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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타고 오십니다!

부활절 조회 수 11563 추천 수 103 2007.04.15 22:49:48
성경본문 : 요한계시록 1:4-8 
mms://wm-001.cafe24.com/dbia/070415.MP32007.04.15. 계 1:4-8
구름 타고 오십니다!

지난 주일은 부활절이었고, 오늘은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부활주일부터 일곱 주간을 부활절기로 지켰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다는 의미이겠지요. 매주일 예배를 드리는 주일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모든 것은 곧 예수님의 부활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모든 성서도 역시 예수님의 부활에 집중됩니다. 모든 말씀이 부활만을 주제로 한다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그것을 바탕에 놓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계시록 1:4-8절 말씀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지금의 터키 서부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일곱 교회는 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입니다.(1:11) 그는 이들 교회에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신께서, 그리고 진실한 증인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빕니다.”(4,5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 가지 특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한 증인”이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며, “모든 왕들의 지배자”라고 말입니다.
1)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가르침, 그의 치유, 그의 십자가와 부활 등, 그의 삶과 운명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에게서는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 발현되었습니다. 그에게서만 참된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그에게서만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유일한 증인입니다.
2)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증인이라는 사실의 가장 단적인 증거는 곧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은 곧 종말에 우리에게 완전히 알려지게 될 영원한 생명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시며, 이 세상에 생명이 가능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 생명의 깊이가 바로 부활입니다.
3) 이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는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십니다. 이건 요한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왜 중요한지를 알려면 초기 공동체의 상황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집필되던 시기는 기독교가 로마 황제에 의해서 극심하게 박해를 받던 때였습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황제숭배가 그들을 극심한 어려움에 빠지게 했습니다.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심한 경우에는 순교까지 당할 정도였습니다.

황제숭배
요즘 우리는 신앙생활로 인해서 크게 박해받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늘 황제숭배를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물질이기도 하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이기도 하고, 또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포스트모던의 영지적 혼합주의, 즉 뉴에이지 류의 상대주의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런 것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또는 은밀하게 활동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기복주의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종교다원주의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의 구원론적 토대를 희석시키는 것들이 바로 오늘의 황제숭배입니다.
밧모섬에 유배를 당한 요한이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왕들의 지배자라고 외친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제 정신이 아니든지 전혀 새롭고 궁극적인 진리이든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라는 요한의 고백은 옳은가요? 현실적으로만 본다면 세상은 황제숭배에 의해서 작동되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는 한미 FTA를 찜찜하게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장개방이라는 원리가 바로 세계를 지배하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는 예수가 지배자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어떤 사람들은 그걸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또는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분명히 황제숭배 논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어도 그것 때문에 출세를 한다거나 돈을 버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건 처세술과 경쟁력으로 가능합니다. 신앙이 아무리 좋은 젊은 여자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멋진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건 다른 재주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모든 왕들의 지배자라는 요한의 고백은 틀린 건가요?
여러분, 요한이 이미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황제들의 방식으로 황제들을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군사와 돈으로 그들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사실 아무 것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 수많은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을 뿐이지 궁극적인 승리자는 없습니다. 현재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군림하지만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 또 새로운 강대국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황제숭배의 역사는 반복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경제와 군사의 힘에 의지하신 분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신 분이십니다. 요한은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만이 모든 왕들의 지배자가 되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바란다고 기도했습니다.(6후) 이 단어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로마에서는 황제만 영광과 권세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황제들은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만 돌릴 수 있는 그런 영광과 권세를 누렸습니다. 이제 요한은 황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영광과 권세를 돌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황제는 이 세상의 힘을 통해서 폭력과 경쟁과 자기만족을 제공할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생명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만 진실로 영광과 권세를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세상의 황제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은 아직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춘향전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과거를 보러간 이몽룡에게서는 감감 무소식입니다. 춘향이는 수발을 들라는 원님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원님의 힘을 하늘을 치솟을 듯하고, 춘향이는 무기력합니다. 이몽룡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이야기의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는 그 상황이 별로 답답하지 않지만 춘향의 입장에서는 막막한 심정이었을지 모릅니다.

구름을 타고
초기 기독교인들의 상황도 이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에게만 영광과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황제에게서 시달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의 희망으로 그 상황을 버텨냈습니다. 다시 오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재림신앙은 부활 신앙과 똑같은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재림에서만 온전하게 실현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 우리가 확인했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증인으로 세우신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경험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의 재림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다니엘과 스가랴의 예언을 빌려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땅 위에서는 모든 민족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7절)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신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구름은 도술을 부리는 손오공이 타고 다니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니요. 지금 요한은 마술이 무언지를 보여주려는 게 아닙니다. 고대인들에게 구름과 하늘은 생명의 은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생명과는 전혀 다른 생명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은 황제들이 약속으로 주는 부국강병, 은퇴 후의 안락한 삶, 높은 연봉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유전공학을 통해서 미모와 건강을 유지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 하는 생명입니다. 사람들에게 시선 집중을 받는 것과는 다릅니다. 재림의 생명은 우리가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만 주어집니다. 구름을 타고 오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생명의 실체로 다시 오십니다.
요한은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예수님의 부활은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났지만 이제 재림에 일어날 예수님의 부활생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명명백백하게 나타납니다. 그때에 우리는 모든 생명의 실체를 얼굴을 얼굴로 맞대어 보듯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가지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요한의 설명에 따르면 땅 위의 모든 민족이 재림의 주님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재림의 주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2천 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은 인식할 수 없었지만 이제 재림의 하실 주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왜 가슴을 칠까요? 진리를 놓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겠지요. 그들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훗날 주님이 재림할 때 땅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황제숭배와 율법주의에 갇혀 있던 그들은 전혀 다른 생명 사건 앞에서 기절초풍하게 될 것이다. 이런 충격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생명의 완성이 우리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나이, 아멘!
요한은 이런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나이, 아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성서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에 특별히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독교 신앙은 이 땅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의 재림을 목표로 합니다. 이 말은 곧 이 세상의 모든 인간적 행위들은 부활의 완성인 재림 신앙 앞에서 상대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어느 국가도 절대적이지 않고, 그 어떤 이념도, 혁명도, 체제도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 모든 것을 지양합니다. ‘나이 아멘’입니다.
앞에서 저는 춘향전 이야기를 잠시 했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춘향이에게 이몽룡이 반드시 자기를 찾아오리라는 희망이 있었을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어려운 상황을 버텨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은 춘향의 운명을 질적으로 새롭게 했습니다. 그네는 낭군이 반드시 다시 온다고 확신했습니다. ‘나이, 아멘’. 요한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이렇게 기다렸으며, 지금도 우리도 그런 신앙으로 삽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제 설교를 들으시고 조금 막연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지금 중요한 건 돈을 벌어서 편안하게 사는 거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만약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바울이 고백했듯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요한 시대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 8절 말씀을 보충한 것 같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말이 인간적인 게 아니라 바로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분이십니다. 시간을 초월하신다는 말은 곧 전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우주 전체의 시간과 공간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이 세상에 생명을 완성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볼 것입니다. 그들은 놀라운 충격에 빠질 겁니다. 우리도 부활생명의 온전한 실현 앞에서 기쁨과 환희에 휩싸일 것입니다. 나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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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April 16, 2007
*.236.169.21

구름과 하늘은 생명의 은폐를 가리킨다고 하셨는데요. 확실히 몰라서 그렇습니다. 목사님 질문입니다.
계 1장 7절은 슥12장 10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 12:10절의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영)을 부어 주리니"를, 계 12:10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요한은 말하였습니다.

혹시 구름이 성령은 아닌지요. 성령을 덧입고 오시리라.
고전 10장의 1절과 2절의 구름도 성령을 의미하는것 같은데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16, 2007
*.150.14.111

브니엘남 님,
위에서 성구를 쭉 나열했지요?
모든 성구는 어떤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연결시키기는 힘듭니다.
요즘은 성구 짝찾기 공부도 일어나고 있는 형편이니
성서 역사비평이라는 게 한국교회에서는 발붙이기 힘든 실정입니다.
제가 뒤의 성구를 모두 설명할 자신은 없구요.
시간도 많이 필요하구요.
구름이 성령으로 이해된 대목도 완전히 없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요.
하늘이 생명의 은폐라는 건 확실합니다.
은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차원을 말하는 거지요.
그것은 곧 하나님 자체를 말하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성서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생각했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를 성령을 덧입고 오시리라고 하는 건
전형적인 알레고리 해석이군요.
돌고 돌아서, 먼 길을 돌아서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요.
생명의 은폐와 깊이는 곧 생명의 영인 성령의 자리이니까요.
그럼 이만.
profile

[레벨:3]코람데오

April 16, 2007
*.109.125.151

"나이 아멘"
은혜로운 설교 잘 읽었습니다.
바쁜 삶 중에 제 속에서 잊어져만 가는
소망 다시 속으로 되세겨 봅니다. "나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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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April 16, 2007
*.109.125.151

"구름"에 대한 브니엘남님의 글 또한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것 처럼
고린도 전서의 바울의 언급은 구름을 신약의 성령의 개념으로 간주하고
잇다고 볼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즉 구름과 바다 를 신약의 성령과 물의 개념으로 간주한다고 볼수도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늘상 "구름"을 "성령"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위험 하다고 생각 합니다.
또한 계시록 1장 10절의 요한의 언급을 스가랴서 12장 10절을 인용구로
보는 것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생각 합니다.
스가랴 12장 10절은 오순절의 베드로의 설교로 부터 일어난 회개운동과
성령운동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보는것이 일반적인 견해라는 생각 입니다.
차라리 본문 1장 7절은 아래서 언급할 다니엘 7:13절이나 이사야 19:1의
언어들을 인용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본문 계시록 1장에서 "구름"이라는 것을 정목사님처럼 "생명의 은폐"를
"아직드러나지 않은 생명"을 가르킨다는 정목사님의 말씀도 매우 타당하다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구름"이란 다어에는 크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구름을 타신다"에서
"구름"이란 말의 뉘앙스는 구약 특히 선지서들을 보면 "심판의 징조"
혹은 "심판"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되며
요한도 그러한 공통된 전통 아래서 심판하실 주님의 신적인 재림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상용구 라는 것이 개인적 견해 입니다..

구약에서 출애굽이후 여호와께서 현현 하실때에 자주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의 뒤를 이어 시편의
저자도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시104:3)" 라고 표현하고
이후 선지자들도 그러한 표현을 따랏다고 봅니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다니엘7:13)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이사야 19:1)
profile

[레벨:24]임마누엘

April 17, 2007
*.67.140.208

나이 아멘....
profile

[레벨:23]브니엘남

April 17, 2007
*.236.169.21

계 1: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계 10:1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오는데
계 14:14~16 구름 위에 앉았는데

목사님 이 모두 생명의 은폐인가요.
profile

[레벨:2]rlagmlrnjs

April 17, 2007
*.22.17.27

교수님, 우연히 이번 설교가 2004년2월1일의 설교와 제목과 본문이 똑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요, 제가 두 설교를 비교해보니 핵심은 구름과 생명의 리얼리티인 건 똑같은데 전개해나가는 방식이 조금 틀린것 같았습니다. 제가 바로 본건 맞나요?^^
제가 궁금해서 여쭙고 싶은 것은 제가 신학교 구석방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중에서 같은 본문으로 5가지 이상의 설교를 할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물론 그 전후에 내용은 잘 기억이 안납니다만은...그 전후의 내용이 훨씬 중요하겠죠?)을 항상 기억하고 거기에 대해서 고민했었는데요 그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말씀의 핵심이나 결론은 동일시해놓고 전개방식을 다르게, 그러니까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똑같은 핵심과 결론에 접근해야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핵심이나 결론자체를 매번 다르게 내려야한다는 것인지...
교수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그 구약 교수님이 하신 말씀 자체를 부정하신다면 대답안하셔도 좋구요 혹시 긍정하신다면 어떻게 하는것이 좋은 방향인지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따라서 교수님은 어떤 의도로 똑같은 본문, 똑같은 제목의 설교를 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愚問(죄송해요)賢答을 기대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18, 2007
*.150.14.163

rlagmlrnjs 님,
나도 놓친 걸 어떻게 잡아내셨나요?
2004년이면 3년 전이군요.
본문이 동일한 건 정말 우연이군요.
내 기억으로 저는 2004년 여름부터 <예배와 강단>이라는
설교 핸드북에 제공하는 성서일과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제가 자의적으로 선택해서 설교햇지요.
아주 우연하게 일치했네요.
이번에 설교하면서 이런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걸 확인해 볼까 하다가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그리고 이런 주제로 신학단상도 썼기 때문에 그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갔지요.
지금 내가 2004년의 설교를 읽어보았는데,
다행히 똑같지는 않네요.
전개 방식이 다르네요.
동일한 본문으로 설교를 하더라도
그 당시의 영적 상태와 성숙도에 따라서 다르게 구성되겠지요.
동일한 본문으로 5번의 서로 다른 설교가 가능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습니다.
다섯번이 아니라 10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영적인 텍스트는 그것 자체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모차르트의 곡을 같은 연주자가 연주하더라도
매번 다르게 해석된답니다.
영적인 경험은 그렇게 다양하기 때문이지요.
전개방식과 결론을 구분해서 이 문제를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요.
결론까지도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되는 결론이 나온다는 게 아니라
지평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건 또 긴 이야기가 필요하겠군요.
감사.
profile

[레벨:0]바우

May 09, 2007
*.146.46.162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늘로 가심은 본 그대로" 이 글은 어떻게 해석하나요?
profile

우물가

May 12, 2007
*.238.235.179

고대인들에게 구름과 하늘은 생명의 은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생명과는 전혀 다른 생명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 여기에 나오는 "구름을 타고는" 히브리서에 말씀을 빗대어 새길 펼요가 있습니다.
허다한 증인들이 보는 가운데 오시리라라고 새김이 더 바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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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8022
429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2011-04-11 17092
428 사순절 빛의 자녀, 빛의 열매 [25] 2011-04-03 23393
427 사순절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18] 2011-03-27 19898
426 사순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13] 2011-03-21 19051
425 사순절 생명의 왕국 [5] 2011-03-13 15883
424 주현절 메시아는 비밀이다 (마 17:1-9) [17] 2011-03-07 16677
423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2] 2011-02-27 16961
422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16] 2011-02-22 18831
421 주현절 하나님이 생명이다 [10] 2011-02-15 17115
420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2011-02-06 17255
419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다 [3] 2011-01-30 20762
418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7] 2011-01-23 16745
417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8311
416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4] 2011-01-09 18767
415 성탄절 그리스도 찬양 [11] 2011-01-02 15773
414 성탄절 은총의 깊이로! [14] 2010-12-26 23526
413 성탄절 영광과 평화의 노래 2010-12-26 21607
412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file [8] 2010-12-20 18709
411 대림절 "당신은 메시아인가?" file [10] 2010-12-12 15891
410 대림절 소망의 하나님, 우리의 소망 file [5] 2010-12-06 21608
409 대림절 인자가 오리라 file [8] 2010-11-28 17968
408 성령강림절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file [12] 2010-11-22 21736
407 성령강림절 새로운 창조의 하나님 file [9] 2010-11-14 13752
406 성령강림절 죽음, 삶, 하나님 file [13] 2010-11-07 14043
405 성령강림절 믿음과 구원 file [4] 2010-10-31 21003
404 성령강림절 영과 구원 file [9] 2010-10-24 13428
403 성령강림절 기도와 믿음 file [20] 2010-10-19 22357
402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file [6] 2010-10-10 16667
401 성령강림절 믿음과 종됨의 관계 file [18] 2010-10-04 19035
400 성령강림절 하나님은 누구인가? file [8] 2010-09-26 19094
399 성령강림절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다! file [5] 2010-09-20 14822
398 성령강림절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 [20] 2010-09-12 16560
397 성령강림절 토기장이 하나님 [11] 2010-09-06 26486
396 성령강림절 안식일과 해방 [10] 2010-08-22 17102
395 성령강림절 주는 우리의 평화! [19] [1] 2010-08-16 15745
394 성령강림절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8] 2010-08-09 19478
393 성령강림절 생명과 소유 [8] 2010-08-02 15400
392 성령강림절 음란한 여자와 결혼한 호세아 [21] [1] 2010-07-25 34631
391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16] 2010-07-19 18260
390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16] [2] 2010-07-11 17088
389 성령강림절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가? [8] [1] 2010-07-05 26538
388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17] 2010-06-27 24337
387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라 [10] 2010-06-21 14276
386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신앙 [19] 2010-06-13 15654
385 성령강림절 한 말씀만 하소서 [17] 2010-06-07 18709
384 성령강림절 지혜의 영, 창조의 영 [7] 2010-05-30 16287
383 성령강림절 성령경험과 구원경험 [2] 2010-05-23 14471
382 부활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3] 2010-05-17 12422
381 부활절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12] [3] 2010-05-09 14229
380 부활절 창조의 위기와 구원 [10] 2010-05-03 15766
379 부활절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 [27] [2] 2010-04-25 16728
378 부활절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 [4] [1] 2010-04-18 13190
377 부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14] 2010-04-11 13961
376 부활절 새 창조와 새 생명 [4] 2010-04-05 14294
375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11] 2010-03-29 20371
374 사순절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27] 2010-03-22 19058
373 사순절 축제의 능력 [5] 2010-03-15 12981
372 사순절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 [2] 2010-03-08 20445
371 사순절 아브람의 거룩한 두려움 [8] 2010-03-01 14578
370 사순절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 [8] 2010-02-22 27844
369 주현절 주는 영이시다 [3] 2010-02-15 13012
368 주현절 거룩한 생명의 씨 [10] 2010-02-08 16069
367 주현절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15] 2010-02-01 15315
366 주현절 교회 일치의 신비 [11] 2010-01-25 15584
365 주현절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 [17] 2010-01-18 18810
364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8122
363 성탄절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 [21] 2010-01-04 15826
362 기타 세겜의 약속을 기억하라 [9] [1] 2010-01-01 17777
361 성탄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2009-12-28 23447
360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와 구속 2009-12-25 16585
359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몸’ [8] 2009-12-21 15177
358 대림절 성령 세례와 심판 [36] 2009-12-14 20300
357 대림절 주의 날과 십일조 [49] 2009-12-07 19529
356 대림절 그 날이 임하리라! [17] 2009-11-30 15736
355 성령강림절 구름기둥과 불기둥 [25] 2009-11-23 30000
354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2] [1] 2009-11-16 12498
353 성령강림절 신앙경험은 새롭게 '봄'이다 [18] 2009-11-09 16926
352 성령강림절 복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 [10] 2009-11-02 21689
351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8914
350 성령강림절 재물과 하나님 나라 [22] 2009-10-19 14557
349 성령강림절 번제의 길 [22] 2009-10-12 15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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