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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성령강림절 조회 수 9704 추천 수 0 2014.06.15 22:48:50
성경본문 : 마태복음 28:16-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28:16-20, 삼위일체 주일, 2014615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질문을 하나 드릴 테니까 답을 찾아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존재라고 믿으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게 말이 될까요?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주장이 아닐까요? 이것은 예를 들어, 어머니는 한 분인데, 또 다른 사람을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가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예수라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믿느냐는 겁니다. 유대교 고위 성직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즉 하나님을 사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고, 그를 통해서 아무리 크고 놀라운 일들이 많이 벌어져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사람과 세상을 초월하는 존재이십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소명을 받은 다음에 당신의 이름이 뭐냐, 하고 물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하셨습니다(3:14). 이 문장을 루터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ch werde sein, der Ich sein werde. (이히 베르데 자인, 데어 이히 자인 베르데.) ‘나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자로 그렇게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유일무이하고, 초월적이고, 알파와 오메가이고, 우주 전체 역사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존재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유대교인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따르는 이들이나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그들의 문제 제기에 대답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걸 피하면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도 그 대답을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의 총괄이 바로 삼위일체론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삼위일체 주일을 기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삼위일체가 가리키는 어떤 존재라는 걸까요

 

삼위일체(trinity)라는 단어는 삼위와 일체의 결합입니다. 삼위는 위격이 셋이라는 뜻이고, 일체는 체가 하나라는 뜻입니다. 한자에서 온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삼위는 맞지만 일체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일체에서 ’()는 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예수, 성령이 한 몸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게 아닙니다. 일체가 아니라 동질(同質)입니다. 우리말로 이미 삼위일체로 굳어져서 그 단어를 일단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논쟁의 출발점은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종교회의입니다. 논쟁의 핵심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위격이 다른 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역사를 초월하지만 예수님은 세상과 역사에 지배받습니다. 하나님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먹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일까요?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놓고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가 논쟁을 벌였습니다.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걸 전문 용어로 헤테로 우시오스’(이질)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서 아다나시우스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 호모 우시오스’(동질)라고 합니다. 니케아에 모인 교부들과 주교 등, 신학자들은 많은 논쟁을 거쳐 아다나시우스의 호모 우시오스 개념을 정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이 위격으로는 하나님과 다르지만 본질로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시오스, 즉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페르조나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인격체, 또는 정체성이라고 봐도 됩니다. 나무도 나름으로 위격이 있고, 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별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총칭해서 페르조나라고 합니다. 본질은 그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훨씬 근원이 어떤 차원을 가리킵니다. 여기 사과가 있다고 합시다. 사과의 페르조나는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공처럼 생겼고, 색깔이 붉거나 청색이고, 맛이 시원 달콤합니다. 손으로 만져서도 알 수 있고, 눈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사과의 본질은 이런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탄소와 물과 햇빛의 결합이 사과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사과가 아닌 것들이 없는 어떤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의 차원에서 동일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 본질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이며, 생명 사건이며,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호모 우시오스 개념에 근거해서 교회는 하나님, 예수, 성령이 위격으로는 구별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삼위일체 개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정통교회는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삼위일체 개념은 신학적으로 너무 전문적인 분야이기에 일반 신자들에게 별로 필요한 게 아니라거나, 그냥 예수님만 잘 믿고 구원받으면 되지 않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초기 교부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서 이런 논쟁을 벌인 게 아닙니다. 이것은 선교 현장에서 불거진 실제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느냐 하는 반론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은 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선교 지향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소중히 여긴다면 오늘도 우리는 이런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작업에 성실하면 기독교는 진리 공동체로 자리매김 되겠지만, 거꾸로 그런 대답에 소홀하게 되면 자폐적인 소종파나 사이비 이단으로 떨어집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8:16-20절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이런 노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부활 후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마지막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즉 권력을 받았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루터는 권세를 강제력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강제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권력이 로마 황제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게 생각할 만합니다. 황제는 민중들의 생사여탈권을 명실상부하게 쥐고 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치, 경제 권력은 임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참된 권력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주는 능력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권력에 저항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팍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평화)를 외쳤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권력이 있다는 본문의 주장은 세상 권력을 대표하는 바로 로마 권력, 즉 로마 정신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 사실을 19, 20a절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이 구절에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명령이 세 가지 나옵니다. 첫째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둘째는 세례를 베풀라, 셋째는 나의 말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겁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한 가지 명령입니다. 복음 선교입니다. 제자를 삼는 것도 선교이고, 세례를 베푸는 것도 선교이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도 선교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선교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자신들의 구원에 자족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고 교회 밖으로, 즉 세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1:8절에 따르면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가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선교가 당연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를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당하는 불이익도 많았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신흥종교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 만능의 가치관이 팽배한 우리나라에서 정의와 평등이 더 우선적인 가치관이라도 외치면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예수의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들어가서 증인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순교의 각오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증인이라는 단어는 순교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순교까지 각오한 선교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서 오늘날도 많은 선교사들이 곳곳에서 활동합니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합니다. 미국이야 처음부터 청교도들에 의해서 시작된 나라이기도 하고, 유무형의 토대가 탄탄하니 그럴만합니다. 해외 선교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선전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형편이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해외 선교에 지나친 열정을 보입니다. 한국교회의 30% 이상이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했습니다. 명실상부하게 교회의 품위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재정자립도를 갖춘 교회는 50%도 되지 못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교 신학적인 검토도 없이 해외 선교사를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순수하게 해외 선교에 대한 열정도 없지 않겠으나 해외 선교를 교회 업적으로 삼으려는 잘못된 생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선교 공동체라는 사실만은, 즉 참된 권력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선포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출발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선교 공동체를 지향한다면 우선 선교가 무엇이냐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선교 방식을 무조건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로마의 국가 종교 모델을 목표로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선교는 시대와 자리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세계교회에서 1960년대부터 선교 개념이 좀더 확장되었습니다. 미쇼 데이(missio Dei), 즉 하나님의 선교를 중심 개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선교사를 파송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가 선포되는 모든 것이 바로 선교라는 겁니다. 경제 불평등이 고착화된 곳이라면 경제 정의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인권이 제약받는 곳에서는 인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경쟁 중심의 교육으로 인해서 청소년들의 삶이 파괴되는 곳에서는 전인교육이 살아나야 합니다. 교회가 선교 지향적 공동체라고 한다면 이런 하나님 선교를 추구해야겠지요.

 

선교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본질을 오늘 삼위일체 주일과 연관해서 말씀드린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19b절이 가리키듯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세례는 죽음과 다시 사는 것을 가리키는 종교의식입니다. 자연인으로서의 그 사람은 죽고,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도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게 아닌 거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죽고 다시 난다는 것도 별로 실감이 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아도 성격이 그대로고, 실수도 반복합니다. 구원의 확신도 늘 뜨거운 게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아버지인 하나님과의 결속, 아들인 예수와 결속, 영인 성령과의 결속이 유명무실하다는 데에 대답이 있습니다. 그 결속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고 단순히 종교현상에 머물러 있으니 new Being이 뭔지 경험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 세 이름과의 결속에 전념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것만 해도 바쁜데 어느 세월에 그런 것까지 생각하느냐고, 그런 것은 이 세상살이가 얼마나 다급하고 치열한지 잘 모르는 목사의 한가한 소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아들, 영과의 결속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각각 세 가지 이름과의 결속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1) 아버지와의 결속, 또는 아버지와의 일치는 창조와 종말의 완성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일까요? 여러분 앞에 마지막 순간에 졸지에 닥쳐 올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가장 궁극적인 현실이 될 것입니다. 2) 아들과의 결속, 또는 일치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약속으로 주어진 영생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게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일까요? 돈과 집과 삶의 재미만이 실질적인 것일까요? 그 모든 것이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이 득달같이 올 것입니다. 그때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이 궁극적인 현실로 경험될 것입니다. 3) 영과의 결속, 또는 일치는 생명의 영인 성령의 차원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름 잡는 이야기인가요? 사람은 자기의 인식 능력을 절대화합니다.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정치 이념 등도 절대화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명백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순간이 곧 닥칩니다. 그때는 생명의 영인 성령이 가장 궁극적인 능력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스스로의 생명을 누리고 늘리기 위해서 평생 수고하겠지만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놀랍게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영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본질이 동일한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 각각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바로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하고, 그 하나님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으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신비한 방식으로 오늘 성경 본문 마지막 구절에 나와 있듯이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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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삶의 과제

June 1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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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우매한 중생인 저로써는 늘 궁금하기도 하면서도

머뭇거리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입니다.

무엇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집중인지요?

머리로는 어렴풋이 알 듯도 하지만,

마음으로 그리고 실제 삶으로는 사실 잘 되지 않습니다.

나를 버린다는 것도, 나를 버리고 존재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머리는 생각하지만

실질적인 삶에서는 공허한 만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머리와 마음이 다름이 위선이라는 생각도 여전하구요......

여하튼 알아간다는 게 예전엔 기쁨이었다면,

지금은 마냥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절대 존재이지신 하나님과 역사적인 인간의 삶에 투영되신 예수님과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성령님에 집중해야겠지요...참 인간으로 오신 참 하나님 예수님을 통해서...

쳇바퀴처럼 도는 삶 속에 그 도는 원이 크지고 있다는 생각에 자위합니다.

저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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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7, 2014
*.94.91.64

삶의과제 님이 솔직하게 표현하셨네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것이 머리로만 받아들여지지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공허하다는 거지요?

일단 머리와 마음의 완전한 일치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한 경지이니 포기하세요. ㅎㅎ

영성 훈련은 그런 일치를 향한 노력이에요.

그게 오죽 어려웠으면

출가해서 수도사가 되는 사람들이 나오겠습니까.

이게 어려운 이유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인식으로 완전하게 붙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믿음이 필요한 거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래도 그게 어떤 거라는 것은 좀더 명확하게 알고

또 틈틈이 경험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약간의 보충 설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것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영혼을 맡긴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현실(reality)로 경험합니다.

그게 잘 안 될 겁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돈, 명예, 가정 등등이니까요.

클래식 음악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사람,

또는 시와의 관계에 집중하는 사람이

각각 음악과 시를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보면 참고가 될 겁니다.

흙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뭔지를 알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도 조금은 알게 될 겁니다.

그게 자신의 최고 현실이 되는 겁니다.

천천히 더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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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또다른세계

June 17, 2014
*.98.145.105

음성 설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올라오지 않아서 텍스트로 설교를 접했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 '사람은 자기의 인식능력을 절대화한다'는 문구가 가장 와 닿았습니다. 

(설교의 주제에서 멀어지나요?? ^^)

요즘 비슷한 생각들에 쌓여 어떤 단어들로 개념들을 정리해야 할지 몰랐는데

딱 이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너무도 명확하게 와 닿네요.

나름 다시 정리를 해본 것은 '사람들은 자신의 왜곡된 인식능력을 절대화 한다'입니다.

그리고 곰곰히 한 번 생각해봅니다. 지금 내게 있는 왜곡된 인식능력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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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7, 2014
*.94.91.64

지난 주일 공교롭게도

엠피쓰리 녹음도 깜빡하고 놓쳤는데,

대구샘터교회 동영상도 소리가 녹음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런 일은 드문데,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우물안의 개구리와 비슷한 거지요.

동전 처럼 생긴 창을 통해서만 세상을 인식하잖아요.

나뭇닢이 그 창을 스치거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

그걸 현상적으로 인식할 수는 있지만

어디서 왔는지, 결국 어디로 갈지는 모르고,

그것과 얽힌 우주 전체의 현상은 더더욱 모르는 거지요.

이런 점에서 심리학이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면 인간을 다 이해할 수 없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성서의 진술은

심리학보다 훨씬 심층적인 인간 이해지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다는 말도 비슷한 거구요.

이런 점에서 기독교 정통 신학인 성령론적 인식론은

합리적으로 보더라도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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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파란하늘지붕

June 18, 2014
*.129.38.112

지상명령으로 잘 알려져있는 본문에서 삼위일체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들어가는 설교라니! 정목사님답다(?)라고 생각이 드네요, 어려운 주제로 보여 두번 세번 반복해서 계속읽어봐야했습니다.  삼위일체는 오케이, 대충이해했어, 다음은 뭘해야하지?라고 말하는 조급증에 경종을 울리는것같습니다. 저의 짧은 이해로는 삼위일체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 중요한 속성(?)인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부분에서 성립이 가능하다...라고 이해를 했는데요, 얼마만큼 깊은 이해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무리하게 비유하자면 사과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맛이라고 가정을 하면, 만약에 자두나 포도에도 사과의 맛을 공유할수있다면 모양과 성질은 달라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라고 비유할수있는건가요? 제가 이런것들이 참 너무 동떨어져 버리게 생각되는것 자체가 철학도, 상상력도 부족한 유물론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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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8, 2014
*.94.91.64

삼위일체에 대한 파란하늘 님의 비유를 곁들인 설명을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사실 삼위일체 개념을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한 남자가 집에서는 아버지로,

직장에서는 사장으로,

교회에서는 집사로 활동하는 걸

삼위일체에 대한 비유로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듯해보이지만 이건 양태론이라고 해서

삼위일체 개념으로 발전되기 이전의 사상입니다.

양태론은 여전히 단일신론에 머무는 겁니다.

그것보다는 파란하늘 님의 사과맛 비유가 나아보이는군요. ㅎㅎ

삼위일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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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anuary 02, 2015
*.206.242.56

하나님의 모든 본질을 우리가 알 수 있게, 볼 수 있게 보내주신 존재가 예수님이십니까?

그리고 그분의 영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지요.

오늘 말씀이 만약 시험에 나온다면 낙제 점수가 확실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제가 날아오를 수 있게 조금더 바람을 일으켜 주십시오.

그러면 더 힘차게 날개짓을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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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2, 2015
*.94.91.64

ㅎㅎ 지금 정도의 속도가 가장 좋습니다.

앞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일도 많이 일어날 겁니다.

아예 생각없이 교회생활에 적응하면 

그런 일도 없겠지만요.

내 설교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요.

긴장감을 갖고 천천히 가다보면

자신의 영적으로 비상하고 있다는 걸

저절로 느끼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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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2841
633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147
632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516
631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3] 2016-02-21 7300
630 사순절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 (신 26:1-11) [6] 2016-02-14 7736
629 주현절 변모의 예수, 하나님의 아들 (눅 9:28-36) [3] 2016-02-07 8490
628 주현절 사랑, 하나님의 존재 방식 [9] 2016-01-31 7904
627 주현절 종말의 능력과 현실 (눅 4:14-21) [5] 2016-01-24 5923
626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466
625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눅 3:15-17, 21-22) [4] 2016-01-10 8256
624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415
623 성탄절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file [5] 2015-12-27 9716
622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2
621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357
620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86
619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file [7] 2015-12-06 8450
618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9719
617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8998
616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8] 2015-11-15 7145
615 창조절 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14] 2015-11-08 11060
614 창조절 쉐마 이스라엘! (신 6:1-9) [4] 2015-11-01 15512
613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175
612 창조절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히 5:1-10) [8] 2015-10-18 8224
611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2
610 창조절 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14] 2015-10-04 10854
609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438
608 창조절 고난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11:18-20) [12] 2015-09-20 8196
607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6
606 창조절 행위와 믿음 (약 2:1-10, 14-17) [4] 2015-09-06 7717
605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38
604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850
603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693
602 성령강림절 하늘의 양식 (요 6:35, 41-51) [8] 2015-08-10 7829
601 성령강림절 영원한 생명의 양식 (요 6:24:35) file [15] 2015-08-02 8048
600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568
599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626
598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457
597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742
596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8
595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21370
594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697
593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211
592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077
591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900
590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781
589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0
588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324
587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196
586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2970
58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43
58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6902
583 사순절 고난의 그리스도 (사 50:4-9) [8] 2015-03-29 8291
582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460
581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653
580 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10] 2015-03-08 8514
579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333
57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29
577 주현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막 9:2-9) [4] 2015-02-15 8333
576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759
575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645
574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8989
573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30
572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784
571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215
570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544
569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1726
568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7
567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22
566 대림절 그 날과 그 때 (막 13:24-37) [8] 2014-11-30 14694
565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4] 2014-11-23 16791
564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3
563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2
56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874
561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205
560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260
559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5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6
557 창조절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4] 2014-09-21 13014
556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356
555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4
55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7] 2014-08-31 13299
553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881
552 성령강림절 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17] 2014-08-17 7646
551 성령강림절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18] 2014-08-10 14745
5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172
549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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