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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부활절 조회 수 12674 추천 수 43 2005.04.10 23:57:39
성경본문 : 베드로전서 1:13-21 
2005.4.10.          
벧전 1:13-21
희망은 기다림이다.

희망의 속성
어제(4월8일) 로마의 바티칸 시국인 교황청이 있는 베드로 성당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왕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거창하게 치르는 영국이나 일본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도 역시 교황의 장례식에 최고의 존엄과 정성을 담았습니다.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수장으로서만이 아니라 세계 정치에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탓인지 수백만 명의 조문객들이 로마로 몰려들었습니다. 평화 티브이에서 보내준 장례미사 실황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미사 집례자들이 한결같이 남성들이었습니다. 남성만 사제가 될 수 있다는 2천년의 전통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궁금합니다. 미사의 마지막 장면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신을 베드로 성당 지하에 있는 교황 묘역에 안치하는 것이었습니다. 티브이는 물론이고 각 나라를 대표하는 조문 사절과 일반 조문객들은 그 자리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그 지하 묘역에 베드로의 무덤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아마 전설에 불과할 겁니다. 저는 장례미사의 끝부분만 잠시 보았는데, 그 광장에 모였던 군중들이 틈틈이 박수를 쳤다는 게 특이하게 보였습니다. 해설하는 어느 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경우는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흡사 무슨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처럼 그들은 짧고 긴 박수를 쳤습니다. 그들이 보낸 박수는 요한 바오로 2세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다는 믿음과 그런 희망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희망은 곧 죽음이라는 경계 너머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쪽 편에서 희망하는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희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희망들은 늘 유한하고 잠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집을 장만해야겠다는 희망은 그것이 성취되는 순간부터 우리를 허무하게 만듭니다. 이런 허무는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것을 열망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전에 우리가 성취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를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참된 희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희망은 죽음 이후와 상관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에서 참석한 사람들은 이런 죽음 이후의 희망을 바라보고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또 하나의 열정이나 욕망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는 그런 희망을 바라본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 기독교 신앙이 자칫 피안주의로 빠져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들은 모두가 헛된 것이니까 포기하고 저 세상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멀리 올라가면 엣세네 파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성속을 구별하는 중세기의 수도승 제도에도 그런 흔적이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 소종파나 정통 교회 안의 일부에서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고 피안의 세계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의 것들은 죽음에 의해서 완전하게 파괴되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일 수 있지만 기독교 신앙은 피안과 차안을 구분하기는 하지만 이원론적으로 구별하지는 않습니다. 죽음 저편의 세계와 죽음 이편의 현실이 상호적으로, 변증법적으로 연관되고 있다는 그 존재론적 신비를 이해해야만 기독교적인 신앙의 실체를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원론적인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무조건 피안적인 희망만을 노래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욕망을 그런 피안적인 희망에 투사시킵니다. 요즘은 이 후자에 속한 신자들이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죽음 이후의 천당을 희망한다면서도 실제로는 이 세상에서 남에게 부러움을 살 정도로 잘 사는 걸 목표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종말이 왔다고 설교하면서도 수백억 원이 소요되는 교회당을 짓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부활 희망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우리가 읽은 편지에서 희망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21절). 베드로는 이미 앞에서 이 희망을 언급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낳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3절). 3절이나 21절 모두 기독교의 희망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죽음이 극복되는 것보다 더 궁극적인 사건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이 분명하기만 하다면, 그래서 그를 믿는 우리도 역시 부활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만 하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파괴되는 그 기초가 해결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우리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믿을만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건 이 세상을 약간이라도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은 믿음만이 이걸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지난주일 설교 시간에도 우리가 한번 언급한 사실입니다만 기독교는 ‘무조건 믿음’에 의지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부활처럼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사건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양자택일을 강요받습니다. 무조건 믿을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할 것인지 말입니다.
저는 이 양자택일이 그렇게 정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합리적 인식능력을 모두 포기하고 무조건 믿는 것만이 기독교에서 중요한 게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요소들을 무조건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도 역시 지혜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과거에 벌어진 어떤 초자연적 사건 자체를 당장 믿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향하고 있는 미래의 생명을 희망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광신도 아니고 과학실증주의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래를 향한 전망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생명형식들이 어떤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바르게 인식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미래적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지금까지 벌어진 사건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의 사건은 아직 증명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열려 있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증명되지 않은 그 미래의 사건에 우리의 모든 삶을 걸어둔다는 게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최후의 사건,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 곧 부활입니다.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난다는 표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이 부활이 곧 미래의 생명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 부활희망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부활은 아직 결정되거나 증명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여전히 열려있는 궁극적 생명이기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무조건 믿는가 부정하는가의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을 재단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옳습니다.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방식으로 밖에는 더 이상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생명 사건이 바로 예수님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는가, 부정하는가에 바로 기독교의 정체성이 놓여 있다고 말입니다. 신약성서는 늘 이런 종말론적 생명을 역사적 예수 사건에서 미리 당겨서 경험했다는 사실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보증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또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기다림의 신앙
베드로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라고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내려 주실 은총을 끝까지 기다리십시오.”(13절).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것은 곧 그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재림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고대인들의 신화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신화적인 사건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묘사했을 뿐이지 실제는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곧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완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그 완성은 곧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부활입니다. 바로 이런 완전한 생명이 우리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삶이 곧 기독교인의 실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궁극적인 생명, 완전한 생명, 곧 부활이 우리에게 임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곧 그 대답입니다. 그 기다림이 곧 희망이며, 희망이 기다림입니다. 생명을 기다리는 희망이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우리가 완성된 어떤 것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완성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어떤 사회적 신분을 얻었거나 도덕적인 업적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잠정적일 뿐입니다. 예술이나 정신적인 깊이에 도달한 사람들도 자신이 어떤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때 매우 높은 경지라는 것도 역시 우리가 기다려야 할 어떤 세계가 있다는 사실만 간접적으로 확인합니다.
삶의 실존이 기다림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생명 형식이 완료된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기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극치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완전한 생명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은 어떨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형식의 모습들,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자손을 낳고, 돈벌고 정치하는 이런 삶의 내용과 형태들은 아직 완전한 생명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왜 꽃과 사람이 이렇게 다를까요? 왜 꽃은 꽃일 뿐이고 사람은 사람일 뿐일까요? 꽃이면서 사람인 존재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이런 생명형식과 조건들은 결코 절대적인 것들도 아니고, 완료된 것들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결국 죽음을 향해서 나갑니다. 단지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이 죽음을 경계로 해서 존재와 비존재를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절대화하지 않고 그 너머의 것을 추구합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처럼 우리는 등불을 들고 그 생명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우리의 부활 희망입니다.

나그네의 두려움
기다린다는 것은 곧 우리의 실존이 나그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곳에 멈추는 게 아니라 어디를 향해서 길을 떠나는 나그네는 긴장을 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아직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각자의 업적에 따라서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은 늘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17절).
우리가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의 판단은 ‘공정’하십니다. 공정하다는 것은 우리의 기준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업적’에 따라서 공정하게 판단하신다는 말을 ‘업적의’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업적은 우리가 판단할 때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나 업적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숨기면서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업적은 곧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서 정확하게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긴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라 할 절대적인 생명 사건에 직면하면 느낄 수밖에 없는 그 두려움은 곧 슈바이처가 말하는 ‘생명경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런 궁극적 생명의 선취이며, 약속의 증거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그런 희망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합니까? 그런 간절한 기다림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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