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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영성

기타 조회 수 12326 추천 수 139 2006.09.17 20:26:57
성경본문 : 시편 104:1-24 
2006. 9.17. 시편 104:1-24
창조 영성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특징은 죄론의 강조입니다. 세례문답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죄인이라는 고백과 아울러 예수의 보혈을 통한 죄 씻김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죄 문제가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서의 증언이고, 둘째는 우리의 실제적인 죄에 대한 경험이며, 셋째는 죄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리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사건 이후로 모든 인간에게는 이런 죄가 유전된다는 교리가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중을 정치적으로 억압하려는 중세기의 황제와 교황 체제가 한몫 했겠지요.
어쨌든지 죄 문제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구성요소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벌어지게 된 신앙의 왜곡 현상은 매우 심각합니다. 죄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칙칙하든지 아니면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죄는 그것 자체로 존재론적인 근거가 있는 건 아니라 훨씬 중요한 어떤 사실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입니다. 그 사실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이지 우리의 모습에서 은총의 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죄의 어둠은 강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왜곡된 신앙이 제 자리를 잡으려면 은총의 세계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들어가는 문은 창조 영성입니다. 사도신경의 첫 항목을 기억하시겠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매 주일 이런 신앙고백을 드리면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창조 신앙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도대체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냐, 하고 생각하고 맙니다.  

창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시편 104편은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묘사된 창조 신앙문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야훼, 나의 하느님, 실로 웅장하십니다. 영화도 찬란히 화사하게 입으시고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고”(시 104:1,2) 시편기자의 눈에 하늘은 이 땅을 안전하게 지키는 차일처럼 보였습니다. 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땅을 주춧돌 위에 든든히 세우시어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고대인들은 지구가 둥글다거나 태양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기둥이 땅을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비록 그들의 우주관이 미숙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그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만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야훼 하나님을 찬미하라고 외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고대인들의 창조 신앙이 오늘과 같은 과학, 정보, 유전자, IT시대에도 설득력이 있을까요? 진화론 논쟁을 촉발시킨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로 오늘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더 창조론의 위기가 닥친 것 같습니다. 150년 전의 진화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진화론은 한정적으로, 어떤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에 관한 생물학적, 지질학적 연구였을 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진화론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만 했다면 그렇게 큰 논란거리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오늘의 과학기술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창조론을 위협합니다. 이미 유전자 변형 식품이 유통되었다거나, 앞으로 배아복제 기술을 통한 인간복제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실제적인 문제도 심각하기는 하지만, 인간 자신이 이 세상과 삶의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훨씬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 확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신비를 놓치고, 결국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더 이상 쓸모없는 뒷방 늙은이나 아니면 퇴물 기생처럼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의 이런 기술만능주의는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비하면 우리의 기술은 흡사 어린아이들의 장난감과 같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이 시간에 길게 설명할 생각이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건 그냥 눈에 들어옵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말씀드린다면, 인간은 자신들의 기술이 기본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장 일상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동물처럼 빨리 달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간은 자동차를 발명했습니다. 놀라운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자동차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편리해지기는 했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 때문에 죽고, 장애인이 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런 현상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는 반문명론자도 아니고 기술 폐기론자도 아닙니다. 다만 그런 힘들이 우리의 모든 삶을 완전히 지배해가는 이런 흐름을 위험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인간의 과학 기술은 그것보다 훨씬 근원적인 하나님의 창조 안에 움직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단순히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이 아니라 이 세계를 무엇으로 보는가 하는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고, 땅을 주춧돌 위에 든든히 세운다는 성서기자의 노래가 바로 그런 세계관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세상이 든든하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바로 세상에 대한 신뢰와 긍정으로 이어집니다.

세상
시편기자는 하늘, 땅, 그리고 바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합니다. 그 세계가 든든하고, 질서가 있으며,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의 삶이 자연스럽습니다. 모든 식물과 동물과 어류들이 제 각각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세부적인 묘사를 제가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10-13절 말씀만 읽어보겠습니다. “계곡마다 샘물을 터뜨리시어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나니 들짐승들이 모두 마시고 목마른 나귀들도 목을 축입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가까운 곳에 깃들이고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귑니다. 높은 궁궐에서 산 위에 물을 쏟으시니 온 땅이 손수 내신 열매로 한껏 배부릅니다.” 시편기자는 계곡, 샘물, 산, 짐승, 새, 비, 열매 등등의 단어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풍성한 생명을 노래합니다.
아마 이 세상을 시편 기자와는 전혀 다르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이 세상은 척박하고, 질병이 많고, 노동의 땀을 흘려야 하고, 죄가 많다고 말입니다. 사막과 광야에는 먹을 게 없고, 자연재해로 인해서 많은 사람과 생명체가 죽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재앙을 막기 위해서 인간은 온갖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도 가능합니다. 옳습니다. 저도 의학을 통해서 인간이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하고, 아파트를 지어 집 없는 사람들에게 공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를 신뢰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신뢰와 긍정의 눈을 가진 사람은 사막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비록 홍수와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가득한 생명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과학기술에 종사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향한 신뢰를 그 바탕에 둘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신뢰와 긍정이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단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인간 삶의 편리를 위해서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하나의 죽어있는 사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에게 이 세상은 죽어있는 사물이거나 우리가 이용해야 할 대상이거나, 더 나아가 우리를 적대하는 악의 원천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은 모든 생명들이 나름의 생명을 향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온갖 생명들이 어울리는 잔치 자리요, 축제 장소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심지어 포악한 바다고기를 대표하는 ‘레비아단’까지도 귀엽게 바라봅니다.(26b절) 얼마나 놀라운 영성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생명의 보고입니다. 시편 기자의 이런 묘사는 단순히 낭만적인 생각이거나 자연주의자의 생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신비주의자라고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와 사물들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가능한 세계관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신비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생명의 토대로 보는 것입니다. 농사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생명의 질서에 참여하는 거룩한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창조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제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런 창조의 영성을 확보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물적인 토대가 강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위해서 그것이 전혀 투자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단지 교회 공동체의 확장에만 모든 에너지가 반복 투자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창조의 영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영성을 확보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 천착하는 게 가장 바른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도 그런 과정이겠지요.
저는 앞에서 시편 기자가 이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창조를 신뢰하고 그 신비를 통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창조영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편 기자의 이 신앙에서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인간입니다. 창조 및 세상과 연관해서 시편기자에게 인간은 무슨 존재일까요?

인간
본문 11절부터 22절까지 잘 보십시오. 여기에는 수많은 동식물들이 등장합니다. 들짐승, 나귀, 새들, 짐승, 포도주, 기름, 양식, 송백, 황새, 오소리, 온갖 짐승, 사자들이 제 각각의 역할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달과 해도 이런 전체 생명 질서의 한 대목입니다. 21-23절을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사자들은 하느님께 먹이를 달라고 소리 지르며 사냥을 하다가도 해가 돋으면 스스로 물러가 제 자리로 돌아 가 잠자리 찾고, 사람은 일하러 나와서 저물도록 수고합니다.” 시편 기자의 노래에 따르면 인간도 역시 다른 동물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창조의 생명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숲 속의 사자가 먹이를 잡고 있을 때 인간은 자고, 사자가 숲으로 돌아갈 때 인간은 노동합니다. 노동의 시간과 방식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는 결국 하나님의 창조에 상응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도 기본적으로 다른 생명체와 똑같이 이 세상, 즉 하나님의 창조 사건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라고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일하러 나와서 저물도록 수고합니다.”(23절) 시편기자의 인간이해입니다. 하루 종일 노동해야 하는 존재가 곧 인간인데, 이것은 다른 동물도 똑같습니다. 사자가 사냥을 하듯이 인간도 노동하고, 사자가 먹어야 하듯이 인간도 먹어야 하고, 그들이 배설하듯이 인간도 배설해야 합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똑같다는 말이냐, 기분 나쁘다, 억울하다,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오늘 우리는 인간이 특별하다는 생각으로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넘칠 정도로 생산하고, 과소비하고, 심지어는 대량살상무기를 만듭니다. 시편기자가 묘사하고 있는 그런 창조의 세계와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곧 창조의 훼손이 아닐까요?
물론 하나님이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들과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적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인 ‘루아흐’는 바로 생명의 영입니다. 우리가 영적이라는 말은 곧 이 세상에서 생명 지향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인간을 포함한 모든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계 안에서는 인간만 중요한 게 아니라 모든 생명들, 강과 산까지 모든 것들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은 시편 기자가 1절과 마지막 35절에서 노래하듯이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하는 영혼의 노래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24절 참조) 이 세상을 창조하신 야훼 하나님과 그가 창조한 세상을 신뢰하고 긍정하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생명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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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September 17, 2006
*.150.14.162

엠피쓰리 작동 착오로
오늘 <설교듣기>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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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박 진

September 21, 2006
*.76.3.34


정목사님!
이번 주 설교제목을 보고 또 본문을 읽어가면서 문득 매튜폭스의 '창조영성'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 동안 아우구스티누스이래로 그리스도교 신학과 세계관을 지배해오던 타락/구속의 패러다임에서
소외되어 왔고 간과되어왔던 창조와 원은총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전환을 촉구하는
그의 목소리는 여러모로 불안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기존의 것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당대의 시대의 변화에 대한
성실한 신학적인 응답의 산물인지 아니면
김순현 목사님의 까페에서 어느 분의 글처럼 전통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가
혹여 좁아지지는 않는지에 대한
불안한 자기검열의 두려움이 제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덧 잠시 몸담고 있는 이곳 독일의 작은 대학도시에도 가을이 찾아 왔습니다.
자연과 환경에 대한 남다른 자각과 관심을 가진 이곳 독일사람들 덕분에 온 도시가 산림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지나친 과장이 아닐 이곳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콘크리트와 매연으로 인해서 회색 빛이 감도는 대도시에서만
살았었던 제게 이곳의 푸른 녹음은 찬탄과 경외의 대상 그 자체였었습니다
.
그러나 낯섦이 익숙한 일상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새로울 것도,더 이상 흥미로울 것도 없는
무덤덤한 풍경 그 자체가 되더군요.
어쩌면 그것이 무한한 은총의 선물을 곁에 두고도 늘 새로움과 낯섦을 찾아 헤맬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라고 비약해도 될련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온 세상에 충만한 하나님을 보기 위해,그 생명을 경험하기 위해
영적인 감수성이라고 새겨 볼 만한 'Mystik'으로 귀결이 되는 걸까요?
그것이 전통적인 정화와 조명과 일치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든 아니면
폭스가 언급하는 구도처럼 긍정과 부정 창조와 변형의 네 가지 길이든
삶과 일상과 자연의 곳곳에서 생명의 기운으로 일하시는
그분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동참하기 위해서는 아직은 제게 모호하기 만한
‘Mystiker’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몇 해전 돌아가신 죌레의 고백을 곱씹어 봅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만을 알다가,
아우슈비츠 경험 이후 신의 죽음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 대리자로서의
예수의 정치적 삶을 추종하다가,
뒤늦게 여성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면서 하느님의 여성성(어머니)을 새로이 느끼게 되었고
지금 일흔을 넘긴 나이에 이르러 하느님을 신비로 고백하며 그 신비 속에 담겨진
저항의 의미를 배우고 있다"

얼마만큼 주어진 길을 왔는지,
여전히 에고와 욕망으로 압도되어 볼 것 보지 못하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가리키시는 손가락을 조금이나마 더듬어갈 수 있음에 작은 긍정을 가져보는 그런 한 주간 입니다.

멀리서 감사의 마음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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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September 22, 2006
*.150.14.98

박진 님,
독일의 작은 대학 도시라...
상상이 가는군요.
창조영성과 기독론은 대립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그걸은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로 분리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에요.
창조는 생명 사건이고,
그 생명의 완성은 바로 부활이에요.
그리스도교 사건과 창조는 이런 점에서 일치하는 거죠.
창조론과 기독론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조직신학적 이해와 해석이 확보되기만 한다면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창조가 신비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도 역시 신비입니다.
매튜 폭스의 글을 읽고 싶군요.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죌레의 성경공부 글을 제가 한번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신앙의 신비와 저항과 여성성과 생택학이 죌레 신학의 기초같더군요.
이런데서는 본회퍼도 역시 통하는 것 같구요.
공부 열심히 하시고,
귀국해서 좋은 만남이 있기를 바랍니다.
알레스 구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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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박 진

September 22, 2006
*.76.3.153



으윽~~~ T.T
가장 아픈 곳을 찌르시는군요.

'공부 열심히 하시고...'

목사님의 설교제목과 설교를 읽어가면서 당연히
폭스의 창조영성을 Hintergrund로 두고 계신 줄 알았는데
초면이시라니,조금은 아니 적지않게 놀랐습니다.

구미정 박사님의 한글자로 신학하기의 글처럼 궁극적인 실체에 몸과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한 곳에서 수렴되고 통하게 되는 것인지.....^ ^

주신 화두! 더 고민하고 머리 싸매 보겠습니다.

폭스의 책은 몇권이 번역되어서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래 덧붙인 글은 구글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짧게나마 맛보기는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안의 인사를 드리며....





창조적인 영성으로 나아가는 네가지 길
Creation Spirituality / Matthew Fox





나와 하느님의 관계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집에서 태어나 여섯 명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나는 12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여러 달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다시 걸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꿈은 축구를 하는 것이었지만 삶의 거의 모든 부분과 함께 그 꿈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어린이들은 죽음에 대해서 어른들 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그때 체험이 그랬습니다. 그 체험은 나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다시 걷게 되고 축구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때부터 감사의 마음이 내 영성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것은 다리를 갖고 있다는 놀라움, 또는 그밖에 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놀라움이나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놀라움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가톨릭 사제가 되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사제가 되려고 마음 먹기까지는 여러 가지 사건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는 내가 살던 위스콘신의 아름다운 호수와 들판과 숲 속에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미사 특히 토요일 미사에서는 신부님들이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을 낭독하곤 했습니다. 지혜문학은 어머니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이야기들이 나의 영혼에 다가왔습니다. 나는 남자이지만 그 이야기들을 통해 하느님의 여성성 영역으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1950년대의 문화적 흐름과도 어울리는 일이었습니다.

음악도 나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베토벤을 고등학교에 다닐 때 처음 들었는데, 그의 음악은 내 영혼을 약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문학 작품, 특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같은 소설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의 기도 체험은 신비롭기도 하고 예언자적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통해 삶에 대한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신비로운 측면이고, 공정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의 고난에 의지하여 똑바로 선다는 것이 예언자적인 측면입니다. 나의 영성과 하느님 체험은 이렇게 신비로운 측면의 기쁨과 예언자적인 측면의 투쟁이 결합하여 변증법적으로 창조됩니다.

하느님에게 가는 길은 많습니다. 나는 특히 그 중에서 내가 "창조적인 영성으로 나아가는 네가지 길"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통해 신성을 체험합니다.

첫 번째는 ’긍정의 길(Via Positiva)’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은총을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13세기에 활동한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길을 ’현존(is-ness)’이라고 불렀습니다. 풀잎 하나를 뜯어 들고 그 색깔과 모양과 그 속에 간직되어 있는 20억년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예술가라면 풀잎 하나를 그리면서 그 속에 담긴 신성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을 보면서, 강아지를 보면서, 또는 친구를 보면서 경외심에 사로 잡힐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성스럽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 속에 깃들이어 있으며, 그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만물 안에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길을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의식입니다. 만물 속에 현존하는 신성을 체험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을 단순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입니다. 이것은 어두움, 비움, 무(無), 공(空)을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자신이 고통 속에 있을 때 또는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볼 때 하느님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심이 듭니다. 그럴 때 이 길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자기를 낮추고 가라 앉아야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디까지 가라 앉아야 끝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끝까지 낮추었던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앉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신적인 체험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강한 신뢰심이 필요합니다. 어둠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성의 계시입니다. 어둠은 궁극적으로 신성의 침묵입니다. 그 침묵을 통해 하느님과의 결합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창조의 길(Via Creativa)’입니다. 이 길은 폭발을 통해 가는 길입니다. 에크하르트는 이 길을 표현하기 위해 ’돌파’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어둠의 밑바닥에서 탈출하여 또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여 빛으로 나오는 체험입니다. 수난(부정을 통한 길)을 체험한 예수께서는 부활(창조를 통한 길)의 새아침을 맞이합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바위가 굴려지고 무덤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는 가라 앉는 과정에서 껍질을 벗고 자기를 비웁니다.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세 번째 길, 곧 창조를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나는 작가로서 글쓰는 작업을 할 때, 내가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영의 도구로써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자각이 들때가 종종 있습니다.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다른 예술가들도 아마 비슷한 체험을 할 것입니다. 나를 통해 진실된 그 무엇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내가 ’부정의 길’을 통해 자신을 비웠기 때문에, 외적인 사물에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창조의 길’을 통해 거대한 신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존재의 어떤 차원에 창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함께 창조의 동역자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우리는 당신과 함께 창조해 나갑니다. 당신은 창조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합니다."

네 번째는 ’변형의 길(Via Transformativa)’입니다. 이것은 창조성과 기쁨과 부활의 능력을 사회를 향해 발산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평화의 복음을 함께 나누는 예언자가 가는 길이며,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대의 명상의 열매를 나누라"는 말로 표현한 길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우리의 명상의 열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상태의 사회제도나 문화에 만족하고 안주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투쟁의 길이고, 자비의 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는 길입니다. 이 길을 통해 새 생명을 누립니다. 하느님은 이 길은 가는 사람을 모든 것에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고 풀잎의 순진무구함을 볼 수 있는 어린 아이처럼 만들어 줍니다.

이 길은 우리를 육체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구조를 바로 잡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활동이나 니카라구아의 혁명 같은 것이 창조의 길을 사회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먼저 다음과 같이 물어 보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시를 읽습니까? 당신은 어떤 음악에 감동을 받습니까? 어떤 사회 문제가 당신의 열정을 불러 일으킵니까? 당신은 어떤 일을 가장 좋아합니까? 에크하르트는 "참된 일을 할 때 황홀해진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때 황홀해집니까? 언제 우주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까? 무엇에서 기쁨을 느낍니까? 당신은 어둠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아무 것도 없음’을 느껴 보셨나요? 어둠의 하느님에 대한 느낌은 어떻든가요?

나는 여러분의 체험을 존중합니다. 환경의 영향으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의 어릴적 경험이 하느님이나 세상에 대한 체험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우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려 보라고 권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10살 때, 20살 때, 30살 때 당신이 생각한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 보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면서, 그 세 가지 체험 사이의 관계를 잘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슬픈 일이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8살 때 가지고 있던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성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숙할 가능성이 있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나는 말로만이 아니라 이미지 차원에서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인간 중심적인 말이 아닌가 해서이지죠. "인격적"이라는 말에는 하느님을 우리처럼 두 발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상상하면서 그와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위험합니다. 대화를 하려면 말도 해야 하지만 듣기도 해야 합니다. 삶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하느님 체험이 아인쉬타인이 체험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주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 잡혔으며, 우주가 우리의 집이며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신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 보다는,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는 신성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인격적인 우주"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발 가진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온 우주 만물이 포합됩니다. 우리는 만물 속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인격적"이라는 말에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 사람인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 위험은 내가 좋아하는가만으로 친구를 결정하는 청소년기의 특성에 고착되어 있는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관념이 종교에까지 투사되어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성숙한 어른이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은 우주 속에서 기쁘게 뛰노는 우주의 시민입니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어린 아이를 발견하고, 인격적인 우주 속에서 즐겁게 뛰노는 사람이 진정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을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 주는 친구나 동료 정도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내가 하는 일은 기도가 됩니다. 그것은 기도가 나오는 곳, 곧 중심인 가슴에서 나옵니다. 모든 일이 가슴의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나의 일은 가슴에서 나와서 가슴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사람의 가슴을 움직이도록 하는 노력이 진정한 일입니다. 이런 일 속에는 음악도 포함되고 건전한 종교도 포함되고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파는 모든 행위까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일은 어른들이 자신이 받은 은총을 다음 세대로 물려 주는 길입니다. 일은 관계입니다. 나는 친구와의 우정이나 이성간의 사랑이나 일반 사회에서의 대인관계 같은 모든 인간 관계가 중심인 가슴에서 비롯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중심과 만날 수 있을까요? 앞서 얘기한 네 길 중에서 첫 번째 길과 두 번째 길과 세 번째 길, 특히 두 번째 길과 세 번째 길이 만나는 지점을 통해 중심과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어둠 속에 침잠하는 ’부정의 길’과 빛의 세계로 다시 나오는 ’창조의 길’ 사이에는 고요한 정지가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중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요한 정지 속으로 빛과 은총이 놵아져 들어오고, 우리는 그 빛과 은총을 우리의 관계를 향해 발산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드리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는 내가 드렸던 어떤 기도 보다도 근본적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수천 년 동안 이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일을 끝낼 때는 언제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아 호 미타키 외친’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와 관련이 있는 모든 것에게"라는 뜻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늘 자기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대지, 바위. 새, 나무, 구름, 모든 종족과 모든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리고 신들과 영들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인 문화에 길들어 있는 우리는 "관계"라는 말을 가족이나 친척 또는 다른 두 발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영적인 전통에서는 우리는 하나의 자궁에서 태어났으며, 우리의 관계는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자궁은 우주적인 하느님의 자궁입니다. 우리는 부정의 길을 통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편안한 안식처이며, 어둡고 비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궁의 어둠과 비어 있음을 체험한 사람은 다시 창조적인 빛의 세계로 나오게 됩니다.

인격적인 우주를 체험하려면 다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고만 관계를 맺으려는 청소년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어린 아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주 속에서 즐겁게 뛰노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주는 우리에게 아주 친근하며 끊임없이 은총을 베풀고 있다고 가르친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믿으십시오. 에크하르트는 신비주의를 무아의식(unself-consciousness)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에고를 넘어선 그런 의식에 도달하십시오. 자기를 잊고 기뻐하며 즐겁게 뛰노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여행에서 그리고 이 우주에서 하느님과 동행하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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