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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기타 조회 수 10716 추천 수 107 2006.06.25 14:33:08
성경본문 : 사무엘상 8:1-22 
http://wms.kehc.org/d/dabia/06.06.25.MP32006. 6.25. 삼상 8:1-22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국가주의
지금 FIFA 월드컵 대회가 한창입니다. 어제 새벽에 열린 한국과 스위스 전은 0대2, 한국의 패배로 끝났고, 같은 조의 프랑스와 토고는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달리 2대0,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결국 우리는 1승1무1패, 승점 4점으로 승점 7점의 스위스와 5점의 프랑스에 이어 3위에 머무르는 바람에 16강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응원을 했다고 합니다. 대도시 광장과 대학교 운동장 등에 수만 명씩 모여 밤새도록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습니다.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축구 자체가 주는 흥미와 스포츠를 기업적으로 이용하는 국제 자본도 한몫 톡톡히 했을 겁니다. 이것과 아울러 민족주의가 그 모든 것의 뿌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4년 전의 월드컵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대-한민국, 짝짜악짝 짝짝!”하는 구호가 지난 2주간 동안 대한민국 땅은 물론이고 한국 사람들이 사는 곳이면 세계 모든 곳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민족과 국가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전 세계 사람들을 열광으로 몰아넣는 걸까요? 이런 민족주의, 국가주의는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가장 강력한 패권을 행사하는 미국을 비롯해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까지 자신들이 속해 있는 국가에 맹목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민족과 국가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확보해 준다는 점에서 이런 현상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같은 역사를 경험했다는 건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동질성의 기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배타적인 국가주의로 발전하면 국가와 국가 사이에 과도한 경쟁이 유발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한 개개인들의 삶도 결국은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결과들을 우리는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과 일본의 천황주의에서 발견합니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국가가 없으면 어떨까요?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국가는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없어도 우리가 우리말로 이야기 하고, 밥을 먹고, 서로 웃고 울며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물론 국적이 없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불편한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겪는 억울한 일들은 바로 그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국가주의가 현대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겠지만 그것에 지배당할 필요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성서 말씀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특히 배타적 국가주의는 왕정시대의 출현 이후에 강화된 현상이라는 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왕을 요구하는 민중
사무엘이 제사장이요, 예언자요, 사사로 활동하던 시대에 민중들이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민중의 대표자들인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주장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늙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르지 않으니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5절) 그 앞 구절을 보면 사무엘의 아들인 요엘과 아비야는 아버지 덕분으로 사사 직을 얻었지만 “제 잇속만 차려 뇌물을 받고는 법대로 다스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식 교육은 억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사무엘이 자식 농사에는 실패를 했군요. 그의 스승이었던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개망나니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중들의 요구는 아주 분명하고, 나름으로 설득력도 있습니다. 사무엘은 늙었고, 그 아들들에게는 지도력이 없고, 주변 나라에는 강력한 왕들이 있었으니까 그들의 마음이 아무래도 불안했겠지요. 사무엘로서는 기분이 나빴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그들에게 내색은 못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사무엘은 이런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중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사무엘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라는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로 반복해서 우상숭배에 떨어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왕을 세우기 전에 왕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게 될는지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10-18절 사이의 내용은 바로 왕정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설명입니다. 왕정시대가 민중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핵심적으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상비군의 조직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 주겠다. 그는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그 당시에 병거대와 기마대는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부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나라의 그런 부대를 보고 부러워했겠지만, 그래서 왕을 세워달라고 했지만 자기 아들들을 그런 부대에 보내야만 했습니다. 둘째는 딸들을 왕궁의 시녀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왕궁을 왕궁답게 유지하려면 강제적으로라도 민중이 딸들을 데리고 와야만 했습니다. 셋째는 세금 납부입니다. 15-17절 말씀을 보십시오. “곡식과 포도에서도 십분의 일세를 거두어 자기의 내시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의 남종과 여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좋은 소와 나귀를 끌어다가 부려 먹고 양떼에서도 십분의 일세를 거두어 갈 것이며, 너희들마저 종으로 삼으리라.”
위에서 제시된 세 요소는 고대 왕정시대의 상황에 대한 묘사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젊음을 군대에서 보낸다는 건 삶을 소비하는 것이겠지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운영하기 위해서 국민들은 많은 세금을 내야 합니다. 오늘에도 많은 사람들이 국가 시스템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국가가 개인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도 가능하기는 합니다. 이런 주장은 이미 우리가 국가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어쩌면 현대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라는 중국 속담처럼 더 이상 국가 없이는 지탱하기 어려운 시대로 넘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런 문제점들을 전해들은 이스라엘 민중들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 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 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의 요구는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왕이 없는 나라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으니까 반드시 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5절 말씀에 따르면 사무엘이 늙었고, 그 아들들이 성실하지 못하다는 게 그 이유였지만, 이제 20절에서는 그런 사사로운 차원을 넘어서서 국가 경쟁력 제고를 그 이유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왕을 요구하는 동기가 서로 다른 이유는 이에 관한 전승들이 약간 씩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어쨌든지 20절이 전하고 있는 민중들의 요구는 아주 절실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의 요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민중들은 자신들의 국가도 주변의 강대국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20a) 그들 주변에 있는 이집트, 아시리아, 심지어 가나안 원주민들도 모두 강력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농사와 부의 축적을 통해서 이룩한 고도의 문명과 군사력과 사회 시스템이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미디안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가나안에 입성한 후에도 원주민들과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인해서 나라를 발전시킬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약소국가로 남아있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왕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잘 살고 싶다는 요구입니다. 우리도 떵떵거리고 싶다는 요구입니다.
둘째, 민중들은 강력한 지도자 밑에 안주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를 다스려 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 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20b) 절대권위를 확보한 지도자는 바로 민중들의 우상입니다. 왕은 민중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그런 권력이 필요하고, 민중들은 그것에 복종하기 위해서 그런 권력자를 인정합니다. 왕과 민중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심정으로 절대 권력을 추구했습니다.
현대국가에서는 고대사회와 같은 의미의 왕은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결코 자기 자리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자본이 왕입니다. 현대인들은 재벌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권력을 흠모합니다. 거대자본이 한국사회를 구원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중들이 고집을 부린 것처럼 마음껏 개인의 자유를 누리는 현대인들도 역시 절대 자본을 통해서 우리나라도 잘 살게 될 것으로 보고, 그 자본에 기꺼이 복종하려고 합니다.

야훼의 허락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중들의 요구를 확인한 사무엘은 야훼 하나님께 다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약 왕을 세우는 것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파괴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막아야만 했을 텐데, 사무엘은 대세를 받아들입니다. 그는 어떤 응답을 받았을까요? “그들의 말대로 왕을 세워 주어라.”(22a) 야훼도 역시 민중들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대답하셨다는 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역사를 통해서 야훼의 뜻을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들은 민중의 요구대로 역사가 흘러간다고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민중들의 요구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왕정정치가 몰고 올 결과가 바람직스럽지 못하지만 민중들이 그걸 요구하면 야훼 하나님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민중들과 대결해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만한 능력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민중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억지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선악과 사건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는 즉시 죽는다고 말씀하실 수는 있지만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먹지 못하게 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흘러갈 수 없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늘 이런 방식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다른 나라보다 강력한 나라가 되는 걸 모두가 원하는 마당에 누가 이걸 마다할 수 있나요. 이라크를 공격해서라도, 미국을 건드렸다가는 큰코다친다는 걸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 하는 미국을 누가 말릴 수 있나요.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바르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모두가 귀를 막고 있는 마당에, 대학들도 이미 기업 마인드로 운영되고 있는 마당에 어디서 경제정의와 분배정의, 지속가능한 생태에 관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그런 힘이 이 세상을 끌어갈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은 하나님도 못하십니다. 아니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은 그렇게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며, 그것은 곧 역설적이지만 야훼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도 대중의 요구가 모든 걸 결정하는 포퓰리즘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인기 있는 설교자는 대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솔깃하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제 대중들의 소비상품이 되었습니다. 대형 슈퍼마켓에 가서 마음에 드는 상품을 고르듯이 다양한 종교상품이 진열된 교회를 기웃거리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소비’입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는 책에서 미국교회의 신앙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북미 신앙은 근본적으로 소비자 중심의 신앙이다. 미국인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생산품 정도로 여긴다. 자신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존재 정도로 생각한다. 그런 시각으로 미국인들은 마치 소비자처럼 가장 좋은 제품을 찾기 위해 쇼핑한다.”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그리스도교적 영성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본이 왕처럼 지배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나요? 야훼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다시 새겨보십시오. “그들의 말대로 왕을 세워 주어라.” 하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역사에 은폐의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눈여겨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만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은 가능합니다. 오늘의 역사는 민중의 요구에 의해서 저질러진 십자가이지만 내일의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부활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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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로

June 25, 2006
*.126.215.210

한국 그리스도교가 포퓰리즘 성향이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예언자적인 설교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대중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들이 인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복음주의적인 설교를 하신다는 분들도 실제로는 우향우 설교로 정치성이 담긴 설교, 진보신학을 단죄하면서 막연히 말씀대로 살라고만 하는 정말 막연한 설교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는 김동호 목사님이나 전병욱 목사님이 인기스타인 것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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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Aslan

July 16, 2006
*.225.157.27

'하나님의 통치 방식' 놀랍고 또 두렵습니다.
하지만 설교의 마지막 문장이 큰 힘이 되는군요...
내일의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부활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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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성탄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2009-12-28 23587
360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와 구속 2009-12-25 16707
359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몸’ [8] 2009-12-21 15461
358 대림절 성령 세례와 심판 [36] 2009-12-14 20645
357 대림절 주의 날과 십일조 [49] 2009-12-07 19876
356 대림절 그 날이 임하리라! [17] 2009-11-30 16005
355 성령강림절 구름기둥과 불기둥 [25] 2009-11-23 30080
354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2] [1] 2009-11-16 12519
353 성령강림절 신앙경험은 새롭게 '봄'이다 [18] 2009-11-09 16956
352 성령강림절 복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 [10] 2009-11-02 2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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