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해방과 자유

기타 조회 수 13351 추천 수 142 2006.03.05 23:20:25
성경본문 : 누가복음 4:16-21 
2006. 3.5.        
해방과 자유 (눅 4:16-21)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에 비해서 찬양이나 또는 구약을 인용한 구원 시(詩)가 많습니다. 그것은 주로 앞부분에 집중해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46-56절에는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부른 찬양이 나옵니다. 그 찬양의 핵심은 51-53절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1장67-79절에는 세례 요한이 출생한 다음에 그의 아버지 스가랴가 부르는 찬양이 나옵니다. 내용은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입니다. 2장29-32절에는 예수의 부모들이 신생아인 예수에게 정결예식을 치르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므온이 이 어린 예수를 보고 부른 찬양이 나옵니다. 이 주제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입니다. 세례 요한이 공식적으로 예언을 선포하기 시작했을 때 누가복음 기자는 요한의 사명을 3장4-6절에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해서 설명했습니다. 이 말씀의 주제도 역시 모든 사람들의 구원입니다. 이렇게 누가복음은 1-3장 사이에서 마리아, 스가랴, 시므온의 찬양을 진술했고, 세례 요한의 활동에 대해서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전달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찬양과 시가 똑같이 해방, 자유, 구원을 주제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의 예언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제 앞서 인용한 모든 것들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의 찬양과 시는 오늘의 본문을 위한 사전 준비라는 말씀이죠. 모든 복음서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에 들르셨습니다. 당분간 그곳에 묵다가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회당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두루마리 성서를 받아들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예언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61:1,2절에 해당되는 부분을 읽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앞서 읽은 그것인데, 그중에서 중요한 것만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몇 대목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가난은 2천5백 년 전이나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을 가장 황폐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그것은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흡사 괴물처럼 등장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반대로 부자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만약 모두가 가난하다면 가난은 별로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좀 역설적이지만 총체적으로 가난한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 느끼는 가난과 한국이나 미국 사람들이 느끼는 가난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런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는 제가 더 긴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들은 돈이 필요합니다. 가난을 벗을 수 있는 직장이 필요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먹을 게 없고, 적절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것이 시급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건 좀 우습지 않은가요?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만 하면 된다는 건가요?
가난과 복음의 관계는 좀 까다롭습니다. 저도 이 시간에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여러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조금 도움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가난은 가난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훨씬 많은 문제와 결탁해 있습니다. 병을 키우게 되는 것도 역시 가난입니다. 학력이 떨어지는 것도 역시 가난이 원인일 경우가 많습니다. 장애인이 될 확률도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높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냉소적인 표현이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 본문에서 기록된 가난한 사람의 그 상황은 그 뒤로 언급될 모든 불행의 근원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즉 그들에게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그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2.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묶인 사람들을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그 말은 옳습니다. 이유가 어디 있든지 묶인 사람들에게 복음은, 즉 기쁜 소식은 풀려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묶인다는 건 단순히 가시적인 감옥만을 뜻한다기보다는 인간을 결박해버리는 모든 악한 질서를 가리킨다고 보아야겠지요. 인간을 묶는 힘들이 무엇일까요? 앞서 가난의 문제가 그 뒤로 나오는 모든 불행의 뿌리인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렸지만, 가난도 역시 인간을 묶는 세력입니다. 현대인들이 물질적인 억압에 얼마나 심각하게 묶여있는지 제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3.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실제적인 시각장애인들의 고통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 곧 복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눈먼 사람은 실제적으로 육체적인 시각을 잃은 사람만이 아니라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포함합니다. 이런 점에서 삶의 의미를 뚫어본다는 것은 복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의 눈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조금씩 볼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곧 복음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한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4.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억눌린 사람은 아마 그 당시에 노예를 가리킨다고 보아야겠지요. 자기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할 그런 사람의 삶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억눌렸다는 건 단순히 사회구조에서 벌어진 노예의 상태만을 뜻한다기보다는 자유를 상실한 모든 인간의 조건을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억눌린 사람은 앞에 나온 묶인 사람과 비슷합니다. 이 둘의 상태를 구분해서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묶였다는 건 수평적인 억압이며, 억눌렸다는 건 수직적인 억압입니다. 전자는 외면적인 억압구조에 불과하다면 후자는 내면적인, 혹은 내재화한 억압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전자에 비해서 후자는 훨씬 심각한 상태이겠지요. 어쨌든지 우리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인 이 억누름의 상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복음입니다.

은총의 해
위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의 예언에서 4가지 주제를 정리했습니다. 그것은 곧 가난과 복음, 묶임과 해방, 눈 멈과 봄, 억눌림과 자유입니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해방과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바로 해방과 자유가 핵심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 게 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이 해방과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정치, 경제, 문화적인 해방과 자유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해방과 자유까지 포함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선택한 기독교 신앙의 구원도 역시 해방과 자유를 가리킵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도 역시 인간의 해방과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의 예언서를 누가는 19절에 이렇게 요약합니다.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주제, 그리고 그것의 요약인 해방과 자유는 곧 주님의 ‘은총의 해’에 일어날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은총의 해는 곧 희년(year of jubilee)을 가리킵니다.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해, 즉 50번째 되는 해입니다. 희년에는 그동안 인간사회에서 벌어졌던 온갖 왜곡된 구조와 질서가 제자리를 잡습니다. 노예도 해방되고, 팔린 땅도 제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가 양극화라는 특징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아주 복잡한 역학관계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경제에 대해서 문외한이 제가 여기에 대해 코멘트를 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서 어떤 방향만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하게 되는 이 사회현상은 사회학적으로 질병일 뿐만 아니라 성서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자기가 자리하고 있는 그곳에서 이런 구조적인 병든 질서를 바로잡는데 일익을 감당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해방과 자유를 실질적으로 선포하지 않는다면 칼 마르크스가 비판했듯이 기독교는 민중의 의식을 잠들게 하는 아편으로 기능할지 모릅니다.
최소한 상식이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교회가 이런 희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동의할 겁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서로 부분합니다. 해방과 자유를 정치, 경제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해방신학과 흑인신학과 민중신학이 그런 입장을 대변합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무장투쟁까지 감행하는 쪽도 있습니다. 또 다른 입장은 해방과 자유의 주체인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며, 그런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투쟁과 소극적인 기다림의 태도는 기독교 신앙의 두 얼굴입니다. 이 땅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열정이 필요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결정적인 대답을 모릅니다. 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성서가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사회과학이든지 아니면 개인의 종교적 경험에 머물지 않고 성서의 고유한 영적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희년의 현실화!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신 다음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해방과 자유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 과연 옳습니까? 이 세상에는 여전히 옥에 갇힌 사람, 눈 먼 사람, 억눌린 사람들이 많은데, 해방과 자유가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괜찮은 겁니까?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은 가시화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것으로, 혹은 이미 성취된 것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아직(not yet)과 이미(already)의 긴장에서 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처음 만난 젊은 남자와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첫 눈에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직 그들은 모르는 게 많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이라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팝송 중에서 이런 가사가 있던가요? “You mean everything to me.”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한 겁니다. 아직 실제적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것을 미리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이와 비슷합니다. 희년의 내용인 해방과 자유가 이 역사에서 아직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실증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또는 이 역사를 기계적인 발전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이런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순수 이성의 눈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게 남녀의 뜨거운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해방과 자유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기독교 신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믿습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증언하고 있는 ‘이 자리’는 무엇을 말하나요? 그 자리는 예수님이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을 선포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사야의 예언이 현실화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야말로 곧 해방과 자유가 현실화하는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너무 종교적 관념으로만 이해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해방과 자유를 매우 심층적으로 이해한 데서 나온 매우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고난, 그의 행위, 그의 가르침, 그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운명이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하게 하는 근원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운명 전체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기자와 함께 그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걸 경험한 사람들은 해방과 자유가 이웃에게도, 이 사회 안에도 구체화할 수 있도록 투쟁하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profile

[레벨:8]김인범

March 06, 2006
*.146.246.7

희년의 현실화가 곧 신앙생활이군요.

받은 구원의 내용을 분명히 이해하고
그러기에 그것을 오늘 우리의 삶에서 누리며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든지
그야말로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된거군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자기 배를 채우는 것으로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으로
그 때, 초대 교회의 그 모습처럼
필요한 자들에게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교회들에서 보여야 할텐데
실은 오늘날의 양극화가
가장 결정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는 곳이 교회이기도 하기에
이 해방과 자유가
이미 이루어진 우리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되는데....

큰 규모의 교회는
그것이 성공이라고 세습까지 하며
작은 규모의 교회도 역시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얽매이는
희년이 현실화 한
그래서 어떤 규모와도 상관없이
가장 해방스럽고 자유로워야 할 교회가
오늘은 전혀 교회 답지를 못한 모습입니다.

하긴
그것, 곧 복음의 복음 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규모와 상관없이
결코 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앙 역시 세상의 삶과 다를 바가 없겠지요.

어쨌거나
귀한 깨우침에 감사드리고
부족하지만 그런 삶을 함께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7, 2006
*.249.178.29

오늘 우리가 이 양극화 현상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점이
교회의 영성을 판단할 수 있는 바로미터일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교회가 경제 문제의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신앙적 담론으로 승화시킬 필요는 있습니다.
해방과 자유의 영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오늘 이 양극화 현상이 인간 삶을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하는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개교회 목사 한 사람이 대처하기는 힘들고
교단이나 한국교회 전체가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대처해야겠지요.
조금 시간을 기다리면 그럴 때가 오지 않을까요?
그때를 기다리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맡은 소임을 잘 감당하는 게 최선이겠지요.
함께 가십시다. 이 길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560
451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662
450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2011-09-05 13366
449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2011-08-29 14700
448 성령강림절 건지시는 하나님 (출 2:1-10) [14] [1] 2011-08-22 15763
447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에 관한 이야기 [10] 2011-08-15 16463
446 성령강림절 구원의 차별성과 보편성 [20] 2011-08-07 13898
445 성령강림절 다리 저는 야곱 [10] 2011-07-31 14487
444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2011-07-24 17518
443 성령강림절 악을 대하는 태도 [20] 2011-07-18 14000
442 성령강림절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14] 2011-07-10 13417
44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8] 2011-07-04 15952
440 성령강림절 아들을 바쳐라! [17] 2011-06-26 14243
439 기타 세례를 베풀라 [8] [2] 2011-06-20 11625
438 성령강림절 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13] 2011-06-12 24671
437 부활절 하나님의 영광이 답이다 (벧전 5:6-11) [15] 2011-06-07 14780
436 부활절 부활은 심판이다 [12] 2011-05-29 13844
435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12] 2011-05-22 19011
434 부활절 예수의 기이한 빛 (베드로전서 2:1-10) [16] 2011-05-16 20131
433 부활절 눈이 밝아진 그들 [11] 2011-05-08 15971
432 부활절 부활의 증인 공동체 [17] 2011-05-01 22499
431 부활절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17] 2011-04-24 19674
430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8096
429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2011-04-11 17117
428 사순절 빛의 자녀, 빛의 열매 [25] 2011-04-03 23415
427 사순절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18] 2011-03-27 19954
426 사순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13] 2011-03-21 19091
425 사순절 생명의 왕국 [5] 2011-03-13 15900
424 주현절 메시아는 비밀이다 (마 17:1-9) [17] 2011-03-07 16712
423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2] 2011-02-27 16978
422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16] 2011-02-22 18857
421 주현절 하나님이 생명이다 [10] 2011-02-15 17143
420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2011-02-06 17305
419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다 [3] 2011-01-30 20800
418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7] 2011-01-23 16770
417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8340
416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4] 2011-01-09 18805
415 성탄절 그리스도 찬양 [11] 2011-01-02 15863
414 성탄절 은총의 깊이로! [14] 2010-12-26 23637
413 성탄절 영광과 평화의 노래 2010-12-26 21719
412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file [8] 2010-12-20 19092
411 대림절 "당신은 메시아인가?" file [10] 2010-12-12 16105
410 대림절 소망의 하나님, 우리의 소망 file [5] 2010-12-06 21890
409 대림절 인자가 오리라 file [8] 2010-11-28 18249
408 성령강림절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file [12] 2010-11-22 21778
407 성령강림절 새로운 창조의 하나님 file [9] 2010-11-14 13776
406 성령강림절 죽음, 삶, 하나님 file [13] 2010-11-07 14068
405 성령강림절 믿음과 구원 file [4] 2010-10-31 21059
404 성령강림절 영과 구원 file [9] 2010-10-24 13459
403 성령강림절 기도와 믿음 file [20] 2010-10-19 22396
402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file [6] 2010-10-10 16698
401 성령강림절 믿음과 종됨의 관계 file [18] 2010-10-04 19071
400 성령강림절 하나님은 누구인가? file [8] 2010-09-26 19122
399 성령강림절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다! file [5] 2010-09-20 14845
398 성령강림절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 [20] 2010-09-12 16582
397 성령강림절 토기장이 하나님 [11] 2010-09-06 26539
396 성령강림절 안식일과 해방 [10] 2010-08-22 17137
395 성령강림절 주는 우리의 평화! [19] [1] 2010-08-16 15779
394 성령강림절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8] 2010-08-09 19504
393 성령강림절 생명과 소유 [8] 2010-08-02 15427
392 성령강림절 음란한 여자와 결혼한 호세아 [21] [1] 2010-07-25 34683
391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16] 2010-07-19 18318
390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16] [2] 2010-07-11 17130
389 성령강림절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가? [8] [1] 2010-07-05 26596
388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17] 2010-06-27 24408
387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라 [10] 2010-06-21 14303
386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신앙 [19] 2010-06-13 15701
385 성령강림절 한 말씀만 하소서 [17] 2010-06-07 18767
384 성령강림절 지혜의 영, 창조의 영 [7] 2010-05-30 16331
383 성령강림절 성령경험과 구원경험 [2] 2010-05-23 14486
382 부활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3] 2010-05-17 12443
381 부활절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12] [3] 2010-05-09 14255
380 부활절 창조의 위기와 구원 [10] 2010-05-03 15791
379 부활절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 [27] [2] 2010-04-25 16753
378 부활절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 [4] [1] 2010-04-18 13216
377 부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14] 2010-04-11 14001
376 부활절 새 창조와 새 생명 [4] 2010-04-05 14326
375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11] 2010-03-29 20398
374 사순절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27] 2010-03-22 19107
373 사순절 축제의 능력 [5] 2010-03-15 13026
372 사순절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 [2] 2010-03-08 20495
371 사순절 아브람의 거룩한 두려움 [8] 2010-03-01 14626
370 사순절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 [8] 2010-02-22 27892
369 주현절 주는 영이시다 [3] 2010-02-15 13043
368 주현절 거룩한 생명의 씨 [10] 2010-02-08 16096
367 주현절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15] 2010-02-01 15348
366 주현절 교회 일치의 신비 [11] 2010-01-25 15610
365 주현절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 [17] 2010-01-18 18858
364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8173
363 성탄절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 [21] 2010-01-04 15937
362 기타 세겜의 약속을 기억하라 [9] [1] 2010-01-01 17910
361 성탄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2009-12-28 23577
360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와 구속 2009-12-25 16693
359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몸’ [8] 2009-12-21 15430
358 대림절 성령 세례와 심판 [36] 2009-12-14 20625
357 대림절 주의 날과 십일조 [49] 2009-12-07 19852
356 대림절 그 날이 임하리라! [17] 2009-11-30 15986
355 성령강림절 구름기둥과 불기둥 [25] 2009-11-23 30075
354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2] [1] 2009-11-16 12514
353 성령강림절 신앙경험은 새롭게 '봄'이다 [18] 2009-11-09 16953
352 성령강림절 복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 [10] 2009-11-02 2171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