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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 찬양!

기타 조회 수 10405 추천 수 73 2006.11.19 14:27:04
성경본문 : 요엘 2:21-27 
http://wms.kehc.org/d/dabia/06.11.19.MP32006.11.17. 욜 2:21-27
야훼 찬양!

구약학자들의 종합적인 의견에 따르면 요엘서는 기원전 4세기, 정확하게 말해서 기원전 350-360년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 중에서 거의 마지막에 활동한 인물이 요엘입니다. 그는 587-538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있었고, 515년 성전 재건, 445년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축성도 알고 있었습니다. 요엘은 이스라엘이 거쳐 온 역사를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의 신탁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이 선포의 핵심은 야훼를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26절에 구체적으로 “찬양하리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으며, 문맥적으로 볼 때 전체 본문이 야훼 찬양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흙아, 두려워 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21절)는 말씀이나 “야훼 너희 하느님께 감사하여 기뻐 뛰어라.”(23절)는 말씀, 또는 “내 백성은 언제까지나 당당하리라.”(27절)는 말씀도 역시 야훼 찬양과 연관된 구절입니다.

찬양하리라.
찬양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여러 곡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것, 특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가 곧 찬송이며, 찬송하는 행위가 곧 찬양입니다. 찬양하라는 말이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간단하지만 그 내용은 간단한 게 아닐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도대체 찬양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가장 간단하게만 보면, 위에서 말한 대로 실제로 찬송하는 것을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찬양을 중심으로 한 모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경배와 찬양”이라는 트렌드가 하나의 예배로 정착할 정도입니다. 전자악기와 타악기, 그리고 율동을 곁들이면서, 흡사 열린음악회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예배가 그것입니다.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은 중간에 “주님께 영광을 드립시다.” 또는 “할렐루야!”라는 멘트를 날리면서 분위기를 잡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은 두 손을 들고 찬송을 부르다가 분위기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감정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크게 웃고 심하게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은 실제적인 삶을 모르는 사람이겠지요. 웃음과 울음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내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감정에 휩싸이는 건 바람직한 게 아닙니다. 쓸데없이 웃거나 쓸데없이 우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불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면 정신치료를 받아야겠지요.
성서가 가르치는 찬양은 단순히 사람의 심리작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사로잡힌 사람의 인격에서 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흡사 노예가 주인을 무조건 높이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을 무조건 높입니다. 노예가 주인 앞에서 자기를 무한하게 낮추듯이 우리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무한하게 낮춥니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예배드리고,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 야훼를 높이는 삶의 태도에서 중요한 것은 삶과 역사에 대한 명확한 통찰입니다. 이에 반해 “경배와 찬양” 유의 집회는 감정과 심리작용에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흡사 초상집에 가면 누구나 슬퍼지듯이, 죽은 사람이나 상주들을 잘 몰라도 그런 분위기만으로도 숙연해지고, 심지어는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듯이 야훼의 통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자기 연민에 빠지는 신앙을 바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리적이든지 아니면 논리적이든지 결과적으로 똑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군요. 이 양자는 결과적으로 똑같지 않습니다. 동기가 다르면 결과도 다르기 마련입니다. 자기연민에 빠진 눈물은 어떤 상황에서나 그런 계기가 주어지기만 하면 눈물을 흘립니다. 결국 이런 신앙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중요하게 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 자기의 슬픈 감정을 해소하는 것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런 “찬양과 경배” 유의 집회에 속한 사람들은 생태계의 파괴나 미국의 이라크 침략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개인의 종교적 감정만이 모든 신앙을 지배할 뿐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신세타령 수준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완성하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자기감정에 휘둘려 울고불고 한다면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안타깝지만 자기연민을 자극하는 설교와 예배에만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점점 더 달콤한 과자만 좋아하는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놀라운 일
성서는 사람의 감정과 자기 연민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은 이와 반대입니다. 자기감정과 자기의 업적을 높이는 게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높이는 겁니다. 그 야훼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닙니다. 만약 야훼 하나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짠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성서가 말하는 야훼 찬양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서는 야훼 하나님을 구체적인 행위자로 설명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역사 안에서 행동하시는 분으로 설명합니다. 2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이제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으며 너희 하느님 야훼를 찬양하리라.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어준 이 하느님을 찬양하리라.” 요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 전체의 내용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바로 요엘의 이 진술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책이 곧 구약성서입니다. 출애굽 사건도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소고를 들고 춤추며 노래한 내용도 바로 이것입니다. “야훼를 찬양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출 15:21) 세상 창조도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일입니다. 노아 홍수도 그렇고 그들을 구원하신 사건도 역시 그렇습니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도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하나님의 그 모든 놀라운 행위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우리는 요엘이 말하는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야겠습니다. 요엘이 21-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흙, 짐승, 시온의 자녀가 그것입니다. 흙과 짐승과 사람은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핵심입니다. 요엘이 “흙아, 두려워마라, ... 짐승들아, 두려워마라., 자녀들아, ... 기뻐 뛰어라.” 하고 외친 이유는 이스라엘의 자연과 인간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요엘은 예루살렘의 파괴된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초토화하고, 성전이 허물어지고, 모든 문화유산이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포로로 잡혀 가거나 굶어죽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 대한 묘사가 1:17-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흙이 말라 그 속에서 씨앗은 죽고, 곡식이 없어 창고는 비고, 곳간은 무너졌다. 목장이 없어져 가축들이 울부짖고 소떼들이 소란하다. 양떼라고 그 벌을 면할쏘냐? 야훼여, 내가 주께 부르짖습니다. 들판의 목장이 타버렸습니다. 벌판의 나무들도 모조리 타버렸습니다. 물줄기들은 모두 마르고 들판의 목장도 모두 타버려 가축들이 벌판에서 주께 부르짖습니다.”
어떤 장면이 여러분의 머리에 그려집니까? 전쟁입니다. 전쟁만이 아니라 자연재해도 겹쳤겠지요.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해서 삶의 터전이 완전히 허물어졌습니다. 이라크나 파키스탄이 이런 상태일까요? 혹시 북한도 이런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을까요? 이스라엘은 이런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우리도 역시 이런 일은 많이 당했습니다. 요즘 남한은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구가하고 있지만 6,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광경은 그렇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이런 시대가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만약 남북 사이에, 또는 북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졸지에 요엘이 묘사한 그런 상황으로 떨어집니다.
지금 우리가 겉으로는 썩 괜찮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전쟁 터, 자연재해로 파괴된 상태와 다를 게 없습니다. 곳간이 무너졌고, 가축들이 울부짖고, 물줄기들이 모두 말랐다는 요엘의 외침이 바로 지금 우리 남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정신적인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남북갈등과 남남갈등, 양극화, 생태파괴, 비인간화한 교육현장 등등, 제가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우리는 파키스탄이나 이라크 못지않을 정도로 처참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줍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야훼 하나님에게 감사하라고 선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훼께서 다음과 같은 큰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들판의 목장이 푸르게 되고, 포도덩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겨울비와 봄비를 내리시고, 그래서 “타작마당에는 곡식이 그득그득 쌓이고 독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라.”고 합니다.(24절)

야훼 하나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먹을거리입니다. 오늘 죽나 내일 죽나 하는 위기 가운데서 이렇게 먹을 게 지천으로 깔리는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을 6.25 직후와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기던 시절에서 다이어트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로 바뀐 것입니다.
지금 요엘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풍요를 즐기자는 말인가요? 26a절에서 그가 “한껏 배불리 먹으며”라고 말한 걸 보면 일단 넉넉하게 먹는 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역시 중요한 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몸을 갖고 세상을 사는 한 먹고 마시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먹을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요엘은 배불리 먹는 것 자체만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배불리 먹는 건 인간이 이 땅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인간은 거기서 머무는 게 아니라,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야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껏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 야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오늘 중산층 기독교인들은 매우 기쁘게 받아들일 겁니다. 물질적으로도 풍부하게 살면서 예수님을 잘 믿는 게 바로 성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청부론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깨끗한 부자로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입니다. 요엘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까요? 배도 부르고 하나님도 잘 섬기는, 소위 ‘윈윈’ 신앙이 바로 이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배부르다는 것은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사용되었을 뿐이지 그것 자체가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배부른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는 야훼 신앙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바알 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경험하듯이 배부르다 해서 늘 행복한 것도 아니고, 물론 배고프다 해서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가 어디까지 배불러야 하는가, 얼마나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면 아무런 대답도 없습니다. 요엘이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 삶의 우여곡절 가운데서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는 분은 오직 야훼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야훼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의 생명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엘의 말씀 선포는 이미 이루어진 현실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약속입니다. 2:12절이 가리키듯이 “진심으로 뉘우쳐”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일으키신다는 약속입니다. 미래의 약속이지만 이런 약속을 믿는 사람은 현실의 배고픔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아갑니다. 하박국 예언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양떼는 간데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합 3:17,18) 현재 배부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그는 환성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찬양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생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희망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 말입니다. 2006년 추수감사절을 맞아 생명의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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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baruch

November 23, 2006
*.205.158.106

여호와는 야훼라고 고쳐 읽을 줄 아는데, baptism은 침례라고 바르게 고쳐 읽지 못함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학적인 아이러니입니다. 이제 많은 학자들이 YHWH를 야훼로 읽는 것을 보면, Baptism도 침례라고 읽혀지는 때가 멀지 않으리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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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봄볕/ 정대진

December 02, 2006
*.89.237.102

"히브리서 9:10에서는 βaφτισμα자체가 세례 혹은 침례를 지칭하는 것뿐 아니라 여러가지 몸을 씻는 정결 예식의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10절에서 쓰인 διαφροιs βαπτισμοιs (여러가지 다른 세정식, immersion 혹은 pouring말고 ablution)으로 직역할 수 있으며 βaφτισμα의 복수형인 βαπτισμοιs가 쓰인 것으로 보아서는 여러가지 예식이 있었거나 βaφτισμα자체가 침례의 의미로만 쓰이지 않고 다른 정결 예식을 일컬을 때도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159 기사에서
'김형락' 목사님의 댓글을 위에 퍼왔습니다.
YHWH를 야훼로 읽는 것과 βaφτισμα를 '세례'로 번역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

오히려 '침례'라는 번역은 βaφτισμα 가진 다양한 함의를
좁힐수 있는 위험이있죠.

저 개인적으로 장로교에 속하며 또 그 안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침례'라는 '형식'이 '상대적'으로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해서 몇몇 과격한 침례교 분들의 주장과 같이
'세례'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고 (님께서는 틀려다는 말은 아니겠죠?)
'침례'만이 '성경적인' 방법이라는 데에는 결코 동의 할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위에 링크한 뉴스엔조이 기사와 댓글들에 담겨있습니다.
^^ 다시 말씀드리지만 baruch 님께서 '과격한' 침례교도라는 말은 결코아니지만
βaφτισμα 의 번역이 '세례' 라는 것에 대해 조금도 문제가 없고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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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유목민

April 10, 2007
*.116.74.249

봄볕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을 보통 '아전인수'라고 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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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8616
139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8974
138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9115
137 기타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1] 2005-10-16 12826
136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8862
135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9003
134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8760
133 기타 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6] 2005-09-18 10548
132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7836
131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8173
130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8546
129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8059
128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8140
12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8079
126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6704
125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9170
124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8000
123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7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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