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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행위, 7월3일

기타 조회 수 10703 추천 수 46 2005.07.04 12:47:53
성경본문 : 마태복음 11:2-19 
2005. 7.3.
마태 11:2-19
삶과 행위

세례요한의 제자들
신약성서는 모든 관심을 예수님에게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사람들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엑스트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엑스트라 중에서 세례 요한은 매우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의 출생 설화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나선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메시아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절대적인 영적 카리스마를 행사한 인물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일반 역사가라고 한다면 세례 요한을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수님과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평가할 만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라는 복음서 기자들의 역사 인식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세례 요한의 등장이 바로 예수님 사건을 가능하게 한 단초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가서 이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가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역시 출현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인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진행되는 그 결정적인 순간인 카이로스는 갑자기 하늘에서 우박 쏟아지듯 내려오는 게 아니라 밤송이가 충분히 익으면 알맹이를 터뜨리듯이 어떤 결정적인 역사의 과정과 그런 순간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사건에서 세례 요한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역할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는 별개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이렇게 묻게 했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3절). 예수님은 이 질문을 받고 직접 대답하시지 않고 이렇게 간접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4-6절). 여기서 열거된 현상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얽어매고 있는 저주스러운 운명이 해결되는 것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에게서 일어난다는 말은 곧 예수님의 일과 하나님의 행위가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장터 아이들의 놀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다음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위대성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이어서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그 세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 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16,17절). 아마 그 당시에 이런 어린아이들의 놀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쪽 편에서 피리를 부는 시늉을 하면 다른 편에서 그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장례 때의 곡을 하면 슬픈 연기를 하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곧 사람들이 모두 자기중심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따라주기를 바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게 그 당시 장터 아이들의 놀이였고, 그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의 삶의 태도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상대방을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사회생활도 그렇고,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그런 방식이야 원래 그렇다 하고 접어둘 수 있지만, 교회마저도 이런 방식으로 작동된다는 건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할 기독교 신자로서 분명하게 짚어야만 합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의 뜻으로 신자들을 흡사 꼭두각시 움직이듯이 다스리는 건, 그것이 아무리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치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요즘 설교비평 작업을 하면서 새삼 더 실감하는 한국교회의 현상이지만 목사들이 신자들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듯한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오직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서 힘쓰라는 말은 겉으로 볼 때 당연한 기독교 가르침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매우 무책임한 발언입니다. 그런 설교자가 생각하는 영혼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영육이원론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통전적인 구원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신학적인 문제까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목사가 신자들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함으로써 결국 생명의 영인 성령의 활동을 축소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한국의 목회 상황에서는 이렇게 신자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곧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직면해 있는 위험스런 현실입니다.
장터 아이들의 놀이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향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건 매우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언하셨습니다.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18,19a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세례 요한은 매우 금욕적으로 살았습니다. 광양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낙타 가죽옷을 입고, 겨우 생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요한의 삶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달리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먹고 마셨다는 말은 음식을 별로 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틴 루터의 번역에 따르면) 포도주를 마셨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툭하면 술, 담배 문제를 신앙과 연결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예수님도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금욕적인 세례 요한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았던 예수님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요? 세례 요한의 광야도 마음에 들지 않고, 예수님의 시장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무엇이 마음에 든다는 말일까요? 그들의 마음에 들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일단 자기만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대상이 적입니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게 사람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지혜의 기준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19b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과 인류 역사를 정확하게 꿰뚫어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이 지혜롭게 살았는가 하는 문제는 그에게서 나오는 삶의 열매로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비유의 말씀에서 가르치셨듯이 나무가 좋은지 아닌지는 그 나무의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는 것과 이 말씀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삶의 결과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만을 보고 트집 잡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고 ‘미쳤다’고 하거나 예수님을 보고 ‘죄인과 어울린다’고 말하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에게 따라서 금욕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그냥 세속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무원으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장사꾼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성직자도 있고, 세속 직업인도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고상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가난해서 천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등포 역 기찻길 옆의 쪽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백 평짜리 최고급 아파트나 전원주택에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이런 것에만 삶의 모든 걸 걸어두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원하는 그런 삶의 기준을 확보하기 위해서 모든 걸 투자하고 있습니다. 운이 좋아서 그런 기준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삶의 방식이나 기준이 아니라 그에게서 무슨 결과가 나오는지, 그 삶의 열매가 무엇인지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의 본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결과, 또는 삶의 열매는 우리가 생각하는 출세와 사회적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된 것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바로 인간 삶의 신비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천하게 사는데도 그 결과와 열매가 거룩한 사람이 있고, 겉으로는 영광스럽게 사는데도 실제로는 천박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제가 오늘 여기서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책의 요지는 매일 새벽마다 빗자루로 동네 청소를 하는 어떤 사람이 바로 성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거쳐 온 긴 삶의 여정이 있지만 결국 청소 행위로 그는 성자가 되었습니다. 행위는 천하지만 존재는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메시야의 행위
오늘 본문의 앞쪽으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언자이면 예언자의 일이, 메시야이면 메시야의 일이 그들에게 드러나는 게 당연하니까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자기가 메시야라고 대답하시지 않고 예수님의 행위를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은 한결같이 저주의 운명에 갇힌 이들입니다. 이들이 그런 저주로부터 해방 받는 일은 곧 메시야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런 이들에게 선포되며, 그들에게서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메시야에게 발견할 수 있는 결과와 행위들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일들이 바로 예수님에게서 발생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 복음서에 기록된 많은 기적과 치유는 상당한 부분에서 사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적이나 치유와는 약간 다른 의미입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병이 바로 악한 영의 개입이라거나 인간의 죄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로 결정적인 불치병이나 장애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매우 심각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은 각각의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셨을 겁니다.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5절 말씀은 원래 구약 이사야 61:1절의 인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렇듯 소경과 절름발이이 치유에서 이해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수님의 행위와 일치함으로써 예수님은 초기 기독교에 의해서 바로 구약이 희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로 고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이제 이런 메시야의 결과와 일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경과 절름발이가 치유되는 일들이 예수님에게서 실제로 일어났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걸 기계적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런 보도에서 중요한 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다는 사실이지 소경이 눈을 떴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닙니다. 사실 메시야로서 예수님에게서 반드시 이런 일들만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부활의 빛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것이지 이런 소경의 치유에서 믿는 것을 아닙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그 결과에서 판단된다는 오늘 본문 말씀은 옳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메시야의 일들이 나타났으며, 오늘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인다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타날 행위와 결과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겉모양이 아니라 그 속으로부터 그에 합당한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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