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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시는 하나님 (출 2:1-10)

성령강림절 조회 수 15736 추천 수 0 2011.08.22 23: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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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애굽기 2:1-10 

건지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1-10, 성령강림절후 10째 주일, 2011년 8월21일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모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강한 사람입니다. 영웅 중의 영웅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이나 초능력자로 알려진 엘리야보다도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더 위대한 인물로 인정받습니다. 그 증거는 구약의 가장 중요한 책인 모세 오경이 바로 모세의 이름을 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배경이 된 출애굽 사건을 주도한 인물도 모세입니다. 그의 일대기는 드라마틱해서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과정에서 중요한 장면인 변화산 전승에도 모세는 엘리야와 더불어 나옵니다. 성경이 전하는 모세는 히브리 혈통으로 태어났지만 애굽 공주의 양자로 들어가서 왕자로 살다가 우연하게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미디안 광야로 망명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살다가 애굽의 노예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라는 사명을 호렙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애굽의 바로와의 대결에서 이겼고, 결국 민족 해방을 완수합니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애굽 사람들에게 임했으며, 결정적으로는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에서 40년을 살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압이라는 곳에서 일장 연설을 마친 후 삶을 하직합니다. 그의 일대기가 바로 모세 오경 중에서 창세기를 제외한 네 권의 책, 즉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인물 중에서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4권의 책에 모두 실려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모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건져 냄’

     모세가 처음부터 위대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모두 태아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머니 자궁 안에서 탯줄을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으면서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우주인이 우주선과 연결된 줄 하나에 의지해서 우주선 밖으로 나와 유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출 2:1,2절에 따르면 레위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가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모세입니다. 산모는 아들을 세 달 동안 숨겨서 키웠습니다. 당시에 애굽의 바로는 자기 지역 내에 있는 히브리 사람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에 남자 아이는 모두 나일 강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입니다. 이것은 히틀러가 집시와 장애인과 유대인들을 향해 펼쳤던 일종의 인종 말살정책과 비슷한 명령이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아이가 세달 쯤 되어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아이를 갈대 상자에 넣고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혹시 행운이 있으면 목숨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모세의 누이가 그 상황을 멀리서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에 왔다가 그 갈대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바로의 딸이라면 공주입니다. 이 공주가 결혼한 여자인지 아닌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공주는 갈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아기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라는 걸 알았습니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을 했을지 모릅니다. 아버지 바로의 명령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공주는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기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이겠지요. 이런 걸 보면 이미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고 키운 경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나중에 발각되더라도 히브리 사람의 아기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둘러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모세의 누이가 나타나서 공주에게 유모를 소개해주겠다고 말합니다. 일 처리가 잘 됐습니다. 결국 세 달 된 모세는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 강에 던져졌다가 구출을 받아 다시 어머니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드라마틱한 반전입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은 이 아기가 자라서 공주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젖을 뗄 정도의 나이가 되었겠지요. 공주는 양자의 이름을 모세로 지었습니다. 이름의 뜻은 ‘건져냄’입니다. 이 이름에서 모세가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 것인지가 암시됩니다. 모세는 훗날 자기 민족을 물에서 건져냅니다. 이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모세를 물에서 건져낸 애굽 공주는 바로의 딸입니다. 바로는 훗날 모세와 싸웁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내보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게 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모세가 바로에게 전달하자 바로는 온갖 핑계로 거부합니다. 애굽 가정의 모든 맏아들과 가축의 맏배가 죽는 열 번째 재앙이 일어나서야 비로소 바로는 모세의 이스라엘 민족을 떠나보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바로의 딸이 알았다면 모세를 살리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바로와 모세의 싸움은 열 번째 재앙으로 결판이 나지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마지막 한판이 남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라는 이름의 뜻과 연결된 사건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출애굽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열 번째 재앙 뒤에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광야로 나갈 수 있는 허락을 바로에게서 받았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횡단해서 가나안까지 갈 대장정을 시작했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고 당시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기마병을 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인들이 아닙니다. 노약자와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기마병의 추격을 뿌리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 앞에 홍해가 가로놓였습니다.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겠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출 14:16) 지팡이를 든 손을 홍해 위로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땅처럼 건널 수 있었고, 뒤따라오던 바로의 기마병들은 모두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격적이었을지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반복해서 들어도 지루하지 않았겠지요. 이 장면은 모세의 노래(출 15:1-18)와 미리암의 노래(출 15:19-21)를 통해서 전승되었습니다.

     두 노래 중에서 미리암의 노래가 원본에 더 가깝습니다. 미리암의 노래가 확장되어서 모세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미리암의 노래는 아주 짧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가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21) 모세의 이름은 ‘건져 냄’이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명령에 따라서 나일 강에 던져졌다가 바로의 딸을 통해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로의 군대인 기마병들이 홍해에 던져졌습니다. 그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 주제는 단순히 홍해 사건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역사와 연관됩니다. 그들은 늘 배수진의 형국에서 살았습니다. 바로의 기마병으로 대표되는 제국의 폭력에 끊임없이 노출된 이스라엘의 운명은 마치 물속을 지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삶이냐 죽음이냐의 경계선에 선 사람의 운명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여호와의 영화로우심을 노래했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영화로우심은 무기력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에서 건져내시고, 천하무적의 기마병을 홍해에 던지셨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도 그렇게 노래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좀 궁금한 생각이 들 겁니다. 홍해를 정점으로 하는 그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일까요? 모세가 팔을 들자 실제로 홍해가 갈라진 걸까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큰 능력이 실제로 나타났을까요? 이스라엘은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고 바로의 기마병들은 모두 홍해에서 몰살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이런 질문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부분적으로 역사적 사실이 있고, 또 부분적으로 성서기자의 해석이 있고, 또는 그들의 희망이 뒤섞여 있습니다. 역사를 엄밀하게 분석하면 오히려 정반대의 일들이 많았습니다. 세계의 역사는 늘 제국이 지배했습니다. 유럽의 역사는 물론이고, 아메리카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파괴했고, 남아메리카의 잉카 문명은 스페인에 의해서 초토화되었습니다. 지금도 미국이라는 제국은 무소불위를 힘을 발휘합니다. 최근에 벌어지는 주식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계 굴지의 펀드가 우리나라 주식 시장을 주무르면서 소위 개미들만 손해를 본다고 합니다. 대형 마트가 어느 지역에 들어서면 동네 슈퍼마켓은 다 문을 닫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천민자본주의 앞에서 초라해지는 개인 노동자들의 운명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게 주변의 제국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다가 결국 망했습니다.

     성경은 말도 되지 않는 사실을 낭만적으로, 이상적으로 고집한 걸까요? 역사의 패배자를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위로하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단순히 현재 누가 더 강한가 하는 표면적인 현상이 아니라 더 깊은 역사의 내면을 보고 있습니다.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는 제국보다 더 큰,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역사를 피상적으로만 보면 그게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 군사, 경제적인 힘만 보입니다.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눈으로 보면 더 근원적인 생명의 힘이 보입니다. 그걸 보고 사는 게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홍해 사건으로 설명했습니다. 그 사건의 중심에 나일 강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가 서 있습니다.

 

     세례 공동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이야기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건져낸 것에 불과합니다. 정치적으로 그는 영웅입니다. 그는 율법을 완성한 위대한 법학자입니다. 모두 본받을만한 인물입니다. 거기까지가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그의 역할로 사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해방이 되어도 사람은 여전히 물속과 같은 실존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 채워도 여전히 외롭고 불안하고 내면적으로 충돌합니다.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죄의 실존을 안고 살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인생 자체가 나일 강, 또는 홍해와 같습니다. 아무도, 그 어떤 이념도, 체제도 우리를 여기서 건져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여기서 건져낼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 전체를 죄와 사망과 피조물의 한계라는 물에서 건지셨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교리로만 들리시나요? 예수님은 당시 종교 권력을 대표하는 유대교와 정치권력을 대표하는 로마에 의해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인류 역사의 반복입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제국에게서 당한 일들이 다시 반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부활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물에 잠겼다가 다시 밖으로 나오는, 즉 물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의미의 세례 예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를 나일 강에서 건지신 하나님이, 그리고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그분만이 절망과 허무의 늪에서 우리를 건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을 찬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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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신짱구

August 23, 2011
*.196.241.92

 "사람은 여전히 물속과 같은 실존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 채워도 여전히 외롭고 불안하고 내면적으로 충돌합니다.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죄의 실존을 안고 살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인생 자체가 나일 강, 또는 홍해와 같습니다. 아무도, 그 어떤 이념도, 체제도 우리를 여기서 건져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여기서 건져낼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 전체를 죄와 사망과 피조물의 한계라는 물에서 건지셨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교리로만 들리시나요?"  ★정말 단순한 교리로 들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오랫만에 글을 올리게 되네요. 그동안 나름 바빴어요. 하지만  디바아 글은 읽으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 명령 앞에 절대적인 순종을 갖고 살면 좋겠습니다. 

어제 만나 뵈니 넘 행복했습니다. 목사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네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사역을 하고 있지 않는다면 꼭 수련회 참석하고 싶는데.... 넘 아쉽습니다.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요.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는 수련회 되시고 순간 순간 행복하세요. 기온차가 있는데 건강유의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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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3, 2011
*.185.31.7

신짱구 전도사 님,

저도 어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교리와 그것의 실체가 어떤 관계인지를

깊히 아는 공부가 신학이랍니다.

그게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워요.

평신도들이 모두 신학의 깊이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교회 사역자들은 그게 필수입니다.

그런 공부를 통해서 목회 사역에 직접 효과를 얻는 것은 아니지만

목회의 바탕인 영성을 풍성하게 하는것은 분명합니다.

이왕 목회사역에 뛰어들었으니

전문적인 영성의 길을 꾸준히 가봅시다.

나는 수련회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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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질그릇

August 23, 2011
*.159.144.211

'건져 냄'의 경험을 삶 속에서 느낄 때마다 겸허한 마음이 깊어지는 것 같더군요.

정언명령에 영혼을 던질 수 있는 '예'가 풍성해 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위의 말씀과 더불어 두 달만에 임하는 시간이라 그런지 더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신앙의 세계를 충분히 맛보는 신앙훈련의 장에 미련을 두고만 있습니다.

더위가 한풀 꺾여서 진행하시기에 좋을 듯합니다.ㅎㅎ

건강 유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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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3, 2011
*.185.31.7

질그릇 목사님,

어제 강의에서 언급한 정언명령을 기억하시네요.

영혼의 예만 나올 수밖에 없는 그 명령을 듣고 살아야겠지요.

그걸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겠지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예' 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이 저 만치 달려오는군요.

그 순간에 헛소리 하지 않도록 평소에 그 명령을 새겨들어야겠습니다.

목사님도 잘 지내시고,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수련회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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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이마고데이

August 24, 2011
*.33.25.38

정말 건져내심(구원)에 관한 깊은 설교를 들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우리와 현세의 것들,

그리고 건져내시는 하나님...이 과정(사건)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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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4, 2011
*.185.31.7

이마고데이 님,

'깊은 설교'라 말씀하셨지만,

그냥 기본적이고 초보적인 설교랍니다.

이런 내용이 상투성에 떨어지지 않고

영적으로 풍요로운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가

우리 모든 설교자들의 숙제겠지요.

하나님만이 홀로 우리를 건질 수 있는 분이시니

그분의 그 행위에 우리의 영혼을 다 맡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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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이마고데이

August 24, 2011
*.33.25.38

예, 저 역시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지라 설교에 대해 신학적인 접근이나 목사님처럼 비평할 수 있는 내공이 안 되고요.

한가지 저한테만큼은 이번 설교 역시 영적으로 풍요로운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깊은 설교였습니다(진심으로).

초보자의 입장에서는 다른 목회자분의 설교와 비교를 함으로 알 수밖에 없는데,

모세와 관련해서 이런 전개와 결론을 내는 뼈대있는 설교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목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대부분 목회자분들은 인물이나 서사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까?

비록 저는 해외에 있지만 이런 설교를 인터넷으로도 접할 수 있어 참 감사합니다.


설교에 대한 감상을 다시 이야기하자면 흔히 말하는 '구원의 감격'이라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서 전반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우리가 현실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말이죠. 저도 설교나 다비아 글을 접하면서 내공을 쌓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덧붙여 팟캐스트가 오픈되었으니 자주 청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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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August 24, 2011
*.179.178.110

목사님, 다음사전에서 <이신론자>에 대해서 검색해  보니까 이런 내용이 실려있던데 옳은 주장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신론자>

영국의 J. 톨런드와 M. 틴, 프랑스의 볼테르, 디드로, 루소, 특히 미합중 건국의 아버지들, 토머스 제퍼슨 , 벤저민 프랭클린 등은 대표적인 이신론자들이다. 미국 독립선언서에 나오는 신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의 야훼가 아닌, 이신론자들이 생각한 신, 즉 이성 또는 자연법칙이라 할 수 있다.[1]

 

 

위에서 "미국 독립선언서에 나오는 신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의 야훼가 아닌, 이신론자들이 생각한 신," 이라는

표현이 영 찜찜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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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4, 2011
*.185.31.7

오메가 님,

내가 잘 모르는 걸 질문하셨네요.

이신론자들은 광범위하니까

위 사전에 언급된 분들도 포함되는 건 맞겠지요.

미국 독립선언서의 신이 이신론에서 말하는 그 신이 맞느냐는 질문이지요?

그건 뭐 독립선언서를 쓴 사람들에게 물어봐야겠는데요.

위에 인용된 프랭클린, 제퍼슨 같은 사람말입니다.

그들은 대개 자연법사상가들이고 하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이신론에 근거해서 말한 거겠지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 개념이니까

이신론과는 물론 다르지요.

유엔의 천부인권론도 비슷한 이야기에요.  

그 표현이 왜 찜찜한지요?

그런 선언문이 신학적인 내용을 담을 수는 없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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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이마고데이

August 24, 2011
*.33.25.38

제가 목사님은 아니지만, 아는 범위에서 말씀드리자면 토마스 제퍼슨은 그 당시 배경대로 신학을 공부하기도 하고 기독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결정적으로 그 자신은 신앙이 없어 성서에 대해서도 이신론적으로 해석하였고-최소 성서에 나오는 특별한 은총 혹은 기적을 믿지 않았고 자연현상은 randomize돼있기 때문에 신의 주관이 아닌 방치에 가깝다-, 정교분리에 대해서도 확고했습니다. 아마 제가 알기로는 정교분리나 국가관에 대해서는 존 로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겁니다.


아래는 위키 편집에도 참고한 문헌이면서 유명한 제퍼슨의 종교와 관련된 도서들-위의 내용이 언급되는 도서들-이고,

Gaustad, Edwin S. Sworn on the Altar of God: A Religious Biography of Thomas Jefferson (2001) Wm. B. Eerdmans Publishing

Sanford, Charles B. The Religious Life of Thomas Jefferson (1987)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Sheridan, Eugene R. Jefferson and Religion, preface by Martin Marty, (2001)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이외에도 미국의 독립/건국 관련 인물들이 이신론자였다는 학설은 많은 사람에게 주장되고 있고, 학계에서도 정론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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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August 25, 2011
*.151.252.71

프리메이슨들의 여향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프리메이슨  구글위키백과사전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A6%AC%EB%A9%94%EC%9D%B4%EC%8A%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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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August 25, 2011
*.217.40.12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를 믿는 자는 부활생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

 

이 사실은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말해지는 것인데

어쩌면 우리의 삶이 당연히 정치 경제 군사의 힘에 좌우된다고 말씀하신 만큼이나

표면적인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따라가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 구절은 기독교 내에서 막강한 교리이거든요.

정말 이 교리의 이면에 깊이 역동하는 하나님, 창조, 종말, 그리스도, 성령, 생명, 인간, 세계..

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표면적인 역사 해석에 멈추지않는 것처럼

그 유기적인 관계를 더 느끼고 싶습니다.

 

믿는다는 보이지않는 내면의 작업이 구원에 이르는 것

알게되고 믿게 되었을 때, 펼쳐지거나 끊이지않고 이어지는 생명에 관한 것들.

은혜의 차원으로 믿음으로 생명에 편입되는 것이라기보다는(이건 좀 구역변경같아서..) 

믿게 되었을 때, 닫혀있던 틈새로 새어나오는 빛들을 따라가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생명에 속해지는....

흠...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멈추어있고 당연한 것들이 움직이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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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5, 2011
*.185.31.7

윤희수 씨,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알아듣겠습니다.

'빛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표현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어요.

그 빛을 느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

아니 빛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조차 왜 그리 어려운지 몰라요.

우주가 흑암물질로 가득차 있다고 하듯이

삶 자체가 어둠에 갇혀 있기 때문일 거에요.

거기서 한 줄기 빛을 보았을 때의 기쁨이 무언지 조금 알지요? ㅎㅎ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어요.

그 전통이 우리까지 이어오고 있구요.

그들이 왜 그렇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에 들어섰으니 쭉 길을 가봐야겠지요.

손해 볼 거 없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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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September 04, 2011
*.220.104.49

나를 건져 내실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께 몰입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몰입, 건져냄과 동떨어진 말 인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몰입이 좋아서 하나님과 묵상의 시간이 잦을수록 나를 건져 내심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서 말해봅니다.

 

악보 없이 연주하는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휘 모습을 보면서 연주 끝 무렵에 길게 몰입된 순간을 봅니다. 그는 그 순간에 몸은 거기에 있지만 영혼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일까요?

 

요즘 나가수 장혜진씨를 보면서 몰입이란 것이 어디론가 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노래 시작 전 이미 노래 속으로 그녀는 들어가 버린 것 같습니다. 끝나면 노래에서 내리죠. 복잡한 감정, 슬픈 감정, 아쉬운 감정..여러 감정의 열차 속에서 막 내린 뒤 거친 숨을 내쉰 뒤 눈물을 흘립니다.

 

나의 능력과 성과를 과시할 수 있는 일 앞에서 조용히 브레이크를 걸고 기도 드립니다. 시간은 짧아도 나의 생각과 계획을 쏟아냅니다.  그게 나만의 치장이라는 것을 느끼고 나면,  곧 성령이 오셔서 옆에 제2의 생각들을 주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이것이 나를 건져 냅니다.  새로운 생각과 새 힘을 얻습니다.

일의 진행은 겉보기에 같아도 능력 주시는 분을 알고 하는 일 자체가 행복한 순간입니다. 길게 아주 길게 인생이 하나님께 몰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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