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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주현절 조회 수 11950 추천 수 0 2009.02.02 09: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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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명기 19:1-13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신 19:1-13)


사람과 다른 동물의 비슷한 점은 서로 싸운다는 겁니다. 동물들의 싸움은 주로 먹이와 짝짓기에 집중된다면 사람의 싸움은 훨씬 광범위하게 일어납니다. 사람이 동물보다 더 자주, 더 심하게 싸웁니다. 일례로 동물은 배가 부르면 다른 동물을 공격하지 않지만 사람은 배가 불러도 여전히 다른 사람을 공격합니다. 아이들도 싸우고, 어른도 싸웁니다. 지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종교의 유무나, 종교 차이에 상관없이 싸웁니다. 에릭 프롬의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 따르면 문명이 발달한 곳일수록 인간의 파괴적 경향이 더 심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런 싸움 중의 하나는 원수를 갚는 데서 일어납니다. 이건 보통의 치고 박는 정도의 싸움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싸움입니다. 자기 가족이나 동족이 다른 이들에게 살해당했을 때 똑같은 방법으로 앙갚음을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유행하던 무협영화의 소재는, 예컨대 <돌아온 외팔이> 같은 영화의 소재는 몽땅 이런 원수 갚기입니다. 아마존 원시림에 사는 원주민들에게도 이런 관행이 있었다고 합니다. 9.11테러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원수 갚기의 악순환은 직접 피해를 당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가해자까지 포함해서 모든 이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합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내면적인 문제도 심각합니다. 증오, 분노, 불안, 절망에 사로잡히는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육체적인 죽음 못지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도피성

이런 일들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원수 갚기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독특한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피성입니다. 물론 이와 비슷한 제도는 근동이나 다른 나라에도 있었으며, 지금은 국가의 법이 이를 대신합니다. 오늘 본문인 신 19: 1-13절에는 그 제도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형식으로 선포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될 경우에 전국을 세 지역으로 나눠 그 중심에 각각 특별한 성읍을 세워야 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있듯이 지역의 길들은 모두 그 성읍에 쉽게 갈 수 있도록 뚫려야 합니다. 땅이 더 커지면 이런 성읍을 세 개나 더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 성읍은 살인자의 도피성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이 성읍으로 피하면 일단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도피성으로 피한다고 해서 모든 살인자가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실수로 살인한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이를 설명합니다. 이웃이 함께 나무를 하러 갔다가 도끼날이 빠져서 상대방을 죽이게 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능한 빨리 도피성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반면에 의도적으로 살인한 사람은 도피성에 피해도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성읍 장로들이 이 사람을 끌어내서 원수 갚을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도피성 제도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사고로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빨리 도피성으로 피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고의가 아니니까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 잘 설명하면 괜찮겠지, 하다가는 피의 보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족이 죽었을 경우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의 가족은 앞뒤 사정을 가릴 것 없이 가해자를 무조건 죽이겠다고 달려들 것입니다. 본문 신 19:6절은 이런 사람의 심리를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도피성까지의 거리를 가능한 짧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 도피성 제도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언제 어느 지역에서 실행되었는지는 학자들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아마 한시적으로, 지엽적으로 실행되었을 수도 있지만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실행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 이유는 도피성에 피한 사람의 살인 행위가 고의인지 실수인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겠지요. 실제는 고의적이었지만 겉으로만 실수인 것처럼 위장할 수도 있었구요. 그걸 판단해야 할 성읍의 장로들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편을 들 수도 있었습니다.

보다 더 큰 이유는 이 제도가 권력자의 손에서 무기력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그렇지 않습니까? 법은 힘 있는 사람들의 자기 편리에 따라서 적용될 때가 많습니다. 똑같은 사안인데도 어떤 때는 법에 따라서, 또 어떤 때는 정치에 따라서, 속된 표현으로 엿장수 마음대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 예를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피로 물들였던 전제 군주 솔로몬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권력 투쟁에서 솔로몬이 승리한 후 배다른 형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두려워하여 제단 뿔을 붙잡고 버텼습니다.(왕상 1:51) 그 당시에는 제단 뿔이 바로 도피성 역할을 했습니다. 아도니야는 그걸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후에 다른 문제를 빌미로 솔로몬에게 죽습니다. 아도니야를 지지하던 장군 요압도 제단 뿔을 잡았습니다. 솔로몬은 브나야 장군을 시켜서 제단 뿔을 잡고 있던 요압을 현장에서 죽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라고 하더라도 독재 권력자들 앞에서는 쉽게 무용지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신명기 기자가 선포하는 도피성의 중심 사상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신명기 기자는 도피성의 설립과 그 기능에 대해서 설명한 다음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10, 13절) 도피성의 핵심은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이다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는 명령은 그런 일이 흔히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이런 피 흘림의 역사라고 해도 좋습니다. 개인 사이에도 그렇고, 종족 사이에도 그렇고, 국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앞에서 저는 인간이 왜 싸우는가, 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싸움이 인간의 본질이니 어떻게 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리석은 질문을 드립니다. 인간이 왜 무죄한 피를 흘립니까? 너무 비관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어쩌면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이 인간의 본질일지 모릅니다. 오죽했으면 창세기 기자는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돌로 쳐 죽인 참사를 창세기 앞부분에 보도했겠습니까? 카인이 아벨을 죽일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 안색이 변할 정도로 분해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따질 일이지 동생을 죽입니까?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끔직한 소식을 또 접했습니다. 군포에서 여대생을 살해한 강 아무개 씨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는 2006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간 경기서남부지역에서 실종된 부녀자 일곱 명을 모두 살해해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에 의해서 살해당한 여성들은 그와 원수진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 무죄한 피 흘림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독재자들과 사회 부적응자들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그들이 사고를 당했을 때 적절한 치료를 해주지 않는 행위는 무죄한 피를 흘린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한국에 돈 벌러 왔다가 신세를 망친 이주노동자들의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뉴타운을 위한 재개발 지역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세입자들의 눈물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눈물은 피와 똑같습니다. 초국가 기업 중에서도 동남아 어린이의 노동력에 기대서 돈벌이를 하는 기업들이 있다고 합니다. 비인간적인 노동을 통해서라도 먹고 살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하는 행위는 무죄한 피 흘림입니다.   

성서가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피가 곧 생명이며, 그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은 곧 하나님의 것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사람의 생명은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람을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창 1:27)과 생기(창 2:7)가 그것입니다. 무죄한 피를 흘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이며, 그의 생기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무죄한 이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사건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행동은 우주와 맞먹는 무게가 있습니다. 자칫하면 무죄한 피를 흘리고, 무죄한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말은 사람들에게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공자 왈 정도로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데 아주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카인의 예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카인에게 일찌감치 주의를 주었습니다. 죄가 너를 이용하려고 하는데,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카인은 그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분노의 노예가 되었는지 아벨을 들판에서 쳐 죽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카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그럴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할 겁니다. 아무리 형이라고 하지만 동생의 모든 걸 책임지라는 건 심한 게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창세기 기자의 지적은 사람의 본성에 대한 정확한 진술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을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모른 척 합니다. 지난 용산 참사에서 여섯의 생사람이 죽었는데도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법적 책임은 둘째 치고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을 지키는 자인가, 하는 변명만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 그리고 이렇게 심판하십니다. 아우의 피를 받았으니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땅을 갈아도 별 소득이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땅에서 방랑하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아담과 이브의 실낙원 사건을 기록한 뒤에 즉시 이 카인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두 사건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며, 후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것입니다. 전자의 결과로 땅이 저주를 받았으며, 후자의 결과로 사람이 땅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모두 생명의 훼손입니다. 이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린 인류가 감당해야 할 삶의 질고이고 시련입니다.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 

우리는 무죄한 피 흘림의 역사 한 가운데 서 있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믿는 예수님입니다. 그는 죄 없이 죄인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을 비롯한 여러 종교 지도자들, 로마의 정치권력, 그리고 그들에게 쉽게 세뇌당한 민중들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 3:14,15a)

예수에게 일어난 무죄한 피 흘림의 역사에서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그렇게 난폭하거나 파렴치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닐지 모릅니다. 가능한 대로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리도 역시 다른 이들의 무죄한 피를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친구를 향해서 ‘라가’, 즉 이 놈 하고 욕을 한다면 이미 살인을 한 거나 진배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민중들의 함성이 바로 우리의 목소리가 아닐는지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자신과 인류 역사는 절망적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생명과는 관계없는 일만, 아니 생명을 파괴하는 일에만 정신을 팔고 있으니 말입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역설적으로, 무죄한 피가 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 없이 피를 흘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죄 없이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향한 그 피 흘림의 역사 자체를 말소시켰습니다. 죽음과 저주에서 생명과 은총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는 이 사건이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한 유대 남자의 피 흘림이 어떻게 인류가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 될 수 있느냐, 그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넘어선다고 해도, 그것이 오늘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냐, 하는 현실적인 질문이 따라옵니다. 이에 대해서 제가 딱 부러지는 대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의 영인 성령과의 소통을 통해서 얻어야 합니다. 다만 이렇게 방향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무죄한 피 흘림의 역사에 맞서는 것입니다. 그 현장이 어디인지는 여러분이 찾아보십시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피 흘림의 역사가 이미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전체 실존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앞의 것은 믿음의 실천이고, 뒤의 것은 믿음의 근거입니다. 앞의 것은 고난이고, 뒤의 것은 기쁨입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용기를 주소서. 아멘! (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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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February 03, 2009
*.109.61.1

예수의 메시아 됨을 신앙하는 기독교인이면서
늘 마음 속엔 '예수'로 인해 상식적인 이해가 깨지고
인간적인 안정감이 흔들립니다

모르고 믿으면서도 그것이 신앙의 과정이라 짐작하고
깨지고 흔들려도 그것이 신앙의 역동이라 위로받고
심지어는 무고한 피를 쫓으면서도 그 악의 통로에서 구원의 길을 발견하는 호사를 누리는
나 자신,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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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4, 2009
*.139.165.33

시그림 님,
제대로 사는가 하는 질문에
누가 대답을 줄 수 있으리요.
그 질문을 놓치지 않은 것이야말로
제대로 사는 삶에 가까이 가는
유일한 길인 것을....
profile

[레벨:7]시드니

February 03, 2009
*.167.253.3

왜 이렇게 마음이 답답할까요?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우리 자신과 인류역사는 절망적이고,
예수님이 피흘림의 역사 자체를 말소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우리가 "피흘림의 역사에 맞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무식하게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불가능한 줄 알면서 애만 쓰는 것이고,
이미 이루어진 일을 다시 성취하려고 하는 건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February 04, 2009
*.139.165.33

시드니 님,
절망은 오늘의 역사이고,
그 절망의 말소는 종말의 역사입니다.
종말의 역사가
오늘의 역사에 어떻게 침투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겠지요.
이런 신앙의 핵심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피흘림의 역사에 맞서게 되겠지요.
각각 다른 방식으로,
각각 다른 경지에서,
그러나 종말론적 희망을 안고서요.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
profile

[레벨:38]클라라

February 04, 2009
*.216.132.150

우리가 "피 흘림의 역사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그 역사가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믿어 질때만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생명존중, 생명에 대한 경외심에서가 아니라, 
'피 흘림' 그 자체에만 머물게 될 것 같아요.
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하셨는지.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목사님,
바로 '생명'이기 때문이군요.
생명이 신비,
말씀을 들으면서 더욱 새겨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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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이삭과리브가

February 04, 2009
*.19.22.61

산수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정답을 썼지요

어느날 토끼 가족들이 굴 속에 모였는데 어른 토끼가  얘들아 밖에 돌아 다닐때 사자를 조심해라 
그 놈들은 우릴 사정 없이 물어 죽이고 먹어치운단다 했죠 
그 말을 굴 밖에서 들은 사자가 그래 맞어 우린 그래도 배가 부르면 너희들 안잡아 먹지만 
가장 무서운 사람은 너희들 가죽을 벗겨 냉동실에 꽁꽁 얼려 쌓아놓고 먹어치운단다 
사람을 더 조심해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먹어야 할 양식이 얼마쯤일까요 
남은 연수에 필요한 돈은 얼마쯤일까요 
수학을 배운다고 하지만 산수조차 안되는 것이 내 삶인걸요 

어느날 샘을 해보았습니다 
자식을 공부시키는데 얼마 만큼의 돈이 필요할까 
내가 남은여생 살려면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까 
자녀를 결혼시키고 분가 시키는데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까 
산수가 잘안되네요 

그런데 모두가 잘 살아가죠 
계산은 안되었지만 결론적인 답은 
그낭 그렇게 다들 잘 살아가요 
이게 정답이고 이 답을 주신 분이 하나님 나의  아버지 시지요 

근데 산수를 못하다 보니 
냉장고 냉동고 김치냉장고 땅을 파고 묻고 그것도 모자라  곡간을 헐고 새로짓고 
그러다 많은 이웃에게 무죄한 피흘림을 자행하는것이 바로 내 산수 계산법이 아니었든지요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면서 다시한번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정답에 자신을 맡기고
작은 것일지라도 이웃을 향하여 눈을 돌리는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설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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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4, 2009
*.181.161.182

이삭과리브가 님,
안녕하세요.
우화 식의 글쓰기가 독특하시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좋은 사귐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6]상수리

February 04, 2009
*.99.193.27

가끔 착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제가 출석하는(가끔이지만요) 교회의 표어가 착한 목자, 착한 양이기도 합니다.
-- 개인적으로 이 표어가 너무 맘에 듭니다. 제가 착하지 않아서 일겁니다.--
그러면서 왜 착한사람은 무고한 피를 더 많이 흘리면서 살고 있나 하는 무력감에 젖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한 사람이 더 부유하고 더 많이 가지면 참 좋을텐데...그럼, 난 가난해도 좋겠다.. 이런 현실감 떨어진 생각도 해봅니다 -- 현실적이려면 그렇게 되도록 제가 먼저 실천을 해야겠죠 --
주님께서 무죄한 가운데 피흘림을 당하시고 부활의 놀라운 생명얻음을 목도한 그 옛날의 제자들처럼 저도 그 목도의 현실이 제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착한 사람들의 더 많은 무고한 피흘림이 더 놀라운 부활의 생명이 될 것을 알고 참 행복해질텐데 말입니다.
감히 진리에 대한 제 알지못함을 탓하지 못하고 주님께서 왜 불의를 참고 계시냐고 하소연해 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February 06, 2009
*.120.170.235

 

상수리 님,
중요한 문제의식입니다.
주님이 왜 이 세상의 불의를 여전히 용납하시는 걸까요?
이런 문제의식이
참된 기독교인을 만들어 간답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불의는 이미 극복되었다는 종말론적 희망으로
현실적 불의와 투쟁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겠지요.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면
어떤 시련과 모순 앞에서도 절망하는 법이 없답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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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 주현절 법과 자유 (마 5:13-20) [18] 2014-02-09 10560
524 주현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31) [16] 2014-02-02 18566
523 주현절 하나님 나라와 제자도 (마 4:12-23) [4] 2014-01-26 11420
522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182
521 주현절 세례 받은 하나님의 아들 (마 3:13-17) [4] 2014-01-13 16088
520 성탄절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6] 2014-01-05 9435
519 성탄절 시험받은 예수 그리스도 (히 2:10-18) [14] 2013-12-29 13665
518 성탄절 성육신의 신비 (요 1:1-14) [12] 2013-12-25 14042
517 대림절 임마누엘은 예수다 (사 7:10-16) [8] 2013-12-22 13475
516 대림절 메시아 질문 (마 11:2-11) [17] 2013-12-15 13000
515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롬 15:4-13) [10] 2013-12-08 13964
514 대림절 여호와의 빛 (사 2:1-5) [13] 2013-12-01 15272
513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352
512 창조절 하나님의 평화, 평화의 하나님 (빌 4:4-9) [15] 2013-11-18 10965
511 창조절 삶과 죽음의 경계 (눅 20:27-38 [8] 2013-11-10 11180
510 창조절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10] 2013-11-04 14668
509 창조절 하나님 앞에서 '옳음'의 문제 (눅 18:9-14) [8] 2013-10-27 13887
508 창조절 약속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 (렘 31:27-34) [10] 2013-10-21 14478
507 창조절 이방인 나병환자의 믿음 (눅 17:11-19) [10] 2013-10-13 24760
506 창조절 거룩한 부르심 앞에서 (딤후 1:1-14) [12] 2013-10-07 15443
505 창조절 불행한 부자 이야기 (눅 16:19-31) [10] 2013-09-29 21062
504 창조절 예레미야의 눈물 (렘 8:18-9:1) [8] 2013-09-22 13504
503 창조절 죄의 심연 (딤전 1:12-17) [6] 2013-09-15 11152
502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8972
501 창조절 헛되고 무익한 것 (렘 2:4-13) [16] 2013-09-01 13527
500 성령강림절 신앙과 위선 (눅 13:10-17) [6] 2013-08-25 14773
4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절망 (사 5:1-7) [1] 2013-08-18 11035
498 성령강림절 인자가 오리라! (눅 12:35-40) [5] 2013-08-12 13115
49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 3:1-11) [10] 2013-08-04 10636
49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8927
495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298
494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눅 10:25-37) [19] 2013-07-14 17927
493 성령강림절 나아만과 게하시 (왕하 5:1-14) [6] 2013-07-08 20259
492 성령강림절 제자의 삶과 하나님 나라 (눅 9:57-62) [6] 2013-06-30 16360
491 성령강림절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눅 8:26-39) [15] 2013-06-24 13590
490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17] 2013-06-16 13256
489 성령강림절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왕상 17:8-24) [7] 2013-06-09 16202
488 성령강림절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9] 2013-06-02 14016
487 성령강림절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8] 2013-05-26 14238
486 성령강림절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요 14:8-17) [4] 2013-05-20 15778
485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553
484 부활절 환상을 보는 사람들 (행 16:6-15) [12] 2013-05-06 15088
483 부활절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6) [10] 2013-04-28 16780
482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요 10:22-30) [8] 2013-04-22 13180
481 부활절 나를 따르라 (요 21:15-19) [10] 2013-04-14 20826
480 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14] 2013-04-07 11339
479 부활절 생명과 죽음 (눅 24:1-12) [8] [1] 2013-03-31 16211
478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8817
477 사순절 의식하지 못한 은총 (요 12:1-8) [10] [2] 2013-03-18 15499
476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2] [1] 2013-03-10 17944
475 사순절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 (사 55:1-9) [17] [3] 2013-03-03 26286
474 사순절 예수와 헤롯 (눅 13:31-35) [8] [1] 2013-02-24 15555
473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559
472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8] [2] 2013-02-10 12910
471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2013-02-03 17010
470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8941
469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2013-01-21 23800
468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21731
467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2013-01-07 17957
466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22305
465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2012-12-24 17029
464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2012-12-17 18100
463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21471
462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2012-12-02 17506
461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2011-11-21 18300
460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2011-11-13 23262
45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20102
458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2011-10-30 16905
457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2011-10-23 23093
456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2011-10-17 20146
455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2011-10-09 16828
454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2011-10-02 14713
453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732
452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762
451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640
450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2011-09-05 13353
449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2011-08-29 1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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