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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롬 7:15-25a)

성령강림절 조회 수 9253 추천 수 0 2014.07.07 00:11:55
설교듣기 : https://youtu.be/chrE5xOLeMU 
성경본문 : 로마서 7:15-25a 

선과 악

7:15-25a, 성령강림후 제4, 201476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폭력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는 조폭들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 티브이에 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착하게 살자!’라는 문구도 가끔 보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이 거기에 잘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착하게 살고 싶지만 잘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건 그분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종교적으로 상당한 내공을 쌓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영적으로 예민할수록 선한 의지와 악한 의지의 충돌을 더 심각하게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롬 7:19절에서 자신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토로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바울은 보통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자기 훈련이 잘 된 사람이었습니다. 고후 11장과 빌 3장에 따르면 바울은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종교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할 정도로 율법에 정통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존경받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말하는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일까요? 바울의 외침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립니까?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다면 구원 문제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구원 문제를...’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그것대로 대처해나가야겠지만 기독교인으로 살겠다면 구원 문제는 늘 삶의 상수로 두어야 합니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구원 문제를 상수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는 바울의 고백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바울을 비롯한 당시 유대인들에게 선과 악의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 종교라 할 정도로 율법을 삶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그가 선을 행한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악을 행한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평생 율법만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율법을 문자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바울은 바리새파에 속했기 때문에 율법에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바울의 영혼이 평화로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신에게 절망감만 늘어났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서 율법을 실정법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는 선과 악의 기준이 실정법입니다. 법을 잘 지키면 선을 행한 거고, 지키지 않으면 악을 행한 겁니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 법을 잘 지킨 거니까 선을 행한 거고, 탈세를 했다면 악을 행한 겁니다. 이처럼 법에 의해서 사회가 운용되는 걸 법치라고 합니다. 법치가 잘 되는 나라를 일반적으로 선진국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단 법이 선과 악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는 걸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똑같은 잘못을 했는데도 재판에 가면 어떤 변호사가 변호했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심지어 전관예우가 법보다 힘이 더 있습니다. 법도 역시 사람이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엄정하게 선과 악을 구별해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특히 법치의 역사가 짧고 온정주의가 강한 우리나라에는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이런 법의 근본적인 한계는 접어두고,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법을 완벽하게 지킨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사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그게 불가능하지만요.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율법과 로마의 법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어쨌든지 법을 완벽하게 지킨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삶과 양심을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선이 아니라 악을 행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자신은 양심에 거리낌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문제는 그가 실제로 얼마나 착하게 살았냐 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비추어볼 거울이 얼마나 투명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거울에 때가 끼어 있으면 자신의 악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살이에서는 때가 낀 거울이 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투명한 거울을 가능한 피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오해는 마십시오. 율법이나 실정법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도 롬 7:12절에서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면 선하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법은 필요한 겁니다. 최소한 법치 사회만이라도 만들어가는 게 옳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해야 할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말인지 해체하는 말인지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노력과 결단과 희생을 무가치한 것으로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법을, 종교적인 율법이나 정치적인 실정법이나 다 마찬가지인데, 절대화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큰 절망에 떨어진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런 문제를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좀더 구체적인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다. 율법을 돈으로 바꿔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대한민국에서는 이건 비유가 아니라 실체나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습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고,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신념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돈이 선이고, 돈 없는 게 악입니다. 돈이 많아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연히 행복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이 두려워서, 불편하게 사는 게 두려워서 돈에 집착하는 것뿐이지 돈을 통해서 행복하기 때문에 돈을 소유하려는 게 아닙니다. 돈에 집중하면 할수록 거기서 더 큰 절망만 경험합니다.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돈을 어떻게 불릴 것인지,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은(노블리스 오블리제) 어떻게 질 것인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줄 것인지 않을 것인지, 걱정거리만 늘어납니다. 돈 쓰는 재미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는 벌면서 살아야겠지요. 다만 거기에 매달리면 바울이 율법에 매달리다가, 내가 젊음을 다 바쳐 노력했는데 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만 행하는 거야, 내가 왜 이런 정도밖에 안 되지, 나에게 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거지, 하는 한탄을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약하거나 환경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 놓여 있는 문제였습니다. 죄가 그것입니다. 20을 보십시오.

 

만약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은 자기 안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죄로 인해서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 겁니다. 여기서 악(, 카키아)과 죄(, 하마르티아)를 구별해서 봐야합니다. 악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나쁜 행동(evil)을 가리키지만 죄는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근원적인 힘(sin)입니다. 악은 우리가 노력해서 조금씩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율법과 실정법이 이런 데 도움이 됩니다. 도덕과 윤리도 도움이 됩니다. 심리적 안정감도 도움이 됩니다. 복지 확대도 도움이 됩니다. 교양인이 되는 것도 약간의 도움은 됩니다. 그래서 유럽의 계몽시대에 사람들은 교육과 복지를 통해서 세상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 1, 2차 대전을 통해서 이런 계몽의 한계를 인류가 경험했지만 기본적인 생각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노력은 계속해서 필요하긴 합니다. 이에 반해서 죄는 우리가 노력해서 조금씩 줄여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죄의 힘을 약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능력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양심과 율법에 충실했던 바울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힘을 원죄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의 내면세계에 보편적으로, 숙명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는 이 문제를 신화적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아담과 이브에게 동산의 모든 과실은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은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러분이 다 아십니다. 뱀의 유혹을 받은 이브, 이브의 권고를 받아들인 아담은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운명이 그 후손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인간 이해가 얼마나 준엄했는지를 이 선악과 설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지배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죄의 지배로 인해서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바울의 이런 설명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죄의 능력은 근원적이어서,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에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히 우리가 윤리적으로 실수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실존 자체가 자기중심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합니다. 인격 여부에 상관없이, 종교여부에 상관없이 그렇게 삽니다. 숨 쉬고, 먹고, 배설하고, 후손을 이어갑니다. 이것은 윤리 너머의 생존본능에 속합니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경쟁합니다. 경쟁은 타인을 거부하는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바로 여기에 악이 일어납니다. 요즘 브라질 월드컵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표 팀은 조별 리그에서 12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16강에서 탈락했습니다. 이런 시합에서는 의리도 없고 체면도 없습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절대적인 논리로 작용합니다. 저도 테니스 동호회에 나가서 친선 시합을 합니다. 내가 이기면 상대방이 지는 겁니다. 가능한 게임 자체를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대방이 실수를 하거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서 내가 이기는 게 기분이 좋습니다. 어처구니없이 내가 실수를 해서 지면 그게 기억에 남습니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게 다 죄라는 뿌리에서 나오는 악이라는 열매입니다. 목회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끼리도 경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자신을 성취하려고, 즉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에 악이 작용합니다.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진술을 오해, 왜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악의 근원이 죄니까 결국 자기가 한 악한 행위도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잘못을 원죄 탓, 아담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그건 잘못입니다. 악은 당연히 그것을 행한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나 악의 뿌리인 죄에 대한 바울의 진술은 악행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좋다는 게 아니라 죄의 지배가 근원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율법을 적당하게 지켰거나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반복해서 선을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자기 안에서 싸웁니다. 그래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절규합니다.

바울은 완전한 절망에 빠졌습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힌 신세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대충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생각했으면 별 탈이 없었겠지만 그는 이것이 구원 문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끝까지 밀고 나갔다가 죽음의 수렁에 빠진 겁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에게 구원의 빛이 비쳤습니다. 그는 25a절에서 이렇게 또 외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서 악의 뿌리인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예수 믿어도 죽는 거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생명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어도 살며, 살아 있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11:25, 26). 단백질 덩어리로 된 몸이 산다는 게 아니라 종말에 그 실체가 드러날 부활 생명을 미래 당겨서 산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믿음으로 죄 문제가 해결된 기독교인들에게는 선과 악의 충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까요? 완전히 선에만 속한 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로 계속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고 살아가는 한 여전히 자신에게서 선과 악이 충돌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겠지만 그것의 뿌리인 죄와 죽음이 해결되었기에 종말의 완전한 해방과 구원을 기다리면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유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집 마당의 텃밭에 원하지 않는 풀들이 자랍니다. 그중에 다른 작물의 몸을 뱀처럼 감고 올라가는 풀도 있습니다. 가는 줄기지만 아주 강해서 그냥 두면 작물을 죽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물을 감고 있는 덩굴을 다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가는 작물에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낫으로 덩굴의 밑동만 잘라주면 작물이 일단 숨을 쉴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몸에 붙었던 덩굴줄기도 시나브로 조금씩, 또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떨어져나갑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모양을 띤 악의 덩굴이 우리를 감고 있으나 예수를 믿음으로 악의 뿌리인 죄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바울처럼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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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July 07, 2014
*.252.37.34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바울이  얼마나 투명한 양심의 거울로 

자신의 죄와 악의 문제를 깊이 씨름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를 휘감고 있는 이 끈질긴 악의 덩굴도

 언젠가는 떨어져 나갈 것을 믿으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지금은 아직  아니지만 ...

미래에 다가올 그 자유함의 희망을 앞당겨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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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07, 2014
*.94.91.64

예, 바울 같은 이가 여러 편지를 남긴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편지 덕분으로 우리는

그의 영혼이 얼마나 치열하게 이런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의 편지를 잘 보존해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도 감사해야겠군요.

죄의 힘이 아무리 막강해도

이미 중심이 무너진 상태이니

겁 먹지 말고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봅시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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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또다른세계

July 08, 2014
*.98.145.10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개인적으로는 너무도 와닿습니다. 

청교도 신앙의 영향이었는지..아니면 제가 그런 성향이 있어서 그랬는지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하면 할수록 절망의 수렁은 깊어져만 갔고

혹여 부족한 제 행실로 인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그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격적이고 놀랍던지요...

물론 지금도 비틀거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목사님의 표현대로

밑둥이 잘려나가 시들어가고 있으니 두려워말고 한 번 붙어봐야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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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08, 2014
*.94.91.64

영적 수행의 길을 잘 걸어오신 거 같습니다.

'절망의 수렁'과 '은혜의 감격'의 관계를

그냥 말로는 대충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걸 그대로 유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건 단순히 감수성이나 심리 문제가 아니라

삶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의 문제입니다.

모든 삶의 내용들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꿰뚫어보지 않으면

구원의 은혜는 결코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번 쯤 꿰뚫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서 좌절해보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그걸 유지하기는 어려운 거지요.

일상에 쫓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다비안이 주일 예배 행위를 가리켜

일상의 정기적인 단절이라고 말하던데,

그건 매우 중요한 시각입니다.

그게 유대교의 안식일 개념이기도 하구요.

일상을 단절하는 일이 없이 거기에 파묻히면

결국 상투성에 빠져서

그 내면에 들어 있는 절망과 희망,

버림받음과 구원받음의 긴장을 놓치게 됩니다.

일단 그걸 놓쳐 버리면 다시 붙들기는 더 힘듭니다.

테니스를 잘못 배워서 그게 몸에 굳으면

고치기 힘든 거와 같습니다.

자, 악과 절망이라는 덩굴이 여전히 기세가 등등해보여도

그 밑둥이 잘렸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고

그 사태 안으로 부단히 들어가도록 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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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July 08, 2014
*.56.59.65

고맙습니다 목사님!

이 아침 

오늘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더운 여름인데 건강 잘 지키십시요.

뉴욕도 오늘은 많이 더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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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08, 2014
*.94.91.64

뉴욕에 계신 모래알 님이 다비아에 들어오신 게

벌써 7년이나 되는군요.

오랜 손님이래서 더 반갑습니다.

저는 원당 숲에서 살기에  겨울에는 추우나

여름에는 크게 더위를 모르고 지냅니다.

언젠가 한번 뉴욕에 갈 기회가 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ㅎㅎ

주님의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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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July 08, 2014
*.56.59.65

벌써 그리 되었나요? 

오늘 신학공부 특강 1번을 들었는데

책이 있는 걸 모르고.. ㅎㅎ

목사님 뉴욕 오시기 전에

제가 대구에 가는게 빠를지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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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햇빛처럼

July 11, 2014
*.37.133.135

 목사님의 설교말씀은 제게 늘 '탁'이어서 기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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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1, 2014
*.94.91.64

제 설교가 도움이 되셨다니

허공을 향한 주먹질이 아닌 것 같아 다행입니다. ㅎㅎ

아마 햇빛처럼 님의 영혼이

비를 기다리는 마른땅,

또는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그것이라는 사실이

줄탁 사태의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겁니다.

제가 아무도 모를 오묘한 진리를 기가 막히게 설교한 게 아니라

성경본문에 나온 당연한 이야기를

아주 평범하게 설명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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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1, 2014
*.94.91.64

악한 덩굴잡초 이름을 모르겠는데,

오늘 사진을 찍었습니다.

보십시오.

잎이 순할 때는 따서 먹어도 된다네요. ㅎㅎ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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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햇빛처럼

July 12, 2014
*.37.133.135

저 무법자는 뙤약볕 마른 보도블럭까지 염치없이 손을 쫙쫙 벌리며 기어나와 행인들 발을 휘감습니다. 좀 치울라치면 그 까칠하고 껄끄러운 줄기가 사정없이 손을 휘감아 상처를 냅니다. 좀체 시들지 않고 다른 식물들을 칭칭 감고 올라가 높은 나무 끝까지 도달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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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2, 2014
*.94.91.64

표현력이 뛰어나시군요.

햇빛처럼 님의 대글을 읽다보니

이름 모를 저 덩굴의 실체가 살아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귀한 주일을 맞으시고요,

출석하는 교회 예배도 잘 드리시고,

설교도 넘 비판적으로 듣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요. ㅎㅎ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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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햇빛처럼

July 17, 2014
*.37.133.135

이름 모를 잡초 하나에도 자기 역할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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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7, 2014
*.94.91.64

햇빛처럼 님의 줄달음 치는 생각은 신앙의 도약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 악하게 보이는 것마저

큰 틀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금 우리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일 수가 있겠지요.

궁극적인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살피면서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겠지요.

다만 우리의 근본적인 인식의 한계를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옳고 그름의 판단과 투쟁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병이 들었다면

그 병이 우리로 하여금 더 큰 뜻을 이해하게 하는 계기가 됨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가서 치료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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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anuary 08, 2015
*.206.242.56

목사님의 훌륭한 말씀으로 오랫동안 헤메이던 큰 문제가 오늘 풀어졌습니다. 독학의 껍질에서 출구를 찾아헤메는 병아리에게 어미의 부리가 가볍게 껍질에 구멍을 내 준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유전자에 경쟁이란 DNA를 주셔서 살게 홀러 서게 하셨습니다.

살아갈 수록, 성장할 수록 경쟁속에서 죄의 그림자를 알게되고 악을 서슴없이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죄로부터 유일한 빛의 탈줄구도 주셨네요.

죄를 모르고 악을 행하면서 고뇌했습니다. 왜 죄를 주셨냐고. 

그 죄가 나에게 태생적으로 어떻게 설계되고 필요한 부분인지를 몰랐습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분석하는데 느낀 한계에 고뇌해 왔었죠.

주님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오늘 목사님께 제가 느낀 감사를 어떻게 글로 적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부터 제게 엄청난 선물을 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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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8, 2015
*.94.91.64

죄의 힘이 존재론적이어서 우리 자신이 극복하기 어렵긴 하지만

근원적으로 본다면 죄는 이미 힘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입니다.

승리자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사실에 근거해서 빛을 받고 사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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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35
648 성령강림절 귀신 이야기 (눅 8:26-39) [43] 2016-06-19 11923
647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37] 2016-06-13 8219
646 성령강림절 울지 말고, 일어나라! (눅 7:11-17) [16] 2016-06-05 14457
645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3
644 성령강림절 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11] 2016-05-22 11525
643 성령강림절 교회는 성령공동체다 (행 2:1-21) [10] 2016-05-15 12145
642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06
641 부활절 바울과 루디아 (행 16:9-15) [9] 2016-05-01 13915
640 부활절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15] 2016-04-24 15132
639 부활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 (요 10:22-30) [13] 2016-04-17 6633
638 부활절 죽임 당한 어린 양 (계 5:11-14) [9] 2016-04-10 7741
637 부활절 부활의 증인이란? (행 5:27-32) [9] 2016-04-03 7708
636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240
635 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file [7] 2016-03-21 9030
634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2840
633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147
632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516
631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3] 2016-02-21 7299
630 사순절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 (신 26:1-11) [6] 2016-02-14 7736
629 주현절 변모의 예수, 하나님의 아들 (눅 9:28-36) [3] 2016-02-07 8490
628 주현절 사랑, 하나님의 존재 방식 [9] 2016-01-31 7904
627 주현절 종말의 능력과 현실 (눅 4:14-21) [5] 2016-01-24 5923
626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466
625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눅 3:15-17, 21-22) [4] 2016-01-10 8256
624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415
623 성탄절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file [5] 2015-12-27 9715
622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2
621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354
620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84
619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file [7] 2015-12-06 8449
618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9718
617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8997
616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8] 2015-11-15 7141
615 창조절 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14] 2015-11-08 11060
614 창조절 쉐마 이스라엘! (신 6:1-9) [4] 2015-11-01 15508
613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175
612 창조절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히 5:1-10) [8] 2015-10-18 8223
611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0
610 창조절 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14] 2015-10-04 10853
609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437
608 창조절 고난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11:18-20) [12] 2015-09-20 8195
607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4
606 창조절 행위와 믿음 (약 2:1-10, 14-17) [4] 2015-09-06 7717
605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37
604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847
603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693
602 성령강림절 하늘의 양식 (요 6:35, 41-51) [8] 2015-08-10 7829
601 성령강림절 영원한 생명의 양식 (요 6:24:35) file [15] 2015-08-02 8048
600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568
599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625
598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455
597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742
596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7
595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21370
594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695
593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211
592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076
591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898
590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780
589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0
588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323
587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195
586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2969
58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42
58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6902
583 사순절 고난의 그리스도 (사 50:4-9) [8] 2015-03-29 8291
582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460
581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652
580 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10] 2015-03-08 8514
579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332
57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29
577 주현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막 9:2-9) [4] 2015-02-15 8332
576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758
575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644
574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8987
573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30
572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783
571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214
570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544
569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1723
568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4
567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19
566 대림절 그 날과 그 때 (막 13:24-37) [8] 2014-11-30 14691
565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4] 2014-11-23 16790
564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2
563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2
56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874
561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204
560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259
559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5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5
557 창조절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4] 2014-09-21 13013
556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354
555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4
55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7] 2014-08-31 13299
553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879
552 성령강림절 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17] 2014-08-17 7645
551 성령강림절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18] 2014-08-10 14744
5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171
549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28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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