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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창조절 조회 수 12750 추천 수 0 2011.09.26 09: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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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애굽기 20:1-11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1-11, 창조절 넷째 주일, 2011년 9월25일

 

구약성경의 여러 단락 중에서 ‘십계명’처럼 유명한 것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의 진수가 십계명에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은 열 가지입니다. 앞의 4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뒤의 6가지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이와 달리 로마가톨릭의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룬 조항이 3가지이고, 사람과의 관계는 7가지입니다. 개신교회는 유대교의 십계명 순서를 따랐고, 가톨릭은 어거스틴의 순서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폴란드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1988년에 십계명을 가리키는 ‘데카로그’라는 이름으로 10부작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그는 그 영화에서 십계명이 담고 있는 인간 삶을 동구권의 문화를 배경으로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십계명을 단순히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간 삶의 불가해성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했습니다.

 

     정언명령

     십계명의 문장 특징은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또는 저렇게 생각해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하라, 또는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윤리학의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입니다. 사람의 윤리를 무조건적인 규범으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말라는 규범이 있다고 합시다. 목적론적인 윤리는 행복해지려면, 또는 사회가 정의로워지려면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정언 윤리는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거짓말 하지 않는 것이 당위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들으면 이런 정언명령은 기분이 나쁩니다. 독재자들의 주장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복잡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거짓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곡하지만 않는다면 정언명령은 개인과 사회를 살립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명령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출 20:1-11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4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1) 제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3절)입니다. 이런 표현만 놓고 본다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이 존재하고, 또 다른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타종교에도 성격은 다르지만 신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주변에도 그런 신들은 많았습니다. 바벨론의 월신(月神)은 신(Sin)입니다. 플라톤의 글에는 데미우르고스라는 창조신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헬라 신화에는 제우스를 비롯해서 신들이 떼거리로 등장합니다. 성경에도 모압의 그모스나 암몬의 밀곰 등이 나옵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신은 모두 가짜입니다. 참된 신은 오직 여호와 한분뿐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신을 섬기지 않는 무신론적 삶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무신론은 세상을 신처럼, 즉 피조물을 창조주처럼 섬기는 것뿐입니다.

     제1계명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참된 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은 모두 유한합니다. 제한적이고 잠정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제1계명의 표현처럼 다른 신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궁극적인 한계를 뚫어본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젊음과 권력과 부와 명예는 시간과 더불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그런 유한하고 제한적이고 잠정적인 것의 운명에 빠져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은 우리를 궁극적인 생명에 붙들어 매는 명령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피하면 사람은 죽습니다.

     2) 제2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4절)입니다. 가톨릭의 십계명은 제1과 제2를 하나로 묶어서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고 한 대신 제10계명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1과 2는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제2계명이 말하는 ‘새긴 우상’은 제1계명이 말하는 ‘다른 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형상은 하나님을 감각적인 것으로 대상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람의 경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적인 것까지 이런 방식으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런 요구는 아주 강렬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고 있을 때 산 아래서 민중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금송아지를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제2계명은 그것을 거부하라는 정언명령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상과 형상을 만듭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세상적인 경험과 범주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번영신학은 곧 우상과 형상숭배입니다. 그건 아주 매력적인 겁니다. 샘터교회 신자들이 일 년에 두 배씩 늘어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멋진 교회당도 마련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혹할 정도로 매력적인 현상들입니다. 이런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우리가 땅을 발에 딛고 사는 한 이런 것 자체를 무조건 매도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런 데서만 확인하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제2계명은 그것을 엄금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런 데서 우리의 고유한 생명이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의 생각, 경험, 욕망의 잣대로 확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안에 들어오면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3) 제3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7절)입니다. 이 문장은 해석하기가 조금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이름을 망령되게 부른다는 말은 표면적으로만 보면 법정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앞세워서 거짓으로 증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독일 성서공회 성경의 해설에 따르면 경솔하게 욕설을 하거나 하나님 이름을 욕설로 잘못 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이름을 망령되게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도구적으로 이용한다는 뜻입니다. 법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증언을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고 하나님은 대상이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수단으로 보고 이용하듯이 하나님을 그렇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도구화, 하나님의 도구화입니다. 3계명은 그것을 엄금합니다. 그런 신앙은 곧 개인과 사회를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결국 복 받기 위한 게 아니냐, 잘 살려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으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불면증도 없어지고, 자식들이 다 잘 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 나가면 뭔가 좋은 일이 많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신앙을 도구화하는 것입니다. 제3계명 식으로 말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를 믿어도 좋은 일이 무조건 일어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와 서신서 기자들이 말하듯이 오히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 것이 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야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는 복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그 복은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부활의 생명을 약속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게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인생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그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3계명은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8절)입니다. 안식일 전승의 동기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창조사건과 연결되며 신명기는 출애굽사건과 연결됩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출애굽의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또한 창조의 능력이 출애굽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이 두 전승은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안식일 명령은 혁명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날이며, 해방의 날입니다. 창조 사건과 출애굽 사건에 주목하는 날입니다. 창조 사건은 모든 자연숭배와 주술숭배로부터의 해방이며, 출애굽은 모든 정치 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거룩하게 지키는 주일은 부활의 날입니다. 생명의 날입니다. 자연숭배와 정치억압을 포함한 모든 죽음의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어디에 있나요? 4계명은 그것을 정언명령으로 제시합니다. 그게 바로 사람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있나요?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듣고 있나요? 현대인은 안식과 해방과 자유와 부활 생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미련도 두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와 세상이 제공한 인생설계 프로그램을 뒤따를 뿐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단순히 바쁜 일정에서도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여전히 자연숭배, 주술숭배, 정치 경제 숭배에 매달립니다. 숭배는 곧 억압으로 작용합니다. 사람들은 부활생명에 대한 희망을 포기합니다. 프로이트 용어로 바꾸면 생명이 없는 무기물로 자기를 환원시키려는 타나토스의 충동에 의해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설명이 손에 잘 잡히지 않으시나요? 현대인들의 삶이 겉으로는 열정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깊은 허무의 늪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면 그게 확인될 겁니다.

 

     “예”의 영성

     이제 설교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영적인 사실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오직 “예”만 할 뿐입니다. 절대명령은 절대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요구합니다. 예컨대 열 달이 가까운 태아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예만 있을 뿐입니다. 밖의 세계가 두렵기에 안 나간다고 버틸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선다는 것은 이와 비슷합니다. 그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머뭇거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도 모든 걸 내버려두고 ‘예’ 하고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점에서 ‘예’ 공동체입니다. ‘아니오’는 없습니다. 회의석상에서 반대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를 생명의 세계로 부르신 그분의 명령 앞에서 우리는 예만 할 뿐입니다. 이런 표현이 공자 왈(曰)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라고 대답한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룩한 두려움으로 떨린다는 뜻입니다. 그게 억지로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나의 실존과 운명을 그분께 완전히 맡겨야겠다는 순종과 결단이 가능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이나 밖이나 눈치를 보고, 머리를 굴리고, 개인적인 이익만 도모할 뿐이지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예’가 없습니다. 시인이 더 이상 언어가 말을 거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건 큰 불행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향해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무늬는 비슷하나 결국 우리의 영혼을 억압하는 사이비 명령에 속지 마십시오. 창조주 하나님만이,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내십시다. 그분만이 생명의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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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天命

September 26, 2011
*.62.0.143

하나님 앞에서 선포되는 이 말씀 앞에 나의 영혼이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어전의 현장에서 내 몸과 영혼이 전률을 하며 그 누미노제를 체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福있는 者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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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6, 2011
*.185.31.7

이재천 님,

그리스도교의 깊은 영성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생명 통치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겠지요.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을

오늘 우리도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깊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나라....

바로 그 하나님의 불길 안으로 우리가 완전히 연소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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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September 26, 2011
*.220.104.49

깊은 허무의 강을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예전에 어쩔줄 몰라 이것저것 해보던 때를 분명히 기억합니다. 주님의 품을 가벼이 여기고 가슴을 뻥뚫고 지나는 허전함을 애써 감추는 사람들의 속이 보입니다. 차마 말은 못하지만 동병상련하던 때를 내가 너무나 잘알기에 지금 주님의 품이 나를 구원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한계를 부정했고, 신을 부정하고 귀를 닫는 그 마음 또한 괴로운 마음이었던것도 기억이 납니다.

전 그들과 차별됨에 우월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습니다.

승리자와 같은 성취감을 표시 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우월감, 성취감이 내 마음의 우상을 불러내고 하나님의 순종을 덮는 모양새를 알고 잘 알고 있습니다.

순간마다 순종의 정신사세를  잃을 때가 지금도 종종 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말씀은 지나간 시험범위처럼 취급받는 것이 아님을 알게됩니다.

가슴에 새기고 항상 눈동자처럼 지니고 다녀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말씀을 귀담아 듣게 들려주셔서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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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6, 2011
*.185.31.7

진인택 님,

길이 보이는 것 같으신가요?

다행입니다.

'... 시험범위 취급... 아님을...'이라는 표현이

새로운 길에 들어선 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자, 말씀의 고유하고 놀라운 세계로 들어가는 일에

좀더 정진, 정진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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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삐쭉이

September 27, 2011
*.182.131.202

목사님

두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십계명 조항별 명령(예를 들면 헌법이라 치면)을 해석하는 문제와 각자의 삶에서 시행법을 이끌어내는 기준이 대한 질문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유추해내는 능력이 없다면, 교회에서 제공하는 신도로써의 일반적인 기준(즉, 절에가지마라, 제사상에서 절하지마라, 주일을 지켜라)의 피동적인 준수을 넘지못하게될수 있습니다. 저또한 이러한 기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지 말아야한다는데 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법과 상황에 맞게 해석된 시행법을 구별해야 이시대를 해석하고 우리의 판별력의 활동을 장려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판별력을 신학적인 지식과 혹은 영감에 의존하기에도 아니면 보편적자연현상에서 이끌어오는 것도 정답은 아닌것 같습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순종을 해야하는 궁극적인 대상은 어딜까요?

 

둘째는, 십계명을 율법을 대표하는데 율법을 넘어서는 은혜의 방식에서 오는 믿음을 통한 구원과는 어떠한 자리매김을 할수있을 까요. 요사이, 로마서 공부하다가 중반부에 율법과 은혜의 갈등이후 후반부에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율법을 제시하는데 대해 이전과 어떤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전진이 안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순종은 현실적인 목표가 제시되기 때문에 이는 우리의 삶을 은혜로부터 격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할수있기때문에 이에 대해 하나님이 구원의 틀안에서 율법의 자리 매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두서가 없었습니다. 너무 어려운 답변주지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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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7, 2011
*.185.31.7

ㅎㅎ 삐쭉이 님,

어려운 답변을 사양한다고 말하면서

본인은 어려운 질문을 했네요.

핵심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거지요?

사실은 이 관계가 신학의 전체 주제라고도 할 수 있어요.

거칠게 말해서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

야고보와 바울,

칼뱅과 루터,

브룬너와 바르트,

몰트만과 판넨베르크 사이에 놓인 신학적인 차이입니다.

이미 예수님과 열매와 나무의 관계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거구요.

어렵게 말하지 말라고 했지요?

내 개인의 생각을 전하는 게 좋겠네요.

율법은 복음에 종속적입니다.

일단 복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게 핵심이고,

그 다음에 율법이 뒤를 다릅니다.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윤리와 도덕적인 대목을 말한 이유는

복음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도 율법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율법을 다시 복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아니에요.

바르트가 복음과 율법에 대해서 좋은 아티클을 많이 썼어요.

관심이 있으면 찾아보세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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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September 29, 2011
*.104.194.161

계명이라는 억압적인 말씀이

설교를 통해서 마음이 시원해지고 자유롭습니다.

표면적이고 반복적인 계명의 그 깊음이 놀랍습니다.

근원이 터치가 되면 제 마음이 이리 설득이 되어지는데요,

목사님, 나머지 계명에 대하여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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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9, 2011
*.18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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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 님은 학생 때 공부를 잘했지요?

저 설교를 듣고

'계명의 그 깊음'을 놀랍게 경험했다면

보통 영적 내공이 아니에요.

나머지 계명은 언제 설교하게 될지 모르겠네요.

교회력을 계명처럼 따르는 목사니까요. 음.

언제 기회가 된다면 십계명을 주제로 수련회를 하면 되겠지요.

어제 추도 모임은 잘 끝났지요.

9월28일은 계절도 좋은 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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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October 01, 2011
*.220.104.49

목사님, 책 잘 받았습니다.

축귀능력을 읽으면서 복음서 기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을 파악하는 능력, 곧 해석능력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석의 오류가 낳는 숱한 부작용을 훨씬 많이 보고 계시는 목사님의 심정의 일부나마 이해 합니다.

기도의 능력에서 경쟁이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뿐만이 아니라 쉽게 죽이는 도구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외면하지 안고 인정합니다. 자본주의 발전의 엔진이 경쟁이었기에 발전을 하였건만 결국 남의 밥그릇 뺏는 것과 연결되는 부분을 묻어 버리고 없는 척하는 모양세입니다.

경쟁이 낳는 많은결과들을 다시 봅니다. 파괴되는 환경파괴, 전쟁,부축기는 경쟁심리...

저도 경쟁조장에 많은 협조를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것하자, 저것하자, 더 잘하자... 이런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가지고 왔던 경쟁체제를 벗어날 수 없을까 ? 혼란 스럽습니다.

얼마전 "개미" 작가가 쓴 "빠삐용"을 읽어보니 사람의 마음이 모질고 변치 않는 다는 것이 잘 나와 있었습니다.

가장 덜 이기적이고, 협조적, 비난폭, 환경을 사랑하고 착한 사람들을 14만4천명을 바로의 추격을 따돌리듯이 우주선에 태우고 파괴된 지구를 떠나 새로운 별에 1250년에 걸쳐 갔건만 내릴 땐 2명이 내리고 그 두명도 내려서는 서로 싸웁니다. 1명만 남아서 임신하여 죽은 여자를 보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아드리앵을 보면서 미워하는 마음, 경쟁에서 이겨 독재자가 되려는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인가. 목사님 이 못된 마음이 주님의 길을 가면 사라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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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2, 2011
*.185.31.7

진인택 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빠삐용"을 썼군요.

재미 있겠네요.

못된 마음이 ... 사라질까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베르베르가 했네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냥 안고 살아야지요.

이런 점에서도 칭의론은 옳습니다.

다만 그 불가능성을 인식하는 사람의 영혼에는

'못된 마음'이 차지할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분명합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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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October 02, 2011
*.228.35.13

ㅎㅎㅎ 목사님 그리고 진인택님...빠삐용과 파피용은 쬐금 다르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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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3, 2011
*.185.31.7

웃음 님, 쬐금 다른 거 좀 설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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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October 04, 2011
*.228.35.13

아~~ 목사님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빠삐용을 쓴게 아니고 파피용을 썼답니다.^^

아마 같은 단어인데 음역만 다른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더스틴호프만의 주인공의 이름이 빠삐용이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 나오는 파피용은

나비를 닮은 우주선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프랑스이외의 번역서들은 같은 단어를 썼을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빠삐용을 쓰지 않고 파피용이라고 썼더군요...

베르베르는 종종 종교에 상당한 관심이 있습니다.

이 파피용도 지구의 종말을 피해서 파피용을 타고 탈출해서 지구와 닮은 별로 옮겨가는 이야기입니다.  일부내용이 성서와 닮았습니다.  파피용의 마지막 부분은 성서의 처음과 같고, 성서의 마지막 부분은 파피용의 처음과 같습니다.  인류의 기원과 종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 위에서 말씀하신것처럼 인간들의 악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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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4, 2011
*.185.31.7

아~ 불어로 파피용이나 빠삐용이나 똑같은 게 아닌가 싶어서요. 음.

진인택 님이 그렇게 알고 쓴 거 같아서요.

두 개 단어가 다른가요?

불어는 언제나 발음이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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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October 04, 2011
*.228.35.13

실시간 답글이군요^^

목사님은 저녁에만 다비아에 들어오시는것으로 알았는데 오늘은 아니군요...^^

뭐 빠삐용이나 파피용이나 프랑스어로는 나비를 뜻합니다.

근데 원래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프랑스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유명합니다.

책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팔리고요... 우리나라 정서와 맞나봐요...아니면 우연히?

그래서 일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인터뷰때 하는말이 자신은 소설을 쓸때 한국독자들을 생각하면서 소설을 쓴다고 하더군요.

출판사에서 빠삐용을 쓰지 않고, 파피용을 싸용하게된 이유가 있을것입니다.  빠삐용은 탈출의 대명사고, 파피용은 탈출을 포함한 그 너머를 이야기하고 싶은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혹시 파피용을 읽지 않으신 독자분들이 계실까봐서 빠삐용과 파피용이 다르다고 한것일뿐입니다.

진인택님도 아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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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October 05, 2011
*.220.104.49

나비와 나방은 변화를 의미할 때 종종 인용이 되나봅니다. 양들의 침묵에서 탈출전문 박사가 조디 포스터에게 범인의 힌트를 줄때 moth라고 살짝 말합니다. 우주선을 만들다 보니 나비모양(제 생각에는 잠자리와도 비슷)이 되었지만 전 읽는 동안 그 나비의 변화과정이 뭔가 성경적인 내용을 또한 담고 있는 듯한걸 느꼈습니다.  탈출선을 타고 과거를 씻어버리듯, 변태를 하듯이 새 행성으로 빠져 나갑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도 그렇게 새로운 곳으로 인도 되겠지요. 빠삐-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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