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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241 추천 수 0 2013.05.26 22: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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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로마서 5:1-5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5:1-5, 성령강림후 1주(삼위일체주일), 5월26일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부터 유대교라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교로부터 종교적 영양분을 받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재림을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겹치면서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교와 함께 길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글로 많이 남겼습니다. 그중에서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가 당시의 신학적인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담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가 왜 유대교와 결별했는지, 그리고 오늘 기독교 복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율법입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은 삶의 규범입니다. 지금 우리로 말하면 실정법입니다. 그런 규범은 필요합니다. 그걸 통해서 세상의 질서가 잡힙니다. 법이 없다면 세상은 카오스로 떨어질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롬 3:20절은 이렇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게 하지만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롬 1,2장에서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법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사람은 다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고 보았습니다. 법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거나 혹은 교만하게 할뿐입니다. 바울은 전혀 새로운 의를 말합니다.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의로움을 얻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 신학의 핵심인 ‘칭의론’입니다.

 

바울의 자랑거리

바울은 이제 롬 5장에서 칭의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었기 때문에 두 가지 사실을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2b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문장을 루터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말 성경이 즐거워한다고 번역한 헬라어 ‘카욱사오마이’는 자랑한다는 뜻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영어성경도 번역에 따라서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사용합니다. 어쨌든지 바울은 여기서 미래의 영광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건 분명히 기독교인들에게 자랑거리입니다. 기쁨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만이 아니라 두 번째로 환난까지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상황입니다. 영광을 자랑한다는 건 말이 되지만 시련과 어려움까지 자랑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보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바로 뒤에서 설명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 결국 희망 안에서 살게 한다는 겁니다. 자학인가요? 광신인가요? 바울은 자학적인 사람도 아니고 광신에 빠진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인간과 그 삶의 실체를 정확하게 뚫어보는 사람입니다. 환난을 당하면 사람은 인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때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유달리 인내심이 강합니다. 인내를 통해서 사람의 내면세계는 탄탄해집니다. 본문이 말하는 연단이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킵니다. 웬만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탄탄한 인격이 있을 때 희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환난을 만나면 힘들어합니다. 더 나가서는 자포자기를 합니다. 삶이 파괴되기도 합니다. 불안, 짜증, 분노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환난, 인내, 연단, 소망이라는 일련의 과정은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신앙의 힘이 있어야만 합니다. 특히 마지막 대목인 희망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었을 때만 환난이 우리의 삶을 승화시킵니다.


바울이 말하는 희망은 막연하게 잘 될 거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그런 희망은 처세술이나 심리학의 차원에 속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희망은 구체적인 신앙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말한 자랑거리의 첫 대목을 루터의 번역으로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이 희망이 바로 시련을 통해서 도달하게 될 희망입니다. 헬라어로도 똑같은 단어인 ‘엘피조’를 씁니다. 바울의 자랑거리 두 가지는 결국 똑같은 겁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희망에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이 희망이야말로 단순히 신앙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삶의 차원에서 환난을 넘어설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말 자체를 낯설어 합니다. 그것보다는 지금 당장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친구를 사귀는 거를 더 절실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일상에서 성실하게 사는 건 중요합니다. 우리 교우들도 모두 그렇게 살고, 또 그렇게 인정받는 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숲속에서 큰 나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큰 나무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나무도 중요하고, 풀도 중요하고, 중간에 부러진 나무도 중요합니다. 어떤 나무나 풀이든지 살아있을 때는 좀 달라보여도 죽으면 모두 흙이 될 뿐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결국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실패한 인생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그 영광에 참여할 것에 대한 희망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마 5:3절에 나오는 팔복의 첫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실제로 가난한 자까지 포함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난은 사람들에게 경원의 대상입니다. 멀리하고 싶어 합니다. 마태복음은 역설적으로 그런 이들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질적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그들에게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경쟁력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희망입니다. 더 이상 욕망을 실현하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걸 가리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실제로 이해가 되시나요? 그걸 믿으시나요? 그런 희망으로 마음이 설레신 적이 있으신가요? 대답은 각자가 다 다를 겁니다.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거고, 점점 또렷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거고, 또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분도 있을 겁니다. 왜 이렇게 다를까요? 이게 왜 억지로 되지 않을까요?


그 이유를 바울은 본문 5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좀 현학적인 발언처럼 들리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명백한 진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야만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혼이 충만한 사람이 되면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에 부풀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롬 8:37절과 39절에서도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는 그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하신 이로 말미암아’ 넉넉하게 이긴다고 했고, 그 어떤 세상의 이념과 권력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낭만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달라고 막연하게 기도합니다. 또는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건 바른 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아는 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예수 사건이 하나님의 사랑인 이유는 그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유대교가 주장하는 율법과는 다른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행위와 업적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더 깊이 아셔야 합니다. 그게 잘 안 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작동원리에 완전히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걸 거래로 생각합니다. 반대급부로만 생각합니다. 똑똑한 사람은 돈도 잘 벌어야 하고, 못난 사람은 못 살아야 합니다. 좋은 뜻으로라도 모든 게 ‘기브 앤 테이크’ 원리로 돌아갑니다. 믿음도 그런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율법 종교가 그것을 가리킵니다. 거기서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상세하게 규정됩니다. 그 규정, 그 규범대로 잘 하는 사람이 종교적으로도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혁명적인 주장을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 그런 모든 규정과 규범은 그 능력을 잃었다고 말입니다. 그 방식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한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단지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가릴 것 없이 믿음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약성서는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사랑 말고는 해명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항아리에 물이 채워지듯이 우리 마음에 채워지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으로 기뻐하고, 그것을 자랑하면서 살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은 환난까지 자랑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복음의 능력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이것이 잘 이해되지 않거나 또는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성령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채워졌다고 했습니다. 궁극적인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지성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성만으로 본다면 악한 사람들도 뛰어납니다. 지성은 단순히 어떤 사건이나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일 뿐입니다. 수학 계산 능력이 뛰어나거나 암기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지성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지성을 통해서는 예수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지는 못합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지성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지만, 또는 종교나 정치 영역에서 뛰어난 사람이 많았지만 그들이 다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고전 1:21절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바울은 비록 세상에서 학문적으로 수준이 낮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채울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령이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하게 하는 존재론적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밖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생명의 영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로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은 성령이 오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왜 성령을 채우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느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도 성령을 채워주시면 분명하게 알고 믿을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결과만 알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 못하지만 우리는 알고 믿게 되었다는 그 결과 말입니다. 이걸 놓고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늘 공평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왜곡해서 받아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걸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겉으로는 거부하지 않았다고 말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거부한 겁니다. 자기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성령 운운해도 성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그런 속마음을 사람은 판단할 수 없지만 성령은 판단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거부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임하실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후 첫 주일이자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놀랍고 신비한 구원의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성령은 그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생명의 빛이 그 사람의 영혼을 강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바울의 고백처럼 환난까지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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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天命

May 28, 2013
*.62.2.5

 - 즐거워함 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함이 좀 더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성령이시여, 저에게 항상 임하사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에
늘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해 주소서.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y 28, 2013
*.94.91.80

천명 님,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간접적으로 천명을 듣고 살겠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직접적으로 천명을 듣게 되겠지요.
그날을 두려워하거나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늘잔치가 시작된다는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들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그건 정말 준비가 필요합니다.
땅, 집, 결혼, 농사, 사업에 정신을 팔다가는
언제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하늘잔치 오라는 소식을 전해도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요.
저는 앞으로 두 가지 종류의 책을 써볼까 생각 중입니다.
하나는 젊은 목사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갖춘 책입니다.
목회, 설교, 삶에 대해서 목사가 목사에게 하는 이야기죠.
60 되기 전에 쓸 계획이었는데 게을러서 미뤄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죽음에 대한 책입니다.
이런 책은 지난 역사에 많이 나왔고,
요즘도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목사가 쓴 책은 아마 없는 것으로 압니다.
저의 실존, 신앙, 경험 등을 바탕에 깔고
하늘잔치를 기대하는 심정으로 써볼까 합니다.
책을 쓰려면 다른 일들을 좀 내려놓아야 하는데,
이게 잘 될지 모르겠군요.
미래의 영광에 대한 희망이
우리 모두의 영혼에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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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진주

May 28, 2013
*.141.168.166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늘 저의 내면을 돌아보게 해 주십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평소에는 조용히 읽고 지나갔는데(조용히 지나다녀서 죄송*^^*), 오늘은 보답의 차원에서 한 가지,...
'성령을 통해서'  문단의 열번째 줄에  '성령이 궁극적인 진리를 인색하게 하는 존재론적 능력..'에서 오타가 있는것 같습니다. 물론 다비안들께서는 다 '인색'을 '인식'으로 인식하시겠지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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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28, 2013
*.94.91.80

진주 님,
저의 설교가 영적인 구도의 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 하니, 다행입니다.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일은 성령이 하시니
그분께 감사를 드리세요. ㅎㅎ
성령이 하신다는 말은 상투적인 게 아니랍니다.
성서시대 사람들이 인식하고 경험한 그 성령을
오늘 우리가 정말 잘 따라가고 있을까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서재의 창문으로
참나무와 대나무 잎들이 비를 맞으며
바람 결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네요.
그 흔들림이 참으로 멋집니다.
저런 흔들림에 비해서
사람들의 춤은 오히려 어색한 것 같습니다.
저런 나뭇닢의 흔들림이 자연스러운 것은
자신들을 바람에 완전히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 바람이 곧 루아흐(프뉴마, 바람, 숨)입니다.
우리 자신을 성령에게 완전히 맡기는 게 무언지를 배우는 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닐까요.
진주 님은 오래된 다비안이시군요.
오랜 세월 여기에 조용히 머물러 계셨네요.
오타을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치겠습니다.
좋은 하루가 되시기를....
profile

[레벨:17]아우

May 28, 2013
*.164.11.151

목사님,
자기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일은 성령의 일이라고 하셨는데요
성령받지 않고도 자기내면을 돌아보는 일은 가능하지요?
성령에 의하여 자기내면을 돌아보는 것과
비그리스도인들의 자기성찰과 어떤 차이가 있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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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28, 2013
*.94.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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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님,
딱 부러지게 질문하시는군요.
성령 없이 자기내면을 성찰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자기내면을 성찰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남의 약점을 캐기 위해서 머리를 쓴다면, 
돈벌이에만 마음을 다 쏟는다면 
그것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의 지배를 받는 거겠지요.
목사나 장로라 하더라도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 머리를 쓴다면,
그것도 복음을 방어한다는 차원에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악령의 지배를 받는 겁니다.
성령의 지배와 악령의 지배를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성령이 반드시 교회에만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세상 전체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고 봐야 합니다.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냐, 하고 물으시겠지요.
성령이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비와 햇빛을 주듯이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활동의 중심에 들어갔지만,
비신자들은 성령 활동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겠지요. 
폭풍도 그 중심과 주변의 힘이 다른 것처럼
성령 경험도 차이가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왜 성령 활동의 중심이냐를 정확하게 아는 거겠지요.
저로 하여금 좀더 구체적으로
성령을 생각하게 해주신 질문에 감사드리며,
주님의 평화가...

profile

[레벨:13]진인택

March 12, 2014
*.220.104.49

목사님, 성령이 임하심이란 말씀이 나를 왠지 힘들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합니다.

부끄러워할 수 있는 상황이 나에게 많게 있습니다.

더 인내와 연단의 과정에 나를 맡기고 믿음을 키우겠습니다.

희망을 보고 참고, 참으면서 희망을 봅니다.

성령이 유전적인것이 아니란 명백한 사실을 이해합니다.

유전적인것이 아니기에 인내와 연단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나도 인내하고 배우고 가슴으로 느끼면서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끝난뒤에 새생명을 주시리 믿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2, 2014
*.94.91.64

우리의 내면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성령의 온전한 조명을 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많은 시급한 문제로 우리가 흔들리는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마음만 있다면

다시 용기를 얻고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될 겁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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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184
521 주현절 세례 받은 하나님의 아들 (마 3:13-17) [4] 2014-01-13 16094
520 성탄절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6] 2014-01-05 9440
519 성탄절 시험받은 예수 그리스도 (히 2:10-18) [14] 2013-12-29 13666
518 성탄절 성육신의 신비 (요 1:1-14) [12] 2013-12-25 14048
517 대림절 임마누엘은 예수다 (사 7:10-16) [8] 2013-12-22 13478
516 대림절 메시아 질문 (마 11:2-11) [17] 2013-12-15 13003
515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롬 15:4-13) [10] 2013-12-08 13968
514 대림절 여호와의 빛 (사 2:1-5) [13] 2013-12-01 15282
513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361
512 창조절 하나님의 평화, 평화의 하나님 (빌 4:4-9) [15] 2013-11-18 10969
511 창조절 삶과 죽음의 경계 (눅 20:27-38 [8] 2013-11-10 11185
510 창조절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10] 2013-11-04 14672
509 창조절 하나님 앞에서 '옳음'의 문제 (눅 18:9-14) [8] 2013-10-27 13890
508 창조절 약속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 (렘 31:27-34) [10] 2013-10-21 14482
507 창조절 이방인 나병환자의 믿음 (눅 17:11-19) [10] 2013-10-13 24764
506 창조절 거룩한 부르심 앞에서 (딤후 1:1-14) [12] 2013-10-07 15446
505 창조절 불행한 부자 이야기 (눅 16:19-31) [10] 2013-09-29 21066
504 창조절 예레미야의 눈물 (렘 8:18-9:1) [8] 2013-09-22 13506
503 창조절 죄의 심연 (딤전 1:12-17) [6] 2013-09-15 11156
502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8977
501 창조절 헛되고 무익한 것 (렘 2:4-13) [16] 2013-09-01 13528
500 성령강림절 신앙과 위선 (눅 13:10-17) [6] 2013-08-25 14773
4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절망 (사 5:1-7) [1] 2013-08-18 11038
498 성령강림절 인자가 오리라! (눅 12:35-40) [5] 2013-08-12 13116
49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 3:1-11) [10] 2013-08-04 10638
49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8936
495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299
494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눅 10:25-37) [19] 2013-07-14 17933
493 성령강림절 나아만과 게하시 (왕하 5:1-14) [6] 2013-07-08 20267
492 성령강림절 제자의 삶과 하나님 나라 (눅 9:57-62) [6] 2013-06-30 16361
491 성령강림절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눅 8:26-39) [15] 2013-06-24 13595
490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17] 2013-06-16 13257
489 성령강림절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왕상 17:8-24) [7] 2013-06-09 16204
488 성령강림절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9] 2013-06-02 14019
» 성령강림절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8] 2013-05-26 14241
486 성령강림절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요 14:8-17) [4] 2013-05-20 15780
485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554
484 부활절 환상을 보는 사람들 (행 16:6-15) [12] 2013-05-06 15089
483 부활절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6) [10] 2013-04-28 16782
482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요 10:22-30) [8] 2013-04-22 13184
481 부활절 나를 따르라 (요 21:15-19) [10] 2013-04-14 20832
480 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14] 2013-04-07 11340
479 부활절 생명과 죽음 (눅 24:1-12) [8] [1] 2013-03-31 16232
478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8824
477 사순절 의식하지 못한 은총 (요 12:1-8) [10] [2] 2013-03-18 15502
476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2] [1] 2013-03-10 17948
475 사순절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 (사 55:1-9) [17] [3] 2013-03-03 26293
474 사순절 예수와 헤롯 (눅 13:31-35) [8] [1] 2013-02-24 15555
473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561
472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8] [2] 2013-02-10 12914
471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2013-02-03 17015
470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8949
469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2013-01-21 23805
468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21737
467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2013-01-07 17963
466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22314
465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2012-12-24 17040
464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2012-12-17 18116
463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21486
462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2012-12-02 17511
461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2011-11-21 18302
460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2011-11-13 23267
45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20104
458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2011-10-30 16907
457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2011-10-23 23097
456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2011-10-17 20150
455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2011-10-09 16830
454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2011-10-02 14714
453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732
452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764
451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641
450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2011-09-05 13354
449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2011-08-29 1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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