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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사순절 조회 수 12526 추천 수 51 2007.02.25 15:25:35
성경본문 : 신명기 26:1-11 
2007.02.25. 신 26:1-11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요단동편에서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대로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가나안으로 이주해온 민족입니다. 한민족도 반만년이라는 역사를 자랑하지만 유대인들도 그에 못지않은 역사를 자랑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벨론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시리아를 거쳐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 그 후손들이 그곳에서 몇 대를 살았습니다. 창세기의 보도에 따르면 야곱의 복잡한 가족 문제와 흉년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그들은 이집트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거의 4백년간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기원전 13세기에 출애급 했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다음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을 배회하다가 결국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적 시점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 요단강 동편에서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행한 연설 중의 한 대목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이집트라는 제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았습니다.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이나 옛 소련에서 살던 고려인의 입장과 비슷했습니다. 더구나 이집트는 아주 강력한 왕정이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소수민족을 강압적으로 다스렸을 겁니다. 그들이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위해서 이런 소수민족들을 강제적으로 동원했으리라는 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을 떠나기로 작정했습니다. 더 이상 소수민족의 서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그랬습니다. 이런 일에 앞장 선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담판을 벌인 끝에 유대민족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야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런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리라고 예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집트의 권력에 한몫 낀 이들이 있고, 이집트를 떠나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도 꽤나 많았을 겁니다. 그들이 광야로 나온 다음에 모세를 향해서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이집트를 벗어났고, 광야생활도 마친 다음, 이제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고생 끝, 행복 시작!” 하고 부푼 꿈에 젖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겠지요. 진절머리 나는 광야생활을 끝난다는 사실만으로도 희망에 부풀어 마지막 진군나팔 소리만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가나안 입성은 모험입니다. 그 일은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마친 집으로 이사 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가나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자칫하면 출애굽과 광야 40년의 고생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의 일곱 부족과의 일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철기문화가 발전한 이들과의 전투에서 유대인들이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더구나 모세의 더 큰 걱정은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은 바알을 섬기는 토착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전혀 풍요롭지 못한 상태에서 겨우 생존에 급급하던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요의 신인 바알에게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혼이 기울어지면 삶 자체도 그들에게 동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자기 민족들에게 야훼 하나님 신앙을 잃지 않도록 가르쳐야했습니다.
신앙을 가르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민감하게 반응하지 보이지 않는 신에게는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많은 종교적인 율법과 도덕규칙을 설명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신앙고백을 가르칩니다. 이 내용은 우리의 사도신경과 비슷합니다. 이런 신앙고백의 형식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종교생활에서는 형식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태권도의 기본자세 훈련이나 바둑의 정석 훈련과 비슷합니다.

조상에게 맹세한 땅
모세가 가르친 신앙고백의 첫 마디는 이렇습니다. “나는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을 오늘 나의 하느님 야훼께 아룁니다.”(3절) 아주 단순한 고백문이지만 여기에는 모세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과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조상으로부터 전해들은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어두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그 약속을 믿지 못했을 겁니다. 믿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믿기 어려웠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가나안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보다 모든 면에서 경쟁력이 월등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고생고생 끝에 가나안 길목까지 왔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을 확신합니다. 그 곳으로 들어가서 햇곡식을 얻으면 하나님께 드리고 신고식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성경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시겠지요. 우리도 그런 믿음으로 살아야겠구나 하고 다짐하겠지요. 물론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무조건 단순한 대답만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의 성취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약속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늘 혼란스러워합니다. 혼란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약속은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약속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성취의 차원에서 약속이 드러났습니다. 모든 진리는 그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나중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과거의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생명의 알곡인 햇곡식을 들고 자신들의 생존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릴 때 조상들과 맺으신 야훼 하나님의 약속이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제적인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이해되시나요? 오늘 우리는 약속의 성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생명을 이해하고 그 안에 들어간 만큼 하나님의 약속은 드러날 것입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 한 방울에서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깊이 깨닫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야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생존의 터를 잡는 것에서 그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떠돌이 아람인
이런 깨달음, 이런 신앙고백은 그렇게 간단하게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걸어온 고단한 삶의 여정을 살피지 않으면 그들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독특한지 알 수 없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가르친 신앙고백의 두 번째 항목이 이를 웅변적으로 증언합니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5절) 모세는 그 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간략하게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몇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이집트에 가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은 제가 앞에서 설명한 그 내용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중요한 신앙고백이 바로 여기 “떠돌이 아람인”에 담겨 있습니다.
아람인들의 뿌리가 어디인지는 고고학적으로 아주 복잡하기도 하고 그렇게 정확하게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바로 아람족에서 갈려나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창세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서도 계속해서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현대인들도 어떤 점에서 떠돌이 아람인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향이 없습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5백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런 현상이 더 확실하겠지요. 지금은 아무도 고향에 머물지 않습니다. 땅으로서의 고향이 없는 것도 그렇지만 영적인 고향이 없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요?
여러분,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땅에 고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신앙적인 차원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곳이 고향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잠시 여기서 머물러 살다가 하늘로 돌아갑니다. 이건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늘은 곧 은폐된 생명의 나라입니다. 오늘의 삶은 그런 하늘의 생명과 연결되기 때문에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의 삶이 ‘떠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엘리스터 맥그레스는 <내 평생에 가는 길>에서 여행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성경은 그 여행의 지도라고 합니다. 여행을 가는 사람이 지도가 없다면 혼자서 길을 찾아야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미 앞에서 그 길을 다녀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지도를 잘 살펴야만 여행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그런 지도의 하나입니다.
떠돌이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어려움은 생존의 불안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광야에서 그걸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불안을 겪었고, 광야에서는 먹을거리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존의 불안이 오히려 그들의 신앙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에게 그야말로 가장 순수한 신앙의 시기였습니다. 흡사 허니문과 같은 시기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은 신앙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오히려 불행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훨씬 심각한 신앙적인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가나안의 삶을 포기할 수도 없었겠지요. 그게 바로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함께 즐겨라.
어쨌든지 이제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으로 살다가 이제 가나안에 정착해서 햇곡식을 거두어들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너희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먹으며 즐겨라.”(11a)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읽을 때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제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고, 개인소득 2만 달러 시대에 들어왔으니까 정말 많이 쓰고 멋지게 살아야 하는구나,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구나 하고 생각이 드시나요? 여러분, 본문의 내면을 들어야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가나안의 생활이라는 게 광야생활보다야 낫겠지만 그렇게 풍요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4백 년 동안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경쟁했습니다. 실제로는 가나안에서도 생존의 위기는 늘 있었고, 기껏 해봐야 그냥 끼니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그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먹으며 즐겨라.”하고 말합니다. 어떻게 즐길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다가 두 끼 먹으면 그게 온갖 좋은 것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이 가리키는 더 중요한 것은 온갖 것이 즐거움의 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따뜻한 밥이나 국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보셨나요? 그걸 즐길 수 있나요? 쑥과 냉이를 캐는 즐거움을 알 겁니다. 된장찌개 하나만 놓고도 먹는 즐거움을 마음껏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산해진미 앞에서도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온갖 것을’을 즐기라고 모세를 통해서 주신 이 말씀은 온갖 것을 소유하라는 게 아니라 온갖 것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삶을 실제로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는 걸 잊지 않는군요. “너희뿐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도 함께 즐기도록 하여라.”(11b)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삶의 즐거움을 우리가 어떻게 주변의 떠돌이와 함께 나눌 수 있을까요? 이것은 원래 떠돌이였으며, 지금도 근본적으로는 떠돌이라 할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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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25, 2007
*.150.83.98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누리며 즐기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의 양식이다.
우리는 혼자 먹고 누리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레위인인 성직자들과 현재의 떠돌이인 우리 주위의 그리스도인들과도 함께 생명의 양식을 먹고 누리며 즐기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전도를 통하여 얻은 떠돌이들에게도 함께 생명의 양식을 먹고 누리며 즐기도록 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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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똑소리

February 26, 2007
*.144.20.9

목사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설교문을 읽다가 또 궁금한게 있네요.

"떠돌이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어려움은 생존의 불안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광야에서 그걸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불안을 겪었고, 광야에서는 먹을거리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존의 불안이 오히려 그들의 신앙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위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을거리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이집트에서 신앙적인 불안을 겪었다는 말은 잘 모르겠군요.
목사님이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불안"이
야훼신앙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설명을 좀 듣고 싶습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기간에
과연 야훼에 대한 신앙이 있었을까 하는 궁금하거든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출애굽기가 모세를 통해서 야훼신앙을 제시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설령 모세에게는 야훼신앙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당시 민족집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서를 지배할 정도의 야훼신앙이 중심을 잡고 있었을까 하는 부분은 의문입니다.
출애굽기기의 서론을 보면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과 고통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하지만
이 표현은 어디까지나 성서기자의 해석이고, 성서기자가 앞으로 전개하게 될 이스라엘의 고난의 강도가 얼마나 혹독한가를 설명하기 위한 단서이지 그 자체가 명백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점에서 이런 표현은 그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확증해 주는 단서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야훼를 소개했을때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모세와 파라오와 대결 중에서 고난의 강도가 더 혹독해지면서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도 정비례했다는 점,
백성들의 다수의 정서가 자유와 해방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기 보다
노예살이를 택하는한이 있더라도 안정적인 삶(현실유지)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에게 과연 야훼 신앙에 근거한 불안이란 표현이 과연 타당한가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동인이 신앙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단순한 민족의식의 발로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이런 사례는 인류역사에서 과거에도 수도 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는 중입니다.
저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부정하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명료했던가 하는 점에 대해서 의심이 들어서 질문하는 겁니다.

다시한번 질문을 요약하면
모세에게는 야훼신앙이 있었다하더라도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연 야훼신앙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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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6, 2007
*.150.14.118

똑소리 님,
잘 지적했군요.
뭘 그렇게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그런 것까지 다 잡아내시는지,
대단하시네요.
그 대목을 내가 말하면서도
여기에는 뭔가 설명이 필요한데,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지만 모든 걸 설명하고 지나갈 수는 없지요.
그리고 그 대목을 전체 설교 진행에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요.
이집트에서의 소수민족인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갈등을 겪었는지는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할 테니까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겠군요.
태양을 섬기는 이집트의 종교 안에서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종교적인 갈등을 겪었으리라는 건,
그냥 상식적으로 옳은 게 아닐까요?
물론 그 종교적 갈등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등,
많은 것들이 종합되었겠지요.
출애굽 당시의 야훼 신앙이 있었겠는가, 하는 게 결론적인 질문이지요?
나도 결론적으로 대답만 할 테니까 더 필요하면 이야기 하세요.
출애굽 당시에 그들에게 야훼 하나님의 신앙이 분명히 있었다고 보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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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똑소리

February 26, 2007
*.204.70.4

저는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이 민족신앙으로서 야훼신앙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점을 질문했는데
목사님은 아무런 설명없이 "태양을 섬기는 이집트 종교 안에서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종교적인 갈등을 겪었을 것"이란 답변은 아직도
솔직히 아직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출애굽 당시에 그들에게 야훼 하나님의 신앙이 분명히 있었다고 보아야지요."
이 문장도 마찬가지구요.
평소에 목사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어떤 전제없이 주장만 하면 <확신>에 불과하겠지요.
목사님이 쓰신 글(주장-애굽에서 신앙적 불안)이 어떤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는가 그게 궁금해서
질문해 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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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26, 2007
*.236.180.63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 3:6, 15, 16)이라는 명칭을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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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똑소리

February 26, 2007
*.204.70.4

브니엘남님!
제 질문에 대글을 주셨네요. 일단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다비아에서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건
저 자신이 정용섭 목사님께 질문을 드렸는데
간혹 적극적인 성향의 회원분들 중에
대글을 다시는 분들이 종종 있더군요.
그런 분들 중에는 귀를 기울이고 들을 만한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다비아에서 그런 분들과 논쟁을 벌인적도 몇 번 됩니다.
조현아님과 코람데오님과 논쟁이 바로 그런 경우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이란게 잘 안 바뀌더군요.
이런 주장은 저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주장이 상대방에게 설득력이 있으려면
비록 신앙의 세계가 신비의 영역이 있다하더라도
적어도 나름의 정당한 논리와 해명이 필요한데도
무조건 믿으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일종의 비블리즘에 빠진 분들이 그런 부류들이겠지요.
저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란 걸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문자적인 차원에서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브니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겠지만요.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신 내용(출3:6,15,16)을 보면
저와는 다른 시각에서 성서를 읽는 분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물론 출애굽기의 내용이 주전 1300-1500년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을 담고 있긴 하지만
저는 출애굽기가 주전 5-8세기의 저작물이란 걸 감안하면서 읽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지금 형태의 성서가 탄생하기까지는
개인과 민족의 복잡한 전승과정이 개입돼 있다는 걸 전제하면서 읽는다는 뜻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죠.
우리민족에게는 단군신화가 이어져 내려옵니다.
그런데 단군신화도 지방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릅니다.
평양에서 전해내려오는 단군신화와 강원도에서 전해내려오는 신화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화적 인물로서 단군은 하나지만
그걸 전해받은 지방사람들의 삶의자리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전승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니까
단군신화와 기독교의 성서이야기가 같은 건가
하는 식으로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성서의 야훼 신앙도 똑같지는 않겠지만 전승방식에서 본다면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주전 13세기에서 15세기에 일어났던 출애굽 이야기가 이스라엘 자자손손 대를 이으며 전승해 왔겠지요.
그런 전승들이 어떤 역사적 시점에서 신앙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재구성했겠지요.
그런 전승의 과정에서 실제사건과 함께
공동체의 신앙고백도 삽입되고 후대를 향한 일종의 교훈과 같은 내용들이
어떤 때는 예언의 형태로, 시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지요.
오늘 우리 손에 들어온 성서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나온 것입니다.
신명기에 그런 내용이 나오던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생활하는 동안 옷도 해어지지 않고
네 발이 부릍지 않는다는 내용을 기억하시죠?
이게 말이 됩니까? 이걸 문자의 차원에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나요?
물론 근본주의자들이라면 의심없이 믿겠지요.
제가 그것까지 막을 순 없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살아가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신명기 역사가는 모세의 권위를 빌어 인간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지켰다는 사실을 역사를 회고하며 이런 글쓰기 방식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위에서 브니엘남님께서 언급하신 성서구절 역시 그렇게 단순하게 취급할 것이 아니라
해석이 좀 더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걸 다 설명하려면 또 말이 길어집니다.
이건 상식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가능한 일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족장들의 신앙형태가
요즘 기독교처럼 제도화된 그런 형태의 신앙이 아니었다는 점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간지
불과 백년도 되지 않아 바알신앙에 오염되어 야훼신앙이 손상을 입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들어간지 400년이 흐르는 동안
그것도 오늘날의 성서같은 종교문서없이)야훼신앙을 지속적으로 유지했으리라 단정하는 건
순진한 거죠. 그렇다고해서 제가 어떤 단서없이 무조건 부정할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고민하고 있고요.
저는 지금 그걸 질문하고 있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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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6, 2007
*.150.14.17

똑소리 님,
내가 오늘 된통 걸려들었네요.
위에서 대충 한 마디 하면 지나가려니 했는데
끝까지 물고 늘어지니 정신이 번쩍드네요.
그래도 그냥 모른 척할까 하다가
질문을 한, 아니 반론을 한 학생이 수제자라서
다시 답글을 쓰게 됐소이다.
이번 답글에서도 똑 님이 만족하지 못하면
나는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각오(?)로 설명해봐야지.
위에서 똑 님이 설명한 역사비평의 문제는 모두 옳소이다.
그런 비평과 내가 말하는 것과는 배치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논점이에요.
지금 똑 님은 내가 사용한 용어를 조금 곡해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이 신앙적 갈등, 불안을 겪었다는 내 말은
이미 그 당시에 이스라엘의 온전한 야훼 신앙이 형성되었다는 의미가 아니오.
그런 종교사학적으로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거요.
내가 사용한 그 용어의 포커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생활에서
종교적인 갈등을, 그래서 결국 신앙적 불안을 경험했다는 사실만 지적한 거요.
나는 결코 이집트 체류 시기와 광야와 가나안 정복,
그리고 통일왕정시대, 분열왕정시대, 포로기, 포로이후로 죽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완전히 일관한 야훼 신앙이 존재했다고 생각하지 않소.
야훼 하나님의 변화한다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인식이 변화한다고 보아야지요.
유목시대와 농경시대, 그리고 포로시대와 해방시대에서
하나님 경험을 당연히 다르지 않겠소?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 탈향 이후
가나안의 족장시대, 이집트 소수민족시대, 엑서더스, 가나안 입성에 이르는 일련의 역사에도
야훼 하나님 자체에 대한 원초적인 관점은 늘 유지했다고 믿소.
그런 신앙이 이집트에서 갈등을 겪는다는 건 당연하지 않소?
비록 가나안, 왕정, 포로전후 등등의 시대와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긴 역사 과정에서 드러난 야훼 신앙의 단초는 명백한 거요.
그게 없었다면 그 이후의 야훼 신앙도 역사에 등장할 수 없었던 거구요.
(이런 맥락에서 구약성서를 폐기해야 한다는 도올 선생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소.)
똑 님의 오해는 그 단초에 초점을 맞춘 내 표현을
침소봉대 해서 다른 주제로 끌고 간거요.
똑 님이 내공이 붙은 수제자인 줄 알았더니
아직 초짜(?)네요.
햇살이 황홀할 정도로 빛나고 있소.
모두들, 좋은 하루.
profile

[레벨:1]똑소리

February 26, 2007
*.204.70.4

정목사님!
답글 감사하구요.
좀 바쁘셨는가봐요?
목사님이 처음부터 위의 형태로 답글을 주셨더라면
제가 목사님을 성가시게 굴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제 이해가 되었습니다.
제가 아직 초짜니까 그럴 수 밖에요.
선생님이 제자를 이해하셔야죠 어떡합니까?^^
제가 원래 성미가 좀 그래요.
말이든 글이든 전제없이 막밀고나가면 참을성이 없어지거든요.
고쳐야 되는데 잘 안되네요.
아무튼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침소봉대"라는 표현은 스승님이 제자(?)의 마음을 잘못 짚은거 같네요.
제 질문에는 다른 의도성은 조금도 없었걸랑요.^^
목사님은 계속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 제가 목사님께 배우지 않아도 될 날이 오려나..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profile

[레벨:1]아직초짜

February 26, 2007
*.204.70.4

이번 기회에 아예 닉네임을 한 번 바꾸어 보렵니다.
<아직초짜>로 말입니다.
항상 배우는 맘으로.....
profile

[레벨:1]아직초짜

February 26, 2007
*.204.70.4

아직초짜, 신고합니다.
며칠전부터 닉네임을 한 번 바꾸어야겠다는 맘을 먹고 있었는데
정목사님이 힌트를 주셨네요.
감사 감사!!!
profile

[레벨:3]코람데오

February 26, 2007
*.109.125.151

똑소리님의 글을 읽다보니 제 글에 대한 언급이 있으시군요^^
님께서 저의 글들은 정당한 논리와 근거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의 글로 표현하고
계시는데
똑소리님 님께서 제 글을 근거없이 주장하는 글로 언급하시는 바
그 근거가 될만한 글 한 줄이라도 있으면 제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님의 주장에 적어도 조금의 근거가 있을 걸로 생각 합니다..
=======================================
아무리 나이가 어려서라고 치더라도 같은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사람의 글을 아무른 근거없이 여기저기서 자기 느낌에 따라
재단하시는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
정목사님의 수제자시라구요?
^^
두서없이 여기 저기서 다른 사람의 글을 비난하는 행위는
인간의 도덕 기준으로도 비 신사적 행위로 판단 되는 군요^^
=======================================
다시 한번 요청 드리지요^^
제가 근거없이 무조건 믿으라는 식의 글을 적은 사례 있으면
제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February 26, 2007
*.150.14.17

아직초짜 씨,
쓰기 쉽게 그냥 '초짜'로 부르겠소이다.
아휴, 이제 겨우 놓여났소.
학생들이 이렇게 정색하고 대들어야
선생 연 하는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는 법이오.
초짜 님의 말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소.
더우기 그 문제의식은 높이 사야할 거요.
침소봉대라는 내 표현도 그리 적합한 게 아니었소.
초짜의 다른 여러 대글에서도 확인한 바이지만
틀린 말은 거의 하지 않더군.
다만 승질이 조금 거시기 한 것만만 빼고는 뭐 ....
내 기억으로는 초기에 초짜가 남자인 줄 알았소.
글쓰는 폼새가 그렇게 느껴졌소이다.
그런데 젊은 아줌마라니, 그때의 놀람이라니...
아줌마 논객으로 이름을 날릴 날이 올 것이라 믿소.
아자!!!!!!
profile

[레벨:1]아직초짜

February 27, 2007
*.144.20.42

코람데오님!
오랜만이군요.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런 기회를 통해서 또 한번 만나게 되는군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진심이에요.
전 코람데오님을 나쁘게 보진 않아요.
생각이 다르긴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라는 걸 잊지 않고 있답니다.
제 글이 오해를 불러 일으켰군요.
글이란 쓰는 이의 동기야 어떻든 간에 읽는 사람이 오해했다면
일차적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코람데오님의 마음이 상했다면 제 잘못이 큽니다.
그렇지만 오해는 풀어야겠지요.
제가 꽁무니를 빼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제 진심을 말할께요.
위에서 특정인을 언급한 것은 논쟁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과
사람의 생각이(저 자신을 포함해서) 잘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브니엘남님께 말하려는 것 뿐이예요.
제 글의 문맥에서 무조건 믿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아무개씨와 코람데오님을 지칭한 게 아니라
제가 위에서 언급했던 그런 성향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이었습니다.
제 글쓰기가 서툴러서 이런 결과를 몰고 왔군요.
앞으로 글쓰기 공부에도 신경을 좀 쓰야겠군요.
어쨌거나 오해가 얼른 풀렸으면 좋겠군요.
사순절이네요. 부활을 기다리며 날마다 승리하시길.
아자, 홧팅!
profile

[레벨:0]sydney

March 04, 2007
*.107.142.70

위 글들을 읽다가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세가 노예(그게 전적으로 유대인인지 아닌지는 정확치 않지만)들을 선동 할 때
그 사람들에게 무슨 분명한 생각이 있었겠나?
20 세기 가장 이성적이라할 독일인들 조차도 히틀러가 제시한 유토피아에 맹목적으로 따라갔는데.
하물며 3, 4000년의 민중들에게.
노예들은 모세가 제시한 비젼, 환상에 홀려서 따라 온 것이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상, 비젼인데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보다 명확한 이해가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이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신앙의 역할은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노예의 역할이 아니라 모세의 역할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profile

[레벨:1]소음공명

May 02, 2007
*.59.118.25

똑소리님, 좋은 지적입니다. 흔히 지금의 신학, 신앙으로 구약의 사건들을 바라보려 하는데, 사실 아브람도 이방신을 섬기던 이교도였을 가능성이 높고, 출애굽 당시 히브리인들의 신앙이 과연 야비스트들이 주장하듯 뚜렷한 야훼 신앙이었을지도 의문입니다. 출애굽이라는 민족적인 정체성의 핵심을 지나기 전이니 하나님 이야기는 하나의 가족신 정도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직 야훼신앙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전이라 '신앙 이야기가' 충분하지 않고 점차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서를 읽을 때 지금의 완성된 시각(?)을 형성의 과정에 덧씌우는 것은 조심해야할 일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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