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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

성령강림절 조회 수 21692 추천 수 0 2009.11.02 16: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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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로마서 1:8-17 
 

복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

(롬 1:8-17)


어제 10월31일은 종교개혁일이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에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95개 조항의 신학 논제를 담은 대자보를 내다 건 날입니다. 금년은 492주년 되는 해입니다. 8년 후 500주년이 되는 2017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행사가 많이 열리겠지요. 루터의 신학적 특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에 대한 강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의가 ‘오직 믿음’(솔라 피데)으로 주어진다는 가르침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당연한 가르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 알려면 루터의 가르침을 반대한 로마가톨릭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로마가톨릭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신자의 의가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와 더불어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개신교회가 오직 믿음을 강조한다면 가톨릭교회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를 강조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이 가르침은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믿음의 증거가 없으면 믿음이 오용될 수도 있습니다. 행위는 눈에 보입니다. 행위에서 믿음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말씀이(마 7:17,18) 여기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여기 학생이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말을 합니다. 잘하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게 말로만은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공부하는 걸 보여야하고, 결과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믿음은 말이나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당연히 실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도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거라고 주장했습니다.(약 2:17)

위에서 설명한대로 논리적으로 본다면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도 역시 소중하다는 사실이 분명한데, 루터는 왜 ‘오직 믿음’을 강조했을까요? 우리는 오늘 그 대답을 바울에게서 들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루터의 신앙적 처지가 바울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로마가톨릭교회의 행위 신앙과 투쟁했다면,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 신앙과 투쟁했습니다. 로마가톨릭의 행위는 유대교의 율법과 똑같은 관점입니다. 양자 모두 인간의 행위와 업적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귀중한 통로로 생각했습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루터의 믿음은 바울의 복음이고, 로마가톨릭의 행위는 유대교의 율법입니다. 우선 바울이 율법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로마서에서 따라가 봅시다. 


율법의 무능력

롬 3:2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 구절은 율법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둘째,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할 뿐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만 알면 율법의 정체성을 모두 아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복음이 율법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를 통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어떻게 신앙과 연결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사실을 나누어서 살펴봅시다.

1. 율법의 행위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해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었습니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온갖 종류의 계명이 그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구전 율법도 많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한 시행 규칙도 많았습니다. 유대의 서기관들은 율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그런 모든 신앙 행태를 거칠게 말해서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그 율법주의를 부정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말입니다. 의를 얻는다는 확신으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원래 바리새파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바리새파로 불릴 정도로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진리를 얻기 위해서 평생 구도정진에 애쓰는 수도사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수행을 게을리 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진리에 도달할 사람은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을 겁니다. 바울의 능력 부족이나 열정 부족 탓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율법주의 자체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롬 2:17 이하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지혜로운 영적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말로는 율법을 가르치면서 자기는 율법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도둑질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간음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 실존의 현주소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생각과 실제 삶이 다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상대적인 것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데 비해서 어떤 사람은 어쩌다가 합니다.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교만한데 어떤 사람은 점잖게 교만합니다. 한 사람은 얼굴에 똥이 묻은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겨가 묻었습니다. 그 차이가 물론 중요합니다. 그게 교양인과 문명사회를 만드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런 차이는 너무나 미미합니다. 작은 차이를 갖고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더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거기서 점수를 매겨야 할까요? 그런 점수가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기나 할까요?

바리새인들은 그런 차이에 몰두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언급되었듯이 그들은 세리보다 더 경건하다는 사실에 뿌듯해했습니다. 세리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안식일을 더 잘 시키고, 십일조를 잘 드리고 기도와 구제를 많이 했다는 사실을 자랑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축복을 많이 받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큰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바리새인들의 이런 신앙 태도를 무조건 나쁜 쪽으로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나름으로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그걸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바울은 그들의 자랑거리, 그들의 즐거움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2.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이라는 게 그 대답입니다.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불가능성을 확인해준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율법대로 살 수가 없다는 뜻이지요. 율법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그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도덕적이고 경건하게 살 수는 있지만 완전한 도덕과 경건을 삶에서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삶을 살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물론 죄로 인한 것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자기에게 끊임없이 집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게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고,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런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요? 율법의 요구와 인간의 무능력 사이에서 충돌이 반복될 뿐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받으면 결국 자책감,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율법주의는 곧 죄에 대한 확인입니다.

바울이 두 가지로 설명한 율법의 기능이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반복되고 있지 않을까요? 율법의 행위로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합니다. 조금 이룬 것 같으면 자족하거나 교만해 하고, 자기의 한계를 확인하면 곧 실망하고 절망합니다. 또 다시 율법의 행위를 채우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바울은 그것으로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고, 즉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 문제는 단지 신앙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과 직결된 것입니다. 율법을 실정법이나 윤리, 또는 사회적인 가치로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살아갑니다. 좋은 집과 최고급 생활도구,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삶의 절대적인 가치로 자리했습니다.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려고 애를 씁니다. 모두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 노력으로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런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율법주의에 대한 바울이 비판이 바로 현대인들의 삶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풍요로운 삶의 조건을 마련하고 교양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삶의 참된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대한민국의 법이 질서를 유지시키기는 하지만 이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법으로는 개인과 공동체의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법과 삶의 방식으로 운용되는 이 세상은 조금 진보했다가 다시 퇴보할 뿐이지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율)법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킬 뿐입니다. 


복음의 능력

율법의 행위로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면, 즉 우리의 노력으로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떤 길이 있을까요? 바울은 복음이 바로 그 길이라고 대답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대답입니다. 복음이 바로 구원의 길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바로 구원의 능력입니다. 복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삶의 참된 만족이 복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요? 그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시나요? 남의 말로 남아 있나요? 

바울은 롬 1:16a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말이 조금 관념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일단 여기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를 기억하십시오. 복음, 믿는 자, 구원,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입니다. 이어서 17a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단어는 16절과 중복됩니다. 복음, 하나님의 의, 믿음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의 구원, 또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정리하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믿는 자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복음은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수난, 십자가, 부활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잘 들으세요. 율법으로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는 앞서의 지적이 바로 이 사실과 대비됩니다. 인간 스스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의를 이룰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선행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만 의가 가능합니다. ‘디카이오수네 데우’, 즉 하나님의 의입니다.

왜 의를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의는 옳은 것인데, 그냥 착하고 정의롭게 살면 바로 의로운 사람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착하고 정의롭게 사는 걸 무의미하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착하지도 않고 의롭지 않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이미 율법을 설명할 때 말한 것입니다. 의로운 척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의롭지는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늘 제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한 행동이 정말 옳은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어도 이해하세요.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극악한 범죄자들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법의 이름으로 범죄자를 죽이는 일을 정의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서 보듯이, 법의 이름으로 행해진 사형이 만에 하나 무고한 이를 죽이게 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할까요? 여기 경제적인 도움을 바라는 이웃이 있다고 합시다. 그 이웃은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했습니다. 그를 돕는 것이 정의일까요, 않는 게 정의일까요? 좋은 뜻으로 도와 줄 수 있지만 그렇게 도움 받는 일이 잘못된 습관으로 젖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다음의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디카이오수네 데우가 나타났다는 말은 의가 종말론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의는 종말에 가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지금은 가려져 있습니다. 마치 가라지와 알곡이 뒤섞여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거기서 알곡을 골라내는 작업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기준으로 어떻게 정의를 세울 수 있을까요? 구원이 종말론적이듯이 의도 종말론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이 이해가 되셨지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이 종말론적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사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솔라 피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노력도 없이 그냥 믿기만 하면 의로워진다니, 조금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뭔가 자기희생적으로 의로운 일을 많이 한 사람들 앞에서 시시해 보일 수도 있고, 부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 같습니다. 그는 롬 1:16a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종말론적인 디카이오수네 데우가 현재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믿는 자에게 의와 구원이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창조자 하나님만이 이루실 참된 생명을, 쏜살같이 지나가는 여기서의 삶을 옷 바꿔 입듯이 바꿔 입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200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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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November 02, 2009
*.162.15.230

의가 종말론적이라는 진술을 한국교회에서 누가 이처럼 분명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요?

최근에 복음서를 읽다가 마지막 심판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읽고 한동안 씨름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옥불이 너무나 실제적인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지옥불에 '던져 넣으리라'는 예언이,

단순히 도덕적 계몽을 위한 협박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께 심판의 주도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계시임을 깨닫고서 도리어 평안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누가 악한 자인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알곡과 가라지가 스스로 자신의 속성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결국 의와 불의는 아직 시퍼렇게 살아계신 그 분의 종말론적인 규정에 달렸으므로

그저 존재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의로운 판결을 초연하게 기다리면 되겠군요.

그러고보니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씀이 참 와닿습니다.

 

계속 마을 도서관에서 설교비평집을 꺼내 읽다가 오늘 대형서점에 가서 드디어 소장용으로 3권 구입했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 죽어있던 생각들이 꿈틀대는 것처럼 거듭 읽어도 깨달음이 큽니다.

막연했던 문제의식이 또렷해지는, 마치 스포츠 경기를 보듯이 흥미롭게 관람하는 기분으로 재독하고 있습니다.

이번주 시간상 특강을 놓쳐서 아쉽지만 ㅠㅠ 이번 주일에 꼭 뵙겠습니다. 목사님 11월에도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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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2, 2009
*.120.170.243

김용남 군이 '하나님의 의'가 종말론적이라는 사실만 알아들었어도

신학대학교 학부 4학년 신학도 못지 않은 신학 경험을 한 거라네.

신학생들이 신학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 신학교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라 할 수 있지.

설교비평집 3권을 소장용으로 구입할 마음을 먹었다는 게, 음,

부럽군요.

좋은 한 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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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geunfeel

November 03, 2009
*.156.50.18

목사님 말씀은 앞뒤가 꽉 맞물려 있어서 긴장을 놓을 수가 없네요.

어제는 이해 되지 않았던 말씀들이 오늘 읽으니 조금 와 닿다가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이 종말론적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말씀에서 또 막힙니다.

내일 읽으면 오늘과는 또 다른 이해가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귀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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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3, 2009
*.120.170.243

[레벨:6]geunfeel 님,
[레벨:6]어제 이해되지 않던 말이 오늘 조금 더 이해되다가
[레벨:6]또 다른 말이 걸리곤 하지요?
[레벨:6]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레벨:6]그런 현상이 없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레벨:6]예수 사건과 하나님의 의가 종말론적 지평에서 일치가 된다는 말을
[레벨:6]오늘 보충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레벨:6]다른 것보다도 '종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레벨:6]단순히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이라고만 생각하면 부족하구요.
[레벨:6]그걸 역사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필요하답니다.
[레벨:6]시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레벨:6]미래를 존재론적인 우위에 두는 관점이에요.
[레벨:6]미래를 단절된 시간으로 보면 곤란해요.
[레벨:6]현재를 포함하는 미래라고 보는 게 좋겠군요.
[레벨:6]현재 안에 이미 미래가 들어와 있다는 거지요.
[레벨:6]은폐의 방식으로요.
[레벨:6]예수 사건이 왜 종말론적이냐 하면
[레벨:6]종말에 일어난 궁극적인 생명을 그의 운명에서
[레벨:6]선취적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랍니다.
[레벨:6]그걸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이니까
[레벨:6]오늘은 거기까지 가지는 말지요.
[레벨:6]결론적으로,
[레벨:6]예수 부활이야말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사건이랍니다.
[레벨:6]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의는 없어요.
[레벨:6]이런 설명이 관념적으로 들리시나요?
[레벨:6]그래도 괜찮습니다.
[레벨:6]그 관념이 언젠가 현실로 다가올 테니까요.
[레벨:6]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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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geunfeel

November 09, 2009
*.156.50.18

목사님은 너무 친절하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7]시드니

November 04, 2009
*.45.80.74

 아~~ 간질 간질 간질....


재채기가 날 듯 말 듯한,

피부 속이 가려운 듯한....


알듯 말듯한 간지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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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4, 2009
*.120.170.243

ㅎㅎㅎ

시드니 님,

나도 시드니 님의 대글이

알듯 말듯한 간지러움이 느껴지네요.

아주 좋은 징조랍니다.

신학과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할 때

누구나 그런 간지러움이 느껴집니다.

대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뒤로 물러서거나

그냥 스쳐지나갑니다.

적은 수의 사람들은 안개를 헤집고 달려가지요.

제가 도사처럼 말해 미안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설명한다는 게

이런 방식이 아니면 좀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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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November 06, 2009
*.109.153.2

'예수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종말론적 일치' 일주일내내 맴맴 돌다 진짜 도는 줄....ㅎㅎ

다른 분들의 깨달음이라도 얻어가려고 수시로 들어왔는데 이번 주 따라 영 댓글도 없어서리

"우리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의와 구원은 종말에야 확연히 드러날 것이나 예수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그 복음을 믿기만 하면 그와 같은 의와 구원이 은총으로 우리에게 임한다

종말론적 뿐만아니라 지금 이땅에서 선취적으로..??" 이렇게라도 이해하고 넘어가도 될른지요

 

사실 그 보단 더 궁극적인 궁금함이 있습니다. 행위에 대한 어떤 불안한 마음인 건데요

목사님의 말씀이 다 진리가 아닐수 있다는 가정하에...최소한의 의무행위가 있진 않을 까 해서요

형식에 얽매이거나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하는 어떤 신앙행위는 배제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일 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던 일 즉, 복음 전도자의 사명은 어떤 의무적인 행위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그것으로 인해 늘 죄송함과 죄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전에는 그것 때문에라도

천국가긴 힘들겠다고 좌절한 적도 있고요 지금이야 그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진 않지만 그래도 늘 찜찜하죠

근데 어제 다비안 11월호 마가복음 묵상을 보다가 그중 한부분에서 꽃혔습니다. 요점은 조용한 신앙생활

이었는데요 없는 듯 조용한 교회와 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소금의 역할을 말씀하셨는데 사실

지금까지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그렇게 안들었거든요 세상사람들에게 본이 될만큼 빛을 내고 맛을

드러내는 것이 참 교회요 신자고 그러한 삶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전도의 길이 열린다 더욱이 전도는

거역할 수 없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이땅에 있는 동안 반드시 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다비아에서 많은 다른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지만 그것 만큼은 다른 진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흔히 주변에서 저런 사람도 교회 다니나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걸 보더라도 삶속에서

어떤 행위가 요구되는거 아닌가 하는 그런 마음이 늘 정리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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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6, 2009
*.120.170.243

방랑자 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설교가 어쩌다가 은혜의 자유를 주기보다는

돌게 만들었니까요.

위에서 요약을 잘 하셨네요.

그 의미를 충분히 따라가는 지는 모르겠으니

일단 문장으로는 완벽합니다.

그걸 그냥 한번 외워보세요. ㅎㅎ

행위에 대한 부담감이 크시다구요?

아무리 귀한 일이라 하더라도

부담감으로 온다면 그건 건강한 신앙이 아니지요.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요?

신앙은 우리의 업적, 행위, 자랑, 도덕성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를 확인하는 자리라는 걸 기억해두세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라는 거에요.

오늘 한국기독교인들은 일단 침묵하는 걸 배워야 합니다.

행동도 멈춰야 합니다.

일을 너무 많이 저지르고 있어요.

가만히 입을 다물고 한 자리에 그냥 앉아 있는 게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게 아닐는지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행위를 경험하면

그때 자기가 무엇을 해야할지 눈에 들어올 겁니다.

그때의 행위는 부담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이지요.

오늘 정병선 목사님이 올리신 글

"교회여, 제발 교회되기에 진력하라."가 도움이 되겠군요.

교회가 세상을 수선해서 모양 좋게 만들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일단 교회의 본질에 천착하라는 내용이랍니다.

그게 바로 소금의 존재론적 능력에 참여하는 거지요.

행위로부터의 자유!

복음의 출발점이랍니다.

좋은 가을밤이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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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November 07, 2009
*.205.199.220

조언 감사드립니다. 맞습니다. 사실 이해한건  아니구요 ㅎㅎ 그냥 외우겠습니다.

정병선 목사님의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저의 내공이 부족해서 아직까진 그 의미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관념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말씀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방향성 정도는 알 것 같습니다.

그나 저나 답변이 궁금해서 밤중에 여기 들어 왔다가 다시 또 문제하나 받았네요

"행위로부터의 자유!=복음의 출발점" 먼 말씀이신 건지 참...쩝

일단 이것도 기냥 외우고 봐야 되겠습니다 내일은 안 그래도 하루 종일 피곤한 주일인데 일찍 자야죠

편안한 주일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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