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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주현절 조회 수 18767 추천 수 3 2011.01.09 23: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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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태복음 3:13-17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 3:13-17, 주현절후 첫째 주일, 2011년 1월9일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 받은 사건은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뜻이겠지요. 마태복음의 보도는 나머지 두 복음서의 보도와 약간 차이가 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 전하는데 반해서 마태복음은 다른 이야기를 보충했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예수님이 요한과 대화를 나눈 장면이 그것입니다. 요한이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14절)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이 거론하지 않은 대목을 마태복음이 언급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세례 문제가 훗날 논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와 세례는 주로 도덕적인 죄에 집중됩니다. 도덕적인 죄는 물론이고, 원죄마저 없으신 분인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논란이 될 만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요한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답변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모든 의’를 이루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왜 의의 근거가 되는 걸까요? 의는 구원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사건은 인류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일어났던 신학논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처음 그리스도교가 시작될 때의 핵심은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그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인간과 똑같은 육신을 갖고 존재할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제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서 살았던 예수님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걸 가현설(docetism)이라고 합니다. 아주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런 가현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는 온전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라는(vere Deus, vere homo)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반은 신이고, 반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온전한 신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존재는 세상에 예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실증적으로 분석해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신비입니다. 이를 다른 신학 용어로 바꾸면 성육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역사에 나타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런 성육신에 대한 확증입니다. 성육신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이런 논리에서 볼 때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세례가 필연적이라는 본문의 진술은 옳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근본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과 상관없는 도그마가 아닙니다. 다음의 사실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의 몸은, 즉 사람의 삶 자체는 구원이 임해야 할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몸이 늙고 병들고 결국 썩겠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몸을 하찮게 여깁니다. 더나가서 자학적이기까지 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거꾸로 어떤 사람들은 몸의 욕망에만 집중합니다. 물질적인 토대가 확장된 세상에서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경향이 크게 나타납니다. 심리적으로 자아숭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몸과 똑같습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할 공간이기도 합니다. 성육신 신앙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자학에 떨어지거나 자아숭배에 치우치지 않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도록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힘을 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세례를 받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면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대화를 전한 뒤에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가 누구냐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똑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례 장면이 특이합니다. 세례는 요단강에서 베풀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몰려나왔을 겁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에 몇 가지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으며,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늘은 열리거나 닫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주 전체가 하늘입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시적인 표현입니다. 이런 장면을 명화로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낮은 구름이 깔렸다가 한쪽의 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이 보이고 빛이 내리비치는 그림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비둘기 자체가 성령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평화의 영인 성령이 함께 했다는 뜻이겠지요.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는 보도도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시적이고, 영적인 표현입니다.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이 거기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성서에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불편하게 생각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신화는 자연스러운 이야기 방식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 이야기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유치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그런 신화적 표상에 궁극적인 진리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가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더 정확하게는 외아들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교의 초석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그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 이어서 두 번째로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들을 둘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아들과 딸을 두지 않습니다. 신이 자식을 둔다는 것은 헬라 신화에나 나올만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문제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신앙의 신비로운 세계를 세상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성만찬을 생각해보십시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믿는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화체설, 기념설, 임재설 등으로 나뉩니다. 어떤 입장이든지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것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듯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단지 성인이나, 도덕선생이나, 인생 상담자로, 또는 마술사로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이면 아들이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어떻게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페르조나’, 즉 격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신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제한적인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대상으로 인식하고 기도를 드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시아’, 즉 본질에서는 동일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답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고, 4세기 교부들은 왜 예수님이 격으로는 하나님과 구별되지만 본질(우시아)로는 동일하다고 생각했을까요? 근거가 있어야 믿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닙니까.

     요즘 우리는 주현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금년은 3월6일 주일까지 9주간이나 계속됩니다. 주현절이 끝나면 사순절이 6주간 이어지고, 그 다음이 부활절입니다. 주현절 바로 앞은 성탄절이었습니다. 그 앞은 대림절이었습니다. 교회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내용을 차례대로 담고 있습니다. 주현절(epiphany)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성이 드러난 것을 지키는 절기입니다. 교회 전통에 따라서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한 것에 근거하기도 하고,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세례 사건에 근거하기도 합니다. 주현절이 말하는 핵심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육체적인 한계를 안고 살았던 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위의 질문을 다시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그냥 믿으면 되나요? 믿을만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증거가 있나요?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운명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은 그것 자체가 파루시아, 즉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났습니다. 치유와 축귀에 대한 복음서의 보도는 모두 이런 권능을 가리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죄인, 세리에 대한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출발부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근거해서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 그의 가르침, 그의 행위, 그의 운명 전체를 하나님과의 일치로 보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이런 신앙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운명이 곧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사실에 대한, 오늘 우리의 주제로 바꾸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이 부활의 빛에서 예수님의 공생활동은 전혀 새로운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마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근거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이 열리고 그 하늘로부터 이것에 대한 소리가 들렸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전해져오다가 공관복음서에 그대로 기록되었고, 오늘 우리가 읽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사실이 이해되지 않으시나요? 믿겨지지 않으시나요? 동의하기 어려운가요? 더 분명한 증거가 필요하신가요?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는 마지막 때 주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선택이 필요합니다. 저는 예수의 말씀, 행동, 운명에 하나님이 온전히 하나가 되셨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통찰과 그 신앙을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들과 똑같은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또 하나의 복음서인 요한복음이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오늘의 설교를 마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를 본 자는, 그를 아는 자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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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Jordan

January 10, 2011
*.200.198.111

아멘..아멘.. 이 이상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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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0, 2011
*.120.170.250

Jordan 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아멘으로 화답하신 거지요?

거기에 그리스도도의 운명이 달려 있겠지요.

종말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이 사실을 변증해나가야 합니다.

너무 무거운 짐이긴 하지만

기쁨과 희망으로 질 수 있는 짐이기에 다행입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에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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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January 11, 2011
*.109.153.8

기독교는 너무 어렵습니다

가장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존재마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기독교를 모르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살았으면 할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과 혼란을 겪고 있기도 합니다

그저 편안하게 목사님의 말씀을 읽다보면 새삼스런 신앙적 깨달음을 얻는것 같다가도

다시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어떤 맞추어지지 않는 퍼즐처럼 인식의 한계를 느낍니다

종말에 이를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겠지만 그전에 좀 쉽게 변증되어 지면 좋겠습니다

요즘엔 통 신앙적 고민없이 너무 세상살이에 몸을 맡기는 것 같은 1인의 푸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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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1, 2011
*.120.170.250

방랑자 님,

지금 영적으로 중요한 순간을 살고 있는 겁니다.

모순과 혼란을 겪고 있잖아요.

그거 없으면 곤란합니다.

기독교가 어렵다고 했지요?

좋은 조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삶은 쉬워요?

삶 자체가 어렵답니다.

그런 것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그냥 사는 게 좋으신가요?

빈 칸이 많은 퍼즐 처럼 인식의 한계를 느끼는 것도 좋은 조짐입니다.

그걸 사람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거든요.

좀 불안하지요?

그 불안을 힘들다고 포기하면 곤란합니다.

좋은 책을 좀더 꾸준히 읽어보세요.

그게 최선입니다.

그것과 더불어 교회 공동체 생활을 좀더 적극적으로 해보세요.

신앙의 근본을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영적인 친교를 실제로 나누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데

좋은 책읽기와 더불어 좋은 기회를 제공한답니다.

2011년 한 해, 힘을 내서 진도를 나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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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뿌리깊은

January 11, 2011
*.44.103.154

 

마음으로는 화답합니다.

헌데 어떤 질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듭니다.^^"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도, 그리고 지금의 이스라엘도, 더 나아가 서구 문화의 중심이었을 때 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그 '선택' 에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와는 많이 다른 (어쩌면 소외된 주변인) 극동 아시아에서 사는 우리가 어떻게 그 선택을 믿음으로 더 쉽게 가져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동시에 찾아옵니다.

 

예배에 참석합니다. 설교 및 여러 순서를 통해 '내게' 일어나는 경험(?)을 통해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인 이성은 여러가지 질문을 하며 혼란스럽게 할 때가 많습니다.

 

목사님처럼 판넨베르크의 도움을 더 받는다면 어느 정도 고민이 해결될까요?

 

이곳에 들려서 종종 글을 읽으며 길을 찾는 것이 어느덧 일상이 된 한 사람이

오늘은 조금 답답한 마음에 처음으로 댓글을 달아봅니다.^^

 

목사님~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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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1, 2011
*.120.170.250

뿌리 님, 안녕하세요?

질문이 드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아주 좋은 일이에요.

영혼이 살아 있다는 증거에요.

한국교인들은 거꾸로 생각합니다.

질문은 믿음이 없는 탓이라고 말이죠.

아마 질문과 의심을 혼동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이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단계까지 나갈 수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들도 힘들었는데,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 너무 힘든 게 아니냐 하는 질문이지요?

기독교 신앙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괜찮아요.

믿음은 억지로 강요될 수는 없는 거에요.

믿음이 강해져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좋아요.

그냥 있는 사실을 그대로 직시하면서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살펴보도록 하세요.

최소한 교회 공동체는 떠나지 말도록 하시고,

좋은 신앙서적을 읽는 습관도 버리지 마세요.

언젠가 답답한 마음이 풀어질 겁니다.

앞으로도 질문은 줄기차게 하세요.

교회 친구들과도 그런 문제로 대화를 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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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January 12, 2011
*.179.178.21

제가 알고 있는 한 형제가 있는데

그 친구는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나서 이야기 해 보니까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기독교 가르침에 대해서 아직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성경을 읽어보라고 했더니 고개는 끄덕거리더군요.

나중에 만나서 다시 물어봤더니 성경은 읽지 않고

신학서적만 파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것도 마커스 보그, 존도미닉 크로산 같은 저자들의 책을요.

그걸 읽어봐도 도무지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이런 형제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실증적으로 요구하는 사람에게

제가 해 줄 말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이렇게 질문을 남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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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2, 2011
*.120.170.250

오메가 님,

안녕하세요?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책만 읽은 친구가

설령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내버려두세요.

무관심 하라는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친구를 받아들이라는 뜻이에요.

친구를 설득할 생각도 필요도 없어요.

설득이 가능한 것도 아니구요.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복음에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계기를 주고 싶은 오메가 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노파심으로 한 말씀 드리면,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나 사명감은 내려놓는 게 좋을 겁니다.

그냥 오메가 님이 성령과 일치해서 살아가면

그것이 친구에게 영향을 끼칠 날이 오겠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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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anuary 13, 2011
*.255.183.133

오늘 설교 들으면서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현장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이 다 모이셨다고요.^^ 저는 목사님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항상 세 분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듣게 되는데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굳이 말씀 안하셔도 듣다 보면 그런 흐름에서 이해하게 되더라구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더 실감이 났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세 분 하나님의 '힘'이 느껴졌어요. 생명의 하나님으로서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몽땅 다 '생명력'으로 느껴졌어요. 우리가 왜 생명지향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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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3, 2011
*.120.170.250

라라 님이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벌써 신학적인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 있다는 증겁니다.

더구나 그 분은 힘으로 느꼈다니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네요.

앞으로 꾸준한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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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셀

January 13, 2011
*.210.107.30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댓글을 통한 목사님과 교우들의 대화에

더 많은 공감과 궁금증에 대한 해갈을 느끼게 됩니다.

 

아침에 판교수님 사도신경을 읽으며

왔는데,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아서

혼자서 즐거워 했습니다.

 

여러번 읽어야 그분의 글쓰기 방식을 겨우 따라 잡을 수 있으니

지루하고 저의 지성에 답답해 하기도 하지만,

엇듯 엇듯 스쳐지나가는 

해갈의 순간을 만나기도 합니다.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나 사명감은 내려놓는 게 좋을 겁니다.

그냥 성령과 일치해서 살아가면

그것이 친구에게 영향을 끼칠 날이 오겠지요"

 

이 말씀이 저에게 왠지 든든한 뭔가를 줍니다.

 

성령님과 일치하는 삶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외아들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님을 바라보며 믿고 의지하면서

현실의 삶을 묵묵히 걸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현실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이 

저의 믿음의 감정들을 여지없이 뭉개버리는

경우가 허다해도 말입니다.

 

저도 다비아의 글들을 통하여

현실을 다시 인식하게 되고

고대 기독교의 신앙뿌리로 부터

그 역사와 신앙의 논점들과

지금의 내 삶과 연결시켜보는

힘겨운 일들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갈 길은 아득하지만

소망을 품고 걷습니다.

 

목사님의 수 많은 글들

그리고  얼굴 모르는 수 많은 고수님들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님안에서 평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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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3, 2011
*.120.170.250

아셀 님은 지금 매우 건강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여정을 살아내고 있는 중입니다.

신앙의 경험이라는 것이

그렇게 언듯언듯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게 분명합니다.

안개 낀 숲속을 가다가 잠시 햇살을 보는 것처럼이요.

그런 과정을 지루해하지 않고 길을 가다보면

조금 더 잘 보이는 위치로 올라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겁니다.

이것이 단지 신앙만의 문제는 아니고

삶 자체의 문제에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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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January 13, 2011
*.135.199.13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기독교도 무의미해지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가능해지는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본래 본자도 없다는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만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다는 뜻일겁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그 아들로 계시된 하나님이시며,  그 아들을 통하여서 아버지를 본것일뿐.. 

저는 우리가 죽어서 다시 부활한다하여도 하나님을 만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을 다스리는것은 상징일뿐이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만나지거나, 확신되어지거나, 설명되어질수 없는분이시지요..

우리가  아는 유일한것은 그 아들일뿐입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타종교에 나타난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다른부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의때 볼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8:56)

저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아버지를 만난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만난것은 아들이었지요..

그래서 구약은 예수님에 대한 그림자요.. 예언이지요..

인간은 아버지를 만날수도 없고, 알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본것이 아버지를 본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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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3, 2011
*.120.170.250

웃음 님이 글을 재미 있게 쓰셨군요.

재미있는 것만이 아니라 옳게 쓰셨습니다.

내가 옳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거는 아니겠지만요.

다만 한 가지는 정리가 더 필요하네요.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을 다스리는것은 상징일뿐이지요"라고했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상징이 아니라 능력이고, 현실입니다.

부활의세계에서도 아들 예수만 만나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했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생명형식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부활의 생명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뤄집니다.

이건 정말 우리가 말로 설명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는 어려운 문제인데요.

그냥 간단히 줄여서

위에 쓴 대글로만 보면

삼위일체의 중심이 흔들린답니다.

왜 그런지는, 음,

천천히 더 생각해보세요. 

돌아오는 주일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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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January 14, 2011
*.155.235.162

목사님 돌아오는 주일에는 못뵐수도 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어머님집엘 가야하거든요,,,

저는 하나님께서 형상도 없고, 인간이 느낄수 있는 어떠한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할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수도 있다고 생각하지요..

인간이 이해하는 존재의 형태로 계시는분이 아니라는것이지요.

하나님은 있고, 없고로 표현될수 있는 그런 존재방식으로 계시는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실수 있는겁니까? 만약 보좌가 존재하고 그곳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시다면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인간과 같아져버리는것 아닙니까?  또 공간을 차지하는 형태가 되어버리는데..

저는 그래서 이것을 상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만 보좌에 앉아 계시는것은 지위를 이야기하고 다스리는것은

목사님의 말씀대로 능력이고 현실임은 인정합니다.

부활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뵐수 없다는

뜻이지요.. 천국가면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계시고, 인간들이 그 앞에서 찬양하는 그런 형태로 계시는분이 아니라는겁니다.

하지만 목사님 말씀대로 지금의 생명형식으로가 아니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이루어 지는것은

인정합니다.  제 표현이 다시 수정하자면. 지금의 존재방식으로 하나님을 뵐수 있는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알수 있는 하나님 확인할수 있는 하나님은 아들이지요. 아버지는 그 아들만을 통해서 알수 있지요.

삼위일체의 중심이 흔들리는 문제는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날씨가 춥네요...^^  항상 건강도 적극적으로 관리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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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도도아빠

January 14, 2011
*.115.223.46

저의 신학적 수준이, 수준을 말할 처지가 아닌지라, 댓글 붙이는 게 조심스럽네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아주 많이 들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깊이 생각해 본 적도 거의 없고요.

또 저 역시 기도할 때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며 매달립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아들'이라고 했을 때 인간적인 '부자' 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냥 어떤 상징이랄까, 그런 것인가요?

삼위일체까지는 생각하기 너무 힘드네요.

 

설교 말씀 잘 듣고 이런 질문한다고 혹시 맥빠져하실까 죄송합니다.

 

며칠 전부터 조철수 박사님의 『예수 평전』을 읽고 있습니다. 몇 번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에 나다니엘이 빌립과 얘기하고, 다시 예수님을 만나는 대목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 특히 정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더군요.

 

얼마 전부터 하나님에 대한 제 신앙을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을,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적어 정리할 수는 없지만, 중심을 놓치지 않으며 계속 생각하고 질문하려 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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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4, 2011
*.120.170.250

도도아빠 님은

꾸준히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시는군요.

자기성찰이 분명하다는 말이기도 하고,

세계를 정직하게 직면하려는 노력이기도 하구요.

그런 것을 빼면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길은 별로 없습니다.

문제는 근본을 우리 손에 쥘 수 없다는 데에 있어요.

왜냐하면 근본은 우리 손을 넘어서는 세계이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꾸준히 그 길을 가는 수밖에요.

그게 구도(求道)겠지요.

그것이 구원의 과정이겠지요.

희망을 아는 자만이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가게 될 겁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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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르네상스

January 15, 2011
*.33.96.231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겠지만)

예수님을 위대한 사상가, 도덕교사, 혁명가 등으로 생각하는데

왜 굳이 예수님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을까, 하나님이 왜 굳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세상 속에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을까,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굳이 그런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하셨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셨다면 교회 역사와 세계 역사 속에서

"예수가 인간이냐? 신이냐?"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냐? 신의 아들이냐?"

"예수는 현자인가, 사상가인가, 종교 교주인가, 도덕선생인가" 하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수많은 피도 흘리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땐

예수도 석가모니나 무함마드나 공자, 노자 같은 사람들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입장에선 "예수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곧 하나님이다"

"예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격에 해당하시는 분이시다"라는 등의 말들이

허무맹랑하고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면서 완전한 신이다, 또는 완전한 하나님이다 하는 것은

물론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그런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굳이 일일이 납득시킬

사명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 문제이지요.

 

어쨌든 역사에, 그리고 성경에 예수라는 분이 안 계시고

그냥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이사야, 베드로, 요한, 야고보, 바울

등만 있으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구속의 역사를 진행하셨더라면

"기독교는 터무니 없는 교리를 주장하는 허무맹랑한 종교"라는 오해와 공격을

받지 않았지 않는가,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참 이해가 안된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죠.

 

어쨌든 이 문제는 참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어찌 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예수가 누구인가?"하는 문제는 세상의 종말까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논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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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2, 2011
*.120.170.250

김종원 님,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잘 짚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구원론은

세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요소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좀 불편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 신앙을 도덕적 실천이나 기복적 통로로 전하고 있습니다.

간혹 연세중앙교회 윤 아무개 목사처럼

우격다짐으로 예수를 전하는 이들도 있긴 하지요.

우리는 케리그마를 진리의 차원에서 논쟁하는 일에

물러서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도 안 되구요.

2천년 전 한 유대인 젊은이가 짊어진 운명이

무슨 근거로 온 인류와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 되었을까요?

여기에 우리는 답해야 합니다.

답할 수 있습니다. 

종말까지! 

profile

[레벨:5]낙타

January 16, 2011
*.51.174.217

오늘 고등부 공과 분문이 바다(호수)를 잠잠케 하는 내용이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연을 다스리는 것을 본 제자들의 반응은 "과연 이분이 어떤 분이시길래.."였습니다. 

먼 훗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답을 내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그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씀하시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비밀스러우며 성령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목사님의 설교에서 성령님의 일하심이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등대처럼 늘 나를 비추진 않지만 한바퀴도는 360도에서 나를 향해 반짝이는 빛에 촛점을 맞추고 살아야겠습니다.

목사님 자주 쓰시는 ... 가끔은 안개로 인해 그 빛이 희미할지라도요^^

 

존재의 하나님, 실현의 예수님, 수습?의 성령님ㅎㅎ (완전하시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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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2, 2011
*.120.170.250

낙타 님,

삼위일체의 낙타 버전이 나왔군요. ㅎㅎ

아이디어가 참신하네요.

좋은 교회 선생님이시네요.

요즘은 추워서 자전거가 잘 팔지 않겠지만

그래도 힘내고 잘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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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행복한빛들

January 28, 2011
*.20.210.49

안녕하세요.. 정목사님..

설교비평으로 목사님을 접하고 많은 도움을 얻었고

이후로도 홈페이지에서 '은혜'를 받고 있는 1인입니다.

 

그동안 눈팅만 하다가 궁금한 점이 있어 이렇게 질문을 남깁니다.

이번 설교중에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일종의 시적이고 영적인 '신화적 표상'으로

말씀하셨는데 이와 관련해서 신약성경에 나온 다른 초월적인 일들도 신화적 표상으로

여기기에는 제 자신에게 괴리가 있음을 느낍니다. 다른 것은 빼고라도 '예수님의 부활,승천'과 '마리아 동정녀탄생'에서요..

괴리는, 정말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기둥인데 그것을 신화적 표상이고, 그것에서 말하고자 하는 고대인들의 하나님 체험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기에는 신앙양심에 걸리는 듯 합니다. 아직 깨달음이 부족하다라고 생각하지만요..

암튼, 목사님의 무게감있고 (조직)신학적 깊이가 드리워진 성서해석은 저에게 언제나 새로운 힘을 가져다 줍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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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8, 2011
*.120.170.250

행복한빛들 님,

안녕하세요?

성서 기자들은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표현할 때는 당시의 세계관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는 게헨나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땅 속의 악한 세계를 가리킵니다.

이런 단어는 우주를 하늘과 땅과 지하로 본

고대 우주관에 따른 겁니다.

노아홍수 사건을 설명할 때도

하늘의 창문이 열리거나 닫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늘에 창문이 있는 건 아니지요?

동정녀 문제는 다비아 어딘가를 찾아보면 자세한 설명이 나올 겁니다.

사도신경 해설을 보면 되겠네요.

예수님의 부활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기독교가 붕괴됩니다.

동정녀에 대해서는 마태와 누가만 말하지만

부활은 네 복음서가 다 말하고,

바울도 동정녀는 말하지 않지만 부활은 신앙의 중심으로 말합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지만

그것에 대한 묘사는 신화적인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이 신화적인 것이고

어느 부분이 역사적인, 사실적인 것인지를 나누기는 쉽지 않습니다.

학자들의 많은 연구를 했고, 지금도 연구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연구되는지 궁금하지요?

최첨단 물리학의 영역이 신비롭듯이

신학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승천은 부활에 대한 다른 표현방식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실제로 공간적인 차원에서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승천을 이야기했을까요?

이런 문제는 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관심이 있으면 좋은 책을 읽으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안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으면 안심하세요.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인지를 알고 믿을 수 있다면,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다면 충분합니다.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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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한밀

February 25, 2011
*.255.229.218

목사님,

 

"예수님의 부활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기독교가 붕괴됩니다."

 

어떤 의미에서의 부활을 말씀하시는건지요

죽었다 살아났다는 말씀이신지요...?

부활이 없으면 진정 기독교는 붕괴되는건지요.

 

저는 가끔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만은

기독교가 가능하지않은지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분이

하나님신앙으로 사시다 돌아가셨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수 있을것 같은데....

 

최근에야 목사님 설교를 접해서

이제야 생각(고민)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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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8816
477 사순절 의식하지 못한 은총 (요 12:1-8) [10] [2] 2013-03-18 15498
476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2] [1] 2013-03-10 17944
475 사순절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 (사 55:1-9) [17] [3] 2013-03-03 26284
474 사순절 예수와 헤롯 (눅 13:31-35) [8] [1] 2013-02-24 15554
473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559
472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8] [2] 2013-02-10 12910
471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2013-02-03 17009
470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8939
469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2013-01-21 23800
468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21730
467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2013-01-07 17957
466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22303
465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2012-12-24 17025
464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2012-12-17 18097
463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21463
462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2012-12-02 17501
461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2011-11-21 18299
460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2011-11-13 23260
45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20102
458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2011-10-30 16904
457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2011-10-23 23091
456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2011-10-17 20145
455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2011-10-09 16827
454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2011-10-02 14713
453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732
452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762
451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640
450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2011-09-05 13352
449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2011-08-29 1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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