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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사 43:1-7)

주현절 조회 수 21734 추천 수 1 2013.01.13 20:43:43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0113.mp3 
성경본문 : 이사야 43:1-7 

두려워 말라!

이사야 43:1-7, 주현절후 제1주, 2013년 1월13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제 2이사야

오늘 설교 본문인 사 43:1-7은 소위 ‘제 2이사야’로 불리는 선지자의 설교입니다. 저는 이런 선지자들의 설교문을 읽을 때마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 살았는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성경 기자들도 우리와 똑같이 적나라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을 보십시오.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이 가까워 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상황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요즘 노동 현장이 아주 척박해집니다. 취업 자체가 힘들기도 하고, 취업을 했다고 해도 경쟁이 치열합니다. 비정규직도 많고, 조기 퇴직도 많습니다. 총체적으로 불안합니다. 어떤 노동자들은 고층 철탑 위에 올라가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버리기도 합니다. 40대 이하 세대와 50대 이상 세대의 갈등도 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은 무슨 대답을 주고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이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나요? 구약의 선지자들도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제 2이사야가 처한 상황은 바벨론 포로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로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이는 마치 고구려가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함락당한 것과 비슷합니다. 남유대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130년 정도 더 버티다가 결국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궁전과 성전은 모두 불탔고, 거기에 있었던 귀한 집기들은 모두 약탈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가족을 잃었고, 불구가 되었습니다. 왕족과 귀족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는 사람에 따라서 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끝까지 무력으로 투쟁하다가 잔인하게 제압당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일본 식민통치 시대에 독립군으로 활동한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비슷한 일도 있었을 겁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바벨론 제국의 새로운 질서에 재빠르게 적응했을 겁니다. 나름으로 노력해서 관리가 될 수도 있었고, 돈벌이도 할 수 있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 처참한 상황 앞에서 속만 끓였을 겁니다. 오늘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경험하듯이 2천5백 년 전 제 2이사야가 살던 바벨론 포로 시대의 사람들도 그 어려운 상황에 제 각각 대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신앙적인 문제의식은 똑같았습니다. 그 문제의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라면 유대가 주변의 제국에게 이처럼 처절하게 당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 아닐지 모른다는 문제의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단순히 불신앙이라고 매도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약의 신앙이 심화되고 성장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 두 문제의식에 대한 대답입니다.

 

창조신앙과 선민신앙

1) 여호와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냐, 하는 질문에 대해 이사야는 1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여기에 두 문장이 반복됩니다. 하나는 야곱아, 하는 부르는 말로 시작되었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똑같은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사실이 여기서 강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말은 그가 전능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전능한 분이 아니면 창조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약은 기본적으로 이런 창조 신앙에 토대하고 있고, 신약도 구약의 창조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첫 마디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창조신앙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그것이 말하려는 중심이 무엇일까요? 많은 신자들이 창조신앙을 단순히 진화를 말하는 자연과학과 대립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소위 창조과학회에 속한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種)을 현재 그대로 창조했다는 겁니다. 이에 반해서 진화론은 현재의 종들이 한 뿌리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합니다. 두 입장이 전문적인 것이어서 일반 사람들은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이들은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되었다는 말이냐, 지금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 쯤 되는 동물이 발견됐느냐, 하고 반론을 펴기도 합니다. 진화론을 부정하기 위해서 지구가 6천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허황된 말도 합니다. 저는 그들의 논쟁을 여기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창조과학회의 주장이 원래 창조신앙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창조신앙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유대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라는 게 대답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바벨론 포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이 근본적으로 의심될 때 창조신앙이 꽃을 피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벨론 제국의 권위 앞에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한탄과 자조와 냉소에 찌들려 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바벨론 제국은 막강합니다. 모든 것을 지배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 권능 앞에서 개개인들의 운명은 마치 태풍에 날리는 낙엽에 불과합니다. 거대한 절벽을 마주대하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두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를 비롯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제국의 왕들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을 창조한 분이라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과 5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창조신앙이 어떻게 두려움을 몰아내는지를 알려면 먼저 두려움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직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대상을 두려워합니다. 그 대상이 국가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실직이 가장 큰 두려움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솔로로 사는 것이, 또는 탈(脫)시골을 못하는 것이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결코 창조주가 못됩니다. 모두 피조물입니다. 그런 것들의 힘은 전능이 아닙니다. 전능처럼 우리를 속일 뿐입니다. 크게 속을수록 두려움도 더 커집니다.

 

창조신앙은 우리를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생명의 본질을 뚫어보게 합니다. 시편 139편은 대표적인 창조 시(詩)입니다. 이 시편기자는 생명 창조의 신비 앞에서 놀라워하면서 찬송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창조신앙은 생명의 신비에 자신의 영혼을 자리매김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십시오. 0.5미리의 난자와 그것보다 수십 배 작은 정자의 결합입니다. 수정란이 열흘쯤 지나면 배아가 됩니다. 그리고 차츰 몸의 형체를 갖추게 됩니다. 양수로 가득한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자랍니다. 우리 모두는 달걀처럼 알에서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빅뱅으로 시작된 우주도 그와 비슷합니다. 이런 신비 앞에서 사람의 일들은 정말 하잘 것 없습니다. 생명의 신비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안다면 바벨론제국의 군사력과 황제 권력을 두려할 수 없습니다.

 

2) 바벨론 포로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제시한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하신 게 아니지 않느냐 하는 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렇게 망할 까닭이 없다고 본 겁니다. 이사야는 사 43:1b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것은 신자들이 좋아하는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표현이 자극적으로 들립니다. ‘너’, 그리고 ‘나’라는 인칭대명사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마치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사랑의 밀어처럼 들립니다. 이사야는 버림받은 것처럼 낙심하고 있는 바벨론 시대의 유대인들을 향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는 연인과 같다고 호소했습니다. 그 구절은 일종의 세레나데입니다.

 

구약성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사람을 찾아오는 것처럼 묘사할 때가 많습니다. 선지자들은 모두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 이야기를 아시지요? 그의 이야기는 창 12장부터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그 이후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계속해서 부르셨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내리실 때도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습니다(창 22:1). 아브라함 이후로 유대인들은 선민신앙을 줄곧 유지했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들을 개인적으로 부르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바벨론 시대에 이런 선민신앙이 흔들렸습니다. 그들에게 이사야는 더 강력한 언어로 그 선민신앙을 역설했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혹시 그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이 그렇게 말하곤 할 겁니다. ‘너는 내 꺼야.’ 그런 말을 듣고 싶으신가요? 누군가에게 완전히 속했다는 느낌은 우리를 외로움에서 건져냅니다. 그래서 연인들이 서로에게 집착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속하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하기 때문에 집착하면 할수록 실망도 더 큽니다. 여기에 그런 걸 절감하는 부부들이 있을 겁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말하는 대상이 누군가가 중요합니다.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오히려 기분이 나쁘겠지요. 이사야는 그 대상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를 ‘구속’한 분입니다. 구속했다는 뜻의 히브리어 원어는 빚을 진 친척의 저당물을 되찾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구속해줄 수 있는 분이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만약 이런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인식하고 확신한다면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이라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의 밀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혹은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도 한눈을 파느라 실연당한 사람처럼 영혼이 공허한 건 아닌가요? 그런 사람은 결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얼굴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그분이 우리를 일일이 부르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증거가 무엇인가요? 증거는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창조주께서 행하시는 일의 오묘한 깊이를 우리가 어떻게 다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없는 것을 찾으려고 하다가 혼란에 빠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불을 보았다거나 소리를 들었다면서 신앙의 ‘자뻑’이 심하고, 또 어떤 이들은 자기만 그런 경험이 없다는 생각으로 불안해합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영적인 혼란은 마찬가지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증거는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방식으로 증거를 찾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새로운 차원에서 모든 것들이 바로 증거의 빛으로 다가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증거를 전혀 새로운 사건에서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과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더 나가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체라고 인식하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임마누엘로,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믿었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믿는다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라는 정치 사회학적인 두려움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고후 4:6절에서 썼듯이 예수님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은 창조의 완성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너는 내 것이라.’는 약속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에 더 집중하십시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자신들도 미처 알지 못한 채 예언했습니다. 놀랍고 신비로운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우리를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기쁨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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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3, 2013
*.149.31.175

주일을 잘 지내셨는지요.

예배도 잘 드리셨겠지요.

위 설교의 녹음 파일을 듣다가 보면

중후반부터 윙윙 하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릴 겁니다.

엠피쓰리 소리 듣기에 방해가 될지 모르겠군요.

오늘 대구샘터교회 예배처소 인근에서

가로수 치기 작업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까 해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좋은 한 주간을 맞으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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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3, 2013
*.149.31.175

고후1:20절 님이 금방 다비아와 친해지셨군요. ㅎㅎ

'그대 눈을 예수께로!'라는 저 문장이

기독교 신앙의 모든 걸 말해주네요.

고후 4:6절이 말하는 예수의 얼굴과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영적 관계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놀라운 자유를 얻게 되겠지요.

저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없는 게 안타깝군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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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우쿵

January 14, 2013
*.43.247.115

오늘의 설교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증거를 전혀 새로운 사건에서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과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도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직감하는 일은 드물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 즉,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반으로

추체험(追體驗)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와 기독교인들은 운명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미래와 운명을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주 설교 「예수가 왕이다」에서

“동방 박사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일까요?…………

마태복음 기자는 지금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즉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동방박사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다른 성탄절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공생애라는 불빛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역시 초기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그 중에서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

더 좁혀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 현현 경험을 통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 경험의 결정적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마태는 무슨 의도로 동방 박사들의 예방 이야기를 엮었을까?

마태가 서기 80년경 복음서를 쓸 무렵

유대인들은 예수 신앙을 거부한 데 반해서

이방인들은 대거 예수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를 영접하는 사실을

예수 탄생기로 소급 투사한 이야기가 동방 박사 예방기라고 보면 무난하지 않을까?

후세인들은 동방 박사들의 신분, 숫자(세 사람이 각기 황금, 유황,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이름을 거론했지만 상상이 자아낸 허구일 따름이라 생각한다.

 

위 두 설교와 또한 정목사님 설교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로서의 성서와 관련하여

성서의 편집과 전승 과정, 초기 그리스도교 창립의 본바탕이 되는

기독론(Christology, 그리스도론)의 형성 과정 이해에 도움이 되는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리스도론 발전 과정 네 단계

 

제1단계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예수께서 3년 남짓 공생애를 통하여 활약하신 다음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함으로써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절망한 제자들은 모조리 뿔뿔히 흩어져 달아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50일이 흘러 오순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이

성령에 힘입어 그리스도 교단을 창립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영영 끝장났다고 생각한 스승께서

수시로 그들 앞에 나타나서 당신이 부활하셨다고 제자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본 신조로 내세웠다(고전15:3-5).

사도 바울은 이 기본 신조를 바탕으로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정립했다.

그는 예수의 생애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제2단계 예수의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닌 직제자들은

죽음과 부활을 내용으로 하는 기본 신조로 만족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과 예수 사화를 내용으로 하는 예수 전승을

입으로 전해주었고, 그들의 후예들 가운데서 더러는

예수 전승을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곧 시리아의 어느 그리스도인은 50~60년대에

예수의 말씀 전승 70여 편을 모아서 이른바 예수 어록을 편찬했다.

또한 어느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은 예수 말씀 전승뿐 아니라

예수 사화 전승까지 모아서 70년경에 마가 복음서를 썼다.

마가는 예수의 사생활은 제쳐두고 오로지 공생애에 관한 전승만 채록했다.

 

제3단계 예수의 사생활

80~90년대에는 시리아 지방의 어느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마태 복음서를 썼고, 비슷한 시기에 어느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누가 복음서를 썼다.

마태와 누가는 선배들이 쓴 예수 어록과 마가 복음서를 많이 배껴 썼다.

마태 1~2장과 누가 1~2장에서는 그리스도교 문헌상 처음으로 예수의 사생활을 거론한다.

예수의 사생활에 대한 전승이 매우 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태와 누가가 제각기 복음서 서두에 굳이 예수의 사생활을 기술한 까닭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지존이셨던 것이다.

 예수 전에 예수 없고 예수 후에 예수 없다는 게 그들의 확신이었다.

그들은 지존이신 예수의 공생활뿐 아니라 사생활에도 큰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마태는 예수는 구약의 메시아 예언대로 잉태되고 태어나고 성장하셨다고 한다.

그 뜻인즉 예수야말로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 출현한 메시아라는 것이다.

마태가 예언과 성취의 도식을 즐긴 것과는 대조적으로,

누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 두 분의 잉태, 탄생, 성장을 비교 서술하면서,

요한 세례자도 훌륭하지만 예수는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분이라고 한다.

마태와 누가가 예수의 사생활에 상당히 관심을 쏟은 것과는 달리,

사도 바울 서간 ․ 예수 어록 ․ 마가 복음 ․ 요한 복음서 등

기타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사생활에 관해서 일절 아무런 말이 없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의 사생활에 유념하지 않고도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도 예수의 사생활에 너무 집착할 일이 아니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라는 속담에 따라

흔히 영웅 ․ 위인들의 사생활을 미화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예수의 사생활을 화려하게 꾸몄다고 보면 무난할 것이다.

마태 1~2장 및 누가 1~2장은 예수 공생활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예수 사건 이전의 기록으로서

다분히 의도적인 예수 선사(先史)라 하겠다.

거듭 말하거니와 마태와 누가의 예수 선사(先史)에

마리아와 요셉의 얘기가 제법 나오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결국 예수는 지존이라는 주장을 그런 식으로 뒷받침했을 뿐이다.

예수 선사는 철두철미 그리스도론이지 결코 마리아론, 요셉론이 아니다.

 

제4단계 예수의 선재(先在)와 신성(神性)

예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 저승에 계셨다는

선재 신앙(先在 神仰)은 예수 겸허가(빌2:6~11)에 분명히 드러난다.

이 노래는 바울계 여러 교회에서 유행했었는데

바울은 55년경 터키의 감옥에서 에게 바다 건너 그

리스의 빌립보 교우들에게 써보낸 빌립보서에 그것을 채록했다.

그러므로 50년 전후하여 바울계 교회에는 예수 선재 사상이 분명히 있었다고 하겠다.

겸허가의 내용인즉 선재하던 분이 자신을 비워 사람이 되시고,

또한 자신을 낮추어 돌아가셨다는 것이요,

마침내 하느님의 배려로 우주의 주님으로 승격되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서간집에 예수 선재 사상이 들어 있지만,

정작 사도는 예수 십자가 사건의 구원론적 의미에 집착했다.

이른바 예수의 대속적 신앙에 집념했던 것이다.

100년경 적어진 요한계 문헌에는 예수 선재 신앙이 두드러질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를 하느님으로 받드는

예수 신성 신앙(神性 神仰)이 돋보인다(요 1:1.18 요 20:28 요일 5:20).

예수 신성 신앙은 오직 야훼 한 분만을 신으로 받들던

유대계 그리스도교에서는 언감생심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 신앙이었다.

예수 신성 신앙은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1차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에서 열린 통산 제4차 공의회에서 교의로 확정되었다.

예수의 선재와 신성 신앙의 깊은 뜻인즉,

예수는 하느님께 뿌리를 내리고 사신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깊이깊이 체험하고 맑게맑게 체현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 이해의 네 단계를 훑어보면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서 공생활로,

공생활에서 사생활로, 사생활에서 선재와 신성으로

관심이 옮겨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렉스 헤일리가 쓴 "뿌리"를 연상케 한다.

거듭 말하자면 예수 부활 체험에서 뒷걸음치며

영원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과거를 추적했다 하겠다.

그리스도론 발전 과정 네 단계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의 두 단계임에 틀림없다.

모름지기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의 공생활, 죽음, 부활에 견주어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운명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둘은 팔자소관이 같다.

 

(출처 :정양모  「내 글 보고 내가 웃는다」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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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4, 2013
*.149.31.175

우쿵 님,

대글을 잘 읽었습니다.

직접 쓰신 대글 내용만으로도

이미 평신도 신학자가 다 되신 것 같습니다.

아래 인용한 내용도 초기 기독교 교리사를

잘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의 선재성과 사생활 등이

부활 경험으로부터 소추의 방식으로 전승된 것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기독교 신앙에서 소홀하게 다루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부활 경험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런 것이 부분적으로 신화적인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문자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피해야겠지요.

우쿵 님의 책읽기가 광범위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지만 나이가 들수록

외부 활동을 줄이고 내면 활동에 더 깊이 들어가야겠지요.

다시, 주신 대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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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우쿵

January 14, 2013
*.143.197.179

예, 목사님

예수님의 삶 어느 한 부분이라도

존재론적 무게의 차이가 없다는 말씀

잘 기억하겠습니다.

 

그저 조용한 내면의 묵독으로 그친 책들은

마음의 비상구로 들어와 은밀히 잠입한 후,

어느새 마음의 뒷문으로 스르륵 빠져 나가 버리는

경험을 저도 자주 하는지라,

내 속에 오래 남겨두고 곱씹어 보기 위해

읽은 책의 내용을 어설프게 글로 쓰보는 흉내를

한 번 내보았습니다.

제 댓글에 대한 comment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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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8, 2013
*.149.31.175

우쿵 님,

우리는 영적으로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영적인 성장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지요.

시간은 자꾸 흘러 마지막 순간이 어렴풋이나마

눈에 들어오는 때를 지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에는 아득합니다.

우쿵 님이 뭔가 뒤문으로 스스륵 빠져나간다고 하시기에

저도 비슷한 느낌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의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에

불안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많습니다.

그래도 길을 가야겠지요.

그분의 도움을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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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January 18, 2013
*.128.219.195

"창조신앙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유대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라는 게 대답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바벨론 포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이 근본적으로 의심될 때 창조신앙이 꽃을 피웠습니다."

 

목사님,

창조신앙이 역사적 위기시에 이데올로기처럼 활용되었다는 데에는 쉽게 이해가 되나, 창조신앙이 이때 시작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이때는 이미 모세오경이 정착된 시기 아니었나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혼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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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8, 2013
*.149.31.175

초 님,

모세오경은 구약성경에 가장 앞자리에 놓여 있고,

또 그 배경이 가장 오래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실제로는 상당히 후대에 속한 문서랍니다.

창세기의 창조 전승은 바벨론 포로 시대에 완성된 거지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의 전체 구약성서를

연대기적인 순서로 읽으면 곤란해요.

고대의 역사 문서들은 다 그렇습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가

겉으로는 깜깜할 정도로 오래된 옛날을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일연의 시대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과 비슷해요.ㅣ  

 

창조신앙이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히틀러 시대에 오히려 창조신앙이 부정되었어요.

왜냐하면 창조신앙이 히틀러의 국가주의를 흔들기 때문이죠.

창조신앙은 오히려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한 항거입니다.

바벨론의 제국주의에 대한 항거로부터

이사야의 창조신앙이 나온 것처럼이요.  

진화론을 배척하기 위해서 창조론을 사용하는 한국교회의 행태는

당연히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창조론의 오남용이죠. 

profile

[레벨:13]진인택

June 06, 2013
*.176.175.67

최근에는 두려움의 실체를 정말 긴박하게 체험하지를 못하면서 그런지 마음이 늘어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의 실체를 맛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두려움을 주는 종류가 어떤지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길수 있는 작은 두려움들이 매일 일어다고 있습니다.
그 작은 두려움에도 늘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나만이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인지는 몰라도 결과의 형태만 다를 뿐 늘 또다시 내 삶에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가, 정말로 사랑하시는가를 확인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미 제시된 증거를 보고 또 보고 있습니다.  모든 걸 말해 주고있는 이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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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6, 2013
*.94.91.80

진인택 님,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두려움을 맛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직면해서 그 실체를 알면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이 보이겠지요.
더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일입니다.
그럴 때 두려움의 실체가 좀더 분명하게 보이고
이미 극복되었다는 사실도 눈에 보이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의 두려움도 넘어선다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수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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