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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지요?”

사순절 조회 수 18023 추천 수 0 2011.04.18 21: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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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태복음 26:14-25 

“나는 아니지요?”

마태복음 26:14-25, 사순절 마지막 주일, 2011년 4월17일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고난주일, 또는 종려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종려주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왕을 환영하는 듯한 멋진 장면입니다만 실제로는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에 처형당합니다. 33살의 나이로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대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간 것일까요? 제자들은 왜 스승의 처형을 막지 못한 것일까요?

     복음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다가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판 이유는 복음서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유추는 가능합니다. 말 그대로 돈에 욕심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은 30을 받고 스승을 파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인격이 파탄된 인물입니다. 유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맡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임을 받았고, 열두 제자들 중에서 학문이 가장 깊었던 사람입니다. 메시아 관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유다는 무력혁명도 불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만을 선포했습니다. 이런 차이를 결국 극복하지 못해서 배신했다는 말도 가능합니다. 복음서를 사실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체포 장면에서 유다의 역할은 미미했습니다. 제사장의 사병(私兵)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는 것뿐이었습니다. 유다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사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유다의 배신에는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따라가기 힘든 어떤 곡절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체포에 관련된 미묘한 사태를 이해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다음입니다. 배신은 유다만의 문제가 아니라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됩니다. 마 26:31절 이하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시고, 대표자로 베드로를 지목합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유다와 베드로의 행동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베드로는 자기 행동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지만 유다는 자살로 끝냈다는 차이는 그렇게 결정적인 게 아닙니다. 오히려 유다가 자기잘못에 대해서 더 엄격했는지도 모릅니다. 같은 자리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부인한 베드로의 잘못이 더 엄중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베드로에게는 너그럽고 유다에게는 인색합니다. 복음서도 그런 입장을 견지합니다. 거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어떤 상황이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가룟 유다에게만 모든 책임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당시 배신에서 자유롭지 못한 제자들을 대표할 뿐입니다. 그 내막이 어떤지를 알려면 본문을 꼼꼼히 살펴야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겠다는 계략을 꾸미고 돌아온 뒤에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먹게 되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모든 유대인들이 지키는 의식입니다. 양을 잡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이런 특별한 먹을거리는 출애굽 사건에 기원합니다. 유월절(逾越, pass over)은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죽음의 천사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유대인의 집만은 비켜갔습니다. 민족 멸절의 위기를 넘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양을 잡고, 그것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기억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먹으면서 자신의 운명이 유월절 양과 같다는 생각을 하셨겠지요.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절) 제자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근심에 싸였습니다. 각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22절) 예수님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이 말씀을 실감나게 들었을 겁니다.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다는 말은 한 상에 둘러앉은 가족이나 형제, 친구처럼 아주 가깝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이어서 예수님은 스승을 판 이가 감당해야 할 운명의 짐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징벌을 없습니다.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되니까요. 초기 그리스도교에는 이에 관한 신학적인 논란이 벌어졌을 겁니다. 지금 우리도 생각해야만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면 가룟 유다의 행위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것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만약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인류 구원이 불가능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역사를 원인과 결과라는 실증적인 관점으로만 보는 견해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그런 견해와 논란을 한 마디로 잠재웁니다. 스승을 판 제자는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운명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가룟 유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자신의 음모가 들통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까요? 아니면 이 위기를 모면할 궁리를 짜느라 정신이 없었을까요? 그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겁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25절) 이미 앞에서 다른 제자들이 한 말입니다. 유다도 말했을 텐데, 양심이 찔린 탓으로 다시 확인하고 싶었겠지요. 도둑이 제 발 저려한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라고,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다고, 스승을 배신하는 철면피가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은 배신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모두 도망갔습니다. 일부 여자들만 빼고 모두 그랬습니다.

     “나는 아니지요?”라는 제자들의 발언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이 이런 불안을 안고 신앙생활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30대 초반의 한 유대인 남자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추종자들을 조직하거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부처나 공자처럼 천수를 누리면서 많은 가르침을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남아 있는 것은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었던 예수님을 생명의 실체로 만났다는 일부 제자들의 경험뿐입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주변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남아 있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떠났을 겁니다. 그냥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배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아직 떠나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기회만 오면 떠날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받을 정신적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나는 아니지요?”라는 발언에는 배교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불안감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배신과 배교를 믿음이 없는 탓이라고 나무라고 싶은 분들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그들과 똑같이 배교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를 등한히 여긴다거나 떠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신앙생활에 열정을 보이면서도 내면적으로 예수님을 은 30에 팔 수 있습니다. 이중적으로 얼마든지 처신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나는 아니지요?” 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합니다. 물론 일부러 이렇게 위선적으로 신앙생활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신앙으로 끌려들어갑니다. 무엇이 예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주로 그리스도교가 교권으로 자리 잡을 때 일어납니다. 교회가 말씀과 영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교회권력에 사로잡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와 20세기 초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던 정교회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는 교권에 찌든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한국교회도 이런 증상을 보인다고 걱정을 합니다. 기독교계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속 사회에까지 크게 불거진 사건도 적지 않습니다. 부도덕성, 분열, 개교회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개교회 안에서도 싸우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주먹다짐을 하기까지 합니다. 한기총의 대표회장 선거에서 거액의 돈봉투가 오갔습니다. 감리교회는 감독회장 선거 후유증으로 수년 동안 사법 재판을 받았고, 판결이 났는데도 여전히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한국교회에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런 행태는 본문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제자들의 배교와 행간에 들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배교와 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설교를 듣고 이제 정신 차려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이구나, 바른 믿음을 지키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제자들처럼 유치하게 살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바른 믿음을 지켜나가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유다의 배신으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배신입니다. 예수님의 처형에는 유다만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과 민중들, 그리고 로마 제국이 모두 연루되었습니다. 그들은 인류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살해자가 곧 인간입니다. 니체는 1882년에 쓴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제3권 ‘미친 사람’이라는 제목이 붙은 단락에서 “신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미친 사람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이것을 너희들에게 말하려고 한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니체의 그리스도교비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기 위해서 음모를 꾸민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현실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그렇게 거창하고 고상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허투루 읽는 겁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그리스도교 영성 안으로 들어가기는 힘들겠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실상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가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나를 팔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각자 “나는 아니지요?” 하고 대꾸한 제자들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인류의 비겁하고 영악하고 비루한 배신과 변명의 역사를 헤치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분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구원 신비를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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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삐쭉이

April 19, 2011
*.182.131.202

역사와 인류와 자신에 대한 부정과 각성이 그분의 세계로 가까이 가는 길인것 같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반전을 위해서는 바닥이 필요하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그러한 세상의 지배를 넘어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느끼기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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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9, 2011
*.120.170.250

삐쭉이 님,

안녕하세요.

이 세상에 대한 부정과 각성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은 부정을 위한 부정을 아니고,

더 큰 긍정을 위한 부정입니다.

삐쭉이 님도 그걸 전제하고 대글을 쓰셨을 거구요.

저는 세상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잘못된 전이해를 뛰어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에요.

수행이라구요?

나는 그게 참 부족한 사람이라서

드릴 말씀이 별로 없어요.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공부'에요.

단순히 책을 많이 읽자는 게 아니라

삶을 공부하는 거지요.

다양한 공부법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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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April 19, 2011
*.23.36.248

저는 12제자 중 가룟 유다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고,

자살을 선택한 비극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을 고민하고 맺은 저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 두 명과 다른 두 명이 기록한 것이기에

그들의 관점에서 유다를, 유다의 행동을 보고 판단한 것을 썼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자 두 명은  몇 년간이나 동고동락하며 서로를 의지했던 사이임에도

유다의 생각, 유다의 고민, 유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거나 함께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재정을 맡기셨다는 것은 목사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그만큼 유다를 신뢰했다는 것이고, 유다가 돈 관리를 철저하고 투명하게 했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뢰한 만큼.. 그리고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던 만큼 유다와 예수님은 단 둘이 얘기할 시간이 많았을 것입니다.

유다는 다른 그 어떤 제자보다도 예수님을 이해하고 알았을 것이구요.

그러한 유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유대인에게 넘길 것을 부탁했고,

유다는 그 후에 예수님께서 어떠한 고통을 당하실지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도저히 마음에 내키지도 않고, 결코 할 수도 없는 일, 스승을 파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간곡한 부탁,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꼭 그래야만 한다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겠지요.

이러한 사실을 모른 복음서 저자들은 스승을 팔아 제 잇속을 챙긴 아주 나쁜 놈 유다에 대해

사탄이 들어가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다는 식의 비판을 할 뿐만 아니라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배신자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그들의 입장에선 당연했겠지요)

그들의 관점에서 기록할 수 밖에 없었고

우린 그들이 기록한 것으로 유다를 나쁘게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번째에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

넘길 사람도 알고 계셨고,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 말 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해놓으신 이 사실은 외면한체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생각에 차 있었고,

훗날 가룟 유다에 대해 엄청난 악평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다에 대해 하셨다는 말씀을(이건 들은대로 기록했을 것이기에) 살펴보면

유다를 애처롭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겨우 몇 마디 밖에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유다에 대한 안타까움과 유다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표현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판 유다가 겪게 될 고초와 고통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  " 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아무도 예수님께서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몰랐지만

유다는 무엇을 해야할 지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속히 하라고 명하셨구요.

유다는 그 일을 행했고,

후에 자신이 한 일로 인해 예수님께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보며

자신을 자책하고 제자들 중 가장 슬프게 울었을 것입니다.

울다 울다 너무 죄송해서 결국 예수님을 따라 자신도 목숨을 끊지요.

물론 스승을 판 돈은 고스란히 반납하고서...

 

혹자는 유다에게서 사탄이 들아갔다가 나가면서 유다가 정신을 차렸다고 하지만

이는 사탄의 속성을 생각치 않고 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사탄은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눈을 가려버리고

자신을 자책하게 하고 자책감에 결국 자살을 하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겠지요.

사탄이 들어갔고 나갔고는 오직 다른 제자들의 관점에서 유다를 바라보고 적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유다는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예수님을 팔게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너무도 불쌍한 사람이지

결코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 넘긴 파렴치한이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시키신 일을 했을 뿐인고,

그 일을 행하면서 엄청난 고뇌가 있었고 너무나 마음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로 인해 벌어진 그 후의 상황은 더욱 더 유다를 패닉 상태로 몰고 갔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실 때 유다만큼 애통해 한 제자가 누가 있었을까요.

이러한 유다의 마음은 전혀 헤아려보지도 않고

유다를 저주하고 당연히 지옥에 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안타까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는 가룟 유다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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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9, 2011
*.120.170.250

눈사람 님의 유다 해석이 재미 있군요.

소설가의 상상력을 발휘하셨네요. ㅎㅎ

나중에 저 세상에 가서 유다를 만나보면

모든 게 훤히 드러나겠지요.

나는 유다를 고뇌를 십분 이해하지만

그의 행동을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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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닥터케이

April 20, 2011
*.24.55.53

눈사람님의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한 해석(혹은 추정)은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에 나오는 내용과 완전히 일치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 참에 소설가로 전업을

한번 고려해보시는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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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April 20, 2011
*.23.36.248

헉..

그런가요?

저 말고도 이런 생각을 가졌던, 혹은 가진 사람들이 있을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대문호일줄이야^^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역쉬 닥터 케이님의 폭 넓은 책읽기와 박식하심은 대단하십니다.

 

제 아버지 일대기에 대한 것을 글로 쓰려다가 도저히 글 재주가 없어 포기했습니다.^^

제 아버지 일대기는 소설 태백산맥과 거의 일치하거든요.

 

가룟 유다에 대한 생각은 제 생각일 뿐 .

 

정목사님 말씀대로 아주 아주 나중에야 알 수 있거나, 아니면 영원히 모를 수도 있겠지요.

 

전 단지 유다가 불쌍하게 생각되고,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다보니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구요.

 

다른 건 몰라도 이 생각은 아마 예수님을 다시 뵈올 때까지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성경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으로 접근을 하는데

 

이 부분은 거의 이단이라 몰려도 이상치 않을만큼 튀어서

 

이런 말 어디에 가서 함부로 못하지요. 오직 폭 넓으신 다비안들께만 할 수 있다는^^

 

제가 이단 아닌 건 다 아시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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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April 20, 2011
*.144.233.29

유다는 예수께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왔는지 압니다. 당신은 바르벨로의 불멸의 세계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보내신 분의 이름을 발음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

셋파문헌에서는 바르벨로를 만물의 신성한 어머니이며, 종종 무한하신 분인 아버지의 선사색으로 전해집니다.   유다의 고백은 예수께서 신의 세계에서 왔으며 신의 아들이라는 고백인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다의 신존재의식이 남다른것을 높이 여기셔서 유다에게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비밀을 전해줍니다.  유다가 예수를 팔게된 이유의 발생을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영지주의문서입니다.   눈사람님은 유다복음의 내용과 상당히 비슷한 주장이며, 복음서의 내용에서 이해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초대교회영지주의자들의 해석과 비슷합니다.

 

저도 유다를 사랑합니다.  그가 비밀을 알아서 예수와 밀약을 맺고 그를 팔았던지,  정치적으로 메시아임을 나타내려고 의도적으로 예수를 그러한 자리로 밀어넣으려했던지간에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던것은 확실합니다.  제자들이 그를 싫어하였던 이유도 궁금합니다.

 

물론 외경도 재미있고, 위경들도 재미있습니다.   엣세네파문서들도 재미있고,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성경을 읽고 상상하며, 여러가지 추측도 해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경계를 지키는것도 중요합니다.

 

참고서적   예수와 유다의 밀약 (유다복음)  로돌프 카세르 마빈 마이어...   해설 바트D 에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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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April 20, 2011
*.23.36.248

그렇군요...

웃음님으로부터 많이 배웁니다.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좀 더 깊은 생각을 해보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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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April 20, 2011
*.144.233.29

별말씀을요...

제 글의 특성이 있죠?  저도 인사도 하고 부드럽게 글을 써야하는데 그냥 저 하고 싶은말만 하고 마니 오해의 소지도 있을법 한데도 눈사람님이 좋게 말해주시는군요..  다른뜻은 아니고요.. 예수님 오실때까지 바뀌지 않을 생각을 갖고 계시는것이 저에게는 부담스럽군요...ㅠㅠ

 

오늘 날씨 참 좋습니다.

 

봄처녀가 넘어오실 제위에 올라가서 봄바람 맞으며, 책을 읽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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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April 19, 2011
*.115.209.41

목사님, 얼마전에 프랑스의 종교사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지은 <신이된 예수> 라는 책을 읽었는데

책에서 가룟유다는  당시에 로마의 억압에 극렬하게 저항한 극단주의 열심 당원이었으며

예수가 로마권력에 맞서서 정치적인 행동은 아니하며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실망스런 선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결국 예수를 배신해 버리게 되는 사태에까지 갔다고 

여러 종교학자들은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오늘날 우리도 가룟유다처럼 예수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고

예수가 가르치고저한 하나님나라를 다소 엉뚱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거기에는 한국교회 신학의 부재, 교회의 세속화, 맘모니즘에 물든 교회의 잘못된 가치관등이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의 말을 잘 알아듣는 학생이 되어야 할텐데요...

한국교회의 현실이 어둡게보이는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히 대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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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9, 2011
*.120.170.250

별달 님,

오늘 한국교회의 실상은 거론하기조차 민망한 게 많지요.

어쩌다가 일어나는 실수가 아니가

구조적이고, 내재적인, 그래서 자체 정화가 불가능한 상태가 아닐는지요.

주님의 오시기를 기도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언제나 '남은자'는 있으니 기다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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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April 19, 2011
*.119.241.105

과거나 현재도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식하면서 말씀을 대한다는 것이 쉽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모험이 아니면 힘들것인데요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척 하지만 순간순간 사실을 왜곡하면서 그것이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배신이란 말씀에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가롯유다도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고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충동에 휩싸였는지 모릅니다.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야 자기 눈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우리 역시도 순간순간 배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기복적으로 삶을 보고 내위주로 말씀을 해석하는 우를 범하겠죠. 가롯유다를 나자신으로 봐도 이상이 없을 만큼요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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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9, 2011
*.120.170.250

삼송 님,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특히 역사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거의 '미션 임파시블'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도 은총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기가 힘들 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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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pril 19, 2011
*.239.93.193

가롯 유다는 악한 인간의 대표인가.
그가 대표이면 나머지는 대표와 다르지 않은 악한 인간인 것이다.

마음약한 제자, 비겁한 제자 여러번 봅니다. 때로는 제자들 조차
표적을 구하는 인간들 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표적 행하심을 확인하려 함을 보았습니다.

악한 12가지 죄로 염색된 그 죄성이 누구에게나 다 색으로 들어난다.

난 하나님을 알던 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에 놀랐고
그 대단한 피조물인 내가 참으로 허망하게 악의 힘앞에 때마다 조종 당하고 있다.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그 악에서 구원하신 것이란 뜻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걸 지금도 느낀다.
악을 떠날 때 그간 내가 빌렸던 악의 빚을 갚느라 온 몸에 진이 빠진다.
그러한 댓가를 지불하고 내가 지쳐 있을 때 마다 조금씩 예수님께 가까이 감을 알게 된다.
달랑 차비 내고 시내 버스 타고 것과 같은 쉬운일이 아니다.

말씀은 쉬워서 귀에 들어오고 들어온 말씀은 가슴을 크게 숨쉬게하고
나를 새롭게 하지만 들은 것에 대한 책임감이 무게를 더한다.

하지만 말씀이 나를 무겁게 하더라도 그런 압박의 무게가 나를 이 세상에서 빨리 달려가지 못하게하는
사슬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 사슬이 영생의 길이요, 나를 지키는 주님의 손길이라 믿고 따르옵니다.

목사님 보내주신 책 오늘 받았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목사님도 너무 많은 일에 건강이 약해지시는건 아닌지요.
시간 내셔서 정기검진 꼭 받기 바랍니다.
저도 얼마전 검진에서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넘치는 일들이 곧 병으로 이어 질수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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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9,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삶이 그렇듯이

신앙도 우리가 우주의 무게로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교회생활 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죠.

적당하게 봉사하면 칭찬도 받고

나름으로 종교적인 위안도 되구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직면한다는 것은

그게 아닌 거지요.

대개의 그리스도인은 그 무게를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값싼 은혜에 머물러 있는 거겠지요.

제 건강을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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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流水不爭先

April 20, 2011
*.173.40.132

목사님 안녕하시죠

늘상 감사드립니다.

 

나는 아니지요 라는 말씀을 계속 되뇌이다 보니

너만 그래 라는 답변이 들려 오는 군요

 

십자가 사건을 묵상할수록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이 더욱 가슴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을 배반 할 수 밖에 없는 나를 왜 사랑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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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0, 2011
*.120.170.250

thinkbible 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말이 안 되는 논리입니다.

우리 각자 살아가는 자리에서

십자가와 하나님의 사랑을 말과 삶으로 변증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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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April 20, 2011
*.157.0.18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가 걸어간 그 길이 구원의 길임" 을 진정으로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지요... 지금 한국 기독교의 현실도 그러하거니와, 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 "배신자" 라는 말씀을 하셔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 합니다...

 

어제 기독교 방송에서 쌍용자동차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치유를 위해서 홀로 묵묵히 일하시는 정혜신 박사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종교적 소수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의 병역 거부에 함께 동참하기 위해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처한 오태양 선생님 생각도 났구요...

 

교회 밖 세상에는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이 드문 드문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는 가룟 유다들이 득실거리구요...

 

저 또한 가룟 유다가 아니랄 수가 없을 듯 합니다...

 

예수 팔아 먹은 죄책감에 자살한 그 가룟 유다의 양심 정도는 따라갈 수 있을까요?

 

강원도의 모 씨는 어떤 정치적 영달과 명예를 위해서 하루 아침에 자신의 신념 모조리 리모델링 해버리고는 아주 행복한 얼굴로 선거에 나섰더군요... 그 모습 속에서 자살하기 전 가룟 유다를 보았습니다...

 

차라리 가룟 유다처럼 자살이라도 하면 양심 있는 겁니다... (엔도 슈샤쿠는 자신의 책에서 가룟 유다는 구원 받았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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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0, 2011
*.120.170.250

첫날처럼 님,

잘 지내지요?

벌써 부활절이 다가옵니다.

그동안 환자분들을 주님 대하듯 정성으로 치료하셨지요?

자신을 역사의 빛에서 늘 성찰하고 있는 첫날처럼 님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소중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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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April 21, 2011
*.23.36.248

영원히 바뀔 것 같지 않던 생각이

하루 사이에 바뀌네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용감한 건지 만용을 부린건지^^

 

제가 좀 좌충우돌합니다.

다비안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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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7]paul

May 02, 2011
*.161.0.195

눈사람님 안녕하시지요?

제가 좀 느려서 이렇게 늦게 뒷북 (?) 댓글을 답니다.

눈사람님의 믿음 항상 부러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글과 지금의 댓글이 좀 앞뒤가 안맞아 아마 눈사람님께서 이미 아시면서 단지 재미로 쓰신 글이라 생각하면서 눈사람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또한 저의 생각이 옳은지 확인하려는 마음에 댓글을 답니다.

위에서 눈사람님께서 또 웃음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눈사람님의 첫 댓글은 다분히 소설적이고 영지주의적인것 같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성경은 역사서도 과학서도 아닌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영적 깨달음을 주시려고 저희에게 주신 말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것 같습니다. 성경에 무슨 초늘력 파워가 있어서 레에저 빔을 쏘아 드라큐라를 퇴치하는 것도 아니고 정확히 몇년 몇월 몇일에 무슨 일이 있었다하고 모든 역사서와 일치 되게 쓰인 글도 아니고 과학적 논리적으로 분자를 어떻게 배합하여 어느 정도의 시간하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쓰신 글도 아닌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유다의 이야기는 정목사님 말씀처럼 저희가 예수님을 판 죄인임을 알고 또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유다보다 못한 죄인임에도 예수님의 보혈로만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판 유다는 (바로 저 자신일지 모르지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죄인이죠. 성경은 단지 그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유다가 어떻게 변절했는지 아니면 정말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건지 그 자세한 내용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고 그 것 또한 주님의 뜻인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고 주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마음대로 셩경에 없는 이야기를 편리를 위해서 또는 재미를 위해서 가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눈사람님께서 물론 이미 저보다 더 잘 아셨겠지만 그냥 제가 옳게 성경을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댓들 달았습니다. 부디 눈사람님의 좋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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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jeuow

April 23, 2011
*.90.84.176

목사님 안녕하세요^^

절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작년겨울쯤.. 서울샘터교회에 다녔던 김보람이라고하는 여학생입니다..

CCC했었다는...^^;;

그동안 아빠교회다니고, 졸업전시회때문에 이런저런 핑계로 교회도 못나가고..

지금은 미국에있는 회사에 다니고있습니다.

목사님 너무 뵙고싶어요 ^-^ 가끔 말씀이 고프고.. 진정한 설교가 고플때 여기와서 배를 채우지만.

사실. 영혼이 너무많이 말라있습니다..

입에맞는 설교? 교회? 를 찾기가 너무어렵고..

심지어 어떤목사님들 설교를 들으면.. 다들웃고있는중에 눈물이 올라올때도 많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을통해..목사님 저서 책들을 통해 달래고는 있지만..

사실 교회생활을 어떻게 해나가야할지.. 막막하네요.

그래서 더..시간을 미루고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어려서인지..

청년들 사이에는 있고싶은데. 신앙의 동지를 찾기도 힘들고.

신앙의 가치관을 터놓기도 무섭습니다.^^;;

 

오늘 목사님 설교를 듣고.. 부활절을 맞아. 많이 묵상하고 가슴설레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교만했던 지난날보다. 혼란스러운 지금이 더좋습니다.

목사님 덕분에 하나님에대해 더 고민하고 성숙해져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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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3, 2011
*.120.170.250

와, 보람이 오랜 만이구나.

기억하구 말구.

멋지게 생기고 생각도 깊은 여자 청년이잖아.

그동안 못 봐서 궁금했는데,

이렇게 소식을 알려줘서 고마워.

지금 미국에 있는 회사에 다닌다면

미국에 가 있다는 말이군.

힘내고 씩씩하게 잘 살아가게.

가끔 대글로나마 소식도 전하고,

좋은 부활절 맞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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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2013-02-03 17010
470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8941
469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2013-01-21 23800
468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21731
467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2013-01-07 17957
466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22305
465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2012-12-24 17029
464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2012-12-17 18100
463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21471
462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2012-12-02 17506
461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2011-11-21 18300
460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2011-11-13 23262
45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20102
458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2011-10-30 16905
457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2011-10-23 23092
456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2011-10-17 20146
455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2011-10-09 16827
454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2011-10-02 14713
453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732
452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762
451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640
450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2011-09-05 13353
449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2011-08-29 1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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