한다.

고래로 유다 민족은 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 의식 아래 탁월한 단결심을 보여왔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 시대에는 이방인 세계에 대항하여 유다 민족이 굳게 뭉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들의 더 큰 관심사는 도리어 민족 안에서 각 집단이 이루는 연대성에 있었다. 즉, 파벌을 나누는

단위가 민족에서 더 좁은 집단의 단위로 축소되었으며,  집단 안에 속하는 이웃 사랑과 집단 밖에 속하는

원수 미움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원칙에 입각해서, '벤데타'라는 혈족 관계의 복수가 예수님

시대에도 완화된 형태로나마 상존했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탈리오' 원칙도 여전히 선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인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으레 원수를 제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여기서 "네 이웃"이란 넓은 의미의 같은 인간 존재가 아니라 좁은 의미에서 네 친척이요 너와 가까운

사람이며 네가 속한 집단의 일원인 것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한다 함은

파벌 의식의 체험이다. 한편 너의 집안, 너의 동아리만 또 다른 하나의  "나 자신"으로 여겨지는,

제한되고 닫힌 개념의 일부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는 으레 나머지 사람들과는 배제나 적대 관계를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의 범위를 넓혀 원수도 포함시켰다. 이웃이라는 사랑의 유대에

만인을 포함시켰다. 이웃과 원수, 내부 사람과 외부 사람 사이에 당연히 엄존하는 대립  관계를 무시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원수를 친척으로, 외부 사람을 내부 사람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오늘 주시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네들끼리만 똘똘 뭉치는 배타적이고 파벌적인 의리보다는,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사랑의 연대 의식, 즉 전체 인류의 연대성 체험을 이야기 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이

요구하는 것은 이웃과 같은 편협한 가족 연대성을 더 근본적인 인격 대 인격의 만인 연대성으로

대치시키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꾸어지는 것은 사랑의 바탕이다.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인위적 가족 관계성 때문이 아니라,

인격 대 인격의.연대성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동일한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지금도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이 사랑의 바탕은 역시 연민(다른 사람의 곤경을 보고 애태우는 감정)이며,

오로지 연민만이 인간의 연대성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연대성 범위의 대치는 근본적 가치 전환을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에로의 방향전환

(메타노이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닐까? 

편가르기가 없는, 모든 수준에서 차별과 차등대우가 없는 하나님 나라 말이다.

 파벌 연대성에서 만인 연대성으로, 배타적 연대성에서 보편 연대성으로....

 

또한 오늘의 말씀은 정목사님 지적하신 대로 원수사랑 가능성 여부의 차원이나 , 이웃이 한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문제라기보다,  사랑의 대상인 사람이 누구냐하는 문제, 즉 누가 내 이웃이며

형제인가하는 존재론적 차원의 질문이 아닐까?

 

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원수 사랑"명령에 너무 쫄지맙시다.

이것은 온갖 사변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설명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자주 구사하시는

극적인 장치입니다.

모든 인간의 피조성과 죄인 됨을 인정하고 파벌짓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열린 마음으로 다가갑시다.

우리 모두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기서 파생되는 인간 행위는

따로 처리해야 될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향점은 하나님과 같은 완전이며,  모든 타인과의 동료의식을 가지고, 

같이 아파하고 딩굴고 때로는 가끔 지지고 뽁고 싸우기도 하지만,

종내에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자는 노력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 희망으로 용기를 가지고 묵묵히 이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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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8, 2014
*.94.91.64

우쿵 님이 마무리를 잘해주셨습니다. 

덕분에 뭔가 미진했던 저의 설교가 

완성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보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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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우쿵

March 01, 2014
*.146.128.5

다 정목사님께서 저의 개안 수술을

잘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겨우 물건(책)을 고르는 안목이

생겼을 따름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A/S를 기대합니다.

 

Pax Dom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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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December 07, 2014
*.44.68.212

하나님을 사랑할 줄도 모르면서 어디서 주워들은건 있어서 원수를 사랑한다고 어설프게 표정관리 해왔습니다.  살이 찌는 음식을 먹으면서 남앞에서 조금씩 먹다가 집에가서 벨트 풀고 왕창먹는 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행위, 전적으로 신뢰하는 행위, 굶어 죽을까 염려 내려놓는 행위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능력임을 머리에 더 기억하려고 감히 목사님앞에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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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햇빛처럼

February 26, 2017
*.172.184.137

...내용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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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6, 2017
*.164.153.48

ㅎㅎ 예언은 적중하지 않아야 세상이 편한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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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8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392
587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268
586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3136
58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10011
58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6982
583 사순절 고난의 그리스도 (사 50:4-9) [8] 2015-03-29 8332
582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500
581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698
580 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10] 2015-03-08 8545
579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368
57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77
577 주현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막 9:2-9) [4] 2015-02-15 8362
576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799
575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680
574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9048
573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71
572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821
571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329
570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635
569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1868
568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358
567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607
566 대림절 그 날과 그 때 (막 13:24-37) [8] 2014-11-30 15021
565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4] 2014-11-23 16953
564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79
563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98
56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919
561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246
560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296
559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528
55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96
557 창조절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4] 2014-09-21 13051
556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398
555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10016
55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7] 2014-08-31 13347
553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916
552 성령강림절 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17] 2014-08-17 7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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