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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259 추천 수 0 2013.06.16 21: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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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2:15-21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성령강림절후 제4주, 6월16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과 십자가’라는 오늘 설교 제목을 주보에서 읽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율법이나 십자가는 신약성경이나 설교에 자주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에 낯익기는 한데 일상과는 거리가 좀 멀게 느껴질 겁니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일상은 아주 절절한데 비해서 성서 언어들은 시들합니다. 간혹 성서 언어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그런 단어들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매우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이긴 하지만, 과연 그들이 그런 성서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성서 언어와 삶의 일치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도 성서의 세계를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어떤 분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요한복음을 공부하다보니 당시 기독교인들의 신앙만이 아니라 그들과 대립관계에 있던 유대교인들의 입장도 이해하게 되어 요한복음의 세계가 더 생생하게 경험되었다는 겁니다. 성서 안에는 수많은 신앙적 투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온실에서 곱게 자란 원예 작물이라기보다는 야생에서 다른 풀들과의 경쟁을 통해서 자란 야생화와 같습니다. 무엇을 놓고 경쟁하고 싸웠는지를 알아야만 성서의 세계를 알 수 있고, 그럴 때 성서가 우리 삶의 현실로 다가옵니다.

 

본래 유대인

오늘 설교 본문이 들어 있는 갈라디아서도 신학 논쟁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점잖은 싸움이라기보다는 아예 이단논쟁처럼 과격한 싸움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대립해 있던 이들을 가리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들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갈 1:6-10). 그들은 유대교인들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입니다. 정확하게는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원래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를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들과 여러 추종자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지금은 바울이 그들과 신학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처음에는 당연히 이들과 똑같았습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바울은 무슨 이유로 유대 기독교인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유대인들의 신앙관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갈 2: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여기서 ‘우리’는 자기를 포함한 모든 유대 기독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원래 유대교 전통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민족이라 할 정도로 율법에 매달렸습니다. 율법은 그들의 숙명이었습니다. 율법은 단순히 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모든 것을 규정합니다. 예컨대 소가 이웃집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망가뜨리는 경우나, 성폭력이 발생한 경우도 율법이 대답을 제시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율법의 기본 개념을 간략히 도식화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었던 도식입니다. 이런 도식은 유대인의 율법만이 아니라 바벨론의 하무라비 법전이나 이집트, 또는 로마 제국의 법전에도 그대로 통용됩니다.


바울은 16a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무슨 말인가요?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믿음을 무조건 틀렸다고 보면 안 됩니다. 원칙적으로는 옳습니다. 합리적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법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보면 됩니다. 준법정신이라거나 법치주의라는 말이 다 이런 걸 가리킵니다. 법이 세상을 지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돈을 벌더라도 법을 지켜야 합니다. 불량 식품을 속여 팔면서 돈을 번다면 그는 법의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에 국정원장이 불법을 저질러서 지금 검찰이 그를 국정원법과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했다고 합니다. 법을 엄정하게 지켜야 세상이 정의로워진다는 말은 옳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다시피 했습니다.


하나의 예가 안식일법입니다. 안식일은 지금의 토요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완전히 안식해야만 합니다. 일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불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 걷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면 4,5백 미터는 걸어도 됩니다. 회당에 가기 위해서 걷는 것은 예외 규정을 두었겠지요. 그들은 시행규칙을 만들어가면서 안식일 제도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법으로 강제해야만 사람은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쉴 수 있습니다. 특히 노예 신분의 사람들은 안식일 덕분에 하루를 쉴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최저임금제를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놓고 볼 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법이 세상을 정의롭게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 전통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놀랍게도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거부했습니다. 율법이 정의롭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는 율법의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법은 일시적으로, 또는 표면적으로 정의를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정의를 세우지 못합니다.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실정법이 대한민국은 정의롭게 만들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세계의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미국은 일종의 율법입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세계를 평가합니다. 세계 다른 나라도 그런 현실을 인정합니다. 영어는 거의 세계 공용어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한미동맹을 절대가치로 생각합니다. 지금 미국이 세계를 정의롭게 만들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부분적으로, 표면적으로 정의로운 일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나라 이익에만 충실합니다. 미국이 정의로울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저는 반미주의자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정치적인 발언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신학적인 발언입니다. 바울의 말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중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개인이나 사회나 정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확인시켜 줄 뿐입니다. 둘째, 사람은 아무도 율법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율법 앞에서 절망합니다. 율법이 사람을 조금 괜찮은 사람으로 계몽시킬 수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새롭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극단적으로 주장합니다. 롬 6:7절을 루터 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사람은 의로워진 것입니다. 그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죄를 어떤 파렴치한 행위나 부도덕한 행동 같은 것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는 자기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자기집중, 자기연민, 이기심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예민하게 계산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죽기 전에는 이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와 더불어 사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겁니다. 죽은 사람은 죄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의롭습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이해하고, 또한 여기에 동의하시나요?


여기까지는 유대 기독교인과 바울의 생각이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유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율법을 실천했지만, 바울이 개척하고 목회하던 이방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포기했습니다. 유대 기독교는 복음과 율법의 절충을 추구했다면, 이방 기독교는 오직 복음에만 ‘올인’한 겁니다. 요즘 한국교회 형편과 비교한다면 유대 기독교는 제자훈련을 중요한 신앙의 문제로 간주하는 ‘사랑의교회’라 한다면, 이방 기독교는 그런 것을 거의 배제한 ‘샘터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유대 기독교가 더 옳습니다. 율법 없이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개척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들이 벌어졌습니다.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자유만 누리려고 했습니다. 그게 인간의 일반적인 속성입니다. 그래서 유대 기독교는 바울에게 따져 물은 겁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한 거냐, 값싼 은혜에 떨어져 버린 거냐, 하고 말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갈 2:21a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페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곧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뜻이고, 자기는 그런 비판 앞에서 떳떳하다는 변호입니다.

 

십자가의 절대화

바울은 유대 기독교 측의 비판이 나름으로 일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 문제로 흔들리고 있던 교우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심각하게 고민했을 겁니다. 아무리 복음의 자유가 본질이라고 해도 자기의 입장만 고수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선택이 바람직한가요? 바울은 초심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복음의 자유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21b절에서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만약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과감하다 못해 과격한 표현입니다. 교회 운영의 묘를 살리기 위해서 율법을 보충하는 게 좋겠다는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한 겁니다. 저들의 주장은 결국 예수 십자가의 상대화라고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갈라디아서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유대 기독교인들도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그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똑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이 본질은 아니지만 신앙생활의 현실에서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바울이 받아들였다면 이방 기독교도 역시 토요일인 안식일을 그대로 지켰을 것이며, 할례도 받았을 것이며, 유대교의 몇몇 절기를 그대로 따르고, 돼지고기도 먹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기독교 교파 중에는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그런 게 종교적으로 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런 교파의 사람들도 만족스러워합니다. 바울은 거기서 복음의 본질이 훼손될 위험성이 높다는 사실을 뚫어보았습니다. 실제로 역사가 조금 더 흐른 뒤에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무모해 보일 정도로 복음의 본질에 매달린 바울의 이방 기독교가 역사에 살아남았습니다. 그게 오늘의 기독교입니다. 지금은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우뚝하게 섰지만 바울 당시에는 아주 위태로운 상태에 직면해 있었고, 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순전히 신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은 늘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교회 공동체는 현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신학적인 것은 결국 구체적인 삶과 연결됩니다. 율법을 통한 의는 삶의 완성입니다. 현대인들이 삶의 완성을 어떻게 추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일반적으로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또는 행복한 조건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돈도 좀 잘 벌고, 이름도 내고, 착한 일도 하고, 취미활동도 잘 하고, 스펙도 잘 쌓고, 등등 ... 할 일이 많습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목사의 경우에는 교회를 크게 키우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저 같은 경우라면 한국교회를 위한 스터디 베스트셀러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은 다 필요합니다. 모두 좋은 율법들입니다. 모두 열심히 자기 몫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인생을 걸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의미해집니다.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고, 매일 십자가만 묵상하면서 살라는 말인가, 하고 혼란스러우신가요?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서 육체로 삽니다. 이런 삶은 각각 다 소중합니다. 우리는 땀 흘려야 합니다. 먹고 숨을 쉬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맺어야 합니다. 거기서 당연히 실수도 할 겁니다. 그걸 다 감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20b절에서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은 그런 육체로서의 삶을 믿음의 차원에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영적 실존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빛에서 자기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신앙의 신비가, 즉 존재론적 신앙의 능력이 그 삶에서 현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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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질그릇

June 17, 2013
*.179.180.168

오늘의 기독교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 신학, 십자가 신앙,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것이 모호해서
율법 안에서 안정감을 찾으려는 유혹에 아주 깊이 빠져간다는 생각이...^*^
구체적인 삶으로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 가야겠지요.

어제 예배 가운데서 의미있는 교회 공동체를 경험하면서 기쁘고 감사했답니다.
목사님의 글들 속에서 많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원당 앞마당에 매실나무도 심으셨는지요?
매실을 거두어서 매실액을 담그는 재미도 솔솔 할 것만 같습니다. ㅎㅎ
장마가 온다고 하니 여러가지로 대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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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7, 2013
*.94.91.80

박 목사님,
구체적인 현실의 교회에서는
율법을 완전히 해체할 수 없겠죠.
그렇지만 교회가 복음라고 한다면
가능한 율법 지향성을 최소화해야겠지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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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June 17, 2013
*.164.1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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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의 교회 신자들이 이 설교문을 읽으면 기분 나쁘겠군요 ㅎㅎ
마치 사랑의 교회에서 실시하는 제자훈련을 의롭게 되기 위해서 하는 것처럼 발언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교회와 샘터교회와 직접 비교한 대목은 압권이네요.
까다로운 신자라면 충분히 시비거리가 될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ㅎㅎ
암튼 이 설교문을 읽고 시비를 걸 사람이 있을까 쫌 걱정이 되네요.
저는 은혜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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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7, 2013
*.94.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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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ㅎㅎ 아우님,
지나가면서 한 마디 한 걸
꼭 짚어내셨군요.
설교를 직접 듣고 있던 청중들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더 정확하게 파악했겠지요.
아주 오래 전
옥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글을 썼을 때
"제자 훈련, 가능한가?" 하고 제가 물었는데요.
제자 훈련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닌데,
옥 목사님이 거기에 너무 진을 쏟는다는 뜻으로 썼어요.
어쨌든지 아우님이 은혜를 받았다 하니
괜찮은 설교라고 생각할랍니다.
주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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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Lucia

June 17, 2013
*.111.223.110

"율법을 통한 의는 삶의완성"
그 부분에 대해 가게에 나오면서 남편과 나눴어요
이론적으로는 아는건데 오늘도 추구하는건
돈벌어서..윤택하게 하고..자식에게도 은근 강요하고..
언제나 실제적인 삶에 연결될까요.?
'내가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밖혔나니..."
맨날 외우고 노래를 부르면 뭐합니까..?
목사님 설교는 늘 고민하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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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7, 2013
*.94.91.80

루시아 님의 글은
저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평생 신학교, 교회, 설교, 예배로만 살아온 사람이기에
일반 신자들의 현실을 정확히 모를 수 있거든요.
'자식에게도 은근 강요하고...' 대목에서
루시아 님이 얼마나 솔직한지를 알았습니다.
그 마음이 어떤 건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도록
우리는 강요받았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고하게 십자가에 달린 어떤 분에 대해서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그 자리까지 내려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생각해야합니다.
목사인 저도 그 사실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실패한다고 해도
십자가보다 더한 실패는 없는 거지요.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실패할까 해서 두려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율법은 그걸 늘 두려워하게 만드는 거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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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TRAILBLAZER

June 18, 2013
*.62.150.143

한 가지 질문 있습니다. 갈 5:21절의 '육체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나니'를 어떻게 해석하시나요? 구원이 오직 율법 없는 은혜로 가능하다면 왜 바울은 짧은 6장의  서신서 안에 정반대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을까요? 목사님의 생각은 '무율법주의'와 어떻게 다른가요? 예수님도 율법을 폐하지 않으시고 완성케 하시러 오셨다고 하시고, 세례요한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말하고... 야고보서는 행함 없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고... 새 관점을 따르는 학자들은 '율법의 행위'를 주로 identity markers - 할례, 절기법, 음식규례... 등으로 해석하며, 1세기 유대 기독교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언약적 신율주의에 근거해 언약관계 안에서의 신실함을 보이는 차원에서 율법을 힘써 지키려 했다는 의견에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구원에 getting in 하기 위해 율법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staying in  하려 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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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8, 2013
*.94.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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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RAILBLZER 님,
안녕하세요?
닉을 자판으로 두드리기 힘들어
그냥 트레일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트레일 님은 '한 가지 질문'이 아니라
서로 많은 대화가 필요한 문제를 제기해주셨네요.
아래 대글로 다신 권영경 교수의 갈라디아서 강해도
제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 의견을 드릴 수가 없네요.
그분은 훌륭한 학자니까 좋은 내용일 거라고만 추정합니다.
어쨌든지 위 대글에서 트레일 님이 말씀하시는 질문의 요지는
1세기 유대 기독교인들의 신앙 정체성에 대한 것인가요?
그건 제 설교에서 대충 전달된 것으로 보고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왜 앞뒤 서로 모순 되는 발언을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받아들여야하겠군요.
모순 발언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맥락을 따라가면
그게 자연스러운 발언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게 '아'와 '어'가 다르잖아요.
육체대로 산다고 할 때도,
같은 단어가 서로 다르게 사용됩니다.
영육 이원론이 아니라 하나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나는 육체로 산다.'고 하면 옳은 말이고,
이기심과 본능에만 충실하다는 관점에서
'나는 육체로 산다.'고 하면 잘못된 말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율법은 복음 안에서만 유효한 겁니다.
복음 외에 또 하나의 근거로서가 아니라
복음이 빛에서만 의미가 있는 율법이라는 거지요.
한국교회도 그렇게 말을 하긴 하겠지만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복음과 더불어 율법'을 추구합니다.
성수주일과 십일조가 어느 정도로 강조되는지 보면 그게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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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TRAILBLAZER

June 18, 2013
*.62.150.143

혹시 cbs 성서학당 권연경 교수님의 '갈라디아서' 강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하시는지요?
http://vimeo.com/6068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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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流水不爭先

June 18, 2013
*.173.40.132

정용섭목사님의 설교를 듣다보면
컵안의 공기를 빼내는 방법이 생각 납니다.

보통은 랩을 씌우고 주사기를 꼽아서
공기를 빼내어 진공상태를 만들어가는데
정목사님의 원리는 컵안에 무엇인가가 채워져 공기가 
밀려나가도록 온 몽의 힘을 빼는 무위의 원리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저만의 느낌으로 표현하였읍니다.

율법이 복음안에서만 유효하다는 말씀이
브니엘을 지날 때 야곱에게 비췄던 아침 햇살 같읍니다.
늘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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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8, 2013
*.94.91.80

흐르는 물 님,
잘 지내시지요?
비유가 재미있네요.
평소 저의 지론을 그대로 묘사하셨군요.
성령의 영역이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서
악령의 영역이 줄어드는 거지요.
우리의 힘으로 악령을 몰아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초기 기독교 기독교인들은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그리고 모일 때마다 이렇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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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TRAILBLAZER

June 19, 2013
*.62.150.143

정용섭 목사님, 바쁘실텐데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목사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도바울의 주장이 모순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말은 1세기 유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정체성을 율법 없는 복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목사님께서도 복음 안에서 율법의 효용성을 인정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1세기 유대기독교인들의 신앙정체성은 '바울의 새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언약적 율법주의 또는 신율주의'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종말론적인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언약관계 안에서의 신실함(율법의 내용을 순종)을
보여야 한다는 뜻으로, 참된 구원에 이르는 믿음 안에는 행함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슈는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지금 수정하고자 하는 것이 '율법의 내용 전체'이냐
아니면 '할례'와 같은 복음 이외에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한 요구이냐 인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그 '율법의 행위'가 뉘앙스로는 율법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서신의 정황상 '할례나 절기법'을 가리킨 것이라면
여전히 사도바울은 갈5,6장에서 강조하듯이 사랑에 기초한 율법의 내용을 지켜야 함은
여전히 강조하고 있는 셈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복음'은
'무율법주의'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죠.
'이미 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는 긴장은 상실한 채
모든 책임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명목 하에
자신들에게는 영원한 면죄부를 주고, 내세적인 신앙 뒤에 숨어서
이율배반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오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겁니다.
새언약의 핵심도 율법 없는 구원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그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시는 차원이라는 점에서
옛 언약과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목사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신학적 기반이 '루터란주의'에 빠져 있는 분들에게는
'율법의 내용을 지킬 필요성'에 대한 언급 자체가 불편하겠지만,
성경을 보는 관점은 다양한 것 같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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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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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 님의 생각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한
어느 누구도 율법 없이 살 수는 없는 거지요.
1세기 기독교인들이라고 한다면,
비록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한 것처럼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는 4가지 단서조항 외에는
그 어떤 율법도 강제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솔라 피데'를 외치는 종교개혁 후예들을 포함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율법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니골라당이나 무율법주의는 정통 기독교 안에 발 붙일 수 없는 거지요.
바울의 편지는 아무리 교리적인 걸 다룬다 하더라도
결국 윤리와 도덕적인 가르침을 수반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건 당연하 거구요.
초기 기독교부터 시작해서
중세의 로마가톨릭에 이르기까지
자칫 하면 '칭의' 문제가 둔감해질 수 있다는 게 문제인 거지요.
루터가 이 문제는 아주 정확하게 지적했고,
그 전통을 개신교가 여전히 유지하고 있고,
아마 로마가톨릭교회도 이런 부분에서
상당히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을 겁니다.
이건 더 근본적으로 구원이 아래로부터냐, 위로부터냐와도 연관됩니다.
오직 위로부터 오는 거라면,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비를 맞듯이,
오직, 은총, 오직 믿음에 전적으로 의존해야겠지요.
말씀하신 '언약적 율법주의 또는 신율주의'는 제가 잘 몰라서
뭐라 코멘트 하기는 어렵군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가 건강한 교회 모습일 겁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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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춰니

June 1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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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가끔 mp3로 설교도 듣고, 보고 하면서 
목사님을 정서적으로 가깝게 느끼는, 이를테면 온라인 샘터교회 신자입니다.^^

오늘 설교를 읽으면서,
육체로 사는 이상 자기 안에 갖히는 죄에서 자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듭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빛이, 존재론적 신앙의 신비가 육체로서의 삶을 믿음의 차원에서 살아가도록 
한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니다.(저는 목사님이 사용하시는 용어가 되게 어렵습니다..^^;; 존재론적 신앙의 신비...ㅎㅎ)

저는 목사님 말씀을 코람데오, 혹은 코람 예수크리스토의 삶이 믿음의 차원의 삶을 말하는 것 이라고 이해했는데요,
그게 삶 전체에서 가능한 걸까요? 제 자신을 살펴보니 순간, 혹은 찰나로만 경험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서 질문드립니다.
아니면, 나이가 더 든 후에....그래...내 삶이 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있었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될까요?

여전히 구체적인 삶에서 갈등하고 있기에...
오늘의 설교가 더욱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귀한 말씀...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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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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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샘터교회 신자이신 춰니 님,
안녕하세요?
제가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청중들의 마음을 좀 불편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학자들은 어려운 용어를 쓰지 말라고 권고하지만,
저는 일부러 어려운 용어를 씁니다. ㅎㅎ
일부러는 아니고 필요한 경우에 피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용어 자체에 힘이 있다는 걸 믿기 때문이에요.
당장 전달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 때가 되면
그 용어가 그 사람의 영혼을 깊은 곳으로 끌어간다는 거지요.
예전 예배를 드리는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시청각적이고 감정적인 것에 길들여진 청중들이 낯설어한다고 해도
예전 예배에 담겨 있는 신앙적인 메타포(은유)들이
결국은 청중들의 영혼을 풍요롭게 한다는 생각이죠.
이상은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변명(?)이었습니다.

'존재론적 신앙의 신비'라는 말에는
존재, 신앙, 신비라는 세 단어가 결합되어 있어요. 
간단히 말하면, 
신앙은 우리의 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신비인 이유는 우리의 상식적인 논리를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보충설명이 더 어려워졌나요?
현실 삶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갈등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그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런 갈등을 뛰어넘어
십자가 사건에 우리의 운명을 거는 결단입니다.
십자가의 빛이 강해지면 갈해질수록
우리의 갈등은 더 깊어질 것입니다.
각오하십시오.
그래서 '키리에 엘레이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주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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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15, 2014
*.220.104.49

목사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전의 나는 죽었습니다.  단지 육체가운데서 살아갈 뿐입니다.

찬송가를 입으로 수없이 불렀습니다. 출근하면서 퇴근하면서 그냥 어렴풋하게 알며서 되뇌였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겠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지금까지는 왜 하나님께서 나를 죄를 짓는 운명을 주셨을까 고민해왔습니다. 그럴것이면 그런 운명을 주시지를 말던가...

하나만 알았습니다. 그런 운명을 새롭게하는 길을 터 놓으셨음에도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런 눈을 저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명을 깊게 파헤치는 철학엔 관심이 있었어도 그 뒤에 허탈감, 새로움의 갈망을 늘 안고 살아왔었습니다. 장자를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지만 그렇게 살아란 얘기지 그 이상은 없었습니다. 탄성과 감동이 생명을 주지는 못했었습니다. 아마 수십년간 고민했던것 같습니다. 그게 해결된 느낌입니다. 상쾌합니다. 이런 진리를 목사님은 알고 계시고 전달하시니 존경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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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5, 2014
*.94.91.64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귀로만 듣는데서

온 몸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군요.

우리 삶에도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이 길을 쭉 가도록,

흔들리더라도 다시 길을 바로 들어서도록

주님께서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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